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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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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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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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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3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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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32화

DUMMY

“오늘로 이 주일 째네요.”


부엌 의자에 앉아 두 발을 앞뒤로 흔들흔들 움직이며 실비아가 말했다.


“뭐가?”


소식지를 보며 올리버가 말했다.


“재료 찾기요. 벌써 몇 달은 지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이 주일이라니.”


“꽤 괜찮은 속도에요. 그래도.” 게걸스럽게 빵을 우물거리며 펠릭스가 말했다. 음식을 씹어 삼키지도 않고 말하는 그의 무례한 모습에, 실비아는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매너를 좀 배워두는게 어때요?”


“밖에서는 안 그래요. 여긴 내 집이니까 그렇지.”


“난 손님이라고요.”


펠릭스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빵을 크게 베어물었다.


“그래서, 오늘은 뭘 할거죠?”


“글쎄요. 여기저기 편지를 보냈는데, 아직 답장이 온 게 없어서.”


“무슨 편지인데요?”


“그야. 당연히.” 펠릭스는 덩어리를 꿀꺽 삼키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 다음에 마저 말했다. “어디에 재료가 있냐 없냐 물어본 편지죠. 뿔도마뱀 눈알 정도는 운 좋으면 시장에서도 구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언제 운이 좋았던 적이 있었나요?”


실비아의 말에, 행복의 연금술 가게의 부엌 테이블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러게.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로군.” 소식지를 접어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으며 올리버가 말했다.


“별로 좋은 편은 아니지 않아요?”


“썩 나쁘지도 않은 편이죠. 그나저나, 실비아. 어제 약 한 병 팔았었죠?”


“네.”


“그럼 새로 재고를 채워 넣어뒀나요?”


“아니오? 겨우 한 병이잖아요?”


“뭐...그렇기는 하네요. 아무튼, 미리 만들어서 재고를 채워둬요. 아니면 나중에 필요할 때 없어 못 파는 우스운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까.”


“걱정은. 실비아가 그쯤이야 알아서 하겠지.”


“그래서, 오늘은 뭘 할 건데요?”


“몰라요. 답장이 안 오면,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기도 애매하거든요. 무턱대고 재료를 찾으러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방법도 있기야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에요. 시간이 빠듯할 때일수록, 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일을 해결해 나가야 하거든요.”


“말은 참 잘 하는군요.”


실비아가 비아냥거리자 펠릭스는 씩 웃어치웠다.


“그럼, 저는 식사도 끝났으니 도로 올라가서 제 일좀 할게요.”


“마음대로 해요. 아, 그래서 가게는 열 건가요?”


“열고 싶어요?”


펠릭스는 실비아가 잠시 우물쭈물 하는 모습을 웃으며 지켜본 다음 말했다.


“열고싶으면 열어요.”


“네? 당신이 정해야죠. 당신 가게잖아요?”


“언제는 자기 집처럼 드나들어놓고서는, 이럴 때만 내 가게 취급해주기인가요? 당신 마음대로 해요 실비아. 작업실이 폭발하지만 않으면, 뭘 하든 나랑 별로 상관없으니. 그렇죠, 올리버?”


“알아서들 해.”


“그래요. 그럼 알아서들 해요. 수고하고요.”


펠릭스는 계단 위로 올라가, 삐걱 소리를 내며 방문을 닫았다.


“열 거야?”


실비아가 영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자, 올리버는 성큼성큼 현관으로 가더니, 문을 양 옆으로 활짝 열고 팻말을 열림으로 돌려놓았다.


“올리버. 마음대로 열어도 돼요?”


“이건 내 마음대로 벌인 일이니까, 무슨 일 생겨도 내 책임이니 걱정 말라고.”


실비아를 향해 웃는 올리버를 보고, 그녀는 마음속으로 조금 감사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열린 가게의 문으로 이따금 낙엽 섞인 바람이 살랑이며 불어왔다. 바닥을 빗자루질하던 실비아는 바람에 먼지가 날려, 엣취 하고 재채기를 했다. 그러면 올리버는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잠시 이쪽을 흘끔 보다가, 다시 아무것도 안한 척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나저나, 본격적으로 연금술사가 될 생각은 없어?”


“없어요!”


깜짝 놀란 고양이처럼, 쭈뼛 곤두선 채 잽싸게 이쪽을 돌아보는 실비아를 보고, 올리버는 겉으로 티나지 않게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꽤 어울리는것 같은데.”


“아니거든요?”


“됐어. 칭찬으로 한 말이야. 기분나빴다면 사과할게.”


“됐어요 올리버. 사과할 것 까지야...아, 어서오세요.”


손님이 들어오자 실비아는 웃으며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고, 올리버는 멀찍이서 그녀가 약을 파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열한 시쯤 되었을 즈음, 올리버는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 몸을 풀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금새 나왔다.


“어디 가려고요?”


뒷문쪽으로 걸어가는 올리버를 향해 실비아가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마을에 잠깐.”


“왜요?”


“왜는. 볼 일이 있으니 그렇지.”


“저 혼자 내버려두고 가려고요?”


“위층에 펠릭스 있잖아? 그리고 이제 혼자서도 척척 잘 하는데 뭘.”


올리버는 실비아가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타, 그녀가 괜히 자기를 붙잡기 전에 슬쩍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가게에 혼자 남게된 실비아는 처음에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자,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는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조금 더 생각을 해 보자, 이 연금술사라는 신기한 직종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실비아는 지금껏 만난 연금술사들을 한 명씩 떠올려 보았다. 펠릭스는 아주 무례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숲에서 만난 연금술사 메를린은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 밖에도 잠깐 만나 불쾌한 시간을 보냈지만 사실은 숨은 사연이 있었던 해리어나, 또는 골든포트 대경매장에서 잠깐 봤던 펠릭스의 친구 첼시도 아마 연금술사였을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실비아는 이 네 사람 사이에서 어떠한 공통점도 찾지 못해 잠시 당황했다. 가정교사, 농부, 상인, 장인 따위의 흔한 직종의 사람들은 모두 어떤 공통점이라든가, 직업의 이름에서 오는 정형화된 모습이 금새 떠오르곤 했는데, 이 연금술사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람들은 도무지 비슷한 점이라고는 없었다. 단 하나, 괴짜같아 보인다는 것만 빼고.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실비아를 조금씩 불쾌하게 만들었다. 실비아는 자신이 단 한 순간도 괴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비아는 연금술사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이제 그만두고, 두 눈을 살짝 감고 소리없이 심호흡을 해 보았다. 가을의 향기. 멀리 마을에서 불을 피웠는지, 살짝 매캐한 재의 냄새가 낙엽 부스러기와 함께 바람을 타고 행복의 연금술 가게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마음이 풀어지는 산뜻한 냄새에, 실비아는 기분좋게 웃으며 눈을 떴다.


“안녕하세요?”


눈을 뜬 실비아의 앞에는 손님이 한 명 서 있었다. 그는 가벼운 정장 차림에 모자를 쓴 남자였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지 거친 피부에 깡마른 얼굴과 체형을 가진 그 손님은, 그러나 어딘가 알게모르게 마음속에 뜨거운 열정을 품고 있는듯, 아주 생생하게 투명하게 살아있는 눈빛으로 실비아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찾으시는 약이 있으신가요?”


실비아는 뒤늦게 당황하며 손님을 맞이했다. 하지만 손님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아, 뭐···”


손님은 잠시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꼭 추억 속의 장소에 온 사람처럼 촉촉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구경하시겠어요?”


“아니, 아니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진통제가 필요한데, 한 병 있나요?”


“진통제요? 잠시만요.” 실비아는 재고 목록을 살펴보았다. 진통제 두 병이 아직 재고로 남아있다고 적혀 있었다.


“있네요. 잠시만요.” 그러나 실비아가 찬장을 열어 아무리 살펴봐도, 그곳에 진통제는 없었다.


“없어요?”


“아니, 잠시만요. 그럴리가 없는데···”


“잠시만요.”


갑자기 손님은 카운터 위로 고개를 쭉 들이밀고는, 한 순간에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열린 찬장안을 쓱 훑어보았다.


“없네요. 진통제.”


“아, 저기. 그...죄송합니다···” 실비아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사과할 필요는 없죠. 그럼 진통제를 좀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소형 규격으로 다섯 병 정도 분량으로.”


“네?”


다시 실비아는 당황하여 머뭇거렸다. 손님은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듯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아아! 그래요. 솥에다가 물 다섯 양동이를 넣고 만들어줘요. 이제 괜찮죠?”


“아, 네.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기···”


“자, 일단. 요금은 여기요.” 손님은 절그럭거리는 돈주머니를 꺼내 뒤적여, 은화 다섯 닢을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아, 네. 그럼, 언제쯤 찾으러 오실건가요?”


이 질문을 듣더니, 갑자기 손님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연금술사가 말하는 거예요 시간은. 약이 언제 될지는 연금술사밖에 모르니까.”


“네? 아···”


“아, 질책하는건 아닙니다. 그냥, 초보 같아서 조언 하나 해 봤습니다. 뭐, 조언할 입장이 아니지만서도. 아무튼, 그러면 약이 완성되는 대로 마을 밖 공터로 가져와 주세요. 유랑 극단이 자주 머무르는 공터니까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겁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모자를 살짝 들어올려 인사를 하고는, 손님은 소리없는 발걸음으로 조용히 가게에서 나가버렸다. 그리고 실비아는 카운터 위에 놓인 은화 다섯닢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뭐에요?”


계단을 내려오며 펠릭스가 말했다. 그는 카운터 위에서 반짝이는 은화를 보더니 씩 웃으며 다가왔다.


“다섯 닢! 많이도 팔았군요.”


“펠릭스. 나 지금 당신이 아주 조금, 살짝 이해가 될 것 같아요.”


“네? 터무니없는 소리하지 말아요 실비아. 당신같은 초짜가 어떻게 저같은 장인중의 장인을 이해해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요?”


실비아는 방금 있었던 일을 펠릭스에게 말 해 주었다. 잠자코 듣고있던 펠릭스는 실비아의 말이 끝나자 씩 웃으며 말했다.


“뭐예요. 어려울것 전혀 없는 일이구만.”


“당신이!” 실비아는 그제서야 문제의 원흉을 찾았다는듯 펠릭스를 쪼았다. “약 재고를 똑바로 관리했어야죠! 진통제를 어디 다 쓴 거예요?”


“아! 맞다. 진통제. 그게요. 비가 왔잖아요?”


“네 병을 써요? 하루에?”


“아니, 그 전에도 써 놓고서 재고를 안 채워뒀던가···”


“하여튼, 순 주먹구구식이군요. 이런 사람이 장인이라니, 내 참···”


실비아는 잠깐동안 혼자서 투덜거린 다음에야 펠릭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전 이제 약 만들러 갈건데요.”


“네. 만들러 가요.”


“그럼 가게는요?”


“잠깐 닫아두든가 해야죠. 아니면 자리비움 팻말이라도 카운터 위에 세워두든가.”


“그러면 돼요?”


“네.”


“도둑이라든가, 괜찮나요?”


“아니, 도둑이 연금술 가게에 뭐하러 오겠어요?”


펠릭스는 대단히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과장되게 웃어보였다.


“그렇다면야 뭐. 그럼, 펠릭스. 진통제를 만들러 갈 건데···”


“네. 가세요.”


실비아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조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이제 제 도움은 필요없을걸요? 당신, 간단한 약 정도는 책만 보고도 만들 정도의 경지에는 올라왔으니까요.”


“그래도···”


“아! 아니면, 뭐 책임감을 좀 덜어달라, 이건가요? 에이, 그건 안 돼요 실비아. 무릇 연금술사라면 자기가 만든 약에 자기가 책임 져야죠. 언제까지고 남이 대신 해줘서는 절대로 뛰어난 연금술사가 될 수 없을걸요?”


“전 연금술사가 될 생각은 없거든요?”


펠릭스는 말없이 눈을 깜빡이다가, 씩 웃었다.


“뭐, 그렇긴 했죠. 해서, 어떻게, 제가 또 도와드려요?”


“됐어요! 하여튼, 약에 무슨 문제가 생겨도 전 몰라요!”


“방금 내가 한 말-”


실비아는 작업실의 문을 쾅 닫으며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조심해요! 살아있는 재료도 있다니까.”


그러자 펠릭스가 닫힌 작업실의 문을 향해 외쳤다.




카운터 너머 의자에 앉아 장부와 재고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펠릭스는, 작업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서류들을 내려놓았다.


“다 됐어요?”


“일단은요.”


“솥이 폭발하지 않았으니, 잘 됐다고 볼 수 있겠군요.”


실비아는 펠릭스의 농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기, 펠릭스.”


“왜요.”


“잘 된것 같나요?”


실비아가 조심스레 약병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연보랏빛의, 조금 걸쭉한 약이 담긴 병을 들어올려 펠릭스는 조명에 이리저리 비춰본 다음 대답했다.


“겉보기에는요?”


“그럼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연보랏빛이라. 제대로 만든거 맞아요? 무슨 다른 약초를 섞은건 아니죠?”


“아, 뭐. 살짝 섞긴 했는데···”


펠릭스는 약병의 뚜껑을 열고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다.


“사랑초. 설탕무. 단 맛을 내고 싶었나요?”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펠릭스는 약병의 뚜껑을 닫으며 피식 웃었다.


“왜 웃어요!”


“바르는 진통제에 단맛 나는 약초를 뭣하러 넣어요?”


“네? 마시는거 아니었어요?”


“아니, 실비아. 하여튼. 아니, 괜찮아요. 이건 내 잘못이니까. 내가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가르치긴 했죠. 내 참. 이런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다니.” 펠릭스는 혼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다가, 문득 생각에 잠긴 눈으로 몇 초 정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흠. 의외로 꽤 괜찮을지도···”


“됐어요! 돌려줘요. 좋은 소리는 못 해주고. 그리고, 미리 좀 잘 좀 가르쳐 주던가.”


실비아는 펠릭스의 손에서 약병을 도로 낚아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언제 찾으러 오라고 했죠?”


“공터로 와 달라던데요. 그런데, 그러자면 또 가게를 비워야 하는것 아닌가요?”


주머니를 열어보고 물끄러미 안을 살피며 갯수를 헤아린 다음, 주머니의 끈을 동여 매며 실비아가 중얼거렸다.


“이럴 때 올리버가 있었으면 올리버한테 부탁하면 되는데.”


“뭐야. 나 불렀어?”


막 뒷문으로 들어오며 올리버가 말했다.


“올리버. 잘 왔네요. 심부름좀 해 줘요.”


“방금 들어온 사람한테 너무하는군. 자.”


올리버는 둘둘 만 종이를 펠릭스에게 내밀었다.


“뭔데요?”


“선물. 오다 주웠어.”


“줍다니. 누가봐도 곱게 포장한 물건이구만.” 종이를 묶은 끈을 풀고 종이를 펼쳐보며 펠릭스가 말했다. “호오. 실비아. 자요. 당신취향 같은데요.”


“뭔데요?” 종이를 받아든 실비아는 금세 종이에 푹 빠져들었다.


“맞죠?”


“서커스! 보름달 서커스단. 유랑 서커스라니. 이런 구석진 마을에도 다 오네요?”


“서커스는 어디든 가니까.”


“그래요. 무시무시한 맹수 조련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중그네의 요정, 춤추는 나무인형의 비극, 무한한 힘을 가진 괴력의 사나이, 불을 삼키며 화염 속을 걷는 괴인. 세상에, 그야말로 하나같이···”


“싸구려죠?”


실비아의 얼굴이 한 순간에 차갑게 굳자, 펠릭스는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보다가 슬쩍 자리를 떴다.


“아무튼, 서커스라. 한번 보고싶네요.”


“그럼 당신 재료는 어쩌고요?”


부엌에서 얼굴만 슬쩍 들이밀고 펠릭스가 말했다. 다시 실비아가 그의 얼굴을 쏘아보자, 펠릭스의 고개가 부엌 문 너머로 쑥 들어가버렸다.


“그래. 재료요. 음. 그렇지만, 서커스도 보고싶긴 한데······”


“펠릭스. 편지에 답장이 오려면 적어도 하루이틀쯤은 걸리겠지?”


“그렇겠죠.” 이번에는 펠릭스의 목소리만 문 너머로 들어왔다.


“그럼 하루 정도는 서커스 보는데 써도 괜찮지 않겠어?”


“실비아가 괜찮다면요. 어차피 저야 아쉬울것 별로 없으니.”


“그럼, 보러가요 서커스!”


“그래요. 하지만, 그 전에, 우리 해야할 일이 하나 남아있지 않았나요?”


실비아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앗차 하며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약! 맞다. 올리버.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뭐.”


“그러니까, 약을 공터에···”


“어느 공터?”


“아. 유랑 극단이 자주 머무는 마을 밖 공터랬어요. 그러니까···”


“혹시, 여기 아냐?” 올리버는 종이의 한 구석에 적힌 글귀를 가리키며 말했다. 종이를 가만히 살펴보던 실비아의 두 눈이, 호기심과 긴장으로 빛났다.




평소와 달리, 오늘은 실비아가 앞장서서 종종걸음으로 걸어갔고, 펠릭스와 올리버는 조금 뒤에서 느긋하게 그녀를 따라갔다. 자꾸 혼자 앞서가다가, 뒤를 돌아보며 두 사람을 재촉하곤 다시 실비아는 빠른 걸음으로 앞장서 갔다.


“엄청 보고싶었나본데, 서커스.”


“그러게요. 그게 그렇게 재밌는지 저는 잘 모르겠던데.”


한가롭게 걸으며 펠릭스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서커스를 본 적은 있고?”


“없겠어요, 설마? 약값 대신으로 본 적도 있었죠. 하지만,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어요.”


“그래? 하긴, 싫어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뭐라더라. 부도덕하고, 천박하고, 무식하고, 더럽고, 추잡하다든가···”


“그중 절반 정도는 사실이라는게 문제죠.”


“그래. 그러니까 말야. 이 보름달 서커스라는 곳은 제대로 된 곳이면 좋겠는데.” 실비아가 행여나 들을까봐 목소리를 죽이며 올리버가 말했다.


“둘 다, 너무 늦잖아요!”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 턱이 없는 실비아는 그저 들떠서 일행들을 재촉하곤 했다.


“당신이 빠른 거에요, 실비아.”


“흥.”


실비아는 다시 쪼르르 앞서나가다가, 갑자기 도로 돌아오며 말했다.


“그런데, 펠릭스. 그러고보니까요. 그 손님, 약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았어요.”


“그래요?” 전혀 관심없다는 뜻으로, 크게 하품을 하며 펠릭스가 말했다.


“뭐라더라, 작은 규격으로 라든가, 아니면 눈으로 슥 훑어보고 진통제가 없다고 바로 아는것도 그렇고···”


“사기꾼일지도 모르죠. 나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척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거든요.”


실비아는 펠릭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자기도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조금 신기한 손님이었어요. 굉장히 깡마른 인상이었는데, 두 눈에는 힘이 있었죠. 뭔가, 카리스마 같은 것이 있다고나 할까...펠릭스. 또 안 듣고 있죠?”


“관심없으니까요.”


“아니, 내 참. 무슨 말을 못 하겠어. 올리버. 당신이라도 제 말좀 들어줘요. 그러니까, 어떤 손님이었냐 하면···”


올리버는 실비아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펠릭스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그는 하품을 하며 관심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작 그의 두 눈은 알게모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건 분명 호기심을 느낀 펠릭스의 눈이었다.




마을의 나무 울타리를 벗어나 숲 속으로 잠깐 걸어들어가다가, 여기까지 소란이 느껴지는 샛길로 빠지자 금새 공터가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공터에는, 그야말로 기분좋은 소란으로 가득했다. 지지대를 세우고 천막을 치는 일꾼들이 분주하게 여기저기 오가고 있었으며, 서커스 극단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벌써 분장을 한 것 같았다. 맹수 조련사의 짐승들은 우리에 갇혀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커다란 뱀만큼은 우리에 갇히지 않은 채, 제 주인인지 친구인지의 몸을 느릿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세상에···”


실비아는 넋이 나간 얼굴로 서커스 극단을 잠시 구경하고 섰다.


“실비아. 그래서, 약을 주문한게 누구죠?”


“아? 아, 네. 그러니까, 그 사람 이름이···”


실비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름이?”


“몰라요. 이름.”


“네? 아니, 모른다고요?”


“말 안해 줬는걸요. 그리고 돈은 지불했으니까, 그리고 그대로 자연스럽게 나가버려서···”


“아니, 내 참. 그래도 약은 줘야 하잖아요. 하다못해 이름까지는 아니더라도 뭐 없나요?”


“생긴거야 기억하죠. 그러니까, 깡마른 인상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아, 맞아요. 꼭 저 사람처럼···”


실비아는 심각한 얼굴로 서류뭉치를 뒤적이며 다른 극단원과 무언가를 떠들고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뒤에서 시선이 느껴진 것인지, 갑자기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그는 이쪽을 보고, 반갑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잠시 물리고서는 아주 당당하게, 힘찬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손님···”


“펠릭스!”


그러나 그는, 실비아를 지나쳐 곧장 펠릭스에게 다가가, 그를 부둥켜 안았다.


“트로이.”


실비아는 당혹스런 얼굴로 그 손님과 펠릭스가 서로 떨어지길 기다렸다.


“저, 손님. 약을···”


“펠릭스.” 그에게 다른 것은 보이지 않고, 다른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대체, 그동안 어떻게 지낸거야?”


“잘 지냈지. 그러는 트로이 너는? 잘 지냈어?”


“보는대로.” 트로이는 팔을 들어올려, 자신의 극단을 소개하며 말했다. “우리 보름달 서커스에 온 것을 환영해.”


“물론이지. 아, 그런데, 트로이. 약을 사러 왔었다면서?”


“아, 맞아! 그래. 펠릭스 네가 이 마을에 자리를 잡고 가게를 차렸다는게 문득 기억나서. 그런데, 너 여기 가게 차린것 맞아? 마을 사람들한테 수소문을 해 봐도, 연금술 가게는 한 군데 뿐이랬는데, 거기 주인은 젊은 아가씨던데.”


“그래? 혹시, 그 사람. 저 사람 닮지 않았나?”


펠릭스가 실비아를 가리키자, 트로이는 고개를 휙 돌리고 실비아는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똑같군. 꼭 쌍둥이처럼. 심지어는 입은 옷도 똑같은걸.”


“저기, 손님! 제가 그 사람인데요.” 조금 짜증스런 목소리를 억지 웃음으로 덮으며 실비아가 앞으로 한 발짝 성큼 걸어와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래요. 여기, 부탁하신 약이요.” 그리고 실비아는 약병이 담긴 주머니를 그에게 내밀었다. 트로이는 주머니를 받아들고 안을 살피다가, 갑자기 멈추더니 약병 하나를 슬며시 꺼내들어 햇볕 아래에 이리저리 비추어 보았다.


“연보랏빛···”


“사소한 실수야. 또는 실험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어쨌든 효능에는 문제 없을테니 걱정말라고 트로이.”


펠릭스가 곧바로 끼어들었다.


“그래? 펠릭스 네가 보증한다면야 뭐. 아무튼, 아가씨. 견습 연금술사인가?”


“아니오!”


“아, 진정해요 실비아. 트로이. 사실 우리 가게 손님이거든. 그런데, 겸사겸사 연금술을 조금씩 배우고 있어. 그런데, 연금술사니 뭐니 하는 말 듣는거 싫어하니까.”


“아, 이해해. 그런 사람이 있었지. 우리들 중에서도, 그래, 첼시가 그랬던가?”


“아니야. 버크가 그런 편이었지. 오히려 첼시는 당당하게 자기가 연금술사라고 떠벌리는 편이었다고.”


“그래? 내가 누구랑 헷갈린거지? 메를린이던가?”


“그래. 메를린은 연금술사라는 말을 처음에는 듣기 싫어했지.”


“아, 맞아. 마녀였으니까. 그럴 만 해. 따지고보면, 자기들 마녀가 연금술사들의 스승격인데···”


“저기, 그럼 이제 볼일은 다 끝났으니, 우린 이만 돌아가봐도 될까요?”


졸지에 펠릭스와 트로이의 동창회에 끼게된 실비아가 대화에 억지로 끼어들며 말했다. 그러자 트로이는 뒤늦게 미안하다는듯 말했다.


“아, 이크. 미안합니다. 옛 친구를 만나서 워낙 반가웠던지라. 아무튼, 고마워요 아가씨. 그러니까, 성함이···?”


“실비아.”


“그래요. 실비아. 고마워요. 아, 모처럼 온 김에···”


트로이는 펠릭스와 올리버의 눈치까지 슬쩍 살폈다.


“왜, 트로이?”


“온 김에, 약들을 좀 만들어 주지 않겠어?”


“무슨 약?”


“그러니까. 사실, 우리 보름달 서커스에 문제가 있거든.” 목소리를 낮추며 트로이가 중얼거렸다.


“무슨 문제?”


“그러니까. 좀 이것저것 있어. 펠릭스. 아무튼 약을 만들어 줬으면 하는데···”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지.”


그러자 트로이는 알겠다는듯 씩 웃으며, 그의 몫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천막 안으로 일행들을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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