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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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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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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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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67화

DUMMY

화이트클리프로 올라가는 초입은 회색빛의 황무지였다. 풀 한포기는 커녕 이끼 한줌 자라지 않는 거친 황무지. 곳곳에서 기분나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시커먼 땅.



“이런 데도 마을이 다 있네.”



선두에 선 올리버는 언제나처럼 지팡이로 땅을 짚어가며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먹고 살 만한 거라고는 눈이랑 얼음 뿐인데.”



“여름에는 이끼가 조금 자라요.”



“이끼? 어디?”



펠릭스는 아무것도 없는 이 거무칙칙한 땅을 크게 둘러보았다.



“여기에?”



“자라요. 그러면, 눈 산양떼가 이끼를 뜯으러 오죠.”



“잠깐 왔다 가는거잖아. 여름이라고 해 봐야 겨우 세 달인데. 세 달동안 눈 산양을 잡아봤자 일년 내내 먹지는 못하잖아.”



“그렇죠. 그렇게 잡아댔다가는 산양 씨가 마를테고.”



조용히 저벅저벅 뒤따라오던 실비아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데요?”



“몇마리 잡아서 길들이죠. 눈 산양 젖은 나름 먹을만 하니까.”



“길들인 산양은 뭘 먹여서 키워요? 여긴 아무것도 없는데.”



“그야. 건초 사서 먹여야죠.”



“건초는 무슨 돈으로 사요.”



“뭐, 눈 산양 말고도 이것저것 있기는 하니까. 봄이되어 눈이 녹기 시작하면 겨울방울이 자라요. 겨울방울. 알아요?”



실비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뭔데요?”



“재미난 식물이죠. 투명하고 둥근 꽃봉오리가 맺히는데, 봉오리를 똑 따서 흔들면 안에서 소리가 나요. 봉오리 안에 금색 꽃술이 여기저기 부딪히며 나는 소리죠. 진짜 방울처럼 딸랑딸랑 하고.”



“장난감으로 써요?”



펠릭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거 비싼 거예요. 사프란이라고 알죠? 비슷해요. 물감 만들때 꽃술을 쓰는데, 굉장히 찬란하고 선명한 금빛이 나거든요. 잉크에도 꽤 섞고. 염료에도 가끔 섞는다지만, 물량이 없으니 하나마나죠.”



“많이 자라요?”



펠릭스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저만한 마을 하나 먹여살릴 정도로는.”



“신기하네요. 이런 땅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니까.”



실비아는 척박한 땅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그거말고도 있어요. 산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을 따라가다 보면, 운이 좋으면 얼음거북을 찾을 수도 있겠죠.”



“얼음거북? 그건 뭔데요?”



“등딱지에 얼음을 달고 다녀요.”



실비아는 펠릭스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그게 다예요?”



“다죠 그럼. 걔 등딱지는 보온 성능이 굉장히 뛰어나요. 등 위에 맺힌 얼음이 녹지도 않을 정도로. 그래서 고기를 뽑아내고 빈 딱지 안에 군불을 넣어 조그만 난로처럼 쓰기도 해요.”



“잔인해요!”



듣자마자 실비아가 질색을 했다.



“뭐 어때요. 당신이 온 몸에 두르고 있는 털옷도 짐승 가죽 벗긴건데.”



실비아는 입고있던 옷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끔 하늘에서 운철도 떨어지고. 운철은 점술사들이 비싸게 사들이죠. 쓰레기 모으기 좋아하는 귀족들도.



뭐, 어떻게든 이것저것 주워다 내다 팔면 돈은 돼요. 가끔 돈만 많고 실력은 부족한 자칭 예술가가 영감을 찾아 오기도 하고. 그치들은 돈 뿌리고 다니는데 전혀 인색하지 않죠. 바가지를 씌워도 좋다구나 돈을 펑펑 쓰고 가니, 당분간 마을이 망할 일은 없어요.”



펠릭스의 말을 듣고 무언가 떠올라, 잠자코 생각하던 실비아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당신 형님도 여길 찾아오면 좋을텐데.”



“에이, 빅터는 글렀어요. 그리고 빅터는 인색해서 여기 와 봤자 마을에 도움도 안 돼요.”



“그래도, 또 모르잖아요. 그림 때문에 힘들어 하는것 같던데.”



“영감 비슷한 거라도 얻으려면 저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펠릭스는 깎아지른 새하얀 낭떠러지를 가리켰다.



“여기까지 오는 사람은 종종 있어도, 저기까지 가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렇게 쉽게 영감이니 뭐니 하는게 떠올랐으면, 여긴 벌써 알아주는 예술가 마을이었어요.”



“하긴. 그건 그렇네요.”



“어이. 떠드는건 좋은데, 거기 땅 갈라졌으니까 조심해.”



앞쪽에서 올리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말인데요.”



바닥의 갈라진 틈을 폴짝 뛰어넘으며 실비아가 물어보았다.



“우린 어디로 가요?”



실비아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저만치 멀리 눈 쌓인 산자락을 훑으며 위로 올라가는 실바누스와, 새떼들의 호위를 받으며 눈 쌓인 산 중턱을 향해 올라가는 메를린을 번갈아 보았다.



“위로!”



펠릭스는 산 꼭대기를 가리켰다.



“저 위로? 펠릭스. 거기까진 못 가.”



단박에 올리버가 당혹스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거기보단 좀 더 아래.”



이번에는 대신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펠릭스의 손가락 끝에 놓여있었다.



“저기까지도 힘들어. 산악 전문가들도 아니고. 초심자를 둘이나 데리고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가?”



“그러면. 저기까지는 어때요?”



여전히 깎아지른 낭떠러지였지만, 아까보단 좀 더 낮은 곳이었다.



“글쎄. 저기까지 올라가는것도 힘들겠는데.”



“올리버. 그럼 대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요?”



올리버는 훨씬 낮은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펠릭스는 실망한듯 입을 불쑥 내밀었다.



“거기까지 갈 거였으면, 동네 뒷산이나 가지.”



“잘 봐. 저기도 네가 찾는 절벽 있어.”



펠릭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보다가, 주섬주섬 배낭에서 쌍안경을 꺼내들었다.



“있기는 하네요. 뭐, 내 예상보다 훨씬 작지만.”



“그럼 된 거 아냐? 높이 올라간다고 찾는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뭐, 그럼 일단은 저기를 목표로 가 볼까요. 저기도 나름 사람 발 닿기는 힘들어 보이니까.”



앞장서서 걸어가던 올리버는 훨씬 안도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화이트클리프의 높은 봉우리는 올리버에게도 벅찼던게 분명했다.







시커멓고 기분나빠 보이는 황무지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땅의 틈새에서 솟아나던 하얀 김도 이제는 점점 줄어들었다. 가끔 길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김을 뿜는 웅덩이도 있었다.



“온천이에요. 여기 아니면 보기 힘들죠.”



그리고 마침 길가에 자리잡은 웅덩이가 하나 있었다. 펠릭스는 두 사람을 뒤로 물려놓고, 숨을 참은채 웅덩이로 다가가 빈 병에 조금 물을 담았다.



“어때요?”



펠릭스는 주머니를 한참 뒤지더니 병 속에 담긴 조그만 식물을 꺼냈다. 손가락 한마디 만한 흙과 같이 담긴, 길이 한 뼘도 되지 않는 줄기였다. 펠릭스는 병뚜껑을 열고 식물을 하얀 증기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 식물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여긴 유독 물질은 없는것 같아요.”



펠릭스는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그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흙 째로 식물을 바닥에 버려버리고, 이번에는 떠올린 물에 지시약을 몇 방울쯤 떨어뜨렸다. 물에서도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호. 물도 깨끗하네요. 자, 실비아. 와서 손 담가봐요. 뜨겁지는 않아도, 뜨끈한 정도는 되겠는데?”



“그래도 돼요?”



펠릭스가 손짓하고, 올리버도 뒤에서 한번 해 보라는듯 눈짓을 보내자, 실비아는 털실 장갑을 조심조심 벗은 다음 웅덩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천천히 손끝을 웅덩이에 가져다 대자 따스한 온기가 손 끝에서 느껴졌다. 살며시 물 속으로 손을 집어넣자 따끈한 온천수가 실비아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맹물을 끓인 것과는 조금 다른 이상한 감각 때문에 실비아는 금새 손을 뺐다. 그러자 차가운 바람이 따끈하게 덥혀진 손에 시원하게 불어왔다.



“좋네요.”



“물 빨리 안 닦으면 손 얼어요.”



실비아는 어느새 펠릭스가 내민 손수건에 손을 닦았다.



“서비스도 좋은걸요. 펠릭스. 나중에 온천으로 장사해도 되겠는데요?"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 손이 얼면 나만 고생하니까. 동상 약이 얼마나 만들기 귀찮다고요. 자, 그럼. 온천 구경도 끝났으니. 다시 가 볼까요?”







펠릭스의 일행들이 느긋한 산행을 하는 동안, 실바누스는 아주 익숙한 일을 하고 있었다. 즉,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으고, 그들에게 같은 목표를 심어준 것이다.



정해진 보수를 받고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믿을 수 있었다. 지나치게 많은 보수를 요구하거나, 때때로 터무니없이 작은 보수를 원하는 사람들은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전자는 대부분 과대망상증 환자였으며, 후자는 날카롭게 가다듬은 발톱과 이빨을 숨긴채 호시탐탐 빈틈을 찾는 사냥꾼이었다.



동일한 임금과 노동을 약속받은 인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눈밭을 파헤쳤다. 이 차가운 땅에 사는 인부들은 겨울 눈꽃이 무엇인지, 그리고 겨울 눈꽃을 찾는다는게 무슨 뜻인지도 대충 알았다.



“너무 땅을 깊이 파헤치지 마라. 놀러온게 아니다.”



준남작은 한마디 하며 인부들을 둘러보았다.



“여긴 없는것 같습니다.”



“잘 찾아봐라. 나중에 다시 찾아올 일 없도록.”



“알겠습니다.”



인부들의 십장쯤 되어 보이는 남자는 말도 하지 않고 손짓과 눈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평소라면 경계했을 일이지만, 실바누스는 모른척 눈감아주며 대신 높다란 산맥 위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밟힌적 없는 새 눈. 아무래도, 여기엔 없을게 분명하다.’



실바누스는 조용히 생각했다.



“정지! 자리를 옮기자. 좀 더 위로, 좀 더 거친 땅으로.”



십장이 큰 소리로 인부들을 불러모으더니,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동안 이곳저곳을 옮겨가며 눈발을 파헤친 끝에, 그들이 찾은 것은 겨울잠 자던 눈토끼 두어마리와 땅 속에 숨어있던 수정 덩굴 한 뿌리였다.



“이런데는 백날 파봐야 겨울 눈꽃은 없을 겁니다.”



십장이 실바누스 준남작의 옆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그는 풀려나 달아나는 눈토끼를 아쉽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인부들을 향해 턱짓했다.



“저정도는 줬어도 될텐데요.”



“부정탄다.”



십장은 놀란 눈으로 실바누스를 보았다가, 금새 고개를 가로저었다.



“똑똑하신 분인줄 알았더니.”



“여긴 인간들의 땅이 아니잖느냐.”



실바누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낯선 땅을 밟으면, 그 땅의 규칙을 따라야지. 난 너희들이 요구하는 보수에도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맞는 말입니다. 뭐, 그래서. 겨울 눈꽃은 왜 찾는겁니까? 그런 물건을 찾을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십장은 흐트러진데 없는 실바누스의 말쑥한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럴 만한 일이 있다.”



더이상 참견하지 말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십장은 수통을 꺼내 목을 축였다.



“다들 일어나!”



그리고 십장은 실바누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난 이 땅에 대해 잘 모른다.”



실바누스는 천천히 십장을 향해 눈을 돌렸다.



“네가 몇 군데 추천해 봐라. 어디가 좋겠나?”



“뭐, 저라고 딱히 낫지는 않지만. 저기는 어떻습니까?”



십장은 아래쪽이 떨어져나가 역경사가 진 작은 절벽을 가리켰다.



“괜찮아 보인다. 그리로 가 보자.”



“알겠습니다. 다들, 이동!”







메를린은 전혀 다른데 한눈팔지 않고 계속 위로만 주구장창 올라갔다. 덕분에 그녀는 남들보다 훨씬 높은 땅에 서서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물론, 아직 중턱이라 부르긴 한참 낮은 땅이었지만, 이미 공기가 달라졌다.



훨씬 차갑고 메마른 공기는 들이쉬는것도 조금 힘들었다. 거기에, 가끔 산 위에서 눈인지 뭔지가 섞여 바람에 불어왔다.



“보고 왔어?”



머리 위에서 한 무리의 새떼가 둥글게 빙빙 날다가 메를린의 근처로 느릿하게 활강했다. 날개를 활짝 펴고 다가오는 흰 새는 메를린보다도 더 커 보였다.



“어때?”



땅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새는 짹짹 소리도 내지 않고, 그저 눈만 깜빡이며 메를린을 바라보았다.



“없어?”



메를린이 조금 아쉬운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여전히 새는 묵묵부답이었다.



“없구나. 하긴. 그렇게 흔한건 아니니까.”



메를린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새가 쫑쫑거리며 그녀의 머리맡으로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아. 별로 실망하진 않았으니까. 너희들은 괜찮아?”



머리 위를 활강하던 다른 새들도 하나둘 지면에 조용히 내려앉아 메를린의 앞에 오밀조밀 모여들었다.



“고마워. 친절하네 다들. 아, 그래도. 힘들면 쉬어도 돼. 배 고프면 잠깐 사냥하러 가도 괜찮아. 목 마르면 물도 마시고.”



그런데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새들을 보고, 메를린은 살며시 웃으며 새의 새하얀 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울 눈꽃. 어딘가엔 피어있겠지?”



어느 새 한 마리가 부리를 열고 끼룩 소리를 내며 날개를 가볍게 퍼덕였다. 그러자 메를린도 고맙다는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힘차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새떼들은 일사불란하게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거친 자연의 땅은 인간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변덕스러워서, 때때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화이트클리프는 훨씬 덜 놀라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렸다. 하늘 위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산 꼭대기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정지!”



인부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실바누스는 늦기 전에 그들을 멈춰세웠다.



“어쩔까요, 준남작님?”



“어때보이나? 난 이곳 땅에 대해 잘 모른다.”



준남작은 십장에게 판단을 넘겼다. 그러자 십장은 아주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인부들을 둘러보았다. 실바누스는 알겠다는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알겠다. 오늘은 여기까지한다. 하산하자. 그리고, 오늘 부족했던 것들은 내일 아침까지 내가 준비하겠다. 오늘은 그만 여기서 돌아가자.”



인부들은 의외라는듯 놀란 눈으로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보기보다 제법이라고, 샌님인줄 알았더니 융통성이 있다고 여기저기서 두런두런 잡담 소리가 들려왔다.



“하산!”



그리고 십장이 다시한번 외치자, 인부들은 다행이라는듯 재빨리 몸을 틀었다. 등 뒤에서 꾸물거리는 폭풍을 피해 그들은 허둥지둥 산에서 내려갔다.







한편, 남들보다 높은 땅에 있던 메를린은 곤란하다는 눈으로 산 정상을 올려다 보았다. 마녀인 그녀는 금새 알아챌 수 있었다. 보통 폭풍이 아니라고.



“어떡할까······.”



메를린은 그동안 걸어온 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길고 기나긴, 구불구불한 산길이 벌써 저만치 멀리 펼쳐져 있었다. 여기서 하산한들, 자정이 다 되어서야 겨우 산을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 폭풍이 몰아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고, 그렇게 내려가면 내일 또 올라오는 것도 문제였다.



“으음······.”



메를린은 쓸만한게 있을까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 땅은 얼마나 척박한지, 그럴싸한 나무 한 그루도 제대로 자라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메를린이 우뚝 멈춰서자, 그녀의 머리 위를 빙빙 돌던 새들이 하나둘 지면에 내려앉았다.



“응? 아.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눈보라가 몰아칠 것 같아서. 난, 너희들처럼 깃털이 없거든. 날개도 없고.”



새 한마리가 끼룩거리며 날개를 퍼덕였다.



“그래? 정말? 하지만, 괜찮아?”



또 다른 새 한 마리도 날개를 퍼덕이며 제자리에서 쫑쫑 뛰었다. 다른 새들도 한두 마리씩 끼룩끼룩 울며 날개를 퍼덕이고, 제자리에서 쫑쫑 뛰며 빙빙 돌았다.



“정말로? 다들, 정말 친절하다. 고마워. 그럼, 부탁해도 될까?”



메를린이 한쪽 팔을 들어올리자, 새가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새는 공중을 크게 한바퀴 돌더니 메를린을 향해 활강했다. 고도를 낮춘 새는 날카롭고 억센 발톱으로 메를린의 왼팔을 상처 하나 없이 덥썩 붙잡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온 몸이 하늘에 떠오르자 서늘한 바람이 메를린에게 불어왔다. 벌써 바람에 눈송이가 한둘씩 섞이기 시작했다.



“아. 저기 내려줘.”



새는 끼룩 하고 힘차게 울며 날개를 쭉 펴고 속도를 늦추며 서서히 산 아래를 향해 날아갔다.







“펠릭스. 날씨가 심상찮아.”



한참 산을 오르던 올리버가 지팡이 끝으로 산 정상을 가리켰다.



“뭐가 온다고.”



“눈사태는 아니죠?”



“내가 어떻게 알아? 눈사탠지 뭔지.”



펠릭스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럼 이쯤에서 야영할까요.”



“야영이요?”



실비아의 두 눈이 거의 평소의 두 배 정도로 커졌다.



“여기서요? 이, 이 눈밭에서요?”



“네. 그럼 뭐 어디서 해요? 여기서 하지. 올리버. 바람 안 드는 바위틈이나, 뭐 없어요?”



“내가 어떻게 알겠어? 지금부터 찾아봐야 하겠는데.”



펠릭스는 근처를 두리번거렸다.



“눈사태는 예측할 수 없다······.”



“진짜요?”



“아.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미 실비아의 얼굴은 잔뜩 울상이 되어 있었다.



“어떡해요? 빨리 내려가야 하지 않아요?”



“펠릭스. 그래. 하산하자.”



“저 먼 길을?”



펠릭스는 그동안 열심히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을 가리켰다.



“하산하는데도 시간 꽤 걸려요. 애써 여기까지 왔는데, 도로 내려가요? 그렇게 해서 언제 겨울눈꽃을 찾아요?”



“그래도, 목숨이 달렸잖아요. 눈사태라도 들이닥치면······.”



“죽죠.”



펠릭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죽음의 약. 나한테 부탁하지 않았나요?”



실비아가 잠시 흠칫했다.



“목숨이 또 아까워요?”



“네! 아까워요. 죽음의 약이든 뭐든, 죽고 나면 무슨 소용인데요?”



“그래. 펠릭스. 실비아 말이 맞아. 죽으면 다 소용없다고. 빨리 내려가자. 응?”



“내려가는길도 꽤 가팔라요. 힘들거라고요.”



“그럼, 전에 말한 그 무지개 다리라도 만들어 주던가.”



“재료 비싸다니까 그러네. 차라리 그 돈이면, 여기다가 그럴싸한 야영장을 하나 차리고 말죠.”



올리버의 얼굴이 잠시 멍해졌다.



“가능해?”



“물약을 펑펑쓰면, 뭐 못할 것도 없죠. 근데, 벌써부터 낭비하긴 싫거든요. 내 물약은 무한하지 않아요. 여행하면서 이것저것 써버려서, 지금은 그렇게 많지도 않고.”



펠릭스는 조끼의 단추를 풀고 양 옆으로 활짝 열었다. 주렁주렁 병들이 들어있던 자리는 이제 군데군데 비어있었다.



“그럼 어떡해?”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보자······저기. 저기라면, 적어도 눈사태는 없겠는데요?”



펠릭스는 바위가 희한하게 움푹 깎여나간 자리를 가리켰다.



“뭐. 그래보이네. 그래서, 저기서 야영을 하자고?”



“네. 가죠.”



올리버가 말리고 자시고 할 새도 없이, 펠릭스는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실비아와 올리버는 서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올리버는 울상이 된 실비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뭐, 펠릭스랑 같이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정말. 최악이에요!”



그러면서, 두 사람은 천천히 펠릭스를 따라갔다.







바위가 떨어져 나간 틈은 얕은 동굴처럼 되어 있었다. 좁긴 해도, 불어오는 바람도 막아주고 천장이 무너져내릴 일도 없었다.



“단단한데. 좋아요. 꼭 누가 일부러 만든것 같아요.”



“우리 여기서 야영하라고? 터무니없어.”



올리버는 동굴 안에 배낭을 풀며 대답했다.



“진짜 안전한거 맞죠······?”



실비아는 훨씬 울상이 되어 조심조심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등에 매고있는 배낭을 풀 생각도 없어보였다.



“안전해요, 안전해. 난 이래뵈도 건축 공학이라든가, 수학이라든가, 뭐 그런것도 배웠거든요. 아마 안전할 거예요.”



별로 도움되는 단어라고는 하나도 섞이지 않은 말이었지만, 그래도 실비아는 조금 안심했다.



“어디가요?”



그러다가 펠릭스가 동굴 밖으로 나가자, 실비아는 재빨리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갔다. 펠릭스는 발로 바닥의 눈을 슬슬 쓸더니, 도로 동굴 안으로 들어와 올리버의 배낭을 열었다.



“뭐해?”



“삽.”



펠릭스는 조립식 삽을 꺼내 낑낑거리며 자루에 날을 끼워 도로 눈밭으로 나갔다.



“비켜. 내가 할게.”


어설픈 펠릭스의 삽질을 보고 올리버가 동굴 밖으로 걸어나왔다. 벌써 눈송이가 하나둘 눈에 띌정도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올리버는 바닥에 쌓인 흰 눈을 삽으로 퍼내 저 멀리 낭떠러지 아래로 휙휙 던져댔다.



한동안 삽질을 하자, 거무칙칙한 땅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별로 안 쌓였네. 좋아요. 올리버, 그만 들어가요.”



“뭘 하려고요?”



펠릭스는 녹색의 꿈틀거리는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더니, 검은 땅 위에 액체를 쪼르륵 부었다. 액체의 주둥이로 끈적한 공 같은게 툭 떨어지더니, 공이 움찔거리며 쩍 갈라셔 순식간에 싹을 틔워올렸다.



“어머, 이게 대체······?”



싹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뿌리를 뻗으며 자라나, 커다란 덩굴을 이루었다. 덩굴은 징그러울정도로 꿈틀거리며 자라더니 순식간에 빽빽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바람이 들이치진 않을 거예요. 자다가 굴러 떨어지지도 않을 거고. 이 눈밭을 방황하는 늑대나 곰도 동굴 안으로 쳐들어오지 않겠죠.”



동굴 입구를 둥글게 에워싼 덩굴 울타리를 보며 실비아는 조용히 감탄했다.



“자, 들어가요. 아, 올리버. 벌써 불을 피워뒀네.”



펠릭스는 넉살좋게 모닥불가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토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실비아는 올리버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어떻게든 됐지?’



올리버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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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후기 22.01.13 68 0 -
172 에필로그 22.01.13 57 1 4쪽
171 마지막화 22.01.13 44 1 22쪽
170 170화 22.01.12 38 1 24쪽
169 169화 22.01.11 34 1 24쪽
168 168화 22.01.10 36 1 23쪽
» 167화 22.01.09 39 1 22쪽
166 166화 22.01.08 35 1 23쪽
165 165화 22.01.07 38 1 26쪽
164 164화 22.01.06 33 1 22쪽
163 163화 22.01.05 38 1 24쪽
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5 1 22쪽
160 160화 22.01.02 37 1 25쪽
159 159화 22.01.01 38 1 23쪽
158 158화 21.12.31 33 1 21쪽
157 157화 21.12.30 38 1 23쪽
156 156화 21.12.29 36 1 24쪽
155 155화 21.12.28 36 1 24쪽
154 154화 21.12.27 42 1 22쪽
153 153화 21.12.26 45 1 24쪽
152 152화 21.12.25 41 1 21쪽
151 151화 21.12.24 40 1 24쪽
150 150화 21.12.23 40 1 22쪽
149 149화 21.12.22 40 1 21쪽
148 148화 21.12.21 41 1 22쪽
147 147화 21.12.20 45 1 22쪽
146 146화 21.12.20 41 1 21쪽
145 145화 21.12.19 44 1 22쪽
144 144화 21.12.18 47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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