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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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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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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63화

DUMMY

주인 없는 숲이 울부짖는다. 울부짖는 숲 속으로 두 사람이 뛰어간다. 의식을 잃은 실비아를 등에 업은 채로.



나무가 뿌리를 들고 일어나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하늘을 향한 가지를 내려 길을 가린다. 펠릭스가 조끼에서 약병을 꺼내 집어 던지자, 허깨비가 연기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펠릭스. 그래서, 대체 무슨 소리야? 숲이 실비아를 집어 삼킨다니?”



펠릭스는 그의 발목을 잡아채려고 날아드는 덩굴을 폴짝 뛰어넘었다.



“주인 없는 숲이 실비아를 자기 주인으로 만드려고 한다고요!”



“펠릭스. 미안한데, 네가 하는 말 아까부터 하나도 모르겠어!”



수풀 속에서 검은 들개가 달려들어 펠릭스는 자리에 넘어져버렸다. 그러자마자 올리버는 몸을 돌려 들개를 힘껏 걷어찼다.



“괜찮아?”



“괜찮아요. 좀 잡아줘요.”



올리버는 재빨리 펠릭스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다시 숲 밖으로 내달렸다.



“그래. 그래서, 뭐 그렇다고 치자. 왜 하필 지금인데?”



“아무나 숲의 주인이 될 수 있는게 아니에요!”



등 뒤에서 수많은 나무의 뿌리, 가지, 줄기가 그들을 향해 그물처럼 스물스물 다가오고 있었다. 펠릭스는 또다른 약병을 꺼내 어깨너머로 휙 던졌다. 약병이 가지에 닿자, 새파란 전기가 폭발했다.



“그래서?”



“마녀나, 마녀 비슷한 사람쯤 되야 숲의 주인이 될 수 있어요.”



“왜?”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난 마녀도 아닌데! 메를린이랑 아이작한테 들은건 그게 다거든요!”



펠릭스가 억울하다는듯 소리쳤다. 다시 커다란 나무가 땅에서 갑자기 솟아나 앞을 가로막자, 이번에는 펠릭스가 빨간 약병을 집어던졌다. 병이 부서지며 새빨간 불꽃이 폭발했다. 폭발에 휩쓸린 나무는 한 순간에 새카만 숯이 되어버렸다.



“알았어, 화 내지마!”



올리버는 숯이 돼버린 나무를 온 몸으로 들이받았다. 그러자 검게 타버린 나무는 힘없이 바스락 하고 무너져버렸다.



“그런데, 실비아는 마녀가 아니잖아!”



“그게 이상하다는거죠! 숲이 맛이 가버렸거나, 아니면 사실 실비아가 마녀거나, 또는 마녀 비슷한 거라도 되거나. 몰라요. 일단, 빠져나가고 생각해요!”



이번에는 눈앞에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십수 미터쯤 되는 폭포 아래에 선 것처럼, 요란한 굉음을 내며 우박이 퍼부었다.



“펠릭스. 네 스승님은 괜찮을까?”



펠릭스는 병을 하늘을 향해 힘껏 집어던졌다. 공중으로 떠오른 병이 폭발하자, 소리없는 충격파가 순식간에 구름을 걷어버렸다. 먹구름이 잠깐 걷히자, 언제 그랬냐는듯 맑고 쾌청한 하늘이 보였다. 당장, 그들이 서 있는 곳에서 몇 미터만 떨어져도, 한없이 평화롭고 청명한 초겨울의 하늘이었다.



“미치겠네.”



“봤죠? 다른데는 멀쩡해요. 우리한테만 그런다고요. 그러니까, 빨리 뛰어요!”



다시 먹구름이 몰려들며 우박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 참! 진짜 살다살다 별 일 다 겪네!”



올리버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우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가자, 우박이 약해지더니 대신 땅이 쩌적 갈라졌다. 갈라진 땅의 틈새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검은 심연이 꾸물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펠릭스! 이건 또 어떡해?”



펠릭스는 약병을 세 개 꺼내들었다. 먼저 두 개의 약병을 던지자, 허공에 물이 튀고 순식간에 얼어 아치모양 얼음 다리가 만들어졌다. 거기에 마지막 약병을 집어던졌더니, 병이 터져나간 부분부터 시작하여 얼음 다리 위에 금박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가요!”



“내 참. 무지개 다리도 아니고, 황금 다리라니.”



금박이 입혀진 다리는 조금 미끄러웠지만, 얼음보단 훨씬 나았다.



“무지개 다리는 재료가 비싸요!”



“그거, 만들 수 있는 거였어? 정말이지. 오늘 하루동안 많이 알아가는걸.”



두 사람은 어기적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겨우 다리를 건넌 뒤에 그들은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등 뒤에서 짐승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수많은 짐승들의 새하얀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깜빡거렸다. 짐승들이 어둠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갈라진 땅이 펠릭스가 이어붙인 다리를 부수며 도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야단났네.”



멧돼지. 사슴. 거미. 까마귀. 거기에 계속해서 어둠 속에서 눈동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숲 속에 사는 짐승들이 전부 한 곳에 모이는듯했다.



“그냥 뛰어요!”



두 사람이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하자, 짐승들도 울부짖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달리고 또 달린다. 날아드는 나무와 식물의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우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달려간다. 섬광의 창이 대지를 꿰뚫고 무시무시한 천둥 소리가 울려퍼져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무가 앞길을 가로막아도 몸으로 부수고 지나간다. 땅이 갈라지면 뛰어넘는다.



“저기, 나가는 길이에요!”



펠릭스가 가리킨 끄트머리에 조그만 빛의 구멍이 보인다. 그러나 빠져나가는 길이 보이자마자, 무수히 많은 나뭇가지와 뿌리들이 솟아나 거대한 장벽을 엮기 시작했다.



“그냥 뛰어요!”



펠릭스를 믿고 올리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펠릭스가 또 약병을 던졌다. 거무칙칙한 액체가 병에서 터져나오더니, 한 줄기 연기를 피워올리며 그 나뭇가지와 뿌리들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뭘 던진거야?”



“사람한텐 안 해로워요. 가, 빨리!”



어느새 짐승들이 턱밑까지 쫓아왔다. 거대한 들개의 턱과 매의 발톱이 올리버의 등으로 날아들려는 찰나, 올리버는 힘껏 뛰었다. 그의 몸이 잠시 공중에 떠올랐다가, 이내 힘없이 바닥에 부딪혔다.



숲의 경계를 넘자마자 세상이 바뀌었다. 먹구름도, 짐승도, 우박도, 환각도 아무것도 여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왔더니 하늘 위는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투명한 울타리에 가로막힌 것처럼 먹구름도, 짐승들도, 나무와 식물들도 숲의 경계에서 두 사람을 향해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한참동안이나 그들을 향해 매섭게 으르렁대던 짐승들은, 결국 어느순간엔가 몸을 돌리고 숲 속으로 돌아갔다.







“대체, 그게 다 뭐였지?”



올리버가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털레털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펠릭스는 오른다리를 절뚝거리며 실비아를 감싼 모포를 슬쩍 들추어 보았다. 그 우박조차도 환영이었는지, 모포에는 물방울 하나 맺히지 않았다.



“어휴. 정말이지. 주인 없는 숲에 두 번 다시 가나봐라.”



펠릭스는 대꾸하지 않고 실비아를 살펴봤다. 열도 차츰 내리기 시작했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도 안색이 훨씬 좋아보였다.



“펠릭스. 주인없는 숲이라는게, 내 기억이랑 좀 많이 다른데. 원래 이래?”



“여기가 유별난 거겠죠. 제이콥이 살잖아요. 연금술사는 아무래도 마녀랑 비슷한 데가 좀 있잖아요? 원래라면 진작 숲의 신비로운 힘을 잃어버렸어야 하는데, 제이콥 때문에 그 힘이 좀 남았나보죠.”



“그렇다고 이런 일이 다 있나?”



“그만큼 숲은 위험한 곳이라고요. 뭐, 올리버. 당신도 다음부터 조심해요.”



펠릭스는 뒤꿈치를 들고 서서 올리버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쳐 주었다.



“생각해 볼게.”



“어휴! 진 다 뺐네. 그래서, 이제 어쩐다.”



널따란 포장 도로 앞에 두 사람은 우두커니 멈춰섰다.







“펠릭스.”



도롯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올리버가 조용히 말했다.



“왜요.”



“너 공작이잖아.”



“그런데요.”



펠릭스는 도롯가에 서서 마차가 오나 안오나 살피고 있었다.



“뭐 마차나, 뭐 못 불러?”



“내가 낭만 소설 속의 마법사도 아니고. 여기서 무슨 수로 불러요? 휘파람 분다고 어디서든 하인이 튀어나오는게 아니거든요. 아니면, 뭐 봉화라도 피워올릴까요?”



“뭐라도 좀 없으려나. 어휴, 기껏 빠져나왔더니. 이게 대체······.”



도로 저쪽에서 다그닥 소리가 들리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마차다.”



올리버는 실비아를 바위에 기대 뉘여놓고, 펠릭스의 곁으로 다가와 도로 위에서 팔을 휘적거리기 시작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마차는 아니었다. 소가 끄는 달구지 한대가 털털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달구지 앞에 앉아 소를 몰던 남자는 만신창이 꼴의 두 사람을 보더니, 헛것이라고 착각한듯 자기 눈을 부비적거렸다.



“좀, 도와주세요!”



다행히 달구지는 그들 옆에서 사뿐히 멈춰섰다.



“아니, 꼴이 말이 아니네. 뭐하는 사람들이래요?”



남자가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그러자 펠릭스가 목을 가다듬으며 앞으로 살짝 나섰다.



“전 연금술사입니다. 병과 약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도 당신을 도와 드리죠. 분명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어딘가 하나쯤은 있을텐데요.”



“뭐. 연금술사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마침 장에서 물건 팔고 오는 길이니, 탈거면 타요. 달구지도 비었으니까.”



올리버와 펠릭스는 서로를 마주보더니, 동시에 웃었다.



“고맙습니다!”



펠릭스가 먼저 달구지 위에 폴짝 올라탔고, 올리버는 실비아를 도로 들쳐업고 달구지로 올라탔다.







마차를 타고 가는 길과 소달구지를 타고 가는 길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훨씬 느리고, 지루하고, 피곤한 여행길이었다.



펠릭스의 일행을 태워준 남자는 여느 시골 농부들과 달리,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소를 몰기만 했다. 펠릭스는 이 예상 밖의 배려에 고마워 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어디로 가는 길이지?”



잠든 실비아와 졸고있는 펠릭스가 깨지 않도록 올리버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집에요.”



“집? 집이 어디길래. 조금있으면 밤인데, 오늘 중으로 도착하기는 하나?”



“곧 도착해요. 봐요.”



남자는 손가락으로 저쪽 야트막한 언덕 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노을이 가라앉아 검푸르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 위로, 한 줄기 연기를 피워올리는 나무 집이 한 채 서 있었다.







남자의 집은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하지만, 조용하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집 근처를 숲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울타리를 세워둬서 사슴이나 멧돼지가 뛰어들 일은 없어 보였다. 집 마당에는 커다란 텃밭이 있었으며, 집 옆에는 소를 넣어두는 외양간도 있었다.



“여보! 손님왔어!”



남자는 두 손을 입에 모은 다음 현관문에 대고 힘껏 소리쳤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문이 달칵 열렸다.



“손님?”



시끄러운 목소리에 놀라, 펠릭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현관에서 걸어나오는 살집 두툼한 아낙을 발견했다. 아니, 그건 살이 아니었다. 온 몸에서 붓기가 빠져나가질 않아 퉁퉁 부은 것이었다. 그 자체로 생명을 위협하진 않겠지만, 놔둬서 별로 좋을 것도 없었다.



“왠 손님?”



아낙이 다가오자 남자는 달구지에서 소를 풀어 외양간으로 몰았다.



“길에서 만났는데, 옴짝달싹 못하는것 같더라고. 환자도 있는것 같고. 그래서 태워줬어.”



아낙은 세 사람을 슥 돌아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어휴. 그래 보이네. 자, 빨리 들어와요들. 밤바람이 차요. 대접할 건 없지만, 편히 쉬다가요.”



상상도 못한 따뜻한 응대에, 펠릭스와 올리버는 멀뚱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온 펠릭스와 올리버는 신기한 눈으로 집안을 두리번거리다가, 남자에게 등을 떠밀려 어찌저찌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방에서 걸어나온 아낙은 선반에서 그릇 두 개를 더 꺼내더니, 천으로 슥슥 먼지를 닦은 다음 스튜를 넉넉히 퍼담았다.



“차린건 없지만, 들어요.”



펠릭스와 올리버의 자리에 시킨적도 없는 스튜가 한 그릇씩 놓였다. 스튜는 아주 걸쭉했는데, 재료를 많이 넣어서 그런건 아니었다. 감자를 넣고 끓인 스튜를 끓이고 또 끓이고 계속 끓여서, 전분밖에 안 남아 걸쭉한 것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물론 펠릭스에게 음식의 맛은 아무 의미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럼없이 수저를 들고 가볍게 스튜를 한 술 떴다.



“어때요? 맛있어요?”



“최고네요.”



아낙은 아주 만족한듯 까르르 웃다가,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달려갔다.



“그나저나. 저희 동료는?”



“옷 갈아입혀서 침대에 눕혀놨어요. 어디 아픈 거예요? 열은 없던데.”



아기를 달래며 아낙이 물었다.



“위험한 일이에요.”



펠릭스는 수저를 놓으며 뜬금없는 소릴 했다.



“위험했어요. 전염병이라도 걸렸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어린 애도 집안에 있는데······.”



펠릭스의 무례한 언동에도, 아낙은 그저 웃으며 대꾸했다.



“힘든 때일수록 서로 돕고 살아아죠.”



이제 펠릭스가 할 말이 없어져버렸다. 그는 낯설 정도로 평화롭고 아늑한 분위기가 답답했는지, 순식간에 스튜를 퍼먹고 일어났다.



“잠시 산책하고 올게요. 늦기 전에 돌아올테니 걱정 말아요.”



“나는?”



막 떠나려던 펠릭스는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당신은 여깄어도 돼요.”







남자는 창문으로 마당을 서성이는 펠릭스를 한참이나 본 뒤에야 거실로 돌아왔다.



“걱정할 필요 없어.”



남자가 올리버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래 뵈도, 자기 앞가림은 하니까.”



“뭐, 괜찮겠죠. 요즘은 멧돼지도 뜸하니까.”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올리버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보니, 도와준 은인 이름도 모르는걸. 당신, 이름이?”



“보누스.”



올리버는 남자의 이름을 곱씹었다.



“보누스. 보누스라······. 이곳 이름이 아니군. 서쪽에서 왔나?”



보누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전쟁할 때 넘어왔죠. 후퇴할 때를 놓쳤는데, 운 좋게 살아남아서요. 아내랑 눈이 맞아서 다행이죠. 아니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또 그 이야기야? 하여튼. 팔불출.”



저쪽에서 아낙이 웃으며 일어나더니 부엌으로 걸어갔다. 곧, 주전자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전쟁이라. 나도 그 전쟁터에 있었지.”



“그래요? 당신은?”



“올리버. 난 별로 운이 없었나봐. 당신처럼 눈 맞은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쭉 혼자에요?”



“그렇지 뭐.”



올리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외롭겠어요.”



“예전에는 그랬지. 요새는 외로울 새도 없어. 어쩌다가, 팔자에도 없는 애가 둘씩이나 생겨서.”



“아까 그 두 사람이죠?”



어느새 아낙은 차를 들고 돌아왔다.



“의붓자식이에요?”



“아니. 한 명은 내 고용주고, 다른 한 명은 고용주의 손님이자 제자. 사정이 있어서 동행하고 있어.”



“참 이상한 사이네요.”



아낙은 주전자와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렇지? 나도 가끔가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게 꿈은 아닌가. 어쩌면, 난 전쟁터에서 진작 죽은건 아닌가.”



“당신은 살아있어요.”



보누스가 잔을 들어올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건 꿈도 아니고요. 그렇지, 여보?”



부부는 서로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담은 조금 지루하게, 그러나 졸립지는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딸아이가 예쁘던데요.”



보누스가 말했다.



“귀족이야. 준남작.”



작위와 외모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올리버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어쩐지. 피부는 달처럼 뽀얗고, 머리카락은 밤처럼 까맣고. 참 예쁜 딸이네요.”



“뭐······. 그러게. 그렇지만, 내 딸 아니니까.”



“아 참. 그랬죠. 참. 아들은?”



“걔도 내 아들은 아냐. 좀, 독특한 녀석이긴 하지.”



“어떤대요? 반항해요?”



보누스는 차를 호록 마시며 물어보았다.



“아니. 반항은 아니고. 그냥, 머리가 너무 좋아. 너무 좋아서 탈이야.”



“맞아요. 그런 사람이 있죠. 우리 형님이 그랬거든요.”



보누스는 찻잔을 내려놓고 물끄러미 잔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나치게 머리가 좋았죠. 어릴 때부터 사전을 달달 외웠어요. 마을 안에서 제일 똑똑했죠. 없는 형편에 무리해서 도시의 학교로 보냈는데, 항상 일등 이었죠.”



보누스는 씁쓰레한 얼굴로 잔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너무 똑똑해서 탈이었죠. 어린애처럼 재롱 부릴 줄도 모르고, 투정 부릴 줄도 몰랐어요. 어리광 부리는건 꿈도 못 꿨고. 어른이 되더니, 삭막한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그래? 그래도, 잘 살 수 있잖아.”



“결혼도 못 했어요. 여자와 가까이 지낸 적도 없죠. 아무도 형님을 못 버텼거든요. 사람같지가 않다면서.”



보누스는 한 모금 호록 입에 머금었다.



“뭐, 형님은 나름대로 만족했을지도 모르지만, 동생인 저는 가끔 그렇게 생각해요. 좀 더 평범했으면 좋을텐데. 나처럼 가족을 꾸릴 수도 있고. 아니면, 저런 사람이라도 이해해 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차를 꿀꺽 마시고 보누스가 조용히 말했다. 보누스의 말을 들은 올리버는 미묘한 기분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잔을 집어올렸다. 펠릭스와 실비아의 얼굴이 찻잔의 흔들리는 수면에서 번갈아 떠올랐다.



“재미없죠?”



보누스의 목소리 덕분에 찻잔을 든 올리버의 손이 떨렸다. 그래서 두 사람의 환영도 사라졌다.



“아니, 괜찮았어. 오히려, 나때문에 지루할까봐 걱정인데.”



올리버는 차를 한모금 후룩 마시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우연이었지만, 옛 전우도 만나고. 좋네요.”



“하하. 전우라. 그 때, 우린 적이었어. 전장에서 만났으면 서로 죽자사자 달려들었을 거라고.”



“지금은 아니잖아요.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걸요.”



보누스는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어차피, 저나 당신이나 전쟁하곤 안 맞았죠. 안 그래요?”



올리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지?”



“당연하죠. 전쟁하고 잘 맞는 사람은 죽었거나, 아니면 영웅이 되었으니까. 당신은 둘 다 아니잖아요. 그럼 저랑 같죠.”



보누스는 찻잔에 남은 차를 모두 마셔버리고 입맛을 다셨다.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 한테는, 전쟁은 스쳐지나가는 폭풍이랑 똑같죠. 휩쓸리면 죽어요. 몸이 날아가지 않도록 뭐든 붙잡고 제발 그만 지나가 달라고 애걸복걸하는게 고작이죠. 헤쳐 지나간 뒤에는 상관 없어요. 누가 아군이었든 적군이었든.”



“내가 당신 동료를 죽였을지도 몰라.”



올리버는 가라앉은 목소리만큼 무겁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이죠. 이제와서 서로 미워해봤자, 죽은 사람은 안 돌아와요. 난 그 때 진심으로 싸웠고, 죽은 동료들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줬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그 때, 현관문이 달칵 열리며 펠릭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펠릭스는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쑥쓰레 웃으며 말을 꺼냈다.



“방해였나요?”



“전혀요. 차 마시고 있었는데, 한 잔 하겠어요?”



보누스는 사람좋게 웃으며 펠릭스에게 차를 권했다.



“전 괜찮습니다. 실비아는?”



“실비아?”



“같이 온 저희 동료요.”



“아, 따님?”



“딸?”



펠릭스는 당혹스런 눈으로 올리버를 보았다. 그러자 올리버는 대충 그러려니 하라는 뜻으로 눈빛을 보냈다.



“저쪽 방이에요. 동생인가요?”



“뭐, 아니오. 제자라고 해 두죠.”



펠릭스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보누스는 주전자를 집어들고 자기 잔에 차를 쪼륵 따랐다.



“남매가 사이가 좋네요.”



올리버는 그러려니 하며 대꾸했다.



“그러게. 의외로 죽이 잘 맞던데.”



“사람이라는게 그렇죠. 저도 당신하고 의외로 죽이 잘 맞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올리버?”



올리버는 보누스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는 찻잔을 집어들어 보누스를 향해 살짝 내밀었다. 그러자 보누스는 잠시 잔을 보고 있다가, 뒤늦게 무슨 뜻인지 알아채곤 자기 잔을 집어올렸다. 두 찻잔이 허공에서 살짝 부딪혔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잔을 입에 기울였다.







세 사람은 숲 언저리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평화롭고 아늑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자 실비아도 겨우 정신을 차렸다.



“별 일 없었어요. 피곤해서 그렇겠죠.”



무슨 일이 있냐고 묻는 실비아에게, 펠릭스는 별 말 하지 않았다. 불확실한 이야기를 해서 괜히 겁먹게 만들까봐 나름대로 배려한 결과였다.



“길가에서 우릴 태워줬어요. 좋은 사람들이니까, 걱정말고.”



보누스의 가족에 대한 펠릭스의 소개를 듣고, 실비아는 살짝 기분이 이상했다. 펠릭스가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칭찬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보누스 부부는 펠릭스의 일행이 오두막 밖으로 나서자 배웅까지 할 요량으로 현관에서 걸어나왔다.



“아, 잠시만요.”



펠릭스는 조끼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꺼내 보누스에게 내밀었다. 보누스는 종이를 펼쳐 보더니, 화들짝 놀라 펠릭스를 보았다.



“이건······.”



공작가 웨일의 도장을 찍고 펠릭스의 서명을 남긴 수표였다.



“하룻밤 머물렀잖아요. 숙박비.”



“아니, 이렇게 많이는 못 받아요.”



보누스는 종이를 도로 고이 접었다.



“받아요. 당신 아내는 몸에 붓기가 자꾸 쌓이는 체질이에요. 당장 목숨이 위험하진 않겠지만, 계속 약을 먹어야 한다고요. 그걸 들고 은행에 찾아가면 더이상 약값 때문에 고생할 일은 없어요.”



“그래도 이렇게 많이는 못 받아요. 돈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니까.”



보누스는 단호하게 수표를 도로 접어 펠릭스에게 내밀었다.



“자식도 있잖아요. 여기서 평생 살아갈 수는 없어요. 당신도 알텐데요? 애들이 크면 학교도 보내야 하죠. 그러다 병이라도 걸리면······.”



“괜찮아요. 우리들은.”



보누스 부부는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같은 웃음이 아니라, 강한 용기와 의지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알았어요.”



펠릭스는 보누스의 손에서 수표를 돌려받자마자 북북 찍어 휙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는 새 종이를 꺼내더니, 대뜸 올리버의 등에 대고 뭔가를 휘갈겨썼다.



“자요.”



올리버가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펠릭스는 순식간에 글씨를 써 주었다. 보누스는 종이를 받더니, 이번에도 깜짝 놀란 눈으로 펠릭스를 보았다.



“약에 필요한 재료랑, 약 만드는 방법이에요. 싸구려 약사한테 찾아가도 이정도는 구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건 나중에라도 당신 자식들 학교에 보낼 마음이 들면, 그 때 써요.”



펠릭스는 새 종이를 꺼내 자신의 서명과 도장을 찍어주었다. 펠릭스 웨일이 신원을 보증한다는 보증서였다.



“이상한데 쓰면 큰일나요. 알죠? 귀족 이름 잘못 팔고 다니면 난리나는거.”



보누스는 결국 두 장의 종이를 받아들었다.



“고마워요.”



“고맙긴요. 우리가 고맙지. 당신같은 사람들,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당신같은 사람들이 많으면 좀 좋을텐데. 그럼, 이만 가 볼 게요. 환대에 감사해요 보누스 부부.”



펠릭스가 손을 흔들며 몸을 돌리자, 올리버와 실비아도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보누스 부부는 세 사람의 모습이 언덕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의 등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포장 도로를 가뿐한 걸음걸이로 한참 걸어가던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북쪽에는 나쁜 것만 있다더니. 꼭 그렇지도 않네.”



펠릭스도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소문이라는게 다 그렇죠 뭐. 무책임하게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일 뿐이에요. 조금의 사실을 담고는 있다지만, 그뿐이죠.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소문으로 퍼지는 법이 없다니까.”



“무슨 뜻이에요?”



"있어요. 그런게. 나중에 내키면 알려줄게요."



줄곧 자고있던 실비아가 눈을 깜빡이며 물어봤지만, 두 사람은 북쪽에서 겪은 조그만 추억을 떠올리며 피식 웃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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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마지막화 22.01.13 44 1 22쪽
170 170화 22.01.12 38 1 24쪽
169 169화 22.01.11 33 1 24쪽
168 168화 22.01.10 34 1 23쪽
167 167화 22.01.09 36 1 22쪽
166 166화 22.01.08 34 1 23쪽
165 165화 22.01.07 37 1 26쪽
164 164화 22.01.06 32 1 22쪽
» 163화 22.01.05 37 1 24쪽
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4 1 22쪽
160 160화 22.01.02 36 1 25쪽
159 159화 22.01.01 37 1 23쪽
158 158화 21.12.31 32 1 21쪽
157 157화 21.12.30 35 1 23쪽
156 156화 21.12.29 35 1 24쪽
155 155화 21.12.28 34 1 24쪽
154 154화 21.12.27 40 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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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152화 21.12.25 39 1 21쪽
151 151화 21.12.24 39 1 24쪽
150 150화 21.12.23 39 1 22쪽
149 149화 21.12.22 38 1 21쪽
148 148화 21.12.21 40 1 22쪽
147 147화 21.12.20 44 1 22쪽
146 146화 21.12.20 39 1 21쪽
145 145화 21.12.19 40 1 22쪽
144 144화 21.12.18 43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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