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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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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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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38화

DUMMY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면, 다른 무언가의 도움 없이도 늘상 같은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는 펠릭스는, 창 밖으로 비쳐드는 햇살의 각도가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중시계를 살펴보니, 정말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보다 거의 한 시간이나 더 지난 후였다. 그는 짜증스레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켰지만, 어딘가 개운치가 않았다. 미묘한 찝찝함을 느끼면서, 펠릭스는 못생기게 찡그린 얼굴로 계단을 내려왔다.


“올리버.”


펠릭스는 올리버의 얼굴에서도 어딘가 영 개운치 못한 기색을 발견했다.


“좋은아침.”


“그래.”


올리버는 평소처럼 테이블에 앉아, 끓인 찻잔을 옆에 둔 채 두 눈을 소식지에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자세히 살펴보니, 눈동자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딱히 소식지를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재미없어요?”


“아, 뭐. 별거없네.”


올리버는 짜증스레 소식지를 접어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고는, 무슨 목마른 술꾼이 술 마시듯 찻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러는 펠릭스. 너는 얼굴이 왜 그래?”


“제 얼굴이 왜요?”


“어디 가서 실컷 얻어터지고 온 어린애같은 얼굴이야.”


“거 참 대단한 칭찬이군요. 아침부터.”


“붓기 빠지는 약이라도 먹는게 좋지 않아?”


“그러는 올리버. 당신은 언젠가 시장 골목에서 봤던 웃기지도 않을 정도로 일그러진 가면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군요.”


“왜 시비야.”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선반을 열어 빵 덩어리를 꺼내며 펠릭스가 말했다. 그는 아무 생각없이 빵을 자르다가, 두 조각을 잘라내고도 빵칼을 한참 더 빵에 깊숙히 박아넣은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내 정신좀 봐.”


그는 빵칼을 방에서 뽑아들고, 깊이 패인 상처가 생긴 빵 덩이를 도로 선반에 집어넣었다.


“아침부터 말썽이군.”


“그러게요.”


크게 하품을 한 다음, 빵 덩이를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펠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고장난 태엽인형처럼, 한참동안이나 계속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빵을 우물거렸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던 올리버는 여느 때보다 멍한 얼굴이었다.


“똑똑.”


그리고 어딘가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 모두 전기가 번쩍 통하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을 번쩍 차리고 평소와 같은 활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열린 문 너머에 서 있던것은, 실비아가 아니라 그녀를 조금 닮은 그녀의 언니 에밀리아였다.


“연금술사 선생님. 혹시, 너무 이른 시간이었나요?”


“그럴리가요.” 다시 무례하게 하품을 하며 펠릭스가 대답했다. “약을 사러 오셨나요?”


“사업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해서요.”


“들어와요.”


펠릭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를 배웅도 하지 않고 먼저 가게 안으로 혼자 쑥 들어가버렸다.




카운터 앞 의자에 앉은 에밀리아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연금술 가게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올리버가 그녀에게 찻잔을 내밀자, 그녀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두 손으로 찻잔을 집어들었다. 그 순간, 펠릭스의 눈이 빛났지만, 그녀 역시 실비아처럼 찻잔을 가만히 잡고만 있을 뿐, 잔에 담긴 차를 마시지는 않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


“제 여동생 때문에요.”


펠릭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약값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니었나요?”


“실비아에게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지불할 생각 없어요.”


“그래요. 그렇다면야. 그래서, 실비아가 왜요? 감기라도 걸렸다 던가요?”


“아니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솔직히 말하자면.” 에밀리아는 두 손을 잔에서 떼고 펠릭스를 조금 쏘아보듯 했다. “당신. 실비아와 어떤 사이죠?”


“계약 관계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녀는 제게서 물건을 샀고, 저는 그녀에게 물건을 만들어 주어야 하죠.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요?”


에밀리아는 여전히 웃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누가봐도 귀족들이 얼굴에 쓰는 가면이 틀림없었다.


“부족해요.”


“뭐가 더 필요하죠?”


“왜 당신과 동거하고 있는거죠?”


“그건 실비아가 마음대로 벌인 일이에요. 자기 짐을 모조리 챙겨들고 우리 가게로 와버렸으니. 말뜻을 잘못 이해한 결과죠.”


“뭐라고 했는데요?”


“약을 만들 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니 저와 같이 발품을 팔며 직접 재료를 구하자고.”


에밀리아는 펠릭스가 한 말의 뜻을 곰곰이 헤아려보았다.


“실비아는 어린 귀족이에요. 그리고, 이제 슬슬 혼담이 들어올 나이죠.”


전혀 뜬금없는 이야기를, 에밀리아가 가만히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 나이의 아가씨를 데리고, 약재를 찾는 여행이라니. 그것도 남자 둘이 시종일관 같이 붙어서. 별로 잘하는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이네요.”


“전 계약을 따를 뿐입니다. 귀족의 사정이니뭐니, 저랑은 하등 상관없죠.”


펠릭스는 다시 하품을 하며 말했다.


“무례하군요.”


“허례허식을 차려봤자 뭐하겠어요? 에밀리아. 당신도 그냥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괜히 귀족답게 물밑에서 이것저것 쿡쿡 찔러보지 말고.”


펠릭스의 무례한 언동에, 올리버조차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에밀리아는 여전히 화가 난 기색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좋아요. 저는 당신에게 두 가지 볼 일이 있어요. 그중 하나는, 제 여동생에 관한 것이구요.”


“그래요. 뭘 바라시죠?”


“여동생과 했다는 그 계약. 제게 내용을 알려줘요.”


“안됩니다.”


펠릭스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그애의 언니에요.”


“그래도 안 돼요.”


“부모나 다름없어요.”


“안 됩니다.”


“실비아는 아직 어린 아이에요.”


“나이를 먹을 만큼은 먹었죠. 당신 말마따나, 혼담이 들어올 나이잖아요? 충분히 사리분별은 할 수 있는 나이에요.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도는 잘 알텐데요.”


“실비아는, 미숙해요.”


“똑똑한 사람이죠. 혼자 계약 정도는 할 수 있을 만큼.”


한 마디를 안 져주는 펠릭스를보고, 에밀리아도 조금 화가 난 것인지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골랐다.




“계약 내용에 대해 말해줘요.”


“안 됩니다. 그건 저와 실비아 사이의 계약이에요. 그녀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알려줄 수 없어요.”


옆에서 의도치 않게 이야기를 듣고있던 올리버는,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어 괜히 자리를 피했다.


“가족인데도요.”


“연금술사로서의 명예에요. 손님과의 계약 내용은 철저히 비밀로 부치는것. 물론, 그 약을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다면 그 때는 예외지만, 그 외에는 무조건 저는 비밀로 부칩니다.”


“어째서죠?”


“왜일것 같나요?” 펠릭스가 히죽 웃으며 되물었다. “평범한 사람이, 이유를 비밀로 한 채 연금술사를 찾아올 것 같나요? 이유를 비밀에 부친 채 나를 찾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유로 찾아와요. 그리고 나는 그 비밀들을 지켜주기로 했죠.”


“실비아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나요?”


“비밀입니다.”


얄밉게 웃으며 펠릭스는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재판소에 가서도 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을까요?”


“아, 재판!” 펠릭스는 반가운 말을 들은듯, 감탄했다. “상관없어요. 재판에는 돈과 시간이 많이 들죠. 듣자하니, 콘월 가는 그렇게 부유한 가문은 아니라던데, 재산에 관해 자신있나요?”


“적어도, 당신보다는요.”


“그래봤자 당신이 져요.” 펠릭스가 놀리듯 말했다. 그는 마치, 일부러 에밀리아의 속을 박박 긁는 말만 골라서 하기로 작정한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관례라는게 있거든요. 계약 내용을 비밀에 부치는건, 관례상 연금술사들에게 아주 정직하고 평범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어요. 판례도 제법 있을걸요?”


에밀리아의 두 손이 가볍게 떨렸다.


“만약.” 아주 감정적인 목소리로 에밀리아가 말했다. “실비아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이 만든 그 약 때문이라고 알겠어요.”


“얼마든지요. 나는 그런 일에는 아주 익숙하니까.”


끝까지 뻣뻣하게 구는 펠릭스를 보고, 마침내 에밀리아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기분나쁘기만 한 한숨은 아니었다.


“그럼 두 번째 이야기를 해 주실까요. 그래, 아마 그게 본 사업 이야기죠?”


“감이 좋으시네요.” 아까보다 오히려 이완된 자세와 표정으로 살짝 웃기까지 하며 에밀리아가 말했다.


“무슨 약이 필요하신가요?”


“죽음의 약이요.”


“죽음의 약!” 펠릭스는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어떤 죽음을 원하시는지? 끔찍한 경련, 구토, 발작이 동반되는 죽음? 조용하고 아름답고 감미롭고 우아한 죽음? 또는, 볼썽사납게 미치광이처럼 춤을 추다가 결국 탈진하는 죽음? 뭐든지 말하세요. 어떤 것이든, 제가 만들어 드리지요.”


“쥐약과 제초제, 구충제, 고엽제, 살충제가 필요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


그 말을 들은 펠릭스는 진심으로 만족스럽게,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전문이죠. 맡겨만 줘요. 그래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아시다시피.” 에밀리아는 드디어 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한 모금을 마셨다. 펠릭스의 눈이 빛났지만, 이내 그의 눈은 실망으로 가득해졌다. 과연, 귀족답게, 에밀리아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아주 능숙하여 뜨거운 음료를 마시는 그 찰나에도 그녀의 본심은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네.”


“콘월 가문은, 유서깊은 귀족이지만, 지금은 가세가 많이 기울었어요.”


“그렇다더군요.”


“특히나, 제 남편은 둘째 아들인데, 상속받은 재산이 가장 적어요.”


“막내보다 더?”


에밀리아는 조금 씁쓸하게 웃었다.


“사업 수완이 조금 있거든요. 도무지 재산 불릴 줄이라고는 모르는 막내 도련님 꼴을 보고, 아마 아버님이 재산을 더 많이 물려주신 거겠죠. 제 남편은 어쨌든 돈을 불릴 줄은 아니까.”


“거 참. 그래서, 그 많은 약들을 다 어디 쓰려고요?”


“쓸 곳이 많아요······” 에밀리아는 잠시 촉촉한 눈망울을 빛내며 말했다.


“밀밭과 과수원에 제초제와 살충제를 뿌려야 하고, 키우는 오십 여 마리의 소와 돼지들에게는 구충제를 먹여야 하죠. 솔직히, 이번 겨울을 버텨내기나 할지도 모르겠어요.

집안에도 문제는 많아요. 저택의 정원에는 왠 잡초가 그렇게 무성한지, 일꾼들을 시켜 메일아침 잡초를 베는데도 하룻밤 사이에 무릎 높이까지 잡초가 웃자라요.

쥐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부엌에는 파리들이 정신사납게 날아다니고. 그야말로, 여긴 아주 엉망진창이에요. 차라리, 로즈베리가문이 훨씬 더 나아 보일 정도로.”


“저기. 잠시, 실례지만. 로즈베리가문은, 작위가?”


“준남작이요. 신흥 귀족이거든요.”


“그래요. 뭐, 별 뜻은 없었습니다.” 펠릭스는 펜을 끄적이며 대충 중얼거렸다. “그래서, 정말 다양한 약이, 아주 많이 필요하겠군요.”


“맞아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연금술사 선생님.”


“펠릭스.” 펠릭스가 웃으며 말했다.


“펠릭스 선생님.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서 며칠 머무르며 약을 만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글쎄요.” 펠릭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이곳 마을 손님들을 못 받게 되는데. 며칠동안 말이죠.”


“돈은 드릴게요.”


“돈으로 신용을 살 수는 없어요. 요즈음엔 일도 있어 자주 가게를 비우다보니,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이 제 가게를 더이상 찾지 않게 될지도 몰라요.”


“충분히 드릴게요.”


“글쎄요. 돈 말고 다른 문제도 있어요.”


“뭐죠?”


“저랑 먼저 계약한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한테, 두 달 안으로 약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미 시간이 좀 흘렀어요. 당신 집에 머물면서 약을 만드는것 자체야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그 손님한테 먼저 허락을 받는편이 좋겠죠. 잘못하면 먼저 계약한 사람이 손해를 보니까.”


“그게 누군데요? 설마.”


펠릭스는 찡긋 웃어보였다.


“실비아와 무슨 계약을 했는데요?”


“그녀한테 물어봐요. 난 말 못해줍니다. 아무튼, 저를 며칠동안 고용해서 집안의 사소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다면, 우선 실비아한테 허락 받고 다시 오세요.”


에밀리아는 잠시 찻잔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그 귀족들의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요.”


“그럼, 수고하세요 에밀리아.”


에밀리아는 펠릭스의 배웅도 무시한채 행복의 연금술 가게의 정문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휴, 펠릭스.”


에밀리아가 돌아가고 몇 초 뒤에, 고개를 불쑥 내밀고 근처를 두리번거린 다음에야 올리버가 카운터 앞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후작부인한테 너무 무례한거 아냐?”


“연금술사들은 좀 뻣뻣해도 돼요.”


“그래도, 상대는 귀족인데······”


“그래봤자 실비아네 언니일 뿐이죠.” 펠릭스가 이죽이며 말했다. “내 손님을 가로채려 든 주제에, 환대를 기대했다면 그 생각이 틀려먹은거죠.”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올리버가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상한데 빠진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을 위해, 동생을 도와주고 있다고 믿고있을 텐데. 네가 그렇게 삐딱하게 굴면 서운해하지 않겠어?”


“내맘이죠.”


“뭐, 그렇기야 하다만. 그나저나, 언니고 동생이고 쌍으로 죽음의 약을 찾다니. 처음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지뭐야.”


“그쵸? 신기한 우연도 다 있군요. 죽음의 약이라. 쥐약, 제초제, 구충제, 살충제, 고엽제······. 웃기지도 않는군. 올리버! 저좀 도와줘요.”


갑자기 펠릭스는 기운을 되찾고, 힘차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작업실로 들어갔다.


“뭘?”


“재료가 필요해요. 재료! 더 많은 재료가! 제법 많이 필요할거예요.”


“뭐하려고?”


“손님이 원하는 죽음의 약을 만들어 줘야죠.” 펠릭스가 작업실 밖으로 고개를 불쑥 내밀며 말했다.


“충분하지 않아? 제초제, 구충제, 쥐약, 어쩌고저쩌고······”


“딴데 못 써먹게 하려면, 좀 필요해요. 부탁해요 올리버.”


“딴데 못 써먹게? 그런 약들을 어디 쓰겠어? 어디 감기약으로 쓰지도 않을테고······”


“그러니까요.” 펠릭스는 다시 씩 웃었다.


“내 참. 알았어. 하여튼, 귀족들이고 연금술사들이고 다들 속내를 알 수가 없다니까.”


“고마워요 올리버!”


툴툴거리면서도, 올리버는 펠릭스의 고맙다는 말을 들은게 퍽이나 좋았는지 씩 웃으며 옷을 차려입고 가게를 나섰다.




에밀리아의 저택 손님방에서 눈을 뜬 실비아는, 온 몸을 틀며 기지개를 켰지만, 전혀 몸이 개운하지 못했다. 그곳의 침대는 푹신했지만 편안하지 않았다. 반가운 언니의 집은 한없이 낯설기 짝이 없었다. 그 집 어디에도, 그리운 언니 에밀리아 로즈베리의 냄새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낯선 후작부인 에밀리아 콘월의 흔적 뿐이었다.


방에서 나온 실비아는 우연히 하인과 마주쳤고, 그 하인은 대단한 죄라도 지은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방금 일어난 일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려보던 실비아는, 크게 하품을 하며 뒤늦게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살펴보았다.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잠에서 깨었는데도, 몸은 전혀 개운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녀는 조금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실비아는 잠시 실내복 차림으로 귀족의 저택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배가 고팠지만 식사를 할 수는 있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었다. 전에, 집에 있을 때는 이럴때 어떻게 했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때는, 모든 것을 시간에 정확하게 맞추어 했기 때문이었다. 식사시간에 늦는 것은 큰 죄나 다름없었고, 그렇기에 식사 시간에 늦은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의 실수 몇 번을 제외하고는 없었다.


무턱대고 저택을 돌아다니던 실비아는, 잠긴 문은 또 왜그렇게 많은지 새삼 놀랐다. 대부분의 문들이 잠겨있었으며, 잠기지 않은 문 너머에서는 하인이 막 옷을 갈아입다가 실비아와 눈이 마주쳐 서로 깜짝 놀라곤 했다. 잘못한것은 자기인데도, 하인이 오히려 더 굽신거리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실비아는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휑한 복도를 거닐며, 실비아는 스스로가 더이상 귀족이 아니게 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귀족을 빼버리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 그녀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겁이나서 어디론가 달아났다.




그래서 실비아는 자기가 잠에서 깨어난 방 안에 가만히 틀어박혀있었다. 방을 정리하러 온 하인도 물려보내고, 실비아는 이불을 돌돌 말아 몸을 감싸안은채, 그저 가만히 있었다.


“실비아?”


그녀의 방문에 똑똑 노크소리가 나더니,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직 자니?”


“깼어.”


달칵 소리를 내며 에밀리아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려다가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뭐하고있어?”


“추워서.” 조금 상기된 얼굴로 실비아가 말했다. “여긴 너무 추워.”


“벽난로에 불을 떼라고 할까?”


“몰라.”


에밀리아는 실비아의 옆에 가볍게 앉은다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은 잘 잤어?”


“잘 모르겠어.”


“하긴, 어릴 때부터 실비아 너는 잠자리에 예민했지. 나랑 따로 방을 쓰게 된 뒤에도 며칠동안 제대로 못 잤잖아.”


“그랬지. 그 때는, 언니가 영영 가버리는줄 알았는걸.”


에밀리아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디로 가겠어?”


실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언니. 나 배고파.”


“아침 안 먹었어?”


“식당이 어딘지도 모르는걸.”


“그래?” 에밀리아의 말소리 말미에, 알아채기 힘들만큼 미묘한 짜증이 서렸다. “하인들한테 내가······”


“그 사람들은, 내버려 둬.” 실비아가 끼어들었다. “내가 늦게 일어나서 그런거니까.” 뒤늦게 그녀는 푸념하듯 덧붙였다. “식당이 어딘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리고 내가 아무나 붙잡고 부탁했으면 그 사람들은 뭐라도 줬을거야.”


“그래? 뭐, 그렇기는 하네.”


“특별대우 해달라고 하인들한테 그러지마.”


“그래. 뭐, 알겠어 실비아.” 조금 의외라는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에밀리아가 대답했다.


“그보다, 언니. 어디 다녀왔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실비아?”


“냄새.” 가만히 실비아의 머리를 쓰다듬던 에밀리아의 손이, 잠깐 굳었다. “바깥냄새가 나.”


“냄새?”


“응. 풀 냄새. 이슬 냄새. 그리고, 희미한 약재 냄새. 시장의 약재 거리에라도 다녀온거야? 아니면······”


“실비아. 맞아. 연금술사의 가게에 다녀왔어.”


“어디?” 실비아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너랑 거래한 곳.”


“나랑? 아, 행복의 연금술 가게에 다녀왔어?”


“그래.”


“왜?!” 실비아가 이불을 팽개치며 벌떡 일어났다. “거긴, 뭣하러?”


“혹시나 해서.” 여전히 온화한 웃음을 유지한채, 에밀리아가 말했다.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 내가 알아서 해!”


실비아는 씩씩거리며 방문을 쾅 닫으면서 방을 나가버렸다. 에밀리아는 여전히 그 온화한 얼굴을 유지한채 실비아가 나가버린 방문을 쳐다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금전까지 실비아가 몸을 감쌌던 이불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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