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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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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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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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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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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54화

DUMMY

펠릭스의 일행들은 있는힘껏 내달려서 공터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들의 등 뒤에 바짝 따라붙던 어둠의 그림자는 나무가 듬성듬성한 공터까지 따라나오지는 못했다. 실비아는 숨을 고르며 불안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둠 속에 도사린 괴물들은 더이상 그들을 쫓지 않았다.



“다들 무사해?”



올리버는 숨을 고르며 횃불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실비아의 안색을 살폈다.



“전 괜찮아요.”



“펠릭스. 너는?”



“저야 당연히 멀쩡하죠.”



올리버는 펠릭스의 얼굴 가까이 횃불을 들이대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뭐, 그렇네.”



“그나저나, 아까 대체 뭐였어요? 나무가 살아 움직였다고요. 저 혼자 본 건 아니죠?”



실비아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듯 자기 뺨을 살짝 꼬집었다.



“나무가 살아움직여? 내가 본 것 보단 훨씬 낫네. 난 뼈만 남은 병사들이 땅 속에서 올라오던데.”



“환각 약을 근처에 뿌려둔 거예요. 역시, 제이콥이 여기있는게 틀림없어요.”



펠릭스는 팔짱을 끼고 제이콥의 오두막 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뭐, 그래서 펠릭스. 거기 계속 서 있을 거야?”



어깨너머로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서야 펠릭스는 오두막에 다가갔다.







오두막 창문의 유리는 더러운 얼룩투성이에 두꺼운 커튼으로 가려져 안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사는 곳처럼 보이지는 않는걸요.”



“쉿!”



펠릭스는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댔다.



“왜그래, 펠릭스? 그냥 노크하고 들어가면 되는거 아냐?”



“올리버, 쉿!”



펠릭스는 도둑처럼 살금살금 오두막을 한바퀴 둘러본 뒤에야 현관문에 다가섰다.



“역시, 틀림없어. 잘못 찾아왔을리가 없어요.”



“그래. 그러면 빨리······.”



“쾅쾅쾅!”



펠릭스는 이번에는 대뜸 주먹을 쥐고 오두막의 남루한 문을 있는 힘껏 쿵쿵 두들겼다.



“제이콥! 제이콥! 당신의 제자가 찾아왔어요!”



“펠릭스! 뭐하는 거예요? 무례하게!”



실비아가 뜯어말리는데도 펠릭스는 계속 문을 쾅쾅 두들겼다.



“제이콥! 나와!”



“펠릭스! 진정 좀 해!”



올리버까지 나서서 펠릭스를 문에서 떼어놓았다.



“놔요, 둘 다! 저 인간은 이딴 대접 받을만 한 놈이라······.”



달칵 소리가 나며 문 손잡이가 돌아가자 세 사람은 일제히 하던것을 멈추고 시선을 고정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며 유령처럼 스산한 한기가 오두막 안에서 희끄무레한 빛줄기에 섞여 흘러나왔다.



“제이콥.”



인영이 문틈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자, 펠릭스는 살짝 뒤틀린 미소를 지으며 실비아와 올리버를 툭 쳐내고 앞으로 나왔다.



“누구냐?”



목소리를 듣고 실비아는 깜짝 놀랐다. 사포질을 하지 않은 거친 나무 판자를, 녹슬고 뒤틀린 갈퀴로 되는대로 긁어내는 듯한 신경거슬리는소리.



“제이콥. 당신의 제자가 찾아왔어요.”



문 뒤에 가려졌던 인영은 현관으로 걸어나와 그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펑퍼짐한 로브로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말라비틀어진 몸. 모자를 눌러써도 도저히 숨길 수 없는 광기어린 눈동자. 제멋대로 자라난 거친 수풀처럼 눈동자를 뒤덮은 뻣뻣한 머리칼.



“난 제자따위 없다."



“펠릭스가 당신을 찾아왔다고요.”



“펠릭스? 난 그런 제자 둔 적 없다.”



“애처럼 굴지 말아요 제이콥. 당신이 날 가르친건······.”



“난 그런 제자 둔 적 없다! 날 무시할땐 언제고, 이제와서 제자 행세냐?”



“하, 거 참. 성질머리 하고는.”



펠릭스는 짜증스레 뒤통수를 북북 긁으며 제이콥을 노려보았다.



“네. 하렵니다. 왜요?”



“돌아가라. 난 너같은 제자 둔 적 없으니까.”



“저길 뚫고 나가라고? 사람들을 그렇게 죽여놓고도 만족 못 해요? 이젠 나까지 죽일 셈입니까?”



“무슨 소릴 하는건지 모르겠다.”



“모른다니, 가르쳐 드리죠. 제이콥. 붉은 가루 병. 당신이 만든거 맞죠?”



제이콥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가라.”



“제자가 찾아왔는데, 너무 냉대하는거 아닙니까?”



“돌아가.”



“숲에서는 왜 도망친겁니까?”



“나가.”



“나때문에 만든거죠? 그 병.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래!”



제이콥이 로브의 모자를 휙 벗어넘기자 벼락맞은 미치광이처럼 뻣뻣하게 산발이 된 그의 머리칼이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만들었다. 그래, 내가 그 병을 만들었다 펠릭스! 어떻더냐? 혼자 뭐든 할 수 있다는듯 기고만장하던 네가, 아주 보기좋게 뭉개지더구나!”



“역시. 당신이었군.”



펠릭스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만들었다. 그래서? 어쩔 셈이냐? 내게 죗값을 받아내려고? 날 죽이기라도 할 셈이냐?”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난 죗값에는 관심 없어요, 스승님. 다만, 그 때 못다한 일을 완수하려고 당신을 찾은거죠.”



“못다한 일이라고? 살아있는 사람을 네멋대로 죽이더니, 이제 죽은 사람들을 네 멋대로 살리기라도 할 셈이냐?”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는 못하죠.”



펠릭스는 아쉽다는듯 입맛을 잠시 다셨다.



“대신, 약이라면 만들 수 있어요. 그 때 못 만든 약. 당신한테 만들어 보여주려고.”



“이제와서? 이제와서 약을 만들어 어디 쓰려고?”



“그거야. 당신의 그 기고만장한 콧대를 눌러주려고.”



제이콥도 펠릭스도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좋았죠? 천재중의 천재, 백 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하는 인재를 이겨먹어서. 하지만,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에요 스승님.”



펠릭스는 제이콥에게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들이밀고 비열하게 웃었다.



“난 당신의 콧대를 짓눌러 주려고 여기까지 찾아왔어요. 당신이 만들어낸 그 병. 결국 내가 이겨냈다고. 알려주려고.”



“미쳤군. 미쳤군 펠릭스. 단단히 미쳐버렸어. 네놈은 역시 악마야. 악마의 새끼였어. 사람도 아니야. 네가 약 만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네 손에 죽어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나?”



“내가 왜 미안해 합니까? 그 사람들은 당신이 만든 병 때문에 죽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손놓고 뒤에서 구경만하던 다른 연금술사들이 나보다 더 미안해 해야죠. 난 적어도 그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후회도 없고요.”



“그래, 그 얼굴. 그 기고만장한 얼굴.”



제이콥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신이라도 된 마냥 기고만장해서 사람을 우습게 깔보는 그 얼굴. 그 목소리. 펠릭스. 내게 물었느냐? 내가 그 병을 만들었냐고? 그래, 대답해 주마. 나다! 바로 내가, 그 붉은 가루 병을 만들었다!”



제이콥은 앙상한 손으로 걸치고 있던 로브를 덥썩 붙잡더니, 그대로 휙 벗어던져 어두운 폭풍 속으로 집어던져버렸다. 제이콥의 육신이 드러나자 실비아는 헉 하며 숨을 참았고, 올리버는 잽싸게 실비아를 뒤로 끌어안았다.



“봐라! 펠릭스!”



제이콥의 몸뚱아리는 곳곳에 붉은 딱지가 앉았으며, 딱지를 둘러싼 불길한 고리 모양의 반점으로 얼룩덜룩했다.



“내가 그 병을 만들었다. 약을 만들고 싶다고? 내 콧대를 눌러주고 싶다 했느냐? 좋다. 해 봐라. 얼마든지 해 봐라! 하지만, 서두르는게 좋을거다. 왜냐하면······쿨럭, 쿨럭!”



제이콥은 기침하기 시작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는 계속해서 축축한 기침을 뱉어댔다. 이따금 손의 틈새로 붉은 피고름의 줄기가 흘러내렸고, 그의 눈알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듯 위태롭게 펄떡였다.



“그래······. 펠릭스. 서두르는게 좋을거다. 내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자기가 만든 병으로 죽게되다니. 꼴이 우습게 됐군요.”



“내가······그 병을 만들었을 때, 달리 어디에다 시험했겠느냐?”



“벌써 오래전의 일입니다. 그 병을 몸에 품고, 아직까지 살아있었다고요?”



“아이작이 날 도와줬지. 그래. 하지만······이제 너무 늦었다. 약으로 병세를 억누르는것도 무리야.”



제이콥은 땅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색색 쉬었다.



“마음대로 해라, 펠릭스. 어디,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해 봐라.”



그러면서 제이콥은 광기어린 눈으로 펠릭스를 올려다보았다.



“또 한번 더 스승을 뛰어넘고 싶으냐? 어디한번 해 봐라. 내 일생의 역작을 꺾어 봐라.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펠릭스.”



“좋습니다.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제이콥은 오두막의 문을 열어둔채 안으로 비척비척 걸어들어갔다.



“우리도 들어가죠.”



“괜찮아요?”



펠릭스는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제이콥은 내가 잠든 사이에 칼을 들고 침대로 찾아올 만한 사람은 아니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 병에 걸렸잖아요. 위험한 역병이라고······.”



펠릭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이에요. 지금은 전염성이 거의 없어요.”



펠릭스는 그러더니 문가에 어중간하게 서서 피식 웃었다.



“그게 악랄한거죠. 다들 처음에는 괜찮은줄 알았어요. 피부병이나, 뭐 그런건줄 알았죠. 딱지가 앉고 열이 오르는 피부병. 그런데, 저기서 병이 더 진행되면 그 때 부터 지옥도가 펼쳐져요. 방문을 열자마자 불그레한 안개가 훅 뿜어져나오면, 그땐 이미 늦었죠. 허파로 가루를 들이마셔버렸으니까. 하지만, 그 때는 다들 아무것도 몰랐어요.”



펠릭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연금술이라든가, 약학이라든가, 의학이라든가. 근처 마을 사람들이랑 평소에 그런 이야기를 좀 나눴더라면, 상황이 그렇게까지 나빠지진 않았겠죠.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랐어요. 다들 아픈 이웃을 도와주겠다고 나섰다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병에 걸려 죽어갔죠.”



“인과응보로군. 연금술사들이 자초한 일이야.”



올리버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죠 뭐. 지식을 꽁꽁 싸매놓고 우리들끼리만 나눴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다 쓸데없는 짓이었는데. 까짓 지식따위, 백날 알려줘봤자 사람들은 따라하지도 못했을텐데. 국왕 덕분에 그 끔찍한 사건은 비밀리에 부쳐졌지만, 대신 왕은 우리 연금술사들에 대한 지원도 철회해버렸죠. 그 덕에, 이제 사람들은 연금술사를 의심하고, 대신 어떻게든 연금술의 비법을 훔쳐낸 약사와 약팔이들은 좋다고 제멋대로 떠들어대는 세상이 왔어요.”



“실비아 반 정도만 네가 착했어도, 그 꼴은 안 봤겠어.”



“그럴지도, 올리버.”



펠릭스는 씁쓰레한 옛날 이야기를 멈추고 실비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전염병 환자가 사는 오두막에는 들어가기 싫나요?”



“좀······아무래도······.”



“최고의 연금술사가 괜찮다고 보장했는데도?”



“그게, 그렇잖아요?”



펠릭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올리버. 뭐, 간이 텐트라도 하나 세워줘요. 실비아가 밤새 꽁꽁 얼지 않도록.”



“쉽지 않을텐데. 재료가 없단 말야.”



“제이콥네 집에서 좀 빌려가죠 뭐.”



“빌리기는.”



올리버는 헛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갚을 생각도 없으면서.”



“스승이 제자를 위해, 까짓거 좀 베풀 수도 있는거 아니겠어요?”



“하여튼, 펠릭스. 말은 잘 해.”



펠릭스는 싱긋 웃으며 제이콥의 오두막에 들어갔다.







제이콥의 오두막 안은 의외로 훈훈했다. 조그만 벽난로의 반쯤 타다만 장작은 열어둔 문을 통해 들어온 바람에 불이 붙어 활활 타고있었다.



“제이콥!”



“시끄럽다 펠릭스.”



제이콥은 새하얀 로브로 온 몸을 칭칭 동여매다시피 한 채 방문을 열고나왔다.



“오, 새 옷으로 갈아 입었네요? 그러게, 괜히 잘난척 한다고 옷을 휙 집어 던지더니.”



“병을 더이상 퍼뜨릴 수는 없어.”



“확실히. 그 하얀 천에는 시뻘건 뭐가 묻으면 바로 티가 나겠죠.”



펠릭스는 제이콥의 부엌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제이콥. 확실히 알겠네요. 역시, 당신은 옛날과 똑같습니다.”



“무슨 뜻이냐.”



“올리버랑 실비아가 걱정돼서 그렇죠?”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제이콥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뭐, 그렇다고 치죠. 그래서 말인데, 집에 두꺼운 천 같은거 없습니까? 밖에 조그만 텐트라도 하나 만들 생각인데.”



제이콥은 어느 방으로 들어가더니 털이 북슬북슬한 모포와 큼지막한 천, 그리고 맨질맨질하고 길쭉한 돌맹이를 들고 돌아왔다.



“돌은 왜요?”



“불에 데워 끌어안고 자면 따뜻하다.”



“하, 참. 생각도 못 했네. 고마워요.”



펠릭스는 주섬주섬 짐을 넘겨받아들고 제이콥의 오두막 현관으로 걸어갔다.







올리버는 펠릭스가 넘겨준 물건들로 순식간에 간이 텐트를 세웠다.



“어때?”



텐트 안으로 들어간 실비아는 잠시 꿈지럭거리다가 웃으며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좋아요. 따뜻하고 아늑하네요.”



“불빛은 필요없어? 기름 등불이라도 빌려올까?”



“그럴것까지는 없어요. 민폐기도 하고······.”



실비아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았다.



“왜?”



“올리버. 당신은 펠릭스의 스승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별로. 내가 펠릭스랑 같이 다니기 시작한 건, 그 병이 종식된 뒤였으니까. 그 전까지 나랑 펠릭스는 오며가며 대충 얼굴만 아는 사이였을 뿐이야.”



“펠릭스는 자기 스승님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던가요?”



“펠릭스는 스승 이야기는 안 해. 대스승 이야기라면 몰라도.”



실비아는 가뿐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스승님한테 저도 들었어요. 펠릭스의 스승님이 무시무시한 병을 만들었다면서.”



“그런데?”



“그렇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전 모포에 대해 잘은 몰라도, 이건 제가 만져본 모포중에 제일 보드랍고 따뜻한걸요. 이런걸 선뜻 내 줄 정도면······.”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는게 아니야, 실비아.”



실비아는 멈칫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 사람은, 그 끔찍한 역병을 퍼뜨린 장본인이야.”



“그렇기는······하죠. 그렇지만······.”



“실비아.”



올리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쭈그려앉아 실비아와 눈높이를 맞췄다.



“네가 마음이 착한건 알고 있어. 남들을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서는건 본받을 만한 자세야. 하지만, 저 사람은 잘못을 저질렀어. 마땅히 졌어야 할 책임을 지지도 않았고.”



실비아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도로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상해요. 나쁜사람 같지는 않은데,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 설마 펠릭스 때문은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겠지.”



올리버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전문가는 아니지만, 실비아. 내 생각에 말이야. 사람이라는 건, 캔버스에 그린 그림보다는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에 가깝다고 생각해.”



“실제로도 그렇고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비유야 비유. 그러니까······.”



올리버는 손을 내저으며 힘겹게 설명을 이어갔다.



“한 단면만 보고서는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 사람은 종잇장 위의 그림처럼 한 단면만 가진게 아니니까. 펠릭스의 스승에게도 아마 어두운 면이 원래부터 있었을거야. 남들은 미처 보지 못했던 어떤 단면이, 펠릭스가 불빛을 비추자 그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던 실비아는 피식 웃었다.



“올리버. 당신은 철학자는 못 되겠어요.”



“동감이야. 아무튼,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 한 단면만 보고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어.”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올리버.”



실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체 어떤 무시무시한 모습을 품고 있었길래. 그렇게 끔찍한 병을······."



올리버는 텐트 밖으로 내민 실비아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었다.



"너무 마음쓰지는 마. 이제 다 옛날 일일 뿐이니까."







펠릭스와 제이콥은 테이블에 마주앉아 서로 딴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왜 찾아온거냐, 펠릭스?”



펠릭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제자가 스승을 찾아오는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넌 내 제자가 아니다.”



“숲에서 날 파문시킨 다음에 도망치지 그랬어요? 그랬으면 나도 고개를 끄덕여 줬을텐데.”



제이콥은 짜증스레 펠릭스를 힐끗 노려보았다.



“제대로 말 해라. 날 왜 찾아온거냐?”



“붉은 가루 병을 누가 만들었는지 찾다보니, 여기까지 찾아오게 됐습니다.”



“오래 전의 일이야. 네 손으로 끝낸 일 아니냐. 그걸, 왜 이제와서 갑자기 파헤치고 나선거냐?”



펠릭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약에 실패해서요.”



“실패해? 약에? 네가?”



제이콥은 믿기지 않는다는듯 몇 번이나 되물었다.



“네. 실패했습니다.”



“네가 실패하다니. 펠릭스. 봐라, 네가 아무리 기고만장해도, 너도 한낱 인간일 뿐이야.”



“그래도 당신보단 훨씬 낫죠. 변변찮은 재주도 없는 주제에, 제자 앞에서 잘난척 하려다가 망신살이나 사고.”



제이콥은 얼굴을 크게 일그러뜨렸다.



“젊은 치기에 저지른 실수였다.”



“실수로 마을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더니, 그 뒷처리를 제자에게 떠넘기고 도망칩니까?”



제이콥은 얼굴을 아래로 푹 수그렸다.



“날 질책하러 온 것이냐.”



“아까 말했죠. 내가 실패했다고.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비록 재료가 부족했다 한들, 내가 연금술에 실패하다니.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넋두리나 늘어놓으려고 날 찾아왔느냐?”



“아니오.”



펠릭스는 두 손을 깍지껴서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았다.



“실패한 뒤에, 대체 어디부터 잘못된건지 되짚어 봤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고 또 오르니, 이 붉은 가루 병이 떠오르더군요. 내 인생 최초의 실패이자 최악의 실패.”



“그래서?”



“그래서. 그 때의 실패를 바로잡게요. 그 끔찍한 역병을 내가 만든 약으로 치료하고 나면, 더이상 나는 아무데서도 실패하지 않겠죠.”



제이콥은 음산한 목소리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린아이다운 발상이다.”



“당신만 할까요? 제이콥. 하나 물어봅시다. 그 때, 내가 공들여 찾아온 늑대의 눈물. 어디 쓸 생각 이었습니까?”



“어디에 쓰든, 무슨 상관이냐.”



“보나마나, 그 마녀의 비약을 만들려고 그런거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재료들을 모아 만든 마녀의 신비로운 약. 전설로만 전해져오는, 이제 기억하는 사람도 몇 없는 그 약. 그거야말로 속편한 동화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제이콥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약을 만들어 붉은 가루 병을 치료하겠다 했지.”



“네.”



“서두르는게 좋을거다, 펠릭스.”



“왜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는것 아닙니까?”



“모른다.”



“모른다. 뭐? 몰라요?”



펠릭스는 그제서야 제이콥에게 시선을 돌렸다.



“당신이 만든 병 아닙니까. 그런데, 당신이 모른다고요? 그게 말이나 돼요?”



“아니, 모른다. 그건 내가 만들었지만, 내가 만든게 아니야.”



“뜬구름잡는 소리하지 마요 제이콥. 당신이 만든게 아니면 누가 만든건데요?”



제이콥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귓가에서 악마가 속삭였다. 어떤 약을 만들어야할지 가르쳐줬지. 나는 악마가 시키는대로 재료를 넣고 솥을 끓였다. 그 뿐이야. 그 병에 대해 알고 있는건 그 악마지, 내가 아니다.”



펠릭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끝까지 경지에 이르지 못했군요.”



“당연한 일이지.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눈 먼 사람이, 어떻게 경지에 오를 수 있겠느냐. 그건 한 순간의 광기일 뿐이야.”



“경지에 오른 나조차도, 심지어는 대스승님조차도 어찌 못한 병이었지만요. 뭐,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도 결국 경지에 올랐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래서, 펠릭스. 할 수 있겠느냐?”



제이콥은 총기를 잃어 흐리멍텅해진 눈으로 펠릭스의 얼굴을 보았다. 이제, 거기에 젊은 연금술사 제이콥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합니다. 해요.”



“그래. 그럼, 서둘러라.”



“재촉안해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나저나, 하나만 부탁하죠. 밖이 추워서 그런데, 여기서 자고가도 돼죠?”



“마음대로 해라. 역병 환자가 사는 집에서 잠들 용기가 있다면.”



“아직은 전염성도 없으면서.”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도로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하나만 더 물어보죠. 당신, 정말 자기 몸에 직접 실험한 겁니까?”



“반 정도는 사고였다. 솥을 부글부글 끓이다가, 커다란 기포가 터지면서 시뻘건 약 덩어리가 내 몸뚱아리에 튀었어.”



“그렇군요.”



펠릭스는 씩 웃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방금 한 말에, 거짓은 없죠?”



“이제와서 너랑 기싸움을 한들, 무슨 소용이냐.”



펠릭스는 제이콥의 공허한 얼굴을 보고 확신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기다려요, 제이콥. 내가 당신의 마지막 역작도 찍어눌러 줄 테니까.”



“할 수 있다면, 어디 해 봐라 펠릭스.”



펠릭스는 더이상 대꾸하지 않고 제이콥의 오두막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문 너머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긴 창고다.”



“미리 좀 말하지. 어쨌든,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겠습니다.”



“거긴 바닥이 차다. 차라리 벽난로 옆에서 자라.”



“불똥이 얼굴에 튀잖아요. 그리고 전 추위는 안 타는 편이라.”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 펠릭스.”



창고 문이 탁 닫히자 제이콥도 서서히 부엌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실수로라도 동여맨 로브의 매듭이 풀리지 않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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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에필로그 22.01.13 56 1 4쪽
171 마지막화 22.01.13 44 1 22쪽
170 170화 22.01.12 38 1 24쪽
169 169화 22.01.11 33 1 24쪽
168 168화 22.01.10 34 1 23쪽
167 167화 22.01.09 36 1 22쪽
166 166화 22.01.08 34 1 23쪽
165 165화 22.01.07 36 1 26쪽
164 164화 22.01.06 31 1 22쪽
163 163화 22.01.05 36 1 24쪽
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3 1 22쪽
160 160화 22.01.02 36 1 25쪽
159 159화 22.01.01 37 1 23쪽
158 158화 21.12.31 32 1 21쪽
157 157화 21.12.30 34 1 23쪽
156 156화 21.12.29 35 1 24쪽
155 155화 21.12.28 34 1 24쪽
» 154화 21.12.27 40 1 22쪽
153 153화 21.12.26 42 1 24쪽
152 152화 21.12.25 39 1 21쪽
151 151화 21.12.24 39 1 24쪽
150 150화 21.12.23 38 1 22쪽
149 149화 21.12.22 37 1 21쪽
148 148화 21.12.21 40 1 22쪽
147 147화 21.12.20 44 1 22쪽
146 146화 21.12.20 39 1 21쪽
145 145화 21.12.19 40 1 22쪽
144 144화 21.12.18 43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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