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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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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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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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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156화

DUMMY

일기장을 펼치자 한 사람의 성격이, 버릇이, 그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수많은 글자들이 나타났다. 그 글자들은 실비아의 눈을 향해 달려들어 한 남자가 살아온 역사를 그녀의 눈앞에 폭로해 보였다.



깜짝 놀란 실비아는 서둘러 일기장에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가빠진 숨을 어떻게든 차분히 골라낸 뒤에야, 그 기괴한 환각은 실비아의 눈동자 가장자리에서 사라졌다.



다시 일기장을 펼치고 실비아는 글자를 읽기 시작했다. 일기장 앞부분에는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날짜와 날씨로 운을 떼어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그에 따른 소감을 몇 마디 적어둔 평범한 일기장일 뿐이었다.



“뭐 없어요?”



펠릭스가 재촉하는 소리를 듣고 실비아는 종이를 파르르 넘겨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일기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넘겼던 종이를 한 장 한 장 되짚으며 실비아는 그 이유를 금새 찾아냈다.



펠릭스가 숲에 왔을 때부터, 제이콥의 일기장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처음에 제이콥은 펠릭스를 무시했다. 그 뒤로는 얕잡아보았다. 그러나 펠릭스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제이콥의 일기는 처음의 정갈함을 조금씩 잃어갔다.



제이콥은 불안했다. 두려워했다. 그는 여전히 펠릭스를 무시하며 때때로 그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일기장에 기록된 날짜로 보건데, 제이콥은 펠릭스가 연금술사들의 숲으로 들어온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이미 그가 얼마나 뛰어난 인재인지 깨닫고 만듯 했다.



“재미로 읽고있는거 아니죠?”



“아니에요! 당신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어요. 좀 기다려봐요.”



실비아는 또 한장을 팔랑 넘겼다. 펠릭스가 한 밤중에 몰래 약을 쑤었다는 이야기가 떨리는 필체로 불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규칙을 운운하며 펠릭스를 훈계했다지만, 정작 제이콥은 딴데 생각이 팔려 있었다. 자신이 첫 약을 만들기까지 여섯 달이 걸렸는데, 펠릭스는 한 달도 되지 않아 평범하게 좋은 약을 오롯이 혼자 힘으로 만들었다는 것. 제이콥은 이 때 이미 제자를 두려워하며 그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별반 다를것 없는 내용들을 술술 넘기다보니, 연례 연금술사 교류회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낯선 이름과 익숙한 이름들 사이에 펠릭스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당돌하게도, 스승을 무시하고 대스승과 독대하여 자기만의 약을 연금술사들에게 선보였다고. 그 때 만든 약에는 특별한 건 없었지만, 부족한 것도 없었다. 다시말해, 펠릭스는 그 때 이미 레시피에 통달해 버렸다.



“당신, 재능이 엄청나대요.”



“내가 좀 뛰어나긴 하죠. 그래서, 그런 당연한 이야기 말고 뭐 없어요?”



실비아는 종이를 또 한장 팔랑 넘겼다.



“당신 스승님은 당신이 무서웠나봐요.”



“그것도 알아요. 제이콥은 날 처음 봤을 때부터 날 무서워 했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실비아는 일기장에서 눈을 떼고 펠릭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보면 바로 알죠. 제이콥은 뭘 숨기는데는 영 아니었으니까. 아마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대충 눈치챘을걸요.”



“스승님한테는, 끔찍한 일이었겠어요.”



“자기가 자초한 일이죠.”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주걱을 힘껏 저었다.



“진작에 날 인정하고 아이작한테 날 떠넘기든가 했어야죠. 꼴에 스승이랍시고 능력 이상으로 욕심을 부러더니, 결국 이런 꼴이 되고 말았으니까.”.



펠릭스가 계속 솥을 젓도록 내버려두고, 실비아는 다시 일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기장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제이콥이 점점 무너져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의 글씨는 힘과 균형을 잃어버려 뒤로 갈수록 옅고 삐뚤빼뚤했다. 처음에는 간결한 어조로 감정을 잘 정리하여 하루에 한 마디씩 소감을 썼는데, 이제는 여과되지 않은 감정을 때때로 폭발시키며 거친 어조를 그대로 드러냈다. 펠릭스를 향한 분노, 질투, 원망.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두려움, 의구심, 불안감. 나쁜 감정은 다른 나쁜 감정과 섞여 부정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 거무칙칙한 소용돌이는 제이콥의 총기와 의지, 삶의 활력을 빨아먹으며 점점 크게 부풀었다.



“휴! 일단, 또 하나.”



펠릭스는 장작의 불을 꺼뜨리고 솥을 기울여 약을 걸러내기 시작했다. 과즙을 섞은 우유같은, 인공적인 분홍빛의 약물이 커다란 솥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구경하고 있어요?”



“아, 아녜요.”



실비아는 허둥거리며 다시 일기장에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펠릭스. 벌써 약을 만들기는 했네요?”



“힌트도 있었고, 짐작가는 구석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여유부리지 마요. 이건, 보통 병이 아니니까. 내 짐작만으로 해결됐으면, 진작에 약 만들었어요.”



펠릭스는 거친 솔로 솥을 순식간에 쓱쓱 닦더니 다시 물을 채우러 양동이를 들고 나갔다.







펠릭스가 새로 장작을 들고와 불을 붙이는 동안, 실비아는 계속 일기장을 읽어갔다. 이제 일기장에는 하루의 일과라든가, 그 날 일어난 일 따위는 거의 적혀있지도 않았다. 다만, 불안감에 몸을 벌벌 떨며 질투어린 눈으로 천재의 등을 훔쳐보는 불쌍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때때로 그는 발작적인 분노를 터트렸다. 그러고나면 그는 죽을듯이 무거운 우울에 흠뻑 젖어 몇날 며칠정도 산송장처럼 멍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펠릭스의 그림자를 보고 가벼운 환각을 느끼더니, 다시 불안에 온 몸을 벌벌 떨다가 그 발작적인 분노를 터트리길 반복했다.



어느 순간부터 일기장에는 제이콥의 이야기보다 펠릭스의 이야기가 더 많아졌다. 펠릭스가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치욕적이며, 끔찍한 일이었는지 일기장에 쓰여있었다. 그건 꼭 재판소에 보내는 고발장과 신부에게 내보이는 고해문을 반반쯤 섞은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제이콥의 일기는 갈수록 알아보기도 힘들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펠릭스. 당신 스승님이요······.”



“왜요? 뭐 좀 찾았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아닌데?”



실비아는 머뭇머뭇 일기장의 페이지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불쌍한 사람이네요.”



“불쌍하든말든. 그래서, 병의 단서는? 뭐 있어요?”



“아뇨.”



실비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계속 찾아봐요.”



“펠릭스. 저, 당신은 스승님을 보고 아무런 생각도 안 들어요?”



펠릭스는 솥에 재료를 넣으려다말고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네. 전혀.”



그는 다시 몸을 휙 돌려 무심하게 재료를 솥 안으로 던져넣었다.



“그래도······.”



“자기 그릇의 크기도 모르며 잘난척 뻗대다가, 자기보다 잘난 제자를 만나 제자를 질투하더니, 어떻게든 제자를 이겨먹겠다고 수작질을 부리다가 결국 패배해서, 마지막으로 끔찍한 역병을 집어던지고 나몰라라 도망친 인간이에요. 내가 제이콥을 보고 달리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차라리 아무 생각도 없는 편이 낫지 않아요?”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시선을 떨구고 일기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어쩌다가······.”



페이지를 넘기자, 단 하나의 거친 글귀가 한 장 가득 쓰여있었다.



‘왜, 하필이면 죽음이지?’



실비아는 그 글귀를 읽자마자 등줄기를 타고 전기가 흐른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페이지를 파라락거리며 일기장의 첫 장으로 되돌아갔다. 제이콥이 바란 것. 제이콥은 사람을 살리는 연금술사가 되고싶었다. 제이콥이 펠릭스를 그렇게까지 미워한 이유도 이제 실비아의 눈에 분명하게 보였다.



“펠릭스. 죽음의 약을 만들겠다고 예전부터 말하고 다녔어요?”



“네. 왜요?”



실비아는 도로 페이지를 넘겨 아까의 페이지로 돌아왔다.



“당신 스승님은, 사람을 살리는 연금술사가 되고싶대요.”



“그런데요?”



실비아가 종이를 한장 더 넘기자, 거기에는 날짜와 시간도 적히지 않은 페이지가 있었다. 거기에는 일기가 아니라, 하나의 표가 그려져 있었다. 무미건조하게 펠릭스와 제이콥을 비교한 표가. 표의 가장 위에는 연금술 개론을 익히는데 걸리는 시간이 적혀 있었다. 제이콥은 3달이 걸렸는데, 펠릭스는 1달이 걸렸다.



“하지만, 당신은 죽음의 약을 만들겠다고, 숲으로 온 바로 그날 남들 앞에서 당당히 선언했다면서요.”



“그래서, 뭐 문제라도?”



실비아는 표의 다음 칸을 보았다. 첫 약을 만들기까지 걸린 시간. 펠릭스는 한 달. 제이콥은 여섯 달 14일.



“당신 스승님은 그걸 견딜 수가 없었나봐요.”



표의 다음 단락은 연례 연금술사 교류회에 참석하기까지 걸린 시간이 쓰여 있었다. 제이콥은 4년. 펠릭스는 8개월.



“견디든가 말든가.”



“일기장에 적혀 있어요. 왜, 왜 하필이면 죽음의 약이냐고. 특권을 가진 자의 마땅한 의무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의 약이 나빠요?”



펠릭스는 솥에서 손을 놔버리고 짜증스레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나빠요?”



“네?”



“대답해 봐요. 그게 나빠요?”



실비아는 머뭇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참.”



펠릭스는 헛웃음을 피식 터트렸다.



“이 사람이고 저 사람이고. 다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들 편한대로 지껄이죠.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 하는 식으로. 반대로 그치들에게 물어보고 싶군요. 사람 살려주는 일이 그렇게 대단한 일이냐고. 지붕도 바닥도 없어 비 새고 물 드는 시궁창 바닥에서, 죽은 쥐새끼와 같이 썩어가던 고아를 살려주는게 잘한 일인가요? 살려주면? 그걸로 끝인가요? 목숨만 붙어있으면 돼요? 걔네들이 죽고싶은지 살고싶은지 물어나 봤어요?”



펠릭스는 거칠게 팔을 뻗어 재료 하나를 집어들고 솥 안에 던져넣었다.



“난 독살자처럼 아무나 죽이지 않아요. 난 죽고싶어 하는 사람한테만 약을 만들어 준다고요. 당신도 알잖아요?”



펠릭스는 다시 재료를 집어들고 솥에다가 힘껏 집어던졌다.



“구차한 변명일 뿐이죠! 내가 뭘 만드는지 관심조차 없었으면서. 제이콥이 일기에 그렇게 써뒀나요? 죽음의 약이 아니라, 사람 살리는 약을 내가 만들었으면, 그랬으면 나랑 사이좋게 지낼 자신 있다고? 비겁하기 짝이없는 인간.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런 역병을 만들어놓고, 의무? 의무같은 소리 하네!”



펠릭스는 있는대로 짜증을 부리며 또 하나의 재료를 솥 안에 던져넣었다. 그러자 검붉은 전기를 머금은 먹구름이 솥 안에서 훅 터져나왔다.



“실비아. 정신 똑바로 차려요. 난 제이콥에게 설득당하라고 일기장을 훔쳐봐달라 부탁한게 아니에요. 그 어디에 적혀있을 단서를 찾아달라 부탁했죠. 붉은 가루 병의 약을 만들 단서. 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워요. 이제와서 감상에 젖어봤자 아무 소용없다고요.”



유난스럽게 화를 내며 길길이 뛰는 펠릭스를 보고, 실비아의 입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움직였다.



“당신도 불안해요?”



“네? 뭐라고요?”



실비아의 입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진작 꺾었다고 생각한 스승님에게 따라잡혀서, 그래서 불안한거죠?”



펠릭스는 주걱을 집어들고 어색하게 서 있다가, 솥에 주걱을 푹 담갔다.



“그래요. 맞아요. 난 거짓말 안 해요. 난 그게 마음에 안 들어요. 내가 유일하게 겪은 실패가, 아이작도 아니고 우리 엄마 때문도 아니라, 그 제이콥 때문이라는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당신 동료들의 책임을 대신 떠안은 것도······.”



“그래, 잘 아네요, 실비아! 집어치우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건 나와 제이콥의 싸움이었다고요. 남들은 필요없어요. 그들이 내 싸움에 멋대로 끼어들어 나 대신 눈물을 흘리네마네. 필요없다고요. 그런거.”



“지금 한 말, 진심이에요?”



펠릭스는 대꾸하지 않고 솥을 휘적휘적 젓다가 주걱을 슬쩍 들어올렸다. 검붉은 색깔. 혼탁하고 검붉고 걸쭉한 액체가, 나무 주걱 끄트머리에 진득히 달라붙어 끈적하게 딸려올라왔다.



“마저 찾기나 해요 실비아. 그래서, 제이콥이 또 뭐래요?”



실비아는 그 아래로 길게 이어지는, 차갑고 쓸쓸한 도표에서 그만 눈을 떼고 페이지를 또 한장 팔랑 넘겼다.







다음 페이지는 텅 비어있었다. 조금 의아함을 느끼며 종이를 또 한장 넘기자, 거기에는 훨씬 정돈되고 정갈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날짜와 시간도 제대로 윗부분에 쓰여 있었고, 글씨도 다시 힘과 균형을 되찾았다. 실비아는 제이콥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나 하며 놀란 눈으로 일기를 읽어갔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기였다. 어느 가을날, 호숫가를 찾아 호수 둘레를 천천히 거닐며 수면 위로 뛰어드는 낙엽의 덧없는 몸부림을 지켜보는 일기. 그러다가 나무 둥치에서 추위를 모르고 자라난 빨간 버섯. 날아드는 낙엽이 버섯의 통통하게 부푼 갓에 닿자, 붉은 포자가 흩날렸다. 날아간 포자를 눈으로 쫓다보니, 좀 더 깊숙한 숲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보였다. 제이콥은 홀린듯이 붉은 부름을 받아 오솔길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버섯이 피어있는 오솔길 끄트머리에는 조그만 공터가 있었다. 공터의 바닥에는 빨간 색과 검은 색이 섞인 버섯이 둥근 고리 모양으로 피어나 요정의 고리를 만들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또다시 포자가 흩날렸다. 홀린듯이 요정의 고리에 다가가자, 고리 한 가운데에 조금 낯설게 생긴 이상한 물체가 있었다. 조심스레 고리 안으로 걸어들어가 낙엽을 헤쳐보자 벌레의 몸을 뚫고 자라난 이상한 버섯이 있었다. 그 버섯에 파먹힌 벌레는, 이미 진작에 죽어버린듯 보였다.



“버섯 이야기가 나와요.”



“버섯?”



“네. 갑자기 굉장히 차분한 어조로 일기를 쓰고 있는데, 숲에서 버섯을 보는 이야기가 나와요. 그러고보니, 아까 붉은 가루 병은 버섯의 병이라고 했잖아요. 무슨 뜻이에요?”



펠릭스는 아리송한 얼굴로 눈을 위로 치켜떴다.



“말 그대로에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좀 긴데. 연금술은 원래 마녀가 쓰던 요술을 우리 나름대로 개량한 거예요. 마녀가 아닌 사람도 그 요술을 부릴 수 있도록. 그래서, 먹구름의 약 같은것도 만들 수 있는 거고요.”



“처음 알았어요.”



“아무튼,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그 근본이 마녀의 요술에 있다보니, 오래된 연금술 약 중에는 자연을 모방한 약들이 많아요. 가령, 사랑의 묘약은 발정기의 산토끼가 뜯어먹는 들풀들을 뜯어 끓인 것이 그 기원이라는 식으로.”



실비아는 낭만적인 이름에 담긴 생각지도 못한 기원에 가볍게 실망했다.



“그 외에는요?”



“불나무 속껍질은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나무에 닿은거죠. 번개를 품었다고 해서 그건 하늘의 약이에요. 그래서 그걸로 구름을 뭉개뭉개 피울 수도 있었고.”



“신기하네요. 그래서, 붉은 가루 병은 버섯의 약이라고요?”



“네. 아까 쇳물을 태운것도 그래서에요. 버섯같이 무른 풀은 뜨겁게 달군 쇳물을 못 이겨요.”



“그러면, 그걸 약으로 쓰면······.”



펠릭스는 피식 웃으며 넌더리를 냈다.



“불에 달군 쇳물을 약으로 먹여요? 사람 잡을 일 있어요?”



“아. 그건, 그렇네요.”



실비아는 조금 실망한 목소리였다.



“계속 봐요. 나름대로 흥미로운 부분이긴 하지만, 결국 그것도 이미 아는 내용이었으니까.”



“알았어요. 잠시만······.”



그러나 실비아가 종이를 넘기자 새하얗게 텅 빈 공백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그 뒤로 종이를 파라락 넘겨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끝이에요.”



“네?”



“끝이라고요. 일기장. 그 버섯 이야기가 마지막이에요.”



“끝이라고? 진짜?”



펠릭스는 솥에서 손을 놓고 성큼 걸어와 실비아의 손에서 일기장을 휙 낚아채 파르륵 넘겼다.



“정말이네.”



그는 짜증스레 일기장을 집어던지고 도로 솥으로 돌아갔다.



“어떡해요, 이제?”



펠릭스는 두 손으로 주걱을 힘껏 쥐었다.



“일단, 이것부터 마무리하고 생각해보죠.”



그리고 펠릭스는 솥을 젓기 시작했다.







펠릭스는 지금껏 만들어낸 세 병의 약을 한 줄로 가지런히 세워두었다. 셋 모두 검붉고 걸쭉한 액체가 담긴 약이었지만, 그 색깔이나 농도가 조금씩 달랐다.



“이중에 약이 있을까요?”



“없어요. 이건 그 붉은 가루 병을 재현하려고 만든 건데, 그마저도 모조리 실패했으니까.”



펠릭스는 손끝으로 약병의 머리를 톡 쳐서 병을 쓰러뜨렸다.



“써 보지도 않았으면서, 실패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경지에 올랐으면 시험해 볼 필요도 없어요. 척 보면 보인다고요.”



“꼭, 약장수같이 말하네요.”



펠릭스는 짜증어린 눈으로 실비아를 곁눈질했다.



“그게 사실인걸 뭐 어떡하라고요?”



“알았어요. 믿어줄게요. 그러면, 지금까지 우린 헛수고 한 거네요.”



실비아는 풀죽은 눈으로 작업대 앞에 앉아 펠릭스가 쓰러뜨린 약병을 손 끝으로 톡 톡 건드렸다.



“뭐 뾰족한 수라도 있어요?”



펠릭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올리버 혼자 심심하겠어요.”



“올리버는 혼자 시간 보내는데 선수에요. 혼자놀기 대회가 있으면, 일 등은 올리버 몫이라고요.”



“그건 또 어떻게 아는데요?”



“본인한테 들었어요.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동안 집에서 혼자 살았다고. 그래서 혼자 시간 보내는건 일도 아니라고. 그리고, 지금은 그 짜증나는 다람쥐 친구도 있으니까 혼자 잘 놀고 있을 거라고요.”



실비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에는 그 붉은 가루 병, 어떻게 대처했어요?”



“예전 이야기는 왜요? 그땐 실패했다니까.”



“궁금해서 그래요. 그 때도 마스크 쓰고 다녔어요? 녹인 쇳물을 불에 태웠어요? 저렇게, 두꺼운 커튼으로 벽도 쌓았어요?”



펠릭스는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마스크는 안 썼죠.”



“그런데, 당신도 그렇고 당신 친구들도 그렇고. 아무도 안 옮았네요. 운도 좋지.”



“그러게요.”



“그럼, 마을 사람들만 죽은 거예요?”



펠릭스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동물들은요?”



“몰라요. 동물이 죽은것 같진 않은데.”



“신기하네요. 포자를 들이마시면 바로 옮는다면서요.”



“모르죠, 뭐. 어느 길바닥에서 쥐 몇 마리 죽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관심 주지는 않으니까.”



“그렇게 끔찍한 몰골로 죽으면, 또 모르죠.”



“몰라요. 그 때, 난 그런 쥐는 못 봤으니까.”



펠릭스가 짜증스레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실비아의 눈에 무언가 빛이 살짝 깃들었다.



“펠릭스. 당신이 그 병을 종식시켰다고 했죠?”



“네. 왜요?”



“그거, 정확히 어떻게 한 거예요?”



“어떻게 하기는. 온갖 약을 다 만들어도 소용이 없으니, 내가 일일이 한 명 한 명 찾아가서 죽음을 설득했죠. 그걸 가지고 웃으며 죽음을 팔아치웠다고 지껄이는 놈도 있었지만······.”



“아니, 그건 안 궁금해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직접 만나서 죽음을 설득한거죠?”



“네.”



“이상하네요. 그러면, 당신은 중증 환자들이랑 꽤 가깝게 지낸거 아니에요? 그런데, 잘도 안 옮았네요.”



펠릭스는 코를 쓱 들이마셨다.



“그러게요.”



“마스크도 그땐 안 썼다면서요.”



“그러게요.”



펠릭스는 그제서야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러게, 운이 좋았네요.”



“약도 직접 전해줬어요?”



“네. 그 끔찍한 꼴로 죽어가는 환자들한테, 누가 무슨 용기가 있어서 가까이 가겠어요?”



“시신은요?”



“한데 모아서 화르륵 태워버렸죠. 마을이랑 같이.”



“누가 했는데요?”



“내가.”



실비아는 참 이상하다는듯 펠릭스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그 전염병 소굴 한 복판을 거닐었으면서, 잘도 안 옮았네요.”



“그래, 그래요! 거 참 신기하네. 그래서, 그게 왜요? 가끔 그런 일도 있어요. 이상하게 전염병에 안 걸리는 사람. 그런 사람의 피나 피부 조직, 체액을 이용해서 약을 만드는 일도 종종 있죠. 물론, 나도 해 봤고. 하지만, 소용 없었다고요. 내 피를 뽑아서 약을 만들어도 병을 낫게 하진 못했어요.”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요.”



실비아는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다시 말했다.



“펠릭스. 대스승님이 제게 말했어요. 뛰어난 연금술사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자기가 원하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네. 그래서요?”



“붉은 가루 병은 당신 스승님이 인공적으로 만든 병이잖아요?”



“네. 그렇네요.”



“뭘 원해서, 그런 병을 만들었을까요?”



“궁금하지도 않아요. 그딴거.”



“그러지말고, 한번 생각해 봐요.”



실비아는 얼굴을 살짝 가까이 들이밀며 재촉했다.



“날 물먹이려고 그랬겠죠.”



“좀 이상하잖아요. 일기장을 보면, 당신 스승님은 펠릭스 당신을 보통 미워한게 아니에요. 그러면, 당신 혼자만 죽을 약을 만들어도 됐잖아요? 하지만,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죠.”



“미쳐버려서 그렇겠죠.”



“당신을 설득하려고 그런건 아닐까요?”



펠릭스는 흠칫하며 실비아를 노려보았다.



“죽음이라는게 이렇게 나쁘다고. 무섭고, 끔찍하고, 피하고 싶은 일이라고. 당신을 설득하려고. 그러니, 죽음의 약은 그만 포기하라고. 그래서 당신이나 당신 친구 연금술사들은 다들 멀쩡했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제이콥은 단단히 미친 사람이 틀림없군요. 한 명 설득하려고 십수명의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동료 연금술사들의 명예를 진흙탕에 쳐박았으니까.”



“그만큼, 당신이 소중한 제자였을지도······.”



“실비아! 그만 해요.”



펠릭스는 짜증스레 작업대를 탕 내리쳤다.



“당신은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죠. 상상력도 있어요. 그러니 제이콥이 어떤 사람이었을지 온갖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지금 상황에선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요. 우리한테 필요한 건, 약. 약 이에요. 약 뿐이죠! 그 붉은 가루 병을 낫게 만들 약.”



펠릭스는 그리고 짜증어린 눈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제이콥은 이제 관둬요. 난 일기장에 무슨 단서라도 남아있을까 싶었는데, 없었으면 그걸로 끝이죠 뭐.”



“아뇨, 단서는 있었어요.”



실비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펠릭스를 내려다보았다.



“뭐죠?”



“펠릭스. 알 것 같아요. 제이콥이 왜 저런 병을 만들었는지.”



실비아는 목을 가다듬었다.



“펠릭스. 당신,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겠다는 마음을 품고 약을 만들어 본 적 있어요? 없죠?”



“없죠. 당연히.”



“그럼, 지금 한 번 만들어 봐요.”



“네?”



펠릭스는 인상을 쓰며 실비아를 올려다보았다.



“만들어봐요. 어쩌면, 제이콥이 바란게 그걸지도 몰라요.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자신과 같은 약을 만들어 줬으면 하는 바람. 그러니까, 펠릭스. 한번 진심으로 사람 살리는 약을······.”



“난 못 해요.”



“펠릭스. 그러지 말고······.”



“아니, 못 한다고요.”



펠릭스도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실비아와 눈을 맞추었다.



“안 하는게 아니라, 못 해요.”



“시도라도 해 봐요. 당신만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실비아.”



펠릭스는 한숨을 쉬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못해요. 난 진심으로 사람을 살리겠다는 마음을 품을 수가 없어요.”



“펠릭······.”


실비아는 펠릭스의 텅 빈 눈을 봐버렸다. 사람의 감정을 품지 못하는 그의 두 눈. 텅 빈 둥지처럼 쓸쓸하고, 바닥없는 우물처럼 공허하고, 종이에 물감을 칠한 것보다 더 차가운 눈.



“난 못 해요. 난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고요. 나는, 정말 빌어먹게 재수없는 일이지만, 난 진심으로 그런 생각 못 해요.”



실비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던 펠릭스는 서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이콥은 끝까지 잘못봤어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실비아. 당신까지 그와 같은 길을 밟으려 들지 말아요. 난, 그런거, 못 하니까.”



펠릭스의 분한 얼굴을 보고, 실비아는 결국 더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씁쓸한 얼굴로 도로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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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에필로그 22.01.13 57 1 4쪽
171 마지막화 22.01.13 44 1 22쪽
170 170화 22.01.12 38 1 24쪽
169 169화 22.01.11 34 1 24쪽
168 168화 22.01.10 36 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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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165화 22.01.07 38 1 26쪽
164 164화 22.01.06 33 1 22쪽
163 163화 22.01.05 38 1 24쪽
162 162화 22.01.04 39 1 22쪽
161 161화 22.01.03 35 1 22쪽
160 160화 22.01.02 37 1 25쪽
159 159화 22.01.01 38 1 23쪽
158 158화 21.12.31 33 1 21쪽
157 157화 21.12.30 38 1 23쪽
» 156화 21.12.29 36 1 24쪽
155 155화 21.12.28 36 1 24쪽
154 154화 21.12.27 42 1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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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152화 21.12.25 41 1 21쪽
151 151화 21.12.24 40 1 24쪽
150 150화 21.12.23 40 1 22쪽
149 149화 21.12.22 40 1 21쪽
148 148화 21.12.21 41 1 22쪽
147 147화 21.12.20 45 1 22쪽
146 146화 21.12.20 41 1 21쪽
145 145화 21.12.19 44 1 22쪽
144 144화 21.12.18 47 1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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