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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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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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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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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45화

DUMMY

펠릭스는 두 손을 깍지껴 책상 위에 올려둔채 가만히 있었다. 그는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으며 숨 쉬는 소리조차 그에게서 들려오지 않았다. 살아있는 사람을 용액에 담가 그대로 조각상의 형태로 굳혀놓으면, 아마 지금의 펠릭스와 비슷하게 보일듯했다.



“펠릭스.”



인형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했던 펠릭스는 실비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눈을 힐끗 움직였다.



“궁금한게 있어요. 저를 왜 데려온 거예요?”



이제 펠릭스는 입술을 꿈틀거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았나요?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몰랐어요. 금방 다녀갈 생각이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굳이 저까지 데려올 필요는 없었을 것 같은데요.”



“재료를 구하는 동안에는 계속 같이 다니기로 했잖아요.”



“그건, 제 마음가짐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유 때문에 그랬잖아요? 이번에는 당신 가문의 힘을 빌려서 재료를 구한다면서요. 그러면, 제가 옆에 있든없든 별 상관 없지 않아요?”



“벌써 질려버렸나요?”



실비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뭐, 우리집이 좀 재미없긴 하죠. 어떻게, 광대라도 불러 줘요?”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정말 아무 생각없이 저를 데려온 건 아니지 않아요?”



펠릭스는 다시 시선을 허공 어딘가에 고정시켰다.



“옛날에, 우리 엄마가 당신 아버지 사업을 꿀꺽 했어요.”



“아까도 그런 말을 했죠. 대체 무슨 이야기에요, 그게?”



“말 그대로죠. 온 대륙이 전쟁으로 한창 떠들썩할 때, 당신 아버지는 직물 사업에 손을 대서 꽤나 성공했어요. 하지만 그걸 못마땅하게 본 사람이 있으니, 그게 바로 우리 엄마죠. 엄마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신 아버지 사업체를 손에 넣고야 말았어요. 뭐, 파괴 공작과 협박도 했다는것 같고. 그 덕분에 당신 아버지 성격이 삐뚤어진것 같더군요.”



펠릭스는 말을 마치고 실비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녀는 꽤나 충격을 받은듯 입을 살짝 벌리고 있었다.



“어떻게 당신이 그런 걸 알아요? 제 뒷조사라도 했어요?”



“설마. 산호항구에서 당신 아버지 병상을 지켜주고 있는 동안 준남작한테 들었어요. 제가 좀 알려달라고 졸라댔죠.”



“왜요?”



실비아의 생각보다 한 발 앞서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왜 그런걸 궁금해해요? 왜? 우리 아빠 옛날 이야기를 알아서 뭣하려고요?”



“그냥.”



펠릭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대꾸했다.



“궁금해서. 그래서 물어봤어요. 그게 다예요. 뭐, 어쨌든 간에, 그래서 따지자면 우리 집에는 당신 아버지의 원수가 있거든요. 그러니, 온 김에 한번 만나서 인사라도 나눠보고, 궁금한게 있으면 물어라도 보라는 뜻에서 데려왔어요.”



“아빠 원수랑 넉살좋게 인사나 하라고요? 당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요. 숲에서는 그래도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 온 뒤로는 전혀 모르겠어요.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펠릭스는 멀뚱히 실비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게요. 저도 제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아무튼! 이게 다 첼시 때문이라니까. 하여튼, 첼시. 잘좀 도망치지. 괜히 엄마한테 잡혀서 말이야. 어떡할까요 실비아? 첼시를 살려 줄까요 말까요? 그놈의 첼시 때문에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이야.”



실비아는 여전히 하고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펠릭스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살려줘야죠.”



“그럼 빅터에게 약을 만들어 줘야한다?”



“그래도, 그건 좀······.”



펠릭스는 실비아가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는듯 웃었다.



“첼시 때문에 험한 꼴을 당했으면서도, 첼시를 도와줘야 한다? 빅터를 반쯤 죽여서라도?”



“죽게 놔 둘 수는 없잖아요? 당신 친구잖아요. 같이 숲에서 연금술을 공부한 친구. 죽게 놔 둘 생각이에요?”



“뭐, 괜히 죽여서 손해볼 건 없죠.”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당신, 예전에 붉은 가루 병이 돌았을 때는 전부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설쳤다면서, 첼시한테는 너무하는것 아니에요? 좀 도와줄 수도 있잖아요. 당신 엄마를 설득한다든가, 뭐 있을것 아니에요?”



펠릭스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붉은 가루 병이 돌았을 때랑 지금은 다르죠. 그 때는 저울질을 해 보니 그게 이득이 되니까 그런거고. 하지만, 지금은 딱히 첼시를 돕는다고 제게 이득이 될 구석이 별로 없어요.”



실비아는 이제 넌더리가 났다. 펠릭스의 저 무관심함은 말 몇 마디로 뜯어고칠수도 없었으며, 저 상태의 펠릭스와는 계속 대화해봤자 실비아의 마음만 상했다.



실비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펠릭스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쫓았다.



“왜요?”



“답답해서요. 펠릭스. 일단, 저는 당신이 저택 안으로 초대한 손님인거죠?”



“그렇죠.”



“저택 안을 구경하고 싶어요. 안내해 주겠어요?”



펠릭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레고리를 붙여주죠.”



“편지부치러 간지가 언젠데, 그 사람이 언제 돌아올 줄 알고요? 다른 사람 없어요?”



펠릭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달려있는 짜리몽땅한 밧줄 같은 것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펠릭스가 도로 의자에 앉을 즈음, 누군가 조심스레 문을 노크했다.



“부르셨습니까?”



그레고리의 목소리였다.



“들어와, 그레고리.”



그레고리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으로 펠릭스의 방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레고리. 실비아가 웨일 저택을 구경하고 싶다네. 여긴 너무 답답하다면서.”



“알겠습니다 도련님. 자, 그럼 가실까요?”



실비아는 그레고리와 펠릭스를 번갈아 두리번거렸다.



“실비아. 답답하다면서요?”



“알았어요. 꼭 절 쫓아내고 싶은 것처럼 보이네요. 그러니 이만 나가줄게요. 하지만, 정말 이상해요. 펠릭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펠릭스는 아리송한 웃음만 지으며 실비아에게 대답하지 않고 그레고리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 가시죠. 이번에는 천천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곧 펠릭스의 방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자 펠릭스는 아주 복잡한 얼굴이 되어 의자에서 일어나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여느 평범한, 고뇌에 가득 찬 십대 중후반 소년이 그러듯이, 펠릭스도 무언가 중얼거리며 방을 배회했다.







그레고리는 아주 뛰어난 하인이었다. 그는 저택 안의 구조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으며, 또한 어디부터 어디까지만 손님에게 알려줘야할지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유리병으로 말하자면, 산맥 너머 서쪽 사막 외진 곳의 유리 공방에서 특별히 주문을 넣어 만든 물건입니다.”



실비아는 둥글고 곡선이 진 유리병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며, 그 공방이 어디있는지 물어 보는게 좋을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저 그림은 신예 화가의 그림입니다. 주인마님께서 수도에 잠시 들른 적이 있는데, 그 때 우연히 길거리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화가의 이름은 페트로라고 하는데, 보십시오. 저 강렬한 색채와 짓뭉개진 윤곽선. 참을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캔버스 위에 있는대로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실비아가 보기에 그건 그냥 종이 위에 되는대로 물감을 엎지른 낙서처럼 보였다.



“잘 모르겠네요.”



“예술가들의 머리는 종잡을 수 없으니 말입니다.”



“빅터도 그런가요?”



그레고리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뒤늦게 실비아는 놀라 입을 가리며 죄송하다는듯 허리를 숙였다.



“아, 죄송해요. 무례를 범해서······.”



“빅터를 아십니까?”



“네? 펠릭스의 형님 아닌가요? 아까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쳤어요. 조금 이상한 사람이던데······.”



실비아는 일단은 하인일 뿐인 그레고리가 빅터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대꾸했다.



“빅터는 예민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지만, 빅터와 같은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이곳 저택에 그 혼자 뿐이니, 자연히 짜증이 날 법도 합니다.”



“저기, 이름을 그냥 부르시네요?”



“빅터는 저와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제 고용주는 주인마님시이며, 주인마님은 제게 펠릭스 도련님의 수발을 들도록 하셨으니까.”



“그래도, 빅터는 펠릭스의 형이잖아요. 그렇게 명령대로 딱딱 맞춰 할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대답하는 그레고리를 보고, 실비아는 이 사람도 사실 웨일의 숨겨진 자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꽤 냉담하시네요.”



“그렇습니까?”



“네. 그렇게 칼같이 사람을 대할 수가 있나요? 저한테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레고리는 실비아의 말에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레고리는 거침없이 걸어가며 실비아에게 저택 이곳저곳을 보여주었다. 사실, 대부분 그레고리가 보여주는 곳은 복도 한켠에 자리잡은 소소한 가구나 장식물이었다. 때때로 그는 어느 방의 방문을 열고 안을 보여주었지만, 하나같이 방들은 다 비슷해 보였다.



“방들은 다 똑같이 생겼네요.”



몇 번째인지도 모를 어느 방 안에서, 실비아는 한 번도 쓰인 흔적이 없는 침대를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주인 마님의 취향이십니다.”



“독특한 취향을 가지셨네요.”



그레고리는 이번에도 웃기만 하고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펠릭스도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을 가지고 있었죠. 벌레를 아무렇지도 않게 만져대고, 커다랗고 위험한 도마뱀을 기른다고 나서지를 않나······.”



역시 그레고리는 입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실비아는 고개를 뒤로 휙 돌려 그레고리를 쳐다보았다.



“그레고리. 당신은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일하기로 한 거예요? 당신도 운 나쁘게 거리에서 납치라도 당했나요?”



“납치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그레고리는 재빨리 미소지으며 실비아의 말을 부정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일하게 된 거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들 인형같아요. 피부 아래에 하얀 솜과 딱딱한 나무 관절이 들어 있을것 같아요. 저들에게 빨갛고 따스한 피가 흐르기는 한 걸까요?”



“물론, 피는 흐를겁니다. 따뜻한지까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어쩌다가 여기서 일하게 된 거예요? 당신이라면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잘 할수 있을 것 같은데. 제게 알려줄 수 없는 이유가 있나요?”



그레고리의 두 눈에서 웃음기가 조금 사라졌다.



“꽤 당혹스런 질문을 하시는군요. 한 명의 귀족으로서, 다른 귀족의 하인에게 물을 만한 질문은 아닌듯 합니다.”



“죄송해요.”



실비아는 금새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너무 이상해서요. 여기 온 뒤로, 계속 기분이 이상해요. 사방팔방에서 감시당하는 기분이에요. 제 마음이 제 것 같지가 않아요. 당황스러운 마음이 도무지 진정이 안 되네요. 무례를 범했다면 사과드릴게요. 죄송해요 그레고리.”



그레고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도둑으로 시작하여 첩자가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실력이 뛰어난 도둑이 하는 일은 첩자가 하는 일과 별반 다를 것도 없으니까. 정보를 모으고, 비밀리에 잠입하여, 귀중한 것을 훔쳐내는 일. 사람들의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들어, 귀로는 소문을 듣고 입으로는 딴소문을 흘리는 일.”



“도둑이었나요?”



“어릴 때는 그랬습니다. 그 때는 저도 젊고 피끓는 청춘이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곳인줄도 모르고 웨일 저택으로 숨어들었으니. 당연하게도 붙잡혔고, 주인 마님과 독대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고용하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게 된 일이었나요?”



“불필요한 이야기를 생략하자면, 그렇습니다.”



“그 때 일을 후회하세요?”



이번에도 실비아의 생각보다 말이 한발 앞서 그녀의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실비아가 방금 자기가 한 말에 스스로 놀라는 동안에, 그레고리는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여긴 무시무시한 웨일 저택이잖아요. 당신 말마따나.”



“주인 마님은 차가울 지언정, 잔인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그동안 더운 피가 흐르는 잔인한 사람을 수도 없이 봐 왔는데, 그들보다는 웨일 가문의 주인 마님이 훨씬 낫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없는데도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심장이 없고, 검은 눈동자는 뻥 뚫린 구멍처럼 텅 비었는데도요?”



“실비아. 제 앞에서 도련님과 주인 마님을 더이상 나쁘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실비아는 그레고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신 것을 보고 다시 미안한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나쁜 뜻으로 하려던 말은 아니었어요.”



그레고리는 다시 잠깐동안 침묵했다. 실비아가 눈을 살짝 위로 들어 그의 눈치를 살펴보자, 그레고리는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은 얼굴로 무언가 잠시 생각하는듯 입술을 움찔거렸다.



“주인 마님은 비겁한 사람은 아닙니다.”



실비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려 그레고리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저와 형제의 우애를 다짐했던, 더운 피가 흐르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제가 붙잡히자마자 앞다투어 저를 밀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주장하듯이. 저를 아들이라 부르던 선술집 주인은 저를 쥐새끼라 말했고, 제 둘도 없는 친구를 자처했던 소년은 저를 처음보는 사람 대하듯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 마님은 달랐습니다.”



그레고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신기루처럼 피어올랐다.



“주인마님은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게 처리했습니다. 집에 침투한건 사실이지만, 훔친 물건이 없으니 죄를 묻지는 않겠다. 경비대를 저택에 끌어들이기 싫으니 너를 고발하지 않겠다. 그리고, 네가 갖고싶으니 널 가져야 하겠다. 얼마면 널 팔겠느냐?”



“그래서, 스스로를 파셨나요?”



“물론입니다.”



그레고리는 꽤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기분좋은 일이더군요. 저는 제 몸값을 제 생각보다 비싸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주인 마님은 그 이상으로 비싼 값에 저를 사들였습니다. 제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실비아는 그레고리의 말이 이해는 갔지만, 여전히 그에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니에요.”



그레고리는 다시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며 미소를 짓기만 했다.



“그럼, 충분히 구경을 하셨을테니 그만 장소를 옮기겠습니다.”



그리고 그레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듯 가볍게 몸을 돌려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가 방문을 열고 눈짓을 보내자, 실비아는 어쩔 수 없다는듯 걸음을 옮겨 방에서 나갔다.







펠릭스는 복도 어딘가를 저벅저벅 걸어가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열린 문 너머로, 책상에 앉아 한창 무언가를 써내려가던 빅토리아 웨일이 보였다.



“펠릭스. 노크 정도는 하는게 어떻겠니.”



빅토리아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도 않고, 손을 멈추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다 알면서 뭘.”



펠릭스도 딱히 미안한 기색 없이 문을 닫고 방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왜 왔니? 사업 이야기를 하려고?”



“그냥. 아들이 엄마 보러 오는데, 달리 무슨 이유가 필요해?”



그러자 빅토리아는 손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어 펠릭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라는게 있다면, 빙빙 돌리지 말고 제대로 말해라.”



“아이작이 왔었지?”



빅토리아는 흥미를 잃은 얼굴로 다시 종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왔었냐고 묻는다면, 그래. 왔었다.”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지?”



“그래. 아이작은 굉장히 뛰어난 연금술사니까. 하지만, 끝끝내 우리들의 자문 역을 맡아주려 하지는 않았다.”



“약재 사업. 진심으로 뛰어들 생각이야?”



빅토리아는 다시 시선을 들어올려 아들의 눈을 마주보았다. 두 개의 텅 빈 눈동자가, 마찬가지로 검고 공허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래.”



“왜?”



“갖고싶으니까.”



빅토리아는 다시 종이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첼시를 자문으로 쓸 수도 있잖아.”



“걔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생긴게?”



빅토리아는 종이를 팔랑 넘기고 대답했다.



“생긴 것도 그렇고. 성격도 별로 내 취향이 아니야. 걔는 별로 갖고싶지 않아.”



“그럼 나는?”



빅토리아 웨일은 잠시 손을 멈추었다.



“나때문에 일부러 잡아둔거지? 첼시. 원래라면 아이작한테 몸값을 받을 생각이었잖아. 그런데, 아이작이 끝까지 거절한거지?”



“백살 넘게 살아온 사람은 사고방식이 다르더구나. 제자가 죽든말든 눈 하나 꿈쩍 않던데.”



빅토리아는 다시 펠릭스와 눈을 맞추었다.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니?”



“전혀.”



“그럼, 그 아이는 살려둘 이유가 없겠네.”



“죽이려고?”



“계속 이대로 놔두는것도 괜찮겠지.”



“나도 아무 신경 안 써. 첼시가 죽든 말든 간에.”



“네 옆에 딸린 그 아이는 신경을 쓸텐데.”



펠릭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치사하게. 그렇게 나오기야?”



“뭐 어떻니? 펠릭스. 너한테도 별로 나쁠것 없는 거래잖니. 내가 원하는 약을 만들어 오면 그 아이는 석방해 줄게. 그러면 로즈베리 가문의 둘째 딸도 쓸데없는 마음고생은 안 하겠지.”



“진심으로 형을 치워버릴 생각이야?”



“그래.”



“왜?”



빅토리아는 다시 눈을 들었다.



“왜?”



빅토리아가 되물었다.



“지금까지 내버려 뒀잖아. 왜 이제와서? 설마, 약혼자라도 어디서 데려온거야? 멋대로 웨일의 혈통을 이어버렸나?”



“아니. 더이상 보기 싫어졌어.”



빅토리아의 대답을 들은 펠릭스는 허탈한듯 웃었다.



“그게 다야?”



“그래. 달리 무슨 이유가 필요하니?”



“내 참. 그래도 당신 아들인데. 정말 그게 전부라고?”



“빅터는 아비를 너무 많이 닮았어.”



빅토리아는 새로 종이를 한 장 팔랑 꺼내들었다.



“나를 닮은 구석이 없는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니.”



“아들인데도?”



“아들일 뿐이지.”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않았지?”



빅토리아는 뜬금없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 펠릭스. 무슨 말을 하는거니 대체?”



“하긴. 미안.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



“그래서, 할 말은 그게 전부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온거야?”



“첼시말이야. 당분간은 내버려 둬. 나도 약을 어떻게할지 좀 생각 해 볼거고, 그동안 시간나면 형도 설득해 볼 테니까.”



다시한번 빅토리아 웨일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바람에 손에 들린 펜이 삐끗하여 그녀는 쓰던 종이를 구겨버렸다.



“설득? 네가? 펠릭스. 아까부터 우스운 말만 하는구나. 언제부터 우리 웨일이 누군가를 설득했다고 그러니?”



“뭐, 형도 일단은 웨일이잖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 줘야지. 이름뿐인 작위에 허울뿐인 지위지만 말이야.”



“그래. 그것조차도 네 아비를 똑 닮았구나, 빅터는.”



펠릭스의 눈초리가 살짝 가늘어졌다.



“그래서 치워버리려고? 당신같은 사람이 또 들어올까봐?”



“그래. 거기까지 눈치 챘으면, 이제 그만 가거라 펠릭스. 난 네가 마음에 드니까, 그 첼시라는 아이는 네 부탁대로 당분간은 살려두마.”



“당분간이라. 언제까지?”



“내 마음이 내킬때까지.”



“고마워. 일단은 그 정도면 충분하니까.”



펠릭스는 빅토리아에게 등을 돌리고 문으로 걸어갔다.



“펠릭스.”



어머니의 목소리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 집으로 돌아올거니?”



“아직은 아냐. 나중에, 필요하면 그 때.”



“기다리고 있으마.”



“별로. 너무 기다리진 마. 돌아오더라도, 가문의 뒤를 이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 재밌을텐데?”



“나한테는 훨씬 재밌는게 있으니까. 아직 대스승님에게 죽음을 팔지도 못했고, 내 최고의 약을 만들지도 못했어. 적어도 그 전까진 안 돌아올거야. 그러니까 너무 기다리지는 마.”



“곧 돌아오겠구나.”



빅토리아는 처음으로 기쁨의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어쩌면.”



그리고 펠릭스도 순수한 기대감이 어린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대꾸하며 빅토리아 웨일의 집무실에서 나가버렸다.







빅토리아 웨일의 집무실을 빠져나온 펠릭스는 저택의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지붕 바로 아래의 층까지 올라갔다. 지붕과 맞닿아 비가 내리면 천장에서 빗소리가 들리는 곳. 다른 사람들은 흔히 다락이라고 부르는 그곳에, 빅터 웨일의 방이 있었다.



펠릭스는 노크도 하지 않고 빅터의 방문을 활짝 열었다. 그바람에 빅터의 노성이 난데없이 울려퍼졌다.



“누구야!”



“형. 나. 펠릭스.”



빅터는 한참 그림을 그리던 와중이었다. 흰 캔버스에는 이해하기 힘든 다양한 색채들이 엉망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며, 그 색깔의 뭉치 위에 빅터는 또다른 무언가를 덧칠하려는듯, 막 손에 든 팔레트 위에다가 붓질을 하여 물감을 묻히고 있었다.



“펠릭스! 이 버르장머리 없는놈. 노크를 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냐?”



“웨일이 되어서, 누가 방문 밖에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서 어쩌려고? 그래서 웨일의 이름을 이을 수나 있겠어?”



펠릭스는 넉살좋게 웃으며 빅터의 화랑을 둘러보았다. 그림이 되다 만 캔버스와, 한 때 그림이었던 덧칠된 무언가를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천천히 돌아보았다.



“왜 왔어?”



빅터는 짜증스레 팔레트와 붓을 바닥에 던져버리더니, 그것으로도 화가 풀리지 않는듯 캔버스의 그림을 두 손으로 붙잡아 북 찢어버렸다.



“이야기나 좀 하려고.”



“무슨 이야기? 너하고는 할 말 없어.”



“아니. 하는게 좋을 걸. 엄마가 나한테 형을 죽일 약을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



캔버스의 종이를 찢고 또 찢던 빅터는, 그 말을 듣고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어 펠릭스를 향해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 좀 하지. 적어도, 형이 뭘 원하는지는 들어줄게.”



펠릭스는 여유롭게 웃었지만, 빅터 웨일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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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에필로그 22.01.13 56 1 4쪽
171 마지막화 22.01.13 44 1 22쪽
170 170화 22.01.12 38 1 24쪽
169 169화 22.01.11 33 1 24쪽
168 168화 22.01.10 34 1 23쪽
167 167화 22.01.09 37 1 22쪽
166 166화 22.01.08 34 1 23쪽
165 165화 22.01.07 37 1 26쪽
164 164화 22.01.06 32 1 22쪽
163 163화 22.01.05 37 1 24쪽
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4 1 22쪽
160 160화 22.01.02 36 1 25쪽
159 159화 22.01.01 37 1 23쪽
158 158화 21.12.31 32 1 21쪽
157 157화 21.12.30 35 1 23쪽
156 156화 21.12.29 35 1 24쪽
155 155화 21.12.28 34 1 24쪽
154 154화 21.12.27 40 1 22쪽
153 153화 21.12.26 43 1 24쪽
152 152화 21.12.25 39 1 21쪽
151 151화 21.12.24 39 1 24쪽
150 150화 21.12.23 39 1 22쪽
149 149화 21.12.22 38 1 21쪽
148 148화 21.12.21 40 1 22쪽
147 147화 21.12.20 44 1 22쪽
146 146화 21.12.20 39 1 21쪽
» 145화 21.12.19 41 1 22쪽
144 144화 21.12.18 43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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