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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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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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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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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51화

DUMMY

도금된 방 안에서 한껏 귀족 분위기를 잡던 펠릭스는 금새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방을 나서 저택 마당의 연금술 작업실로 걸어갔다.



작업실의 문을 활짝 열자마자 훌쩍이는 실비아의 옆얼굴이 보여, 펠릭스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뭐해요?”



“생각하고 있어요.”



“무슨 생각?”



실비아는 고개를 살짝 돌려 쓸쓸한 눈으로 펠릭스를 쳐다봤다.



“이렇게나 재료가 많은데도,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니.”



“왜요? 뭐 때문에 그래요?”



실비아는 울먹이며 펠릭스에게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자기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약을 만들었는지. 그런데 정작 약을 먹은 사람들이 왜 그러는지. 한 십 분 정도 실비아의 하소연을 듣던 펠릭스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꾸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요?”



“두 사람 다 살리고 싶어요.”



“살아있잖아요. 둘 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무신경한 펠릭스의 말에 실비아가 발끈했다.



“빅터가 가진 정열도 살려두고 싶고, 첼시가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게 놔 둘 수도 없어요. 왜 둘 다 제가 용기를 불어넣어 줬더니, 가장 소중한걸 포기하려고 드는 건데요?”



“그러게. 내가 미리 말 했잖아요. 소용없을 거라고.”



“미리 알고 있었으면 좀 도와주지 그랬어요. 날 도와주겠다면서요?”



펠릭스는 의자를 질질 끌어내 그 위에 털썩 앉았다.



“작업실 문 열여줬잖아요. 열쇠도 두고갔고.”



“약이요, 약! 약 만들때 뭐라도 조언을 좀 해 줄 수도 있었잖아요!”



“조언한다고 듣지도 않았을거면서.”



실비아는 발끈하려다가 입을 우물거렸다.



“안 그래요? 당신도 한 고집 하잖아요.”



“들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실비아는 눈에 띄게 움츠려 들어서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련하겠어요. 됐어요 됐어. 지나간 일은 잊어요.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고싶은데요?”



“둘 다, 마음을 바꿔먹었으면 좋겠어요.”



“죽겠다고 바꿔먹었잖아요. 당신 덕분에.”



“펠릭스!!!”



실비아는 다시 발끈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왜, 왜 둘 다 포기하려고 드는건데요? 왜 약효가 내 뜻대로 나질 않아요? 네?”



“당신이 할 말은 아니죠. 날 찾아와서 죽음의 약을 부탁했잖아요.”



실비아는 크게 동요했다.



“오히려 제가 묻고 싶은데. 당신은 이해할 수 있지 않아요? 무슨 심정으로 죽음을 찾아나서는지?”



“아니에요! 아닐 거라고요. 아니에요. 아무리 그래도, 죽도록 놔둘 수는 없어요······.”



펠릭스는 심드렁한 투로 대답했다.



“예전에 말 해 줬잖아요. 약을 먹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중요하다고.”



“그렇다고 이렇게 효과가 바뀌어요? 난, 사람 살리는 약을 만들었는데, 정작 제 약을 먹은 사람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이에요. 그렇게까지 효과가 달라진다고요? 당신은 지금껏 그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요.”



“그야. 난 그럴 여지를 안 주니까.”



펠릭스는 느긋하게 두 손을 깍지껴서 뒤통수에 받쳤다.



“여지를······안 줘요?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죠. 내가 만드는 약에는 빈 구석이 없어요. 먹는 사람이 제멋대로 채워넣을 빈 공간이 없다고요. 아주 빽빽하고 조밀한 약이죠. 그러니,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먹든 내가 예상한 효과를 내요.”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만드는데요?”



펠릭스는 넉살좋게 다리를 꼬았다.



“만드는건 쉬워요. 하지만, 당신이 할 수 있으려나.”



“어떻게 하는데요? 가르쳐 주기나 해요!”



“그렇게까지 두 사람의 마음가짐을 뜯어고치고 싶어요? 억지로라도? 그들 자신이 바라지 않는데도?”



실비아는 주저하며 작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둘 다, 죽게 놔 둘 수는 없어요.”



“사람은 언젠간 다 죽어요.”



“벼랑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사람의 등을 떠민 기분이에요. 제가 만든 약 때문에 죽을 용기를 얻은 거잖아요. 저 두 사람은 이대로 가만히 못 내버려 두겠어요.”



“무리를 해서라도, 억지로라도 바로잡고싶다?”



실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가르쳐 주죠.”



펠릭스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 솥으로 걸어왔다.



“쉬워요. 벌레나 짐승한테 먹이는 약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어요.”



“펠릭스. 난 지금 장난칠 기운 없어요.”



“농담아닌데.”



실비아는 걱정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펠릭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약에 빈 공간을 많이 만들잖아요. 약을 먹은 사람이 여운에 잠기도록. 스스로 생각할 여유를 갖도록. 그래서 두 사람이 쓸데없는 방향으로 마음을 바꿔먹은 거죠. 처음부터 그럴 여지를 안 만들었으면 될텐데.”



“그래서는 세뇌랑 다를게 없잖아요.”



“그렇죠. 그렇지만, 무리해서 억지로라도 생각 뜯어고치고 싶다면서요? 그럼 세뇌 뿐이죠. 이미 설득한다고 통할 단계는 지나갔어요.”



실비아는 솥 반대편으로 걸어가 손으로 솥을 슬슬 쓰다듬었다.



“정말 그것 뿐이에요?”



“뭐, 다른 방법도 찾아보면 있겠죠. 하지만 난 몰라요. 이미 좋은 방법이 있는데, 더 생각하기도 귀찮고.”



실비아는 쓸쓸하게 솥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둘 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게 얼마나 무서운건데.”



실비아의 말을 듣고 펠릭스는 실소를 터트렸다.



“하! 꼭 당신은 안다는듯 말하네요?”



“네! 난 알죠! 당신 덕분에 두 번이나 겪었으니까! 한 번은 가게에서, 또 한 번은 교류회에서!”



실비아는 앙칼지게 소리를 꽥 질렀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내가 백날 설명해도 당신은 요만큼도 이해 못 할 걸요? 정말 무섭다고요! 진짜, 진짜로 무서웠어요. 죽는다는게 얼마나 무서운데. 그런데, 첼시도 빅터도 알지도 못하면서······.”



실비아는 울먹이며 솥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펠릭스.”



“왜요.”



“당신. 죽음의 약이요.”



실비아가 펠릭스의 얼굴을 향해 살짝 눈을 돌렸다.



“네. 제 죽음의 약. 제 장기죠. 왜요?”



“그게 아니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어떻게 만드는지 저한테 가르쳐 줄 수 있어요?”



펠릭스는 얼빠진 눈으로 실비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에요. 당신이 만든 약. 저는 두 번 이나 먹어봤잖아요.”



“네.”



“정말 잘 만들었더라고요. 진짜로 죽은줄 알았으니까.”



“당연하죠. 누가 만든 약인데.”



“그런데, 결국 두 번 다 살아남았잖아요?”



펠릭스는 의아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그렇죠. 한 번은 재료가 모자라서, 또 한 번은 애초에 죽일 의도가 없어서. 그래서요?”



“그래도, 약을 먹었을 때는 진짜로 죽은것 같았거든요. 아, 죽음이라는게 이런거구나······하고.”



“자꾸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요. 왜요?”



실비아는 머뭇거리다가 두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당신의 죽음의 약, 만드는 방법좀 가르쳐줘요.”



“뭐라고요?!”



실비아는 펠릭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그보다 훨씬 놀랐다.



“뭘, 가르쳐 달라고? 죽음의 약? 가르쳐달라고요?”



“네.”



“왜요? 알아서 어디쓰게? 당신은 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죽이면서.”



“만들어서 빅터랑 첼시한테 먹일 거예요.”



“하! 왜요, 죽을 마음이 든 김에 아예 죽여버리려고요?”



“아니에요!”



펠릭스는 두 손으로 재빨리 귀를 막았다.



“그럼?”



“죽일 것까지는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했던 것처럼 하려고요. 죽음을 경험시켜 주면서 죽이지는 않도록.”



펠릭스는 슬금슬금 귀에서 손을 뗐다.



“왜 그렇게 번거로운짓을?”



“그 두 사람도 한번 죽어보면 알 걸요! 두 번 다시 죽겠다는 소릴 입밖으로 내지 않을 거예요.”



펠릭스는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했다.



“우선,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빅터는 죽겠다고 한 적 없어요. 자기의 정열을 잘라내겠다고 했지.”



“죽는거랑 똑같죠.”



“어쨌든, 빅터는 죽음의 약을 먹어도 별반 달라질게 없을지도 몰라요.”



“상관없어요! 빅터도 한 번 죽어보면 생각을 뜯어고칠 걸요! 적어도 지금처럼 징징거리지는 않겠죠.”



펠릭스는 조금 놀란 눈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첼시도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좋다구나 하고 죽으러 달려들지도 모르죠.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건, 그게 뭔지 잘 모른다는데서 오는것도 있으니까.”



“차라리 모르는게 훨씬 낫다고 생각할걸요. 당신이 만든 약은 그 정도는 되니까.”



“하긴. 내 약이 보통 약은 아니죠! 그래서 말인데, 실비아.”



실비아는 긴장한 눈으로 펠릭스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르쳐주기 싫어요.”



“왜요!”



“내 비장의 레시피를 넙죽넙죽 넘겨줄 것 같아요? 내가 그걸 만드느라 얼마나 애 썼는데. 그리고 알려준들 재료가 부족해서 여기선 못 만들어요.”



“교류회에서는 재료 없이도 잘만 만들었잖아요! 가르쳐줘요. 네?”



“싫-어-요.”



“펠릭스! 이, 이 나쁜놈! 도와준다고 해 놓고서 조금도 안 도와주고, 알았어요! 마음대로 해요! 까짓거, 내가 직접 만들테니까!”



펠릭스는 오히려 화색이 되어 싱글벙글 웃었다.



“오, 진짜로요?”



“도와줄거 아니면 나가요! 당신,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크! 좋아요. 기대할게요, 실비아! 잘 해 봐요. 싸구려 쥐약이나 만들지만 말고.”



실비아가 대답 대신 손에 집히는 재료를 집어던지자 펠릭스는 허둥지둥 작업실에서 뛰쳐나갔다.







펠릭스를 쫓아낸 실비아는 작업실의 커다란 솥 앞에서 멈춰섰다. 솥 너머의 검은 구멍은 그 어느 때보다 깊숙하고 어두워 보였다. 솥 아래에 거대한 심연이 자리잡아 꾸물거리는 가벼운 환각이 보이자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실비아는 용기를 내어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솥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빈 솥에 물을 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처음 펠릭스를 만났을 때, 그는 실비아에게 어떻게 죽음의 약을 만드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행히, 그 기억은 실비아의 뇌리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작업실 밖에서 창가에 등을 기대선 펠릭스는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창문 너머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곧 굴뚝에서 무겁고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펠릭스는 유령처럼 음습한 미소를 지으며 창문 너머를 훔쳐보았다. 작업실 안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끔찍한 폭발음과 시뻘건 불지옥같은 광경을 지켜보며 펠릭스는 좀처럼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여가며 큭큭거렸다.







모든 작업을 끝마친 실비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증류관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작업실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증류관이 없었다.



실비아가 안절부절하는 사이에, 문을 벌컥 열고 펠릭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왜 왔어요?”



“얼마나 잘 만들었나 궁금해서 왔죠. 그리고 증류관 없어도 돼요. 그건 색깔이랑 냄새 때문에 쓴 거니까. 그냥 거르기나 해요.”



펠릭스는 실비아를 슬쩍 밀치고 솥 앞으로 걸어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흐음!”



숨을 내쉬며 펠릭스는 가볍게 감탄했다.



“좋군요. 좋아. 어깨너머로 본 것치고는 꽤 장래가 기대돼요.”



“냄새만 맡아보고 알아요?”



“알 만큼은 알죠. 재료도 텅텅 비고, 기술도 부족하고. 이래서야 제대로 된 약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네요.”



“재료가 부족한건 어쩔 수 없었어요. 대신 최대한 비슷한걸로 넣었어요.그리고 당신도 부족한 재료로도 잘만 만들었잖아요? 교류회에서. 그정도만 만들어도 두 사람의 생각을 뜯어고치기엔 충분하니까.”



“그렇죠. 그러면······.”



펠릭스는 실비아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려주었다.



“잘 해 봐요. 아, 그리고. 그 빅터의 정열을 잘라내는 척 하는 약도 만들어요. 결국 엄마를 설득하려면 그게 필요할테니까.



“아, 맞아. 그래야겠네요 참. 놀라서 잠시 잊고있었네.”



실비아는 자기가 만든 죽음의 약을 병에 담았다. 검은색과 연보라색이 섞인 기묘한 색상의 혼탁한 약물을 그녀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짜 먹으면 죽을것처럼 생기기는 했네요.”



“칭찬이에요?”



“알아서 생각해요. 그럼, 수고해요. 약 마저 잘 만들고.”



“안 도와줘요?”



펠릭스는 작업실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걸어나가며 대답했다.



“필요 없어 보여서요.”



작업실 문이 닫히고 몇 초쯤 지난 뒤에 실비아가 투덜거렸다.



“하여튼. 진짜 조금도 안 도와주네.”



실비아는 솥을 재빨리 씻어내고 뭉친 어깨를 슬슬 풀며 안에 물을 채워넣었다. 그리고, 뒤늦게 실비아는 그 정열을 잘라내는 약이 뭔지 전혀 모른다는걸 깨달았다.







저택으로 들어오자마자 펠릭스는 두 손을 입에 대고 복도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레고리!”



그러자 펠릭스의 바로 앞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그레고리가 나타났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그레고리. 엄마랑 이야기 좀 하고싶은데.”



“마님께서는······.”



“핑계대지 말고. 한, 두 시간쯤 뒤에 만날 생각인데. 잠깐정도는 볼 수 있지?”



그레고리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럼 수고해 줘.”



그레고리는 순식간에 복도 저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사라졌다.







실비아는 작업실 문을 살짝 열고 바깥을 힐끔거리며 펠릭스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펠릭스의 모습은 작업실 근처에서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솥의 물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고, 작업실 벽면에 붙어있는 시곗바늘은 째깍째깍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실비아는 펠릭스를 찾으려다가 웨일 저택의 커다랗고 검은 그림자를 보고 뒤로 슬슬 물러섰다.



웨일의 그림자와 부글부글 끓는 솥을 번갈아 보던 실비아는 걸음을 돌려 작업실의 문을 쾅 닫아버리고 솥 앞으로 다가갔다. 미심쩍은 눈으로 솥에서 끓는 물을 지켜보던 실비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아이작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상상력을 발휘해라. 연금술은 마법이다. 실비아는 소매를 걷고 재료를 집어들었다.







약병을 끼워넣는 가죽띠는 생각보다 훨씬 불편했다. 실비아는 걸을 때마다 띠에 매달린 약병이 그녀의 몸을 쿡쿡 찌르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면서도, 행여나 실수로 병을 흘릴까봐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실비아는 우선 땅 아래로 걸어내려가 첼시를 찾아갔다. 지표면의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죽음의 한기가 실비아의 몸을 가볍게 어루만지는 착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촛대에 불을 밝히고 감옥으로 향했다.



첼시는 실비아가 건넨 약병을 조용히 받았다.



“먹어요.”



“실비아. 나를 위해 이 정도로 마음 써 주는건, 내 사업 파트너 이후로는 네가······.”



“먹어 봐요.”



실비아가 말을 자르고 끼어들자 첼시는 쓸쓸하게 웃으며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그래. 먹어 볼게. 어차피, 난 이미 마음먹었으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첼시는 말을 끝맺지도 않고 약을 꿀꺽꿀꺽 삼켰다.



“굉장히 이상한 맛인데. 난생 처음 느끼는 맛이야. 이건, 정말이지······.”



그리고 첼시의 몸이 뻣뻣하게 굳더니 그녀는 그대로 감옥 바닥에 픽 쓰러졌다. 커다랗게 뜬 그녀의 두 눈동자는 검게 물들었고, 입술은 공포에 질려 위로 말려들어갔다. 그 자세로 오 분 정도 첼시는 시체처럼 굳어있다가,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정신이 들자마자 첼시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때요?”



첼시는 고개를 거칠게 휙 돌렸다가 이내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나, 살아있어? 이거 꿈 아니지?”



“아니에요. 여전히 죽고 싶어요?”



첼시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눈에 눈물이 맺힌 채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빅터는 웨일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고 실비아가 건넨 약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빅터 웨일의 몸도 한 순간에 뻣뻣하게 굳었다. 실비아는 그의 슬픈 눈동자가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애원으로 가득 차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걸어나온 빅터는 괴성을 지르며 길길이 날뛰다가,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이제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았어요?”



“난 죽고싶지 않아.”



빅터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더더욱 펠릭스의 그 약이 필요해.”



“아니에요. 그건 정열을 없애는 약이 아니에요. 지금의 당신을 죽이고 새로운 빅터 웨일을 만드는 약이죠. 그걸 먹으면, 지금의 당신은 죽어서 영영 사라진다고요.”



빅터는 손으로 눈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그 여자와 싸워도 죽을 거야.”



“싸우기 나름이죠. 싸워 볼 만한 방법은 있어요.”



“네 바보같은 계획에 나까지 끌어들이지 마.”



“달리 방법이 있어요?”



빅터는 원망스런 눈으로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네 약 덕분에 기껏 용기를 냈더니, 날 다시 겁쟁이로 만들고. 넌 대체 뭐하는 연금술사야? 악취미도 그런 악취미가 또 없군.”



“난 당신이 죽게 놔 둘 수 없어요.”



빅터는 길게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어. 네 마음대로 해. 어쨌든, 네 덕분에 나도 이제 죽는건 무서우니까.”



“좋아요. 그럼······.”



실비아는 허리띠에 매달았던 약병을 꺼내려다가, 뒤늦게 약이 있어야할 자리가 텅 빈 것을 발견했다.







펠릭스가 문을 열자 북쪽을 향해 활짝 열린 창문에서 북풍이 불어들어와 커튼을 휘날렸다. 펠릭스가 문을 닫자 한껏 휘날리던 커튼은 금새 잠잠히 사그라들어 이따금 살랑살랑 흔들렸다.



빅토리아 웨일은 북향의 휴게실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뜨거운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펠릭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자기 바로 맞은편에 올 때 까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안녕, 엄마.”



“너도 차 마시러 왔니?”



펠릭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빅토리아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이야기나 좀 하려고.”



펠릭스는 품을 뒤져 실비아가 만든 약을 꺼냈다.



“뭐니.”



“형의 정열을 잘라내는 척 하는 약. 실제로 무슨 효과가 있는지는 나도 모르긴 한데, 이걸 먹는다고 형이 막 달라지지는 않을거야.



펠릭스는 약병을 빅토리아쪽으로 슬쩍 밀었다.



“알아. 그래서?”



“이걸 형한테 먹이려고.”



“그러려무나. 그런데?”



“그러니까. 약을 만들었잖아? 이제 첼시 석방해주고 제이콥의 정보도 줘.”



빅토리아는 찻잔을 탁 내려놓았다.



“펠릭스. 계약 내용과 다르잖니.”



“그렇기는 하네. 따지고 보면 이건 내가 만든 약도 아니니까.”



“그럼?”



펠릭스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냐는듯 빅토리아에게 눈짓했다.



“알잖아.”



빅토리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찻잔을 집어들었다.



“네가 데려온 손님. 재밌더구나. 꽤 마음에 들던데.”



“그래?”



빅토리아는 차를 한 모금 호록 마셨다.



“그래. 너랑 비슷하잖아. 나랑도 비슷하지.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기 뜻대로 밀어붙이고. 난 그렇게 솔직하고 고집스러운 사람, 좋아해. 재밌으니까.”



“그렇다는건?”



빅토리아는 빈 잔을 내려놓았다.



“좋아. 펠릭스. 꽤 재밌는 손님을 데려왔구나. 네 덕분에 모처럼 웃었으니까, 첼시든 빅터든 네 마음대로 해. 둘 다 더이상 관심없어. 계약도 더이상 신경쓰지마.”



펠릭스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마워, 엄마. 그럼 약속했어.”



“난 약속은 지켜.”



빅토리아의 확답을 듣자마자 펠릭스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펠릭스.”



“왜?”



“대신, 그 아이를 여기로 좀 불러줘.”



“실비아를? 뭐하려고?”



“그냥. 이야기나 좀 하려고.”



“알았어. 뭐, 방해했다고 죽이지는 않을 거지?”



빅토리아가 엷게 웃는것을 보고 펠릭스도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두 번 다시 올 일이 없었다고 생각했던 휴게실의 차가운 의자에 앉아 실비아는 떨리는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절 보자고 하셨다면서요.”



빅토리아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실비아가 머뭇머뭇 말했다.



“그래. 이야기나 좀 하고싶어서.”



“말씀하세요.”



“우리집 안에서, 나를 상대로 재밌는 계획을 꾸미고 있더구나. 방금전까지 빅터와 같이 있었지?”



실비아의 안색이 명백히 나빠졌다.



“전, 무슨 말씀이신지······.”



“난 다 알아.”



실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빅토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 마. 빅터든 첼시든, 당분간 죽일 생각 없으니까.”



“네? 진짜요?”



“그래. 첼시는 놔 줄게. 빅터도 당분간은 저대로 놔두겠어. 네가 모처럼 재밌는 구경거리를 마련해 줬으니까.”



실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펠릭스와 무슨 사이니?”



뜬금없이 날아든 빅토리아의 질문에 실비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사제관계에요.”



“펠릭스와 결혼할 생각 없니?”



“없어요! 전혀요! 아, 그러니까, 없습니다. 네.”



빅토리아는 실비아가 허둥거리는 것을 지켜보며 엷게 웃었다.



“난 네가 꽤 마음에 들어.”



“네?”



“너처럼 제멋대로에, 고집을 꺾지 않고, 자기가 옳다는 확신에 가득 찬 사람. 마음에 들어.”



실비아는 빅토리아의 두 눈동자가 먹잇감을 잡은 거미처럼 검게 빛나는 것을 보고 가볍게 부르르 떨었다.



“원한다면, 펠릭스와 결혼을 주선할 수 있어.”



“아니오! 아, 저,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빅토리아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을게. 원한다면 언제든지 찾아와.”



“아뇨! 아, 저기, 말씀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괜찮아요. 저, 죄송하지만, 막 해야할 일이 떠올라서요.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빅토리아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만 가 봐.”



실비아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는둥마는둥하며 휴게실에서 달아났다.







실비아가 나가자 그녀와 교대하듯 펠릭스가 도로 안으로 들어왔다.



“왜 또 왔어?”



“덜 줬잖아.”



펠릭스는 방금전까지 실비아가 앉았던 의자를 발로 슥 밀었다.



“뭘.”



“제이콥. 가르쳐 준다면서.”



“계약 내용이 달라졌잖니.”



“갖고있어봤자 쓸데도 없는 정보잖아.”



펠릭스는 다른 의자를 끌어와 빅토리아 맞은 편에 앉았다.



“제이콥. 어딨는지 알지?”



빅토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이작도 날 찾아왔어.”



“대스승님이? 언제?”



“교류회가 열리기 한 달 정도 전에. 너랑 같은걸 묻더구나.”



“그래서? 가르쳐줬어?”



“아니. 괘씸해서. 내 부탁을 거절했으니까.”



“하여튼. 악취미 하고는. 그래서, 나한테도 안 가르쳐 줄거야? 괘씸해서?”



빅토리아는 빈 잔을 들어올리고 호록 소리를 내며 공기를 한 모금 머금었다.



“펠릭스. 집에 돌아올 생각 없니?”



“없다니까 그러네.”



빅토리아는 빈 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하지만, 언젠가 돌아오게 될 거야.”



“어떻게 알아, 엄마가?”



“넌 나를 닮은 내 아들이니까.”



빅토리아는 종이를 한 장 꺼내 펠릭스에게 내밀었다.



“제이콥의 거처야.”



펠릭스는 종이를 집어들고 주머니에 구겨넣었다.



“고마워 엄마.”



“조금 서두르는게 좋을거야.”



막 자리에서 일어서던 펠릭스는 엉거주춤 서서 빅토리아를 돌아보았다.



“왜?”



“글쎄. 가 보면 알게 될 걸.”



의미심장하게 웃는 빅토리아에게 펠릭스는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조용히 휴게실 출입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펠릭스가 차가운 손잡이를 잡아당겨 문을 열자 또 한 차례의 북풍이 휴게실 안으로 매섭게 몰아쳤다. 그러나 펠릭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빅토리아 웨일은 그 매서운 폭풍 한 가운데서도 아무렇지도 않은듯 고고하게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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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마지막화 22.01.13 44 1 22쪽
170 170화 22.01.12 38 1 24쪽
169 169화 22.01.11 33 1 24쪽
168 168화 22.01.10 34 1 23쪽
167 167화 22.01.09 36 1 22쪽
166 166화 22.01.08 34 1 23쪽
165 165화 22.01.07 36 1 26쪽
164 164화 22.01.06 31 1 22쪽
163 163화 22.01.05 36 1 24쪽
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3 1 22쪽
160 160화 22.01.02 36 1 25쪽
159 159화 22.01.01 37 1 23쪽
158 158화 21.12.31 32 1 21쪽
157 157화 21.12.30 34 1 23쪽
156 156화 21.12.29 35 1 24쪽
155 155화 21.12.28 34 1 24쪽
154 154화 21.12.27 39 1 22쪽
153 153화 21.12.26 42 1 24쪽
152 152화 21.12.25 39 1 21쪽
» 151화 21.12.24 39 1 24쪽
150 150화 21.12.23 38 1 22쪽
149 149화 21.12.22 37 1 21쪽
148 148화 21.12.21 40 1 22쪽
147 147화 21.12.20 44 1 22쪽
146 146화 21.12.20 38 1 21쪽
145 145화 21.12.19 40 1 22쪽
144 144화 21.12.18 43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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