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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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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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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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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68화

DUMMY

화이트클리프 산맥 아래 자리잡은 동명의 마을 여관 창가에 두 사람이 있었다. 그 두 사람은 점점 거세지는 눈보라 속을 불안한 눈으로 꿰뚫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누굴 기다리나.”



실바누스가 먼저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침착한척 했지만, 관찰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걸 눈치챘을 것이다.



“네.”



메를린은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녀는 걱정어린 눈으로 눈보라를, 그리고 눈보라가 시작되는 저 드높은 산맥을 바라보았다.



“제가 기다리는 사람은 이것보다 더 심한 눈보라도 뚫고 왔어요.”



메를린이 스스로를 설득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분명 올 거예요. 분명······.”







아침이 되자마자 실바누스와 메를린은 여전히 눈발이 날리는 여관 밖으로 뛰쳐나갔다.



실바누스는 그와 계약한 인부들을 일일이 찾아가 한데 불러모았다. 잠도 덜 깬 표정의 인부들에게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한 것에 대한 추가 보수를 지급하자, 그들은 금새 열의에 찬 얼굴이 되었다.



메를린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뒤에 휘파람을 힘껏 불었다. 일 분도 되지 않아 산 위에서 하얗고 커다란 새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다가왔다. 메를린이 새들에게 작게 뭐라고 속삭이자, 한 마리를 제외한 새들이 일제히 산을 향해 날아갔다. 남은 한 마리는 어제처럼 메를린의 팔을 붙잡고 그녀를 산으로 옮겨주었다.



밤새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그들이 걸어온 발자국은 물론 실바누스가 인부들을 데리고 파헤친 땅도 폭신한 새 눈이 쌓여 있었다. 그 눈밭 위를 날아다니며 메를린은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거렸다.



한편, 저 아래에서는 수레에 장비를 잔뜩 싣고 새로 길잡이까지 고용한채 인부들을 거느리는 실바누스가 보였다. 그 인부중 몇몇은 새를 타고 하늘을 나는 마녀를 보더니, 잠시 헛것을 봤나 하며 눈을 부볐다.







타닥타닥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가 멈춘지도 벌써 오래, 훈훈한 기운은 점차 싸늘하게 식어갔다.



곧 어디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비슷한 소리가 두어번쯤 나더니, 이번에는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실비아가 몸을 움츠리며 모포를 단단하게 여미는 동안, 잠에서 깬 올리버가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올리버는 배낭에서 새 모닥불 키트를 꺼내 불을 피웠다. 연기가 동굴 밖으로 잘 빠져나가는걸 확인한 뒤, 올리버는 조그만 냄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는 밖에서 밟힌적 없는 새 눈을 한가득 퍼담아 냄비에 담고 불 위에 올렸다. 눈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는데, 그 많은 눈을 퍼담아도 물은 조금밖에 찰랑거리지 않았다.







올리버가 뜨거운 물에 말린 사랑초의 꽃잎을 살살 털어넣자, 실비아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실비아는 모포로 몸을 돌돌 만 채 잠깐동안 꿈틀거리다가, 결국 크게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깼다.



올리버는 실비아에게 말없이 차를 한잔 내밀었다. 실비아는 눈을 크게 뜨고 조용히 차를 쳐다보았다. 곧, 그녀는 올리버에게 고맙다는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데서 차라니.”



펠릭스도 어느새 잠에서 깼다. 그는 반쯤 잠이 덜 깬 눈으로 동굴 안을 둘러보다가 큰 소리를 내며 힘껏 기지개를 켰다.



“너도 한 잔 할래?”



“난 그 차 별로에요.”



펠릭스는 모포를 금새 정리하고, 동굴 밖으로 나가더니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아하. 눈이 많이도 내렸네.”



그가 지난밤 만들어둔 나무 울타리는,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굳건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물론, 나무 자체는 진작에 물기가 쪽 빠져 바싹 마른 채였다.



“오늘 하루도 힘들겠어.”



“당연하죠.”



펠릭스는 울타리를 발로 뻥 차버렸다. 그러자 바싹 마른 덩굴이 우수수 부서져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그 위에 쌓였던 흰 눈의 장벽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뭐. 이건 나중에 치우기로 하고. 으으으! 일단 아침이나 먹고 생각해야지.”



다시한번 힘껏 온 몸을 비틀며 상쾌하게 기지개를 켠 뒤에 펠릭스는 동굴 안으로 돌아갔다.







동굴 안에서 맞이하는 아침식사는 생각보단 훨씬 좋았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지도 않았고, 모닥불은 따뜻했다. 올리버가 끓인 차도 좋았다. 분위기만 받쳐준다면, 딱딱한 빵과 말라 비틀어진 육포를 뜯어도 그저 좋았다.



“펠릭스. 그래서, 오늘은 어쩔거야?”



한창 마른 빵을 우물거리던 올리버는, 실비아가 빵을 차에 적시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긴요. 위로 올라가야죠.”



“무턱대고 올라간다고 찾을 수 있는것도 아니잖아.”



실비아가 훨씬 편하게 빵을 우물거리는 걸 보고, 올리버도 빵 끄트머리를 차에 살짝 적셔보았다.



“밑에서는 찾기 힘들거든요.”



“높이 올라가면 우리가 힘들어. 그건 알지?”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아는건지 마는건지.”



“잘 알아요. 그러니까, 너무 많이 먹지 말라고요. 나중에 배탈나니까.”



빵을 한참 우물거리던 실비아는 그 말을 듣더니 어색하게 입을 멈췄다.



“그건 마저 먹어도 돼요.”



“그래. 그리고 배탈 나도 펠릭스가 약 만들어 줄거야.”



그러나 실비아는 먹던 빵을 조심스레 도로 내려놓았다.







올리버가 힘껏 걷어차자, 쌓인 눈의 장벽이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아주 좋아요! 눈이 얼지도 않았고. 이런 눈이 최고지. 솜처럼 푹신하고 비단처럼 부드럽고······.”



“만져본적도 없으면서.”



펠릭스는 올리버의 말을 가볍게 무시해치웠다.



“자, 그럼. 우리 보금자리에 작별인사나 한번 하고 가죠. 아직 갈 길이 머니까.”



펠릭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척척 걸음을 옮기다가, 우뚝 멈춰섰다.



“왜 가다 말아?”



저 아래 산자락에서 실바누스 준남작이, 그리고 저 멀리 산 중턱에서 메를린이 각각 이쪽을 향해 힘껏 달려오고 있었다.







처음에 펠릭스는 히죽히죽 웃으며 그들을 맞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메를린은 인사 대신 따끔한 잔소리를 시작했다. 잔소리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이 계절에 화이트클리프에서 제대로된 장비도 없이 야영을 하다니. 동상이라도 입으면 어쩌려고 그랬냐 하는것부터 시작해서 산짐승, 눈사태, 균열, 온갖 잔소리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펠릭스는 대충 잔소리를 듣는척하며 눈길을 슬쩍 돌렸다. 실비아도 실바누스에게 단단히 혼쭐이 나고 있었다. 올리버도 옆에서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은채 괜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펠릭스. 듣고 있어?”



“당연히 듣고 있지.”



“거짓말.”



펠릭스는 웃으며 얼버무렸다.



“듣고 있었어.”



“제대로 안 듣고 있었잖아.”



메를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메를린을 따라온 큰 새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끼룩끼룩 소리내어 울었다. 메를린을 대신해서 펠릭스에게 화를 내는것 같기도 했다.



새의 울음소리에 놀라서일까, 실바누스도 잔소리를 멈추고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걱정했단 말야.”



어쩌다가 이목을 끌게 된 것도 모르고 메를린이 나직이 말했다.



“많이 걱정했어. 죽을까봐.”



“연금술사가 얼어죽을까봐?”



펠릭스는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시선을 외면하며 대꾸했다.



“걱정 많이 했단 말야.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말을 마친 메를린은 곧바로 몸을 휙 돌려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가 왼팔을 위로 들어올리자, 옆에서 따라가던 큰 새가 흰 날개를 활짝 펼쳤다. 새는 날개를 힘껏 퍼덕이더니 그대로 메를린을 붙잡고 산 아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뭐. 그래서. 준남작. 그쪽도 하고싶은만큼 잔소리 했어요?”



준남작은 도로 고개를 돌려 실비아를 바라보았다.



“실비아. 다음부턴 걱정끼칠 일은 하지 마라. 정 하고싶으면······.”



준남작은 괜히 헛기침을 했다.



“미리 언질이라도 해라.”



“미안해, 아빠.”



실바누스는 실비아에게 등을 돌렸다.



“그래서. 계속 갈거냐?”



실바누스는 여전히 실비아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응.”



“어디로.”



“위로. 아마도.”



실바누스는 잠시 조용히 서 있었다.



“실비아. 만약 내가 먼저 찾아내면, 즉시 포기하고 바로 산에서 내려와라.”



실바누스는 실비아의 대답을 듣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단단히 혼났네.”



어쩌다보니 올리버는 사이에 끼어서 양쪽에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인데, 그는 벌써 지쳐보였다.



“올리버. 그냥 못들은척하지.”



“어떻게 그래. 어쨌든, 지금은 내가 너희들 보호자인데.”



“난 당신 보호 별로 필요없어요.”



“실비아는 아니잖아. 준남작은 많이 놀랐을거야. 그리고, 네 친구도 네 걱정 많이 한 것 같더만.”



펠릭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치웠다.



“내가 언제 걱정해달라 그랬나. 괜히 오지랖이야.”



“너무 그러지 마 펠릭스. 네 친구는 진심인것 같던데, 그런 말 들으면 크게 상처받는다.”



“원. 알았어요 올리버. 아주 전문가 납셨네. 그래서, 실비아? 제대로 따라오고 있죠?”



펠릭스는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실비아는 조금 풀죽은 얼굴로 바닥을 보며 걷다가, 자기 이름이 들리자 살짝 눈을 들었다.



“왜요? 삐쳤어요?”



“아니거든요. 그냥, 미안해서 그랬어요.”



“누구한테? 나한테? 괜한 잔소리를 듣게 만들어서?”



실비아의 얼굴이 조금 찌푸러졌다.



“아빠한테요.”



“그럼 사과해요. 지금은 말고. 나중에. 지금은 하던 일이 있으니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거든요.”



실비아는 여전히 바닥을 쳐다보며 입을 삐죽였다.



실비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펠릭스는, 조끼를 열어 약병 하나를 꺼내 실비아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추자, 앞서가던 올리버도 걸음을 멈추었다.



“뭐예요?”



“먹어요.”



실비아는 펠릭스가 내민 빨간 약을 받아들었다. 자세히보니, 약이라기 보다는 잼 같았다. 살짝 끈적하고 불투명한데다가, 안에 고형물이 조금 떠다니고 있었다.



“무슨 약인데요?”



“삐친 어린애한테 최고로 좋은약.”



실비아는 펠릭스를 잠시 흘겨보며 뚜껑을 열었다. 약병을 입에 대고 기울이자 선명한 단맛이 났다. 설익은 딸기처럼 싱그럽고, 농익은 산딸기처럼 달콤했다.



“펠릭스. 약 아니지?”



올리버가 슬쩍 다가와 펠릭스에 귓가에 대고 말했다.



“네. 잼 맞아요.”



“그래보이더라. 병이 다르잖아. 무슨 잼인데?”



“산딸기 잼. 뭐, 맛있는건데. 솔직히 좀 아깝네요.”



“넌 음식 맛 안 따지잖아. 맛이 있든없든 대충 꿀꺽꿀꺽 먹어치우면서.”



“그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거거든요. 아껴뒀다가 이런 식으로 쓸 줄이야.”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실비아는 산딸기 잼을 그저 즐겁게 맛보았다.







메를린과 실바누스 준남작은 산자락 아래에서 재회했다.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으며 잠시 인사를 나눴다. 가볍게 훑어보니, 서로 급하게 올라오느라 제대로 준비도 못한 상태였다.



“잠시 대기. 그리고, 이걸 좀 부탁하지.”



준남작은 십장에게 메모지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십장은 인부 몇을 데리고 화이트클리프 마을쪽으로 수레를 끌고가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고마워. 그럼, 이따 보자.”



새떼들도 도로 하늘위로 푸드득 날아가버렸다.



“또 보는군.”



“그러게요.”



준남작은 남아있는 인부들에게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눈치빠른 인부 몇몇이 동료들을 이끌고 저만치 멀리 자리를 비켜주었다.



“아침부터 고생이 많으시네요.”



메를린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딸이 제멋대로라. 그러는 너도. 아침부터 고생이 많아 보이던데.”



“친구가 제멋대로라서요.”



메를린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서로 아침부터 고생이 많군.”



“그러게요. 이 계절에, 화이트 클리프에서 야영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정말, 잘못하면 죽는데도. 죽음 무서운줄을 전혀 모르니까······.”



실바누스는 헛기침을 했다.



“내 딸. 위로 올라간다던데. 마녀. 나는······.”



“메를린이에요.”



실바누스는 다시 헛기침을 했다.



“메를린. 하나 묻고싶다. 위로 올라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나? 겨울 눈꽃은 밟히지 않은, 해 닿지 않는 새 눈 위에 핀다는데. 저 산꼭대기는 햇볕이 그대로 내리쬐잖나.”



“어머, 꽤 잘 아시네요. 겨울 눈꽃에 대해서.”



실바누스는 눈을 슬쩍 피하며 모른척했다.



“맞아요. 산꼭대기는 햇볕이 들죠. 하지만, 그거 아세요? 겨울 눈꽃이 어떤 물건이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재료라고 하더군.”



“네. 맞아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죠. 눈 위에서 꽃을 피우긴 커녕 싹을 틔우지도 못하니까.”



메를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화이트 클리프의 별명이 뭔지 아세요?”



“단두대.”



메를린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 전의 별명이요. 좀 더 옛날 별명. 혹시 아세요?”



“모른다.”



“기둥이에요. 하얀 기둥. 그 때는, 절벽이 잘려나가기 전이었거든요. 세상의 끄트머리, 하늘 위에 닿는 곳이라고 하얀 기둥.”



준남작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



“네. 그럼, 한번 물어보죠. 화이트 클리프의 꼭대기는, 우리가 발딛고 사는 이 세상에 있을까요? 아니면 구름 너머 하늘 위의 세상에 있을까요?”



실바누스는 누구에게도 침범당한적 없는, 새하얀 산 꼭대기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재료를 찾기에, 거기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요?”



“밟히지 않은, 해 닿지 않은 새 눈 위에 피는 꽃. 저 꼭대기에는 그늘이 없다. 따라서, 저기에 겨울 눈꽃은 없다.”



“그래요. 하지만, 만약 왕국 안에 이 세상이 아닌 곳이 있다면, 저곳 뿐일 거예요.”



메를린은 다시한번 새하얀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하늘과 맞닿은, 구름보다 조금 더 높은 곳.







펠릭스가 실비아에게 건넨 붉은 약은 놀랄만큼 효과가 뛰어났다. 줄곧 거무칙칙한 울상이었던 실비아의 얼굴은 이제 화색이 돌았다.



“최고의 약. 맞죠?”



펠릭스가 올리버의 등에 대고 조용히 말하자, 올리버는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왜요?”



실비아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올리버는 대충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네.”



“왜요? 무슨 이야기 해요?”



“별로요. 이 눈, 먹을수 있나 없나 뭐 그런 이야기에요.”



펠릭스는 대충 재미없는 이야기로 얼버무렸다. 그런데, 의외로 실비아는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먹을수 있을것 같은데. 설마, 못 먹어요?”



“먹을 수야 있죠. 대신, 생으로는 못 먹어요. 배탈나서. 물에 끓여먹어야 하죠.”



“아니, 하지만. 눈을 끓이면 그냥 물이잖아요.”



“그렇죠.”



“그럼, 눈이 아니라 물이잖아요. 눈은 못 먹어요?”



“아까 말 했잖아요. 배탈 나는걸 감수한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요.”



“그게 못 먹는다는 거죠.”



“먹을 수는 있어요.”



“아니죠!”



“저기. 둘 다 쓸데없는데 기운빼지 말라고. 아직 갈길이 한참 남았으니까.”



두 사람이 또다시 무의미한 말싸움을 할 기미를 보이자, 올리버가 걸음을 늦추며 끼어들었다. 비록 실비아가 살짝 볼을 부풀렸고, 펠릭스는 약올리듯 나몰라라 하며 휘파람을 불었지만, 그걸로 말싸움은 끝났다.







한동안 조용히 능선을 오르다가 그들은 맨질맨질한 바위를 찾아 잠시 쉬기로 했다. 배낭을 풀고, 단단히 조인 신발 끈을 풀어 부은 발을 주무르니 훨씬 살것 같았다. 불어오는 찬 바람도 햇볕이 쬐는 동안에는 그런대로 맞아줄 만 했다. 가끔 저 멀리 흰 눈이 꼼지락거리는 듯한 착각도 들었는데, 그중 몇몇은 눈토끼였다.



“겨울잠 안자는 눈토끼도 있네요?”



“종이 다른 두 토끼를 뭉뚱그려 눈토끼라고 불러서 생긴 참극이죠.”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 벗으며 펠릭스가 대꾸했다.



“왜 똑같이 눈토끼라고 부른대요?”



“뭐, 비슷한데 쓰니까요.”



“어디 쓰는데요?”



“가죽을 벗기고, 고기는 먹죠.”



실비아는 소름끼친다는듯 역겨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건 내 탓 아니죠! 그럼 그걸 달리 어디 써요?”



“애완 동물이라든가······.”



펠릭스는 넌더리를 내며 실비아를 외면했다.



“그래요. 애완동물로 키우던가요. 눈토끼. 번식력이 좋으니 암수 한쌍만 키워도 일 년 뒤면 수백마리로 불어날걸요.”



실비아는 머릿속으로 천천히 그림을 그려보았다. 널따란 마당에 한 쌍의 눈토끼. 털이 새하얗고 복슬복슬한 눈토끼. 두 마리가 여섯 마리가 되고, 여섯 마리가 열 여덟마리가 되고······.



“눈토끼는 못 키우겠네요.”



“그러니까요. 무턱대고 뭐든 애완동물 삼을 생각 말아요.”



“귀여운데.”



펠릭스는 털갈이 시기의 눈토끼를 떠올렸다.



“당신, 눈토끼가 어떻게 생겼는진 알죠?”



“알죠! 새하얗고 복슬복슬하잖아요? 꼭, 솜뭉치에 점으로 눈 두 개 찍은 것처럼.”



펠릭스는 공연히 실비아의 환상을 깨지 않기로 결정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올리버가 돌아올 때까지 두 사람은 바위 위에서 얌전히 쉬고 있었다.



근처를 둘러보고 돌아온 올리버는 펠릭스에게 몇 군데 의심스런 장소를 찝어주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하나같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였다.



“좀 더 위로 올라가야돼요.”



“아니, 지금도 꽤 높아. 동네 뒷산으로 치면, 이미 정상을 찍었다고.”



“동네 뒷산에서 캘 수 있는 약초가 아닌걸요.”



올리버는 어쩔수 없다는듯 쯧 하며 바위 위에 털썩 앉았다.



“그럼, 좀 쉬다 올라가자고.”



“그런데, 펠릭스. 막 생각난건데. 당신, 겨울 눈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요?”



“네.”



잠시도 주춤하지 않고 펠릭스가 즉답하자, 이번에는 오히려 두 사람이 더 놀랐다.



“알아요? 어떻게 알아요? 직접 봤어요?”



“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캐냈죠.”



“캐냈다고? 어디서 본게 아니라, 네 손으로 채취했다고?”



올리버도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저는 아니고. 대스승님이. 대스승님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닐 적에 봤어요. 같이 캐냈죠. 뭐, 사실 난 뒤에서 거의 구경만 했지만.”



“저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고? 지금보다 훨씬 어릴 때?”



올리버는 팔을 휙 들어 화이트 클리프의 높다란 봉우리를 가리켰다.



“아니. 거기까진 안 가고. 훨씬 아래.”



펠릭스는 산 중턱의 하얀 절벽 즈음을 가리켰다. 거기도 이미 충분히 높은 땅이었다.



“저기까지 올라가야 돼요?”



“훨씬 낮은 데서도 찾을 수는 있어요.”



“그러면, 낮은데서 찾지. 뭐하러 높이 올라가요?”



“낮은데는 쓸만한게 없어요.”



“되게 흔한 재료 말하듯 하네요.”



“네.”



다시 실비아와 올리버가 고개를 돌렸다.



“흔하다고요?”



“생각보다는 훨씬 더.”



“아니, 흔한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둥 거창한 이름이 따라붙어요?”



“좋은게 희귀하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은 겨울눈꽃을 봐도 못 알아보거든요. 눈이 없는데 보물을 본다고 그게 보물인지 쓰레긴지 어떻게 구분해요.”



“혹시, 지금까지 오면서 몇 번 봤어요? 겨울눈꽃?”



“아마도.”



“어디에요?!”



펠릭스는 손을 쭉 뻗어 눈을 한 움큼 집어들었다.



“여기.”



펠릭스는 눈을 실비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없잖아요.”



“잘 봐봐요.”



펠릭스가 손을 살짝 움직이자,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눈꽃 결정이 보였다.



“예쁘기는 하네요. 눈 결정은 보여요. 하지만, 눈꽃은 없잖아요.”



“눈꽃이죠 그것도.”



“말장난하지 말아요!”



실비아는 펠릭스의 손을 탁 쳤다. 그러자 눈뭉치가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제대로 된 눈꽃 아니에요? 피어나는 꽃이라면서요?”



“네. 꽃이죠. 그런데, 아까 그것도 눈꽃이잖아요. 그리고 나름대로 보물일지도 몰라요. 눈 속에 무슨 씨앗이 숨겨져있을줄 알고? 수십 수백년 전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마지막 씨앗이 눈 속에 숨어있을줄 알아요?”



“모르죠. 그리고, 궤변이잖아요.”



“예를 들어 설명하는거죠. 겨울 눈꽃은 흔해요. 생각보다 찾기 쉽다고요. 하지만, 다들 못 알아봐서 문제죠. 보물은 자기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내요. 사람들이 가치를 점점 잊어버리자, 많은 보물들이 세상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렸죠. 그렇게, 사라져버렸다고요.”



펠릭스는 다시한번 눈을 한움큼 집어들었다.



“이 안에도 보물이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편협한 눈을 가지고서는 겨울 눈꽃은 못 찾아요. 좀 더 넓게 보는게 좋을걸요.”



펠릭스는 손바닥을 활짝 펴서 손가락 틈새로 눈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그러다보니, 그의 손바닥 안에 조그만 뭔가가 남았다.



“이런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뭔데요?”



“그냥 가시풀 씨앗이에요. 흔한 쓰레기죠. 하지만, 여기 겨울 눈꽃 씨앗이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펠릭스. 그래서, 그 겨울 눈꽃이 대체 뭔데?”



줄곧 이야기를 듣던 올리버가 슬쩍 말을 던졌다.



“겨울에, 밟히지 않고 해 들지 않은 새 눈 위에 피는 꽃. 식물인지 아닌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히 피어요. 뿌리도 없고 잎사귀도 없죠. 가진 것이라고는 꽃송이 하나 뿐. 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동백꽃과는 분명 달라요. 얼음처럼 투명하고 서늘한 꽃잎을 가졌다고, 한 밤중에 달처럼 은은하게 빛난다고도 하죠.”



“그걸, 지금까지 몇 번 지나쳐 왔다고요?”



“투명한걸 어떻게 봐요. 그리고, 낮은데 핀 건 못 써먹어요.”



“그럼, 언제 볼 수 있는데요?”



펠릭스는 손가락을 쭉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밤에.”



“밤에 밖에 나가면 얼어죽어.”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재료죠. 찾으려면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니까. 메를린이든 실바누스 준남작이든, 제일 중요한걸 모르니까 나도 줄곧 여유로운거고.”



“그러면, 밤에는 찾을 수 있어요?”



펠릭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신, 이 시기의 화이트 클리프는 밤마다 눈보라가 몰아쳐요.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못 찾겠죠. 그러니까, 실비아. 포기하려면 미리 말해요. 솔직히, 죽음을 각오한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나 포기할래.”



올리버가 말하자마자 펠릭스는 웃으며 그의 등을 팡팡 쳤다.



“올리버! 당신은 안 돼요. 내 채집꾼, 내 고용인. 전쟁도 이겨낸 사람이 왜그렇게 약한 소리에요? 여기까지 와서 어딜 도망치려고요?”



올리버는 한숨을, 아주 깊은 한숨을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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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에필로그 22.01.13 55 1 4쪽
171 마지막화 22.01.13 44 1 22쪽
170 170화 22.01.12 37 1 24쪽
169 169화 22.01.11 33 1 24쪽
» 168화 22.01.10 34 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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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3 1 22쪽
160 160화 22.01.02 36 1 25쪽
159 159화 22.01.01 36 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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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56화 21.12.29 35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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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154화 21.12.27 39 1 22쪽
153 153화 21.12.26 42 1 24쪽
152 152화 21.12.25 39 1 21쪽
151 151화 21.12.24 38 1 24쪽
150 150화 21.12.23 38 1 22쪽
149 149화 21.12.22 37 1 21쪽
148 148화 21.12.21 40 1 22쪽
147 147화 21.12.20 43 1 22쪽
146 146화 21.12.20 38 1 21쪽
145 145화 21.12.19 40 1 22쪽
144 144화 21.12.18 43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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