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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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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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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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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70화

DUMMY

왕국 동쪽의 넓고 성근 녹색 빛의 숲에서 살던 실비아는 하얀 눈과 눈보라에 약간 낭만을 품고 있었다. 벽난로의 불을 쬐며 흔들의자에 앉아, 무릎에는 담요를 덮고 두 손으로 따스한 찻잔을 쥔 채,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흩날리는 눈송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그런 낭만.



그리고 지금 실비아는 그런 낭만을 한때나마 품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불어닥치는 눈보라 때문에 눈 뜨는것도 힘들었고, 기껏 눈을 떠도 눈송이가 눈으로 자꾸만 날아들어 도로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다.



“좀 보여요?!”



펠릭스는 이 어둠과 추위 속에서 녹색 등불을 이리저리 비추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뜨겠어요!”



“잘좀 봐요! 빨리 찾아야 빨리 내려가죠.”



“저기, 저거아냐?”



근처를 두리번거리던 올리버가 팔을 쭉 뻗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뭐야. 네 등불 그림자였잖아. 펠릭스. 정신사납게 그러지말고 좀 가만히 있어봐.”



“어! 저기, 저거!”



이번에는 펠릭스가 손을 뻗었다.



“저기! 있다! 겨울 눈꽃! 빨리, 이쪽으로!”



그는 발목높이까지 쌓인 눈을 밟으며 뒤뚱뒤뚱 걸음을 재촉했다.







밟히지 않은 새하얀 눈 위에서 은은한 푸른 빛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실비아의 눈에도 보였다. 펠릭스는 장갑낀 손으로 조심스레 빛나는 물체를 들어올렸다. 그가 달빛을 향해 물체를 들어올리자, 파란 꽃이 투명하게 반짝였다.



“겨울 눈꽃이에요? 이게?”



뿌리도 없고, 잎도 달리지 않은, 줄기와 꽃 뿐인 이상한 생물. 추위에 얼어붙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정말 꽃이 아닌건지, 겨울 눈꽃의 줄기와 꽃잎도 얼음처럼 딱딱했다.



“못 써요.”



펠릭스는 겨울 눈꽃을 휙 던져버렸다.



“아니, 왜요! 기껏 찾았잖아요!”



“얼었어요. 저건 며칠 전에 핀 꽃이겠죠. 난 얼지 않은 새 꽃이 필요하다고요.”



실비아는 눈 속에 반쯤 파묻힌 겨울 눈꽃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어쨌든, 이제 알아볼 수 있겠죠? 잘 찾아봐요!”



실비아는 못내 아쉽다는듯 눈 속으로 파묻혀 사라져가는 겨울 눈꽃을 지켜보았다. 흰 눈이 무덤처럼 쌓인 뒤에야 그녀는 눈을 다른데로 돌렸다.



다시 어둠 속을 방황하던 실비아의 눈에 무언가 얼핏 보였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파르스름한 불빛이 일렁였다. 잠시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화이트 클리프의 무시무시한 능선을 향해 내리쬐자, 실비아는 탄성을 내질렀다.



“저기! 있어요!”



“오, 잘 봤어요. 올리버, 저쪽!”



펠릭스는 정강이 높이까지 쌓인 눈을 온 몸으로 뚫으며 척척 걸음을 옮겼다.



“펠릭스. 조심해. 거긴 눈이 너무 많이 쌓였다고. 그러다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에이, 설마 무너지려고요! 따라오기나 해요. 이건, 진짜······으아아악!”



‘와르르릉—-’



눈이, 바닥이, 단단하고 견고하게 쌓이고 다져진 새하얀 땅덩어리가 한 순간에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막 꽃을 쥐려던 펠릭스는 하얀 돌과 바위 사이로 떨어져버렸다.



뒤늦게 두 사람이 무너진 절벽으로 뛰어왔다.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내려봐도, 보이는건 밤의 어둠 뿐이었다.



“펠릭스!”



“펠릭스! 살아있어요?”



돌아온 대답은 그들의 메아리 뿐이었다.







실바누스 로즈베리 준남작과 그의 인부들은 그나마 유순해진 눈보라 속에서 겨울 눈꽃을 찾아 헤맸다. 과연, 낮은 곳에도 여기저기 겨울 눈꽃이 피어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사람 손이 닿자마자 눈녹듯 스르륵 녹아버렸다.



“어째서 눈앞에 두고도 가질 수가 없는거지?”



실바누스 로즈베리의 손 안에서 또 한 송이의 얼어붙은 겨울 눈꽃이 녹아버렸다.



“저기! 또 하나 있습니다!”



혼자 저만치 눈발을 뚫고 들어간 인부는 튀어나온 바위 그림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지금 간다!”



실바누스는 곧장 눈을 뚫고 인부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푸르스름한 섬광이 바위그늘 아래 숨어있었다.



“확인하겠다.”



“조심하십시오. 겨울이 되면 이 산맥에서는 심심찮게 눈사태가······.”



눈보라의 바람 소리 때문에 인부의 말은 실바누스에게 닿지 못했다. 준남작은 눈을 뚫고 바위 틈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발 아래의 땅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것도 그는 알지 못했다. 사람이 닿은적 없는 땅은 사람의 낯선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무너져버렸다.



‘우르르르릉-’



“아니, 위험합니다!”



이미 늦었다. 준남작이 발 디딘 바닥이 부서졌다. 그리고, 거친 산비탈의 경사면을 향해 후두둑 미끄러져 내려갔다.







돌과 눈의 파도 속에서도 준남작은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겨울 눈꽃의 꽃잎에 가까스로 닿았다. 꽃잎은 준남작의 체온에 녹지 않았다. 진짜 겨울 눈꽃이었다.



그리고 준남작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눈과 돌의 딱딱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고개를 돌리는것도 힘겨웠다. 그의 손에, 겨울 눈꽃은 없었다.



하늘 위에서 새를 타고 메를린이 내려왔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준남작을 살펴보았다.



“괜찮으세요?”



준남작은 대답 대신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웃는건지 우는건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데는······.”



“왜, 난 가질 수 없는거지?”



메를린은 준남작의 다리를 살펴보았다. 그의 오른 발목이 이상한 각도로 비틀려 꺾여있었다.



“그래도 살아서 다행이에요. 잠시만요. 제가 약을 드릴테니까······.”



“왜, 어째서, 나는 구할 수 없는거지?”



준남작이 목매인 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로 내 눈앞에 있는데도, 왜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거지? 어째서, 왜?”



“준남작님······?”



“너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마술을 부리잖아. 그런데, 왜 나는 할 수 없는거냐. 왜, 왜! 어째서? 너랑 내가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정신 착란이 시작된 것 같았다. 메를린은 허리띠에 대롱대롱 매달린 천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어째서야! 어째서······. 눈 앞에서 아내를 잃어버렸고, 이제 내 딸의 차례가 다가왔다. 이번만큼은 구해주고 싶었다. 제 어미와 똑같이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큰 꿈이었나?”



메를린은 약병의 뚜껑을 열고 횡설수설하는 실바누스의 입에 덥썩 물려주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며 저항하다가, 곧 진정제가 돌자 조용해졌다.



“옮겨드릴게요.”



메를린은 얌전해진 준남작을 쓸쓸하게 내려다보았다.



“뼈가 부러진 것 같다.”



“이 약을 드세요. 그럼, 금방 괜찮아 질 거예요. 내려가요.”



“찾아야 한다. 늦기 전에. 내 손으로 직접. 실비아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상태론 무리에요. 그만 돌아가요.”



“아니, 돌아갈 수도 없다. 오른 발. 움직이지 않으니까.”



메를린은 꺽여버린 준남작의 오른 발목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인부들은 실바누스가 추락한 절벽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횃불을 들이밀었다. 그러다가, 커다랗고 새하얀 새가 준남작을 덥썩 붙잡고 날아오르자,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마녀다!”



누군가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진짜? 마녀가 아직도 있었다니.”



“분명 봤어! 새 등을 타고 있었어!”



인부들은 그 찰나에 저만치 날아가버린 흰 새의 뒷모습을 멍하니 눈으로 쫓았다.



“이제 우린 어쩌지?”



“어쩌긴. 다들 철수하자! 여깄으면 얼어죽어!”







화이트클리프 마을 어귀가 소란스러웠다. 거대한 새를 타고 내려온 마녀와 준남작을 보더니, 마을 사람들은 뭐라 웅성거리며 어디선가 들것을 가져왔다.



“참 편리하군.”



들것에 실려 어느 집으로 옮겨지는 동안 실바누스는 그의 곁을 따라오는 메를린에게 중얼거렸다.



“편리해. 너희들이 부럽다. 이런 대접을 받기 위해 네가 누구인지 소개할 필요도 없다니.”



“준남작님.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너희들이 부럽다. 하고싶은건 뭐든지 제멋대로 해버리는 너희들이. 내 아내도 그랬지.”



준남작은 다시 멍한 눈으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숲이 좋다고 숲에서 살다가, 나와 눈이 맞아 숲을 버리고 날 따라왔다. 아이가 갖고싶다며 아이를 낳더니, 그러더니, 숲이 그립다는 말만 남기고는 그대로 죽어버렸지.”



메를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멋대로야. 자기 하고싶은대로 살다가 갔어. 나를 버려두고. 두 딸을 내버려두고.”



마을 입구에서 다시 소란이 일었다. 한 무리의 새하얀 동물 떼가 마을 입구를 기웃거리며 고개를 쑥 내밀고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이트클리프의 마을 사람들은 눈토끼와 눈여우가 친구처럼 한데 모인 기이한 광경을 보고 뭐라 쑥덕거렸다.



“아. 이제 돌아가도 괜찮아. 오늘 하루동안 고마웠어.”



바람결을 타고 메를린의 목소리가 날아들자, 동물들은 일제히 산 위로 사라졌다.



“오늘은 제가 돌봐 드릴게요.”



“네가 찾던 물건은······.”



“못 찾았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그 대신,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으니까.”



준남작의 눈이 흐리멍텅해 지더니 그는 곧 고개를 떨구었다. 진정제가 천천히 그의 온 몸으로 퍼져나가, 실바누스는 편안히 숨을 쉬며 잠들었다.







펠릭스의 왼손에는 겨울 눈꽃이, 아주 커다랗고 탐스럽게 피어난 겨울 눈꽃의 꽃송이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오른 손은 무너진 얼음과 바위 사이에 끼어있었다.



“아야야야······.”



펠릭스는 우선 왼손을 움직여 보았다. 왼손은 멀쩡했지만, 어깨가 빠진듯 팔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필, 손이······.”



이번에 펠릭스는 오른 손을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을 하나 까딱했을 뿐인데, 끔찍한 격통이 느껴졌다.



“아이구. 맙소사.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나쁘다고 해야 하나.”



펠릭스는 두 다리를 꿈틀거리며 파묻힌 눈 속에서 겨우 끄집어냈다. 그는 애벌레처럼 꾸물꾸물 기어나와, 몸을 뒤집어 하늘 위를 향해 바로누웠다.



“제법 떨어졌는데.”



눈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를 애써 무시하며, 펠릭스는 어둠에 가려진 절벽 위를 노려보았다.



“올리버! 실비아! 들려요?”



힘껏 목청을 내질렀지만, 돌아온 것은 자신의 메아리 뿐이었다.



“올리버! 실비아!”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펠릭스는 비척거리며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그는 이빨로 조끼의 단추를 하나 물어 뜯어 퉷 뱉은 다음, 조끼 주머니를 향해 머리를 처박았다. 아슬아슬하게 주머니에 걸린 약병에 이가 닿지 않았다.



“아, 조금만 더. 제발. 조금만······.”



아무리 용을 써도 불가능한건 불가능했다.



“으으으으······! 젠장. 하여튼. 하필이면······.”



펠릭스는 결국 포기하고 눈발에 벌렁 누워버렸다. 몸을 덥히는 약효가 도는 것은 두 시간. 이미 한 시간을 눈 속에서 해맸다.



“온 몸이 눈에 파묻혔으니까, 남은 시간은 대충 삼십 분 정도.”



펠릭스는 여전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얼어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포함하면, 남은 수명은 약 한 시간.”



여전히 펠릭스는 아무런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았다. 다만, 조금 아깝다는 생각 뿐이었다.



“기껏 찾아냈더니. 약도 못 만들어보고. 어휴. 뭐, 뾰족한 수가 없나? 올리버! 실비아! 나 여깄어요!”



그의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블루드래곤도 좀 더 키워보고 싶었는데. 비늘 하나도 못 뽑아봤네. 또, 뭐가 있더라. 첼시는 꺼내줬고. 붉은 가루 병도 해결했고. 대스승님도 한번 이겨먹었고. 제이콥도 한방 먹여줬고. 형도 곯려줬고. 그럼, 죽음의 약 빼고는 대충 다 해 봤네.”



펠릭스의 얼굴 위로 눈이 서서히 쌓이기 시작했다.



“뭐, 나쁘지 않나.”



그는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도, 그의 피부로는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죽어간다는 감각, 죽음의 고통이 그에게는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아까부터 코끝이 기분나쁘게 간질간질했다. 펠릭스는 짜증스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새까맣고 조그만 눈동자와 마주쳤다.



“코튼?”



다람쥐는 그의 목 근처를 바쁘게 오가더니 다시 머리 위로 올라왔다.



“코튼. 네가 왜 여깄어.”



“찍!”



펠릭스는 다람쥐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코튼. 올리버한테 돌아가. 넌 나만 보면 자꾸 깨물어 대잖아. 아, 아야! 또!”



코튼은 펠릭스의 코를 깨물고는 그의 조끼 주머니로 사라졌다.



“야이, 다람쥐가. 야, 너, 나와!”



펠릭스는 어거지로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 조끼 안주머니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리고, 조끼 주머니 틈에 숨어있는 코튼을 보더니 펠릭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코튼. 요 똑똑이. 착한 다람쥐야. 내 말좀 들어줄래?”



코튼은 눈을 깜빡였다.



“거기, 약병 있지. 하나 꺼내볼래? 그래, 그거. 아니, 말고! 옆에있는거. 아니, 반대쪽!”



코튼은 이 약병 저 약병을 두 앞발로 쥐었다 놓았다 했다.



“그래, 그거! 그래. 들어. 좋아. 아유, 착하지 착하지. 좋아. 잘 했어. 자, 조금만 더 가까이. 아니, 내 입으로 가까이 밀라고! 이 멍청한······아니, 아니야. 좋아. 코튼. 자······천천히······.”



코튼이 두 앞발로 계란 흰자를 물에 푼 것 같은 약병을 들어올렸다. 펠릭스는 이빨을 내밀어 코르크 마개를 깨물더니, 그대로 마개를 쑥 뽑아 땅에 퉷 뱉었다.



“좋아. 잘했어.”



펠릭스는 이로 약병을 살짝 깨물고 고개를 뒤로 휙 젖혀 약을 꿀꺽 삼켰다.



“어휴! 좋아. 수명 두 시간 늘었다. 보자. 왼팔. 잘 하면 끼울 수 있을것 같은데.”



펠릭스는 어기적어기적 절벽을 향해 기어갔다. 그는 벽에 어깨를 맞대고 한참 몸을 비비적거리더니, 마침내 뚜둑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으악!”



잠시 가만히 있던 펠릭스는 조심스레 왼팔을 움직여보았다.



“됐다. 야, 코튼. 그래. 그러고보니까. 너, 절벽 탈 수 있어?”



코튼은 새까만 눈을 깜빡이더니 쪼르르 벽을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좋아! 자, 그럼 올리버랑 실비아한테 이거 좀 전해줘. 위에서 걱정할라.”



펠릭스는 주머니에서 구깃한 종이를 꺼내들고 왼손으로 어설프게 글씨를 썼다.



“자!”



글씨 쓴 종이를 코튼은 두 손으로 돌돌 말더니 볼주머니에 집어넣고 절벽 위로 잽싸게 올라갔다.



“보자. 어떡해야 올라갈 수 있으려나······.”







“펠릭스! 들려요? 살아있어요오오?!”



실비아가 벼랑 아래의 심연 속으로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쳐 돌아왔다.



“실비아. 그만 포기해. 이러다 너까지 다쳐.”



“펠릭스으으으!!!”



화이트 클리프의 무자비할 정도로 새하얀 산맥에서 실비아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실비아. 그만, 내려가자.”



실비아는 가만히 절벽 아래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흐느끼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실비아. 왜 울어?”



“몰라요!”



“그렇게 티격태격하더니. 미운정 들었나보네.”



“이렇게, 이렇게 죽을 줄은 몰랐다고요! 난, 난 몰라······.”



실비아는 이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몰라요. 그냥, 죽음의 약따위 부탁하지 말걸. 진작 이딴거 포기할걸. 그냥, 같이 다니는게 재밌어서 계속 미루다가, 내일은 또 뭐가 있을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밤마다 기대하는게 좋았는데, 그래서 미루다가, 결국에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올리버는 천천히 실비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실비아는 아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고요. 알았으면······차라리 진작 말 할걸······. 펠릭스! 살아있어요?!”



어둠 속에서 돌아오는것은 눈과 메아리 뿐이었다.



“실비아. 그만 가자.”



“어떻게, 어떻게 살아있는지라도 알았으면······펠릭······.”



또 한번 힘껏 외치려던 실비아가 갑자기 멈췄다.



“코튼?”



절벽 아래에서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기어올라왔다. 그 다람쥐는 중간에 두 번 정도 쌓인 눈에 파묻혀 발버둥을 치다가, 겨우 빠져나와 실비아의 손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찍!”



코튼은 의기양양하게 볼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찍! 찍!”



“뭐야. 코튼. 네가 왜 거깄어. 내 주머니 어디 있던거 아냐?”



실비아는 뜨뜻하고 축축한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엉망진창 알아보기 힘든 글씨가 쓰여 있었다.



‘살아있’



“살아있대요! 코튼, 이거 펠릭스가 쓴 거 맞지?”



“찍!”



코튼은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실비아는 대번에 웃으며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올리버! 펠릭스 살아 있대요! 코튼. 그러니까, 저 밑에 있는거야? 펠릭스가 살아있는거야?”



“찌직!”



코튼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 바로 구해줄게요!”



실비아는 절벽 아래로 힘껏 소리친 다음 올리버를 돌아보았다.



“올리버! 밧줄! 뭐든지요!”



“저기, 실비아.”



“올리버! 빨리요! 펠릭스가······.”



“아니, 실비아. 밧줄은 무리야.”



실비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금새 사라졌다.



“왜요?”



“아까부터 말 하려다 못하고 있었는데. 우린 지금 땅이 아니라 눈 위에 서 있어. 여기도, 언제 또 무너질지 몰라.”



“그러니까 빨리 구해줘야죠!”



“아니, 실비아. 여긴 밧줄을 고정할 데가 없어. 못을 박으려고 해도, 눈이 깊이 쌓여서 암반까지 닿지도 못해. 그러다가 잘못하면 우리도 휘말려서 같이 추락해. 밧줄은 위험해서 못 써.”



“그럼 어떡해요!”



실비아는 절벽 아래의 깜깜한 어둠을 내려보았다.



“펠릭스가 살아있다잖아요!”



올리버는 미안하다는듯 고개를 살짝 떨구었다.



“뭐라도 있을 거예요! 그래, 분명 있을거야. 단단한 돌이라든가. 암반이라든가. 아니면, 뭐라도. 있을텐데. 연금술사잖아요 펠릭스는. 분명, 뭔가 있을 거라고요. 지금까지 그랬듯이 항상, 신기한 약을 꺼내서 놀라운 마술을 부릴 거예요. 항상 그랬듯이······.”



“펠릭스는 여기 없어.”



올리버의 말 한 마디가 눈보라보다 더 차갑게 들려왔다.



“실비아. 우리 둘이서는 못 해. 그러니까······.”



“아니, 있어요. 아직 있다고요. 그래, 있었어요!”



실비아는 주머니 속에서 펠릭스가 건네주었던 그 약병을 꺼냈다.



“이런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연금술 약은 없어.”



“있어요! 이거, 어젯 밤에 펠릭스가 나무 울타리를 만들때 쓴 약이에요. 나무 덩굴을 자라나게 하는 약. 덩굴이라면 이 깊은 눈 속까지 뿌리를 내리고 땅을 찾을 거예요. 땅에 단단하게 박힌 덩굴이면 펠릭스를 구할 수도 있을 거라고요.”



“내 생각엔,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은데-.”



이미 실비아는 약병의 뚜껑을 열고 눈밭 위를 향해 약을 쏟아부었다. 약은 순식간에 눈 속으로 스며들었고, 그리고, 잠잠했다.



“실비아. 그만, 가자.”



“아니야! 아니야. 또 이런건 싫어. 싫단 말야! 언제까지 두 손 놓고 지켜만 보고 싶진 않아!”



“실비아. 불가능한건 불가능한거야. 우리가 신도 아니고. 인간인 이상, 안 되는건······.”



눈 속에서 투명한 덩굴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뱀처럼 똬리를 트는 덩굴에는 잎사귀 한장 붙어있지 않았다. 덩굴은 둥글고 복잡하게 얼키고 설키면서 점점 크기를 부풀리더니, 절벽 아래를 향해 한 가닥 줄기를 천천히 뻗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줄기를 뻗던 덩굴에서 일제히 봉오리가 올라와 꽃이 피어났다. 창백한 푸른 색의 빛나는 꽃송이가. 겨울 눈꽃이 가득 피어난 덩굴이 도로 슬금슬금 줄기를 끌어들이자, 줄기로 자기 몸을 칭칭 묶은 펠릭스가 그 아래에서 천천히 딸려올라왔다.



“펠릭스!”



“아, 반가워요. 진짜 죽는줄 알았······으악! 잠깐만! 지반이 약해요!”



펠릭스에게 달려든 실비아는 곧장 뒤로 물러섰다.



“어휴! 진짜 죽는줄 알았네. 이거 좀 풀어줘요.”



올리버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와 두 손으로 덩굴을 붙잡아 북 찢었다.



“거칠기는. 하여튼. 잘 지냈어요?”



“죽은줄 알았잖아요!”



“아니, 왜 성질이야.”



실비아는 펠릭스에게 따끔하게 쏘아붙이더니 씩씩거리며 저쪽으로 걸어갔다.



“네 걱정 많이 했거든.”



“걱정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메를린도 그렇고, 다들 왜그리 오지랖인지. 그나저나, 이게 다 뭐람?”



펠릭스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겨울 눈꽃이 가득 피어난 덩굴을 바라보았다.



“뭔데.”



“겨울 눈꽃이요.”



“이게? 전부? 다?”



“네.”



올리버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끔뻑거렸다.



“갑자기 부자 됐네.”



“그러게요.”



“뭐라고요? 뭘, 뭘 했다고요?”



뒤에서 훌쩍이던 실비아도 깜짝 놀라 쪼르르 달려왔다.



“이게 다 겨울눈꽃이라고요. 실비아. 뭘 한 거예요?”



“저는, 그냥, 어제 당신이 준 약 뿌린게 다인데······.”



“봐요.”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약병을 내밀었다. 약병의 주둥이에 둥근 씨앗이 걸려 빠져나오지 못한 그대로였다.



“흠.”



“왜요?”



“이건 생장을 가속하는 약이에요. 수명까지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서 보통 식물 씨앗에다 쓰죠. 뭐 아무튼, 그래서 안에 씨앗을 하나 같이 넣어뒀거든요?”



“그런데요?”



“그런데, 씨앗이 걸려서 못 빠져나왔어요. 그러니까, 이 약은 불량품이라는거죠.”



“그럼, 얘들은 다 뭔데요?”



펠릭스는 덩굴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눈앞에 보물이 파묻혀있었네요.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이거 다 겨울눈꽃이에요. 눈 속에 숨어있던 씨앗이 자란 거예요.”



“다, 다요? 이 많은게, 전부 다 겨울 눈꽃 이라고요?”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올리버! 겨울 눈꽃을 찾았으니 이제 뭘 해야 할까요?”



“뭔데?”



“하산이죠, 하산! 자, 저거 챙겨서 이제 내려가자고요!”



올리버는 이제서야 활짝 편 얼굴이었다.



“근데, 너 내려갈 수는 있어?”



“아, 뭐. 저길 내려가긴 힘들겠죠. 그래도, 그동안 고생한것도 있으니까 이번에는 좀 편하게 가볼까요?”



펠릭스는 왼팔로 조끼 단추를 전부 풀어헤쳤다. 그리고 줄줄이 걸린 약병들을 하나하나 꺼내 공중으로 휙휙 던져댔다. 공중에서 두 약병이 부딪혀 깨지고, 튄 약물위에 새로운 약물이 뒤섞이자 허공에서부터 줄기가 뻗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것도! 저것도! 그리고, 이놈도!”



뻗어나온 줄기를 중심으로 점막이 펼쳐지고, 점막 위에 코팅이 입혀지더니, 마지막으로 펠릭스는 일곱 약병을 한번에 던져버렸다.



하늘에서부터 다리가, 식물의 줄기와 뿌리를 중심으로 하는 반투명한 다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리의 기둥은 구불구불하게 자란 식물의 줄기였고, 다리의 발판은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굳은 점액이었다.



“가죠.”



“무지개다리. 가능하구나.”



세 사람이 다리 위로 발을 디디자, 걸어온 발판은 스르륵 말려들어가 사라지고 대신 저 멀리 앞에 새로운 발판이 하나 뻗어나왔다. 뻗어나온 발판의 모퉁이에서는 줄기가 아래로 쭉쭉 뻗어나와 머나먼 땅에 닿아 새로운 기둥이 되었다.



“꿈인가.”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펠릭스는 멀쩡한 왼팔로 그를 부축하던 올리버의 등을 팡팡 쳤다.



“꿈이긴. 현실이에요! 우린 지금 무지개 다리를 밟고 있다고요!”



반투명한 무지갯빛 발판 아래로,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화이트 클리프의 눈덮인 산맥이 보였다. 메를린이 타고다니던 새하얗고 커다란 새가 다리 아래를 신기하다는듯 휙 지나가기도 했고, 막 눈발 위에서 잠자리를 찾던 눈토끼 가족과 은여우 부부가 하늘 위로 고개를 들어올려 구경했다.



“꿈인것 같은데.”



화이트 클리프의 빛나는 마을 전경을 바라보며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정말 꿈 같아요.”



“꿈이겠지?”



올리버가 실비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전 꿈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실비아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불어오는 찬 바람에 실비아의 머리칼이 가볍게 살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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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에필로그 22.01.13 56 1 4쪽
171 마지막화 22.01.13 44 1 22쪽
» 170화 22.01.12 38 1 24쪽
169 169화 22.01.11 33 1 24쪽
168 168화 22.01.10 34 1 23쪽
167 167화 22.01.09 36 1 22쪽
166 166화 22.01.08 34 1 23쪽
165 165화 22.01.07 36 1 26쪽
164 164화 22.01.06 31 1 22쪽
163 163화 22.01.05 36 1 24쪽
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3 1 22쪽
160 160화 22.01.02 36 1 25쪽
159 159화 22.01.01 36 1 23쪽
158 158화 21.12.31 32 1 21쪽
157 157화 21.12.30 34 1 23쪽
156 156화 21.12.29 35 1 24쪽
155 155화 21.12.28 34 1 24쪽
154 154화 21.12.27 39 1 22쪽
153 153화 21.12.26 42 1 24쪽
152 152화 21.12.25 39 1 21쪽
151 151화 21.12.24 38 1 24쪽
150 150화 21.12.23 38 1 22쪽
149 149화 21.12.22 37 1 21쪽
148 148화 21.12.21 40 1 22쪽
147 147화 21.12.20 43 1 22쪽
146 146화 21.12.20 38 1 21쪽
145 145화 21.12.19 40 1 22쪽
144 144화 21.12.18 43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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