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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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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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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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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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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144화

DUMMY

식당 문 옆에 서서 어색하게 펠릭스를 기다리고 서 있던 실비아는 문득 이 저택 안에서 자기가 하인만 못한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바로 지금도 그녀의 눈앞을 스쳐지나가는 하인들은 적어도 실비아와 달리 뭔가 할 일이라도 있었다.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실비아는 처음에는 무섭고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는 짜증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관상용으로 새장에 갇힌 느낌. 자기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 하나같이 익숙하다 못해 질리는 느낌들이었다.



그래서 실비아는 벽의 무늬나 바닥의 융단과 눈싸움 하던 것을 그만두고 될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따지고보면, 자기는 웨일 가문의 차남이 초대한 손님 아니던가? 무슨 일이 벌어지든간에 마땅히 펠릭스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몇 걸음 걷다말고 실비아는 도로 걸음을 멈춰버렸다.



‘나랑은 무관하다고요.’



하다못해 가족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조금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던 그가, 실비아가 실수를 한다고 해서 대신 사과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실비아는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다시 식당 문 앞에 서서 괜히 어색하게 벽만 쳐다봤다.



줄곧 벽과 눈싸움을 하던 실비아는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건 꽤 낯선 일이었는데, 웨일 저택 안의 사람들은 다들 신비로운 약이라도 마셨는지 전혀 인기척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눈앞을 하인이 스쳐지나가도, 심지어 눈에 그의 모습이 보여도 인기척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곳 하인이었다. 그래서 실비아는 아주 의아한 기분으로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았다.



실비아의 등 뒤에는 훤칠한 미남이 서 있었다. 머리칼은 단정하고,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으며, 펠릭스보다 키도 두 뼘 이상이나 더 컸다. 흉측하게 배가 나오지도 않았으며, 다리는 근육이 붙어서 팽팽했다. 다만, 한가지 흠이라면, 입고있는 옷이 쓸데없이 화려하다는것 하나였다.



“누구?”



남자의 눈동자는 펠릭스나 그의 어머니보다 훨씬 많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아, 저는······.”



실비아는 잠시동안 자기를 뭐라고 소개하는게 좋을까 생각했다. 펠릭스의 손님? 제자?



“펠릭스가 초대한 손님이에요.”



스스로를 손님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실비아는 이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의 소개라고 생각했다.



“펠릭스가?”



그는 펠릭스의 이름을 듣더니 여과없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보였다.



“혹시, 너도 연금술사인가?”



“아, 그러니까, 일단은요.”



“일단은?”



남자는 아리송한 얼굴이되어 의심스런 눈초리로 실비아를 힐끗거렸다.



“우리집에 죽을 사람은 없는데.”



그러더니 그는 아주 이상한 말로 실비아에게 대꾸했다.



“네?”



“죽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그런데, 왜 온거지?”



실비아는 아주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펠릭스가 저를 초대했어요. 그뿐이에요.”



“여기서 연금술사가 할 일은 없어. 그만 돌아가.”



다시 펠릭스가 언급되자 그는 못마땅한 얼굴이 되었다.



“네? 그래도······.”



“이 집의 주인은 나야. 펠릭스가 아니라, 나라고! 손님이 되었으면 집주인의 말은 따라야지. 안 그래?”



남자는 뜬금없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다가, 뒤늦게 얼굴을 붉히며 실비아와 시선을 피했다.



“나가.”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잘은 몰라도,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조금 제정신이 아닌듯했다. 자세히 보니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린다든가, 손가락 끄트머리가 바들바들 떨린다든가, 눈동자도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 그러면. 펠릭스에게······.”



“나가! 나가! 나가!”



남자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폭발하자 실비아는 재빨리 도망치듯 복도를 가로질렀다.



“당장 나가버려! 여긴 내 집이야! 그놈의 손님따위, 나가! 나가아아아아아!”



그의 광기어린 목소리가 복도 저편에서 악몽처럼 울려퍼졌다.







복도 모퉁이를 돌던 실비아는 맞은편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와 화들짝 놀랐다.



“꺅!”



맞은편에서 오던 사람은 아주 몸놀림이 잽싸 그 잠깐 사이에 몸을 피했다. 덕분에, 실비아가 품위없이 낯선 남자와 부딪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남자는 중죄라도 저지른 죄인처럼 죄송스런 얼굴로 실비아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방금 봤던 사람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지만, 그도 꽤나 쾌남이었다. 머리카락은 짧았으며 피부는 구릿빛이었다. 입고 있는 것은 하인의 옷도 아니고, 귀족의 옷도 아니었다. 어딘가 허름하고 평범한, 농부의 옷과 더 비슷해 보였다.



“저, 당신은?”



“아, 손님이셨죠? 저는 그레고리라고 합니다. 도련님이 불러서 가던 길이었는데, 혹시 당신이 그 실비아 로즈베리 맞습니까?”



그 남자는 바다 건너 땅에서 살다 왔는지 목소리에 조금 독특한 억양이 남아 있었다.



“네. 제가 실비아 로즈베리에요.”



그레고리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실비아에게 허리를 꾸벅 숙였다.



“환영합니다, 실비아. 그럼, 도련님이 시키신대로. 우선 방으로 안내 해 드리겠습니다.”



실비아는 환영한다는 그레고리의 말이 조금도 사실처럼 들리지 않았다. 무관심한 펠릭스. 그 이상으로 무관심한 그의 어머니에, 방금 만난 괴짜까지.



“정말로 저를 환영하시나요?”



“도련님의 친구 아닌가요? 그렇다면 당연히 환영하죠.”



“아, 다른 사람들은 별로 저를 반기지 않는것 같아서요.”



실비아가 어색하게 웃자 그레고리도 순수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기분탓일겁니다. 웨일 가문은 다들 사람 대하는걸 어려워 하니까요. 그럼, 이만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레고리는 안심하라는듯 다시한번 실비아에게 악의가 담기지 않은 미소를 지어주고 나서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레고리는 아주 독특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실비아가 보기에는 그레고리야말로 이 저택 안에서 가장 독특하고 이질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아무리봐도 농부, 또는 어부의 옷과 별 다를게 없었다. 하지만 저택 안에서 그런 옷을 입고있는 것은 오직 그레고리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그레고리는 그 펠릭스나 그의 어머니보다도 저택 안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저, 그레고리?”



“편하게 부르십시오. 도련님의 친구분 아닙니까?”



그레고리의 목소리는 바닷바람처럼 힘차고, 서늘하며, 또한 조금 끈적거렸다.



“아, 네. 고마워요. 혹시,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맞은 편에 두 명의 하인들이 장식된 도자기 항아리를 닦고 있는데도 그레고리는 조금도 걸음을 늦추지 않고 직진했다. 그러자 하인들은 그레고리를 방해하지 않도록 슬쩍 몸을 피해주었다.



“당신도 이 저택의 손님인가요?”



“하하! 아니오. 전혀요. 제가 손님처럼 보이나요?”



“다른 사람들이랑 달라 보여서요.”



실비아가 조금 숨을 헥헥거리며 말했다. 그레고리의 발걸음은 아주 독특했는데, 그는 평범한 보폭을 가진듯 하면서도 남들의 배 이상의 속도로 휙휙 앞서나갔다. 달리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지만, 실비아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사실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 저는 원래는 하인이 아니었거든요.”



“그럼, 원래 뭐였어요? 발이 빠른걸 보니 전령이었나요?”



“전령이라. 아니오. 비슷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눈앞에 계단이 나타났는데도 그레고리는 마치 몸무게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휙휙 가볍게 계단을 올라갔다.



“잠시만요!”



결국, 계단 앞에서 실비아는 항복하듯 외쳐버렸다. 그러자 그레고리는 뒤를 돌아보고 실비아가 숨 고르는 것을 보더니 다시 한 달음에 계단을 휙 내려와버렸다.



“아, 죄송합니다. 그만 착각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도련님의 친구 분이지, 도련님이 아닌데.”



실비아는 조금 숨을 고르며 대꾸했다.



“그 도련님은 정말 걸음이 빠르겠어요.”



“네. 펠릭스 도련님은 저와 같이 걸어다녀도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거든요.”



실비아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래요? 펠릭스가요? 하지만, 그는······아, 언제적 일인가요?”



“오래 전의 일이죠. 도련님이 연금술사가 되기도 전의 일이니까. 제 걸음에 발 맞출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 대단했죠.”



“어린 아이들은 힘이 넘치니까요.”



실비아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개구쟁이였을 시절의 펠릭스를 떠올려보았다.



“아니오. 도련님은 제가 어떻게 걷는지를 보고 제 기술을 금새 익히셨습니다. 오히려 체력은 평범한 편이었죠.”



“기술이에요? 걷는데도 기술이 있어요?”



“물론이죠! 걷는것 뿐만 아닙니다. 말 한 마디, 손짓 하나 발짓 하나에도 전부 기술이 녹아있거든요. 함부로 말씀드릴수는 없습니다만.”



그레고리는 그 기술들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는듯했다.



“무슨 기술이 필요해요? 그냥 걷고 말하면 되는게 아니에요?”



“음. 더이상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충분히 숨을 고르셨나요?”



“네.”



“그럼, 다시 갈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레고리는 한 달음에 계단을 휙 올라갔다.







그레고리의 뒤를 힘겹게 쫓아 실비아가 도착한 곳은, 방이었다. 그것도 아주, 아주 커다란 방. 방 안에는 세 사람이 동시에 잘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옷장은 짙다 못해 검은 빛이 도는 갈색이었는데, 흠집이 조금도 없었다. 다른 가구도 마찬가지였다. 서랍장이나 거울이 놓인 장식장. 칠이 벗겨지지도 않았고, 어디 한 군데 뒤틀린 부분도 없었다. 화려한 장식물은 단 하나도 없는 곳이었지만, 대신 방 안의 천장부터 바닥까지 그 모든 것들이 조용히 분위기를 잡아주었다.



“응접실인가요?”



실비아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엉망진창인 책장을 발견하고 방금 자신이 던진 질문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달았다.



“도련님이 쓰시던 방입니다.”



“펠릭스가요?”



실비아는 그러면그렇지 하며 피식 웃었다. 펠릭스는 연금술 가게에서도 장부 관리는 엉망진창으로 했으니까.



“펠릭스의 방이라니. 조금 신기하네요.”



실비아는 다시한번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다가 여전히 문 옆에 멀뚱멀뚱 서 있는 그레고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계셨네요?”



“네. 도련님이 편지를 대신 좀 부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편지요?”



“네. 방으로 안내한 다음, 실비아 로즈베리가 쓴 편지를 대신 좀 부쳐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편지라니. 저는 금시초문인데······.”



실비아는 숲을 떠나며 마차 안에서 펠릭스가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아직 인사를 못 건넨 연금술사들에게 편지를 부치면 된다고 했던 그 말. 그것은 실비아의 생각과 달리 농담이 아니었다.



“아. 기억났어요.”



실비아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종이와 잉크는 아무거나 쓰면 될까요?”



“원하시는 상표가 있다면 바로 찾아오겠습니다.”



“아뇨. 딱히 없어요. 그냥, 평범한 것이면 돼요. 저, 책상을 써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실비아는 아마 어린 시절의 펠릭스가 썼을 책상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의자에 앉아보았다. 어린 아이가 앉기에는 조금 높은, 지금의 그녀의 키에 딱 맞는 의자였다.



“종이는······.”



“오른쪽 첫번째 서랍입니다.”



실비아는 서랍을 열어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오랜 세월 비어있었던 방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종이는 새 것 처럼 깨끗했고, 그리고 어딘가 익숙했다. 자세히 살펴보며 종이를 만지작거리자, 실비아는 그 종이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했다. 그 숲 속에서 아이작이 나눠준 종이와 같은 것이었다.



“왜그러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조금 신기해서요. 다른 곳에서도 우연히 같은 종이를 본 적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조금 의외로군요. 웨일 외에 그런 종이를 쓰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면, 제 착각인가봐요.”



실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펜을 집어들고 편지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글씨를 몇 자 쓰다말고 실비아는 여전히 문 옆에 서 있는 그레고리를 힐끗 보았다.



“기다리고 계실 건가요?”



“그렇습니다. 편지가 완성되는대로 바로 부쳐드리겠습니다. 혹시, 불편하십니까?”



“조금요.”



그레고리는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문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더 불편해요! 알았어요. 금방 써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천천히 쓰셔도 됩니다. 저는 하인일 뿐이니까.”



실비아는 다시 몇 자 쓰다말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평범한 하인은 아니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결국 하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레고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미소를 본다 해서 딱히 실비아의 마음이 놓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편지를 완성하여 그레고리편에 들려주자, 그는 소리없이 방을 나가 조금의 인기척도 내지 않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레고리가 떠나자 펠릭스가 쓰던 빈 방에 혼자 남은 실비아는 괜히 눈치를 살피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실비아는 아까부터 신경쓰이던 책장을 향해 걸어갔다. 다른 모든 것들이 정갈하게 정돈된 이 방 안에서 유일하게 무질서하게 흐트러진 책장으로.



책장 앞에 멈춰선 실비아는 무슨 책이 꽂혀있나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나같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책들 뿐이었다. 수학, 논리학, 역사학, 신학, 천문학, 약학, 의학, 하나같이 실비아도 전부 보았던 것들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공부했던 것과 똑같은 책도 몇 권 있을 정도였다. 그 사이에서 실비아는 더럽다못해 표지가 거의 뜯어져 나가려는 책을 하나 발견했다.



실비아는 손가락을 뻗어 조심스레 그 표지없는 책을 뽑아들었다. 익숙한 무게감을 느끼며 펼쳐보자, 펠릭스가 끼워둔 수많은 메모지가 우수수 쏟아져나와 봄날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꺅! 실수했다.”



실비아는 황급히 부스럭거리며 종이를 수습하다, 그 위에 적힌 글자들을 드문드문 읽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건 어떤 약에 관한 메모였다. 아주 빽빽하고 강박적인, 무시무시한 집착이 느껴지는 메모. 아이작의 이름도 있었으며, 엘릭서도 종이 이곳저곳에서 언급되고 있었다. 약물이 담긴 병을 그린 그림이나, 또는 솥을 젓는 도식. 복잡한 그림 모형. 수없이 많은 숫자와 문자, 암호같은 말귀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죽음의 약!’



펠릭스가 거칠게 휘갈겨 쓴 글씨였다.



“뭐하고 있어요?”



그 메모의 주인이 말하자, 실비아는 다시한번 깜짝 놀라 책을 덮어버렸다.



“펠릭스! 왔으면 왔다고 인기척을 좀 내 줘요.”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으로 붉어진 얼굴을 실비아가 감출 새도 없었다. 문 가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서 있던 펠릭스는 가볍게 몸을 털고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나요?”



펠릭스는 자기가 쓰던 책상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좀 오래 기다리긴 했어요.”



“하긴.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서. 뭐, 그래도 별 일 없었죠?”



“별일 없었겠어요? 복도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지 않나. 당신이 붙여준 그레고리는 발이 너무 빨라서 따라잡기도 벅찼어요.”



실비아는 마음에 담아둔 말을 따박따박 쏟아내었다.



“아, 뭐. 미리 말을 한다는게 깜빡해서 그만. 그레고리는 발이 좀 빠르긴 하죠. 그래도 말 한 마디만 하면 걸음을 맞춰 줬을텐데.”



실비아는 걸음을 늦춰달라고는 한 마디도 한 적 없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러면, 그 복도에 이상한 사람은 뭐예요?”



“빅터.”



펠릭스는 짧게 대답했다.



“빅터?”



“네. 빅터. 정신이 좀 오락가락 한다고 해야하나. 뭐, 이해는 가지만.”



“여기가 자기 집이라고 하던데요. 그러면서 저보고 당장 나가래요. 설마, 미친 사람은 아니죠?”



“아직까지는요. 그리고 여긴 그 사람 집이 아니니까 걱정 마요. 따지자면 우리 엄마 집이지.”



“그러고보니, 저는 당신 어머니 성함도 몰라요. 소개를 했는데도.”



“빅토리아 웨일. 뭐, 이름을 안다고 해서 별반 달라질건 없겠지만요.”



“빅토리아? 그런 이름이었군요. 그런데, 아까 빅터라고요? 그 이상한 사람 이름이······.”



“네. 우리 엄마 첫째아들.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빅터. 웨일 가문의 상속자 빅터 웨일.”



실비아는 잠시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했다.



“그럼, 복도에서 저한테 화낸 사람이 당신 형님이라고요?”



“네.”



“당신 형은 그림을 잘 그린다면서요.”



“네. 잘 그려요. 보실래요?”



“미친 사람 처럼 보였어요! 갑자기 이유도 없이 성난 소처럼 버럭버럭 화를 냈다고요! 그런 사람이, 식당에 걸린 그림들을 직접 그렸다고요?”



“정신머리가 좀 약한 사람이라 그래요.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걱정 마요.”



“세상에.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당신 어머니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못 느끼는 것처럼 보이던데. 그 사람은 왜그렇게 성격이 불같대요?”



“아빠를 닮아서.”



펠릭스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고보니, 저택 안에서 당신 아버지는 본 적이 없는걸요.”



“죽었으니까.”



“네. 그렇군요······네?”



“죽었어요. 예전에.”



펠릭스는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죽은 사람이 보일리가 없죠.”



“그랬군요. 유감이에요. 어쩌다가······.”



“어머니가 죽였어요.”



실비아는 자신의 두 손이 비어있다는 것에 대해 뒤늦게 감사했다. 그 때 손에 뭐라도 들고있었다간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려 박살났을게 틀림없으니까.



“네? 뭐라고요?”



“어머니가 죽였어요. 아버지.”



“왜······왜요? 아니, 그보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지금?”



실비아가 경악하는것에 신경도 쓰지 않고 펠릭스는 무덤덤하게 말하기만 했다.



“네. 아버지도 정신머리가 약한 사람이라. 뭐, 이런저런 일들을 도저히 못 견뎠다네요. 그래서 어머니가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을까 해서 죽였다던데, 저야 모르는 일이죠. 그 때 나는 아직 일곱 살도 되기 전이니까.”



“뭐, 아무런 느낌도 안 들어요? 당신 아버지가 죽었다는데? 그것도, 당신 어머니가 죽였다고 하는데······.”



“그닥요. 애초에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옛날 일인데요 뭘. 그래서, 편지는 잘 썼어요? 듀프랑 버크한테 부칠 편지.”



더이상 떠들어봤자 별다른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일까. 실비아는 펠릭스가 말을 돌리는대로 그냥 따라주었다.



“아, 네. 썼어요. 그레고리편에 부쳤고요. 그런데, 그 사람도 좀 특이하던데요. 그냥 하인인가요?”



“하인이긴한데, 아주 하인은 아니고. 뭐라고 해야하나. 첩보원이라고 할까요? 귀찮거나 민감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죠.”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네요. 원래 뭐하던 사람이었대요? 군인?”



“첩자.”



“아.”



실비아가 기억하기에 첩자라는 단어에는 그리 좋은 의미가 담겨있지 않았다.



“그럼, 암살이라든가······.”



“잠입, 정보수집, 이간질, 파괴 공작, 암살, 독살. 다 하죠. 아주 유능한 사람이에요.”



“사람을 죽이기도 해요?”



펠릭스는 실비아의 눈망울을 보고 피식 웃어넘겼다.



“난 그런일 시킨적 없어요. 애초에, 어릴 때 좀 친하게 지낸 뒤로는 오늘에서야 다시 만난 거니까.”



“그러고보니까. 그 사람, 아직 젊어보이던데. 대체 몇살때부터 여기서 일했대요?”



“열다섯인가? 아마도요. 유능한 사람은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이니까.”



“그럼, 그 사람은, 저랑 비슷한 나이대부터······.”



실비아는 거기서 그만 입을 다물었다. 말 해 봤자 자기만 더 슬퍼질것 같았기에.







펠릭스는 실비아가 쓸모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표류하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리고 실비아가 마침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뒤에야 펠릭스가 말을 꺼냈다.



“실비아. 원래는 잠깐 들렀다 떠날 생각이었는데, 조금 문제가 생겼어요.”



“무슨 문제요? 사실, 무슨 소리를 더 들어도 별로 놀랄것 같진 않네요.”



“첼시를 만났어요.”



실비아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골든포트에서 만났던 그 첼시요? 그 사람이 여기 왜 있어요?”



“지하감옥에 갇혀있던데요.”



“지하감옥에······네? 왜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래요? 아까부터 당신이 하는 말, 하나도 이해 못 하겠어요. 설명좀 해 줘요, 펠릭스.”



펠릭스는 목을 가다듬었다.



“웨일 가문은 올해 초부터 약재 사업에 뛰어들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첼시가 그것도 모른채 자기 사업 파트너랑 꿈버섯 밀매를 시작했고.”



“그래서요?”



“꿈버섯은 왕국 안에서 엄중히 다뤄지는 약재죠. 다시말해, 꿈버섯 사업이 잘못되어 왕국의 눈길을 끌었다간 약재 사업 전반에 악재가 드리울지 몰라요. 웨일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 일은 아니죠. 뛰어들려던 사업에 액운이 끼는 거니까.”



“그래서, 어쩌다가 지하감옥에 갇힌 건데요?”



“뭐, 저도 자세한건 몰라요. 대강 짐작건대, 사업을 방해하는 눈엣가시를 뽑는 김에 쓸만한 연금술사를 붙잡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인지도.”



“첼시를 만난 것이, 그 예상 밖의 일이에요?”



“아니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런 거예요. 엄마는 나한테 형의 정신을 파괴할 약을 부탁했어요. 약을 만들지 않으면 첼시를 죽이겠다고 협박했고. 그래서 어쩔까 싶어요 지금.”



“네, 네에? 정신을 파괴하는 약이요?”



“네. 사람의 감정을 뭉텅뭉텅 썰어내고,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열정의 불을 차게 식혀버리는 약. 그걸 만들어 주지 않으면 첼시를 죽이겠다던데요.”



“어떻게, 어떻게 그런 약을······. 친엄마가 친자식에게 그런 약을 부탁한다고요? 그것도, 다른 자식에게 만들어 달라고? 당신 친형을 죽이는 약을······.”



“뭐, 죽이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래서 조금 고민이네요. 어떻게 하는게 좋겠어요, 실비아?”



“아무리 그래도. 그런 끔찍한 약을 만들 수는 없잖아요.”



펠릭스는 슬쩍 웃었다.



“그럼 첼시가 죽을텐데.”



“첼시가 죽도록 놔둘 수도 없어요. 웨일은 법관은 아니잖아요? 아무리 귀족의 위세가 드높다 해도, 멋대로 처형까지 할 수는 없는걸요.”



“첼시는 골든포트에서 당신과 올리버를 납치했는데도?”



실비아는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화이트플레인 창고를 폭파시킨게 첼시인데도?”



“그건 몰랐어요!”



“지금 알았네요. 그래서, 여전히 첼시를 죽일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펠릭스는 실비아가 혼자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뭐,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솔직히, 저로서도 조금 골치아픈 일이라. 당분간은 여기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괜찮겠어요?”



“저야 뭐······.”



기다렸다는듯 펠릭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기다려 준다니 대단히 감사하네요. 그럼 어쩔까 천천히 생각을 좀 해 보자고요. 첼시와 빅터 중에 누구를 살릴지. 또는 누구를 죽일지. 뭐, 둘 다 죽일 수도 있지만 둘 다 살리기는 힘드려나.”



실비아는 아까부터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 펠릭스가 문득 무섭게 느껴졌다.



“왜요?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아니오.”



종종 느꼈던 감정이지만, 이제 아주 확실하고 분명했다. 역시, 펠릭스는 실비아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세상에서 홀연히 흘러들어온 낯선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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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에필로그 22.01.13 55 1 4쪽
171 마지막화 22.01.13 44 1 22쪽
170 170화 22.01.12 37 1 24쪽
169 169화 22.01.11 33 1 24쪽
168 168화 22.01.10 33 1 23쪽
167 167화 22.01.09 36 1 22쪽
166 166화 22.01.08 34 1 23쪽
165 165화 22.01.07 36 1 26쪽
164 164화 22.01.06 31 1 22쪽
163 163화 22.01.05 36 1 24쪽
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3 1 22쪽
160 160화 22.01.02 36 1 25쪽
159 159화 22.01.01 36 1 23쪽
158 158화 21.12.31 32 1 21쪽
157 157화 21.12.30 34 1 23쪽
156 156화 21.12.29 35 1 24쪽
155 155화 21.12.28 34 1 24쪽
154 154화 21.12.27 39 1 22쪽
153 153화 21.12.26 42 1 24쪽
152 152화 21.12.25 38 1 21쪽
151 151화 21.12.24 38 1 24쪽
150 150화 21.12.23 38 1 22쪽
149 149화 21.12.22 37 1 21쪽
148 148화 21.12.21 40 1 22쪽
147 147화 21.12.20 43 1 22쪽
146 146화 21.12.20 38 1 21쪽
145 145화 21.12.19 40 1 22쪽
» 144화 21.12.18 43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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