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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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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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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165화

DUMMY

왕국 최북단에 거대한 하얀 산맥이 우뚝 서서 북극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산맥은 일년 내내 흰 눈이 쌓인 데다가, 험준하기가 절벽과 같아서, 사람들이 화이트클리프라 불렀다.



화이트 클리프는 왕국 안에서 가장 거친 땅이었다. 일 년중 단 세 달, 한 여름이 되어서야 겨우 산자락에 눈이 녹고 바닥에 이끼가 자랐다. 그러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한 무리의 산양들이 잠시 머물러 이끼를 뜯다가,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황량한 땅이었다.



그 산맥 바로 아래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누가, 언제, 왜 만든 마을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헛소문을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화이트클리프 너머에 사는 거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마을을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화이트클리프에 손님이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때때로 영감을 찾아 방황하는 예술가가 찾아오거나, 독특한 취향을 가진 귀족이 행차하는게 전부였다. 그러나 어느쪽이든, 눈보라를 뚫고 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 계절의 눈보라는,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니까.



그런데, 그 눈보라를 뚫고 어둠 속에서 마차 한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층 창문 앞에 앉은 사람들은 다들 놀란 눈으로 마차의 출현을 지켜보았다. 하얀 눈을 몰고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마차의 모습은 추위를 몰고 다니는 차가운 북극의 전령처럼 보였다. 물론, 이 마차는 남쪽에서 왔으니, 북극의 전령은 절대 아니었다.







올리버는 흰 눈을 온 몸으로 맞으며 마차를 마차 대여소로 몰고갔다. 머리 위는 물론, 어깨 위에도 눈이 쌓여 그는 영락없는 눈사람 꼴이었다. 마차 대여소의 널따란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건물 안에서 당황한 얼굴로 사람들이 나타날법도 했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가장 먼저 올리버가 살아는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마차를 대여소에 넘기고, 펠릭스와 실비아가 사무실에서 서류를 쓰는 동안, 올리버는 몸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그리고 지금껏 마차를 끌어온 말에게 다가가, 대견하다는듯 손으로 등을 슬슬 쓸어주었다. 마음같아서는 빗을 꺼내 털을 빗질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올리버. 그새 정 들었어요?”



문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등 뒤에서 펠릭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분 전까지만 해도 눈보라가 웅웅 우는 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안 들렸지만, 그사이 눈보라가 조금 잠잠해져서 이제 대화하는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네가 한번 눈보라 뚫고 말 몰아 봐. 없던 정도 들걸. 무사히 도착만 한다면, 발굽에 한두번쯤은 차여도 될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큰일나요. 말발굽에 차이면.”



“알아. 그정도로 고맙다는 뜻이야.”



올리버는 말의 등을 가볍게 툭 쳐주고 마굿간의 그늘에서 걸어나왔다.



“어찌저찌 중간에 퍼지지도 않고 용케 여기까지 왔군.”



“올리버.”



“왜.”



“갈 때도 부탁해요.”



올리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번 다시 하기 싫어.”



“하여튼. 엄살은. 알았어요 알았어. 일단 여관이나 잡자고요. 기껏 눈 털어냈는데, 또 눈사람 되긴 싫잖아요?”







다시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하자, 세 사람은 마을 안을 돌아보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이 가장 먼저 눈에 띈 여관에 들어갔다.



펠릭스가 앞장서서 여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낯설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나 그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메를린과 실바누스 준남작이 나란히 서서 막 안으로 들어오려던 펠릭스를 멀뚱히 보고 있었다.



펠릭스는 도로 문을 닫고 여관을 나가버렸다. 두 사람은 여전히 여관 문을 지켜보았다. 문 밖에서 잠시 실랑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번에는 실비아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녀가 여관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듯 한 줄기의 눈보라가 열린 문의 틈을 통해 여관 안으로 뛰어들어와, 실비아는 여전히 투덜거리는 펠릭스를 잡아끌고 여관 문을 닫았다.







“제가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네요.”



메를린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내가 기다리던 사람도.”



실바누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그는 의아한 기분이 들어 메를린의 눈치를 살폈다. 메를린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의 딸이 아니었다. 그 딸 옆에 붙어있는 연금술사를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펠릭스의 일행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막 눈을 털고 여관 주인과 뭐라 떠들던 펠릭스는, 두 사람이 어느정도 가까이 다가오자 갑자기 손바닥을 불쑥 내밀었다.



“그만. 나중에 해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펠릭스가 말했다. 그래서 여관 주인은 잠시 당황했다가, 먼저 온 두 손님과 막 도착한 손님이 대충 친구사이쯤 되나보다 하며 넘겨들었다.



“겨우 눈보라를 뚫고 오는 길이니까 하고싶은 말이 있어도 좀 미뤄둬요. 탈진하기 직전이거든요. 둘 다, 예의 지킬 줄은 알잖아요?”



메를린은 뒤로 물러섰지만, 실바누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실비아도 불현듯 고개를 들어올렸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실비아······.”



“잠깐! 비켜줘요 준남작. 우린 아직 짐도 못 풀었거든요. 나중에 해요, 나중에!”



실바누스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펠릭스가 끼어들었다. 그는 실비아의 등을 떠밀며 계단을 올라가 2층으로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각자의 방에 짐을 풀고 나서 세 사람은 펠릭스의 방에 자연스레 모여들었다. 펠릭스는 영 아리송한 얼굴로 바닥에 퍼질러앉아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뭐해요?”



막 방 안으로 들어오려던 실비아는 흠칫하며 펠릭스를 보았다. 겨울잠자는 두꺼비마냥, 펠릭스의 눈은 힘이 풀려있었다.



“생각해요.”



문이 달칵 열리고 올리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비아는 옆으로 비켜서며 올리버에게 말없이 눈빛을 보냈다. 올리버는 처음에는 뭔가 하더니, 펠릭스의 힘풀린 눈을 보고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이요?”



“왜 두 사람이 여기있을까.”



“겨울 눈꽃 찾으러 왔다잖아요.”



“겨울 눈꽃은 돈이 안 돼요.”



펠릭스는 고개를 들어올려 실비아와 눈을 마주쳤다.



“메를린은 몰라도, 실바누스가 여기 있을 이유는 안 되거든요.”



“사업차 방문했겠지 뭐.”



올리버가 가볍게 말을 툭 던졌다.



“여기 내다 팔게 뭐가 있어요? 눈이랑 얼음밖에 없는데.”



“그 눈이랑 얼음이라도 내다 팔 생각인가보지.”



올리버는 스스로도 그게 얼마나 헛소리인지 잘 알고 있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피식 웃었다.



“내 참. 눈이고 얼음이고, 여기서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도 줄줄 녹거든요. 눈 녹은 물이랑 반쯤 녹은 얼음을 어디 써요?”



“연금술사잖아, 펠릭스. 뭐 방법 없어?”



펠릭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 녹게 만들 수도 있죠. 대신, 그러면 주먹만한 얼음 한 조각에 은화 열 닢씩은 받아야 할 걸요. 눈 한줌에 은화 서너 닢은 받고. 그만한 돈을 주고 누가 얼음을 사요?”



“또 모르지 뭐. 잘난체 하고 싶은 귀족이라든가······.”



이번에는 실비아가 피식 웃었다.



“펠릭스. 연금술로 못하는게 대체 뭐예요?”



“그러게. 나도 좀 궁금한데. 넌 먹구름도 만들고, 금도 만들고, 무지개 다리도 만들 수 있다면서. 거기에, 안 녹는 얼음까지?”



펠릭스는 짜증스레 기지개를 켰다.



“상상력만 받쳐주면 뭐든 만들 수 있어요.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게 아니잖아요. 왜 두 사람이 여깄는지. 정말 나랑 같은 물건을 찾고 있는지······.”



‘똑똑’



기다렸다는듯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짝을 향해 돌아갔다.



“문 밖에서 듣고있었나. 어휴. 실바누스인지 메를린인지는 몰라도······.”



펠릭스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문 밖에서 기다리던 여관 주인이 살짝 놀라며 뒤로 움찔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무슨 일이죠?”



“저희 여관은 선불이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아. 죄송해요. 아깐 좀 바빠서. 보자, 그래서 얼마라고요?”



“한 사람당 세 닢씩. 은화 아홉 닢이요.”



“비싸네요.”



펠릭스는 궁상맞게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며 동전을 긁어모았다.



“저도 벌어먹고 살려면 어쩔 수가 없어요.”



“이해해요. 여관업 하기 좋은 땅은 아니니까.”



여관 주인은 때묻은 은화 아홉 닢을 받아 주머니에 쑥 집어넣고 나서야 돌아갔다.



“전혀 공작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문이 닫히고 나서 몇 초 정도 더 기다린 뒤에야 실비아가 말했다.



“난 떠벌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라. 그리고 여행중에 돈자랑 하는건 나 죽여달라 하는거랑 똑같거든요.”



펠릭스는 여전히 궁상맞게 주머니 여기저기를 뒤적거렸다.



“그래서, 펠릭스. 이제 어쩔 셈이야?”



“뭐 어쩌긴. 일단은 쉬어야죠.”



내키는 만큼 주머니를 뒤적인 뒤에야 펠릭스는 침대로 걸어가 풀썩 드러누웠다.



“지쳤거든요. 당신도 지쳤잖아요. 실비아도 비슷하겠죠. 눈보라를 뚫고 다니는건 할 짓이 못 된다니까.”



“듣던중 최고의 계획인걸. 그럼, 난 먼저 간다.”



올리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펠릭스의 방을 나섰다.



“그럼 저도 쉬고 있을게요.”



곧이어 실비아도 방을 나섰다. 펠릭스는 두 사람에게 배웅도 하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워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 그러고보니. 마침 메를린도 있는 김에······.”







식사 시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사를 준비할 시간도 아니었지만, 여관 부엌에서 솥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를린은 새빨갛게 타오르는 장작 앞에 서서 부글부글 끓는 솥을 주걱으로 휘휘 젓고 있었다. 솥 안에는 연분홍빛의 끈끈한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꼭 녹인 사탕처럼 보였다.



“메를린. 고마워. 덕분에 살았네.”



펠릭스는 솥 근처에서 벽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었다.



“펠릭스. 넌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뜸 다리부터 고쳐달라 그래?”



“고장났거든.”



“안부 정도는 물어봐도 되잖아. 내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 궁금해?”



여전히 솥을 바라보며 메를린이 말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메를린은 이제서야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냈어.”



“왜 여기있어?”



메를린은 잠시 주걱을 멈추고 웃는 얼굴로 펠릭스를 바라보았다.



“대스승님한테 들었어.”



“뭘.”



“펠릭스. 너, 죽음의 약 못 만든다면서.”



펠릭스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만들 수 있어.”



“최고의 약은 못 만든다면서. 대스승님이 말 해 줬어. 넌 죽음을 몰라서, 죽음이 두렵지가 않아서, 최고의 죽음의 약은 못 만든다면서.”



“그래서?”



펠릭스는 조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메를린은 온화하게 웃으며 받아주었다.



“내가 만들어줄게.”



“네가? 넌 못 만들어 메를린. 넌 아직······.”



“펠릭스. 나도 경지에 올랐어. 나도 너만큼 할 수 있어.”



메를린은 이제 펠릭스를 향해 몸을 완전히 돌려 그와 마주보고 서 있었다.



“난 더이상 네가 지켜줘야 할 어린애가 아니야.”



“메를린. 나한테 너무 집착하는거 아냐?”



“내가 싫어?”



펠릭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싫진 않지.”



“그럼?”



펠릭스는 대답하지 않고 메를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솥 타겠어.”



메를린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펠릭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솥이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들리고, 어딘가 이질적인 단내가 부엌에 풍기기 시작했지만,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실비아는 여관 일층으로 내려와 차를 한 잔 주문한 뒤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불투명한 유리창 때문에 바깥 풍경은 흰색과 어둠색 뿐이었다. 불도 제대로 켜지지 않은 거리에서 보이는 건 흰 눈과 하늘 위의 어둠 뿐이었다.



여관 주인이 차를 가져다 주자, 실비아는 두 손으로 잔을 들어올리고 여전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얌전히 집 안에 있었을 때는 본 적 없는 낯선 풍경. 차갑고, 으슬으슬했지만, 좋았다.



누군가가 실비아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대각선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안녕 아빠.”



여전히 창밖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실비아가 조용히 말했다.



“실비아. 그동안 잘 지냈나.”



“그럭저럭. 아빠는?”



실바누스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럭저럭 지냈다.”



“다친데는 이제 안 아파?”



“흉터가 남았다. 그 외에는, 괜찮다.”



실비아는 창문 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들어올렸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미안해, 아빠. 내가 좀 더 잘 했으면, 흉터 안 남았을텐데.”



실바누스는 살짝 숨을 들이쉬었다.



“상처가 깊으면, 흉터가 남는건 당연하다. 그 연금술 약으로 흉터를 가리는게 무슨 소용이냐.”



“보기 흉하잖아.”



“가린다고 사라지는게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게 아냐.”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아버지 때문인지, 실비아는 살짝 입을 비죽 내밀었다.



“여긴 왜 왔어? 나 찾아서 설교하려고?”



실바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서쪽에서 금맥 찾았다고 편지했잖아. 받아보긴 했어? 거기 있어야 하는거 아냐?”



“거긴 믿을 만한 사람들을 보내놨으니, 괜찮다.”



“언제는. 딴 사람 못 믿겠다더니.”



실바누스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사업을 하려면, 좋든싫든 누군가를 믿어야만 한다. 어쨌든, 믿을 만한 사람들을 보내 밑작업을 하고 있으니, 금맥 쪽은 신경 꺼라.”



“그래서. 왜 온 거야, 아빠.”



실비아는 서서히 눈을 들어 실바누스 준남작과 눈을 마주쳤다.



“네 뒷조사를 했다.



“날? 또? 왜?”



단번에 실비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버지로서, 네가 어디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 그랬다.”



실비아는 화를 내지는 않고, 다만 한참동안 말없이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떠들썩하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더구나.”



“응. 뭐, 그렇긴 했어.”



지나온 여행길을 돌이켜보며 실비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남쪽으로, 서쪽으로, 이제는 북쪽으로. 네가 다녀간 곳에서는 다들 기억하고 있더구나. 이상한 삼인조라고.”



“좀 이상하긴 했지.”



“에밀리아 한테도 들었다. 약을 만들 재료를 찾고 있다던데. 여전히 무슨 약에 쓸 재료인지 말 할 생각 없나?”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긴 왜 왔어?”



“내가 왕국 어디에 있든, 내 마음이다.”



실바누스는 딸의 얼굴을 한동안 내려보다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덧붙였다.



“누가 귀띔을 해 줬다.”



“누가?”



“북쪽 어딘가의 숲에서 만난 방랑자가.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너를 알더구나. 화이트클리프로 갔을 거라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 말을 믿어?”



“내 딸과 관련된 일이야. 만일 거짓말이었다면, 나중에 가서라도 처리하면 될 일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거짓말을 한 것 같지는 않구나.”



실비아는 그 수수께끼의 방랑자가 제이콥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날 만나려고 여기 와 있던거야?”



“그래.”



실바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널 데리고 돌아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 순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실비아는 다시 두 손으로 잔을 들어올리고 차를 한 모금 호록 마시더니, 잔을 거세게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난 안 가.”



“실비아. 이번에는 널 꼭 데리고 돌아가야겠다.”



“왜? 왜또? 왜, 왜!”



실비아가 화를 버럭 내자, 눈보라를 피해 여관 안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말 못 한다.”



“왜? 또 어디 결혼 약속 잡아뒀어?”



“그런게 아니다.”



“그러면? 아예 집안에 가둬 두려고?”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럼 뭔데? 왜 또 데려가려는건데? 그 때, 서쪽에서 헤어질 때, 믿어준다면서! 약 완성할 때까지는 기다려 준다면서?”



“여기서 할 만한 말이 아니다.”



“이제 다 왔어! 이게 마지막이란 말이야. 여기서 꽃 한 송이만 찾으면 끝나. 그러고 나면, 나도 집으로 돌아갈게.”



“그 꽃 때문에 그러는거다. 하지마라. 여기서 멈춰라. 그만 돌아가자.”



“싫어!”



실비아가 벌떡 일어났다.



“왜 또 방해하는데?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서 그러는거야?”



“그 꽃. 겨울눈꽃 이랬던가. 평범한 꽃이 아니다.”



“그렇겠지! 눈 위에선 꽃이 피질 않으니까!”



“그런 뜻이 아니야!”



실바누스가 엄숙하게 말했다.



“실비아.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 꽃을 찾지 마. 다른건 몰라도, 그건 안 돼. 더이상, 넘어오지 못할 강을 건너지 마라.”



실비아는 바로 화를 내려다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 눈을 깜빡였다.



“넘어오지 못할 강이라니. 무슨 소리야?”



“실비아. 여기서 할 말이 아니다.”



“왜? 나랑 의절하려고? 난 그런거 안 무서워.”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냐! 말 그대로다. 겨울 눈꽃을 찾지 마. 그런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한테는 필요하다구! 난 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재료가 필요하단 말야.”



“찾지 마라.”



실바누스가 다시 엄숙하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네 마음대로 살게 해 줄테니까. 더이상 결혼을 주선하지도 않으마. 분명히 약속할 수 있다. 그리고, 뛰어난 음악가를 붙여 피아노를 가르쳐 줄 수도 있다. 듣자하니 수도에서 피아노 콩쿠르에 나갔다더구나. 귀족들의 물밑공작을 뚫고 삼 등씩이나 했다고.”



실바누스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달라졌듯이, 나도 전과 달라졌다 실비아. 하고싶은걸 하기 위해 더이상 집을 떠날 필요 없다. 그러니, 그만 여기서 멈추고 집으로 돌아와라 실비아.”



실바누스는 눈을 살짝 돌려 딸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고집스런 얼굴이었다.



“이것만 하고 갈게.”



“안 된다니까.”



“왜 안 되는데?”



실바누스는 말하지 않았다.



“왜 안 되는데? 넘어오지 못할 강이라는게 무슨 소린데?”



실바누스는 복잡한 얼굴로 실비아의 시선을 피했다.



“왜, 내가 연금술사라도 될까봐 그래? 아빤 연금술사 싫어하니까.”



여전히 실바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아주 바쁘게 떨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연금술을 싫어해? 나 어릴때, 그 때 그 일 때문에 그러는거야?”



“그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럼?”



실바누스는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실비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실비아. 마녀가 뭔줄 아나?”



실비아는 흠칫 놀랐다.



“아빠가, 아빠가 어떻게 그걸 알아?”



“마녀가 뭔줄 아나? 실비아. 대답해라.”



실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뭔줄 안다면, 여기서 그만 멈춰라.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두 번 다시 못 돌아온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니까.”



실비아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잘 들어라, 실비아. 나도 네가 모르고 살기를 원했다. 알아서 좋을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차라리 진작 말했다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빨리 말 해.”



실바누스의 입이 움직였다.



“실비아. 네 엄마는 마녀였다.”







귀가 있다고 모든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귀로 들었다고 전부 들리는 것도 아니다.



“뭐라고?”



실바누스는 같은 말을 다시 속삭였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숙였던 허리를 서서히 도로 폈다.



“아빠. 지금, 그게······.”



“네 엄마가 널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건, 너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아빠. 그게 무슨 뜻이야······.”



“에밀리아는 물려받지 않았다. 그래서, 난 너도 물려받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넌 물려받았다. 어릴 때부터 혼자 숲 속을 드나들었지. 그 위험한 곳을. 상처 하나 없이.”



실비아는 헛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맺힐듯말듯 했다.



“아니. 그러니까. 아빠. 그냥, 방금 막 지어낸 이야기지? 난 그런거 전혀 몰랐어. 그리고, 언니도 그런 이야기 한 적 없단 말야. 집 안에 솥을 걸어뒀다는 이야기도 없고, 그리고 우리집은 숲 속에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너도 대충 마녀가 뭔지는 아는가보구나. 하지만, 실비아. 네 엄마는 마녀였다.”



“그래서?”



“숲을 떠났지. 나와 결혼하려고. 너희들을 낳아 기르려고.”



“그런데?”



“오래 못 갔다. 계속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어버렸다. 네가 아직 어렸을 때.”



실바누스는 창 밖으로 시선을 살짝 돌렸다.



“네 엄마가 내게 말했다. 숲과 요술과 연을 끊고 살 수도 있다고. 그러려면, 최대한 멀리 해야 한다고. 마녀랑 관련된 건 뭐든지 간에. 하지만, 그래도 채 십 년을 못 버텼다.”



실바누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연금술은 마녀가 가르쳐준 지식. 결국 마녀의 것. 가까이 하지 마라 실비아. 이제 그만 발을 돌려라. 그 길로 계속 나아가면, 너도 마녀가 될 뿐이다.”



실바누스는 목구멍을 넘어오려던 무언가를 힘겹게 삼켰다.



“마녀가 되고싶은거냐? 평생 숲에 얽매여 사는게 네 꿈이었나? 집안이 답답하다고 뛰쳐나가더니, 집 대신 숲에 갇혀 평생 살 생각이냐?”



“그런거 아냐. 그렇지만······.”



“여기서 그만 멈춰라, 실비아. 아직 돌아올 수 있다. 돌아와서 귀족으로 살아라. 네가 하고싶은건 뭐든 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까. 친구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사귀게 해 주마. 뛰어난 예술가를 집안으로 초청할 수도 있다. 사업이 궤도에 올랐으니까. 이제 충분히 돈이 많으니까. 하지만, 그 꽃을 손에 쥐면 넌 더이상 돌아올 수 없다.”



"왜 못 돌아가는데? 아빠가 어떻게 알아?"



"물어봤다. 너희들의 대스승이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어쩌면, 날 찾아왔을지도 모르겠군. 그가 가르쳐줬다. 생각해 봐라 실비아. 세상에 존재 하지 않는 재료가, 어떻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



실비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애초에, 더이상 아무것도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녀가 만들어 낸 것이다."



실비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겨울 눈꽃은 꽃이 아니다. 씨앗에서 싹을 틔워 피는 꽃이 아니다. 마녀가 만들어낸 꽃이다.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재료다. 실비아. 네가 그걸 찾게 놔 둘 수는 없다. 한번 마녀가 되면, 영원히 마녀로 살아가야 한다. 숲에 뿌리를 박고 평생. 죽을 때까지. 네가 그렇게 살도록 놔 둘 수는 없다."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떨리는 두 손으로 잔을 집어올렸다. 하지만, 결국 실비아는 잔을 입에 가져다 대지 못하고 도로 내려놓았다.



“돌아가자. 마녀가 될 생각은 없지 않았느냐.”



“나, 연금술을 배우고 있었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서, 그래서······.”



“그만 둬라. 그게 아니라도 사람들을 도와줄 방법은 많다. 넌 똑똑하고, 그리고 이제 돈도 많다. 연금술과 마녀의 요술은 한 발짝 차이다. 괜히 연금술에 매달리다가, 실수로 발을 헛디뎠다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나, 그래도······.”



“마녀자 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괜찮다고 말할 셈이냐?”



실비아는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만 가자.”



실바누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재밌었겠지. 이제, 놀이는 끝났다. 해가 저물었다. 그러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



실바누스는 실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아버지의 손을 보았다.



“아까 한 말, 진짜지?”



“진짜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다. 네 엄마는 마녀였다. 너는 그걸 물려받았다. 네 대스승은 내게 진실을 말해줬다. 그가 살아온 백구십삼년의 세월을 걸고 맹세했다.”



“그래도, 거의 다 왔는데. 마지막 재료란 말야. 그것만 찾으면······.”



“그만 돌아가자.”



실비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머리가 새하얗게 물들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기가 뭘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왜 실바누스가 내민 손을 잡으려 하는지. 그저, 실비아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준남작.”



펠릭스가 슬그머니 손바닥을 내밀어 실비아의 손을 가로막았다.



“가족사다.”



“저랑 계약 했거든요. 보실래요?”



펠릭스는 또 궁상맞게 한참이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구깃한 계약서를 꺼내 준남작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준남작은 두 눈으로 순식간에 계약서를 훑어보다가 단번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딴 사기계약을 하다니. 위약금으로 금화 백닢을 무는 계약이 어딨나?”



“뭐 어때요. 당신 딸도 서명했거든요.”



“위조다!”



“고발하시든가. 난 법정에서 당당할 자신 있거든요. 한, 서너달 걸리겠죠?”



펠릭스는 히죽 웃으며 실바누스의 옆으로 걸어가더니, 뒤꿈치를 들고 서서 그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금광 사업. 중요한 시기 아닙니까? 서너달 씩이나 비워둬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지금 위약금으로 금화 백닢 내실래요?”



실바누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자. 그럼, 전 이만.”



“기다려, 연금술사!”



실비아의 등을 떠밀던 펠릭스는 휙 뒤를 돌아보았다.



“네가 뭘 하는 줄은 알고 있는거냐? 실비아가 어떻게 될 지 네가 아냔 말이다!”



“당신은 아나요?”



“안다! 그래, 제 엄마처럼 되겠지.”



“대단하네요. 그렇게 미래를 잘 알면, 어디 돗자리 펴고 점쟁이나 하지.”



“이놈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실바누스가 얼마나 더 길길이 뛰든 말든, 펠릭스는 실비아의 등을 떠밀며 자기 방으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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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연금술 가게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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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170화 22.01.12 38 1 24쪽
169 169화 22.01.11 33 1 24쪽
168 168화 22.01.10 34 1 23쪽
167 167화 22.01.09 36 1 22쪽
166 166화 22.01.08 34 1 23쪽
» 165화 22.01.07 37 1 26쪽
164 164화 22.01.06 32 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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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4 1 22쪽
160 160화 22.01.02 36 1 25쪽
159 159화 22.01.01 37 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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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56화 21.12.29 35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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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154화 21.12.27 40 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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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150화 21.12.23 39 1 22쪽
149 149화 21.12.22 37 1 21쪽
148 148화 21.12.21 40 1 22쪽
147 147화 21.12.20 44 1 22쪽
146 146화 21.12.20 39 1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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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144화 21.12.18 43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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