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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유자 님의 서재입니다.

행복의 연금술 가게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녹색유자
작품등록일 :
2021.10.08 16:53
최근연재일 :
2022.01.13 18:00
연재수 :
17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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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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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74,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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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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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39화

DUMMY

펠릭스와 올리버의 어딘가 울적한 기분이 그들의 몸 밖으로 새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점심시간 즈음이 되자 행복의 연금술 가게의 하늘위에 찝찝한 먹구름이 슬슬 끼기 시작했다.


“기껏 재료 사 왔더니. 아무것도 안 해?”


그리고 그런 창 밖을 슬쩍 내다본 올리버의 목소리에는 조금 짜증이랄지, 초조함이랄지 같은 것이 묻어나왔다.


“아직은요.”


펠릭스역시 조금 초조함을 느끼는듯 미세하게 떨리는 눈으로 괜히 장부를 뒤적거리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귀족이 돌아올까?”


“아마도요.”


“확신해?”


영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올리버가 말하자, 펠릭스는 괜히 카운터에 소리나게 장부를 탁 내려놓았다.


“그래요. 확신해요. 요즘같은 세상에, 연금술사를 찾아와서 죽음의 약을 찾는 사람은 잘 없거든요.”


“요즘같은 세상이 아니더라도, 그런 약을 찾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겠지.”


“어쨌든, 돌아올 거예요.”


펠릭스가 대충 마저 대꾸하고 입을 다물자, 행복의 연금술 가게에는 다시 지루하고 초조한 침묵이 감돌았다.


“안 돌아오면 어떡하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올리버가 금새 다시 입을 열자, 펠릭스가 짜증스레 대꾸했다.


“온다니까요.”


“아니, 그 후작부인 말고.” 올리버는 헛기침을 한 다음 말했다. “실비아 말야. 펠릭스. 실비아가 이대로 안 돌아오면······”


“그러면, 뭐. 끝인거죠.”


펠릭스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아깝지 않아?”


“아깝죠.”


“그럼, 뭐라도 해야 하는것 아냐?”


“뭘 해요 제가? 전 이미 선불로 대금은 지불받았어요. 제가 손님을 재촉할 이유는 전혀 없죠.”


“금화 20닢짜리 선금 말야?” 올리버가 자조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어젯 밤에, 네가 만든 밧줄의 약은 금화 백닢짜리였잖아. 네가 실비아에게 만들어 주려는 약은, 그 오 분지 일의 가치도 없는건가?”


“값어치로 가치를 어떻게 매겨요? 당연히, 밧줄의 약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약을 만들어 주려고 했죠.”


“그러면.” 올리버는 조금 기운을 되찾고 말했다. “펠릭스. 넌 아직 약값을 충분히 받지 않은 셈이잖아?”


“계약서에는 벌써 대금은 치렀다고 써 뒀어요.”


“그래?” 올리버의 목소리에서, 순식간에 도로 기운이 쭉 빠졌다. “그럼, 할수 없네.”


“그렇죠 뭐. 아쉬워도 어쩔수 없지.”


“펠릭스.” 올리버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네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최대한 조언이든 뭐든 참견은 안 하려고 해.”


“나도 알아요. 그리고, 그 점은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하기도 해요. 특히나, 참견쟁이 실비아가 찾아온 뒤로는.”


“그렇지만, 지금은 너한테 한 마디 정도는 해 두고 싶어.”


“하세요. 얼마든지.”


올리버는 헛기침을 한 다음, 언젠가 외워 두었던 시의 한 구절을 읊듯이 말했다.


“고기를 잡으려면, 낚싯줄을 드리우고 가만히 있어서만은 안 돼.”


그러자 펠릭스는, 잠시 목을 풀더니 그 연극톤의 복화술 목소리로 올리버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손을 벗어나는 나비를 함부로 붙잡으려다가는, 나비의 날개에 상처가 남는다.”


펠릭스가 입을 다물자 올리버가 대답했다.


“실비아는 나비가 아냐.”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펠릭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고기는 더더욱 아니죠.”


“그래. 실비아는 그냥 실비아야.”


“그래요. 번거롭게 비유니 은유니 뭐니 할 필요가 없다고요. 내 참. 그냥 그녀는 수없이 많은 손님들중 한 명이었을 뿐이에요!”


마침내, 도저히 못 참겠다는듯 펠릭스는 장부를 집어들고 신경질적으로 카운터 위를 내리쳤다. 그 꼴을 본 올리버가 잠시동안 무슨 파리라도 한 마리 날아다니는가 착각할 정도로.


“엄밀히 따지자면, 수없이 많은 손님들 중 한명은 아니지. 너도 인정했잖아. 뛰어난 아가씨라고.”


“제 나이가 아직 스물도 안 됐는데, 살면서 설마 그런 사람을 다시 한번 못 만나려고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 퍽이나!”


펠릭스가 조소를 내뱉으며 말했다.


“실비아는, 그래요. 제 생각보다 쓸만한 사람이긴 했어요. 하지만! 그녀역시 발에 채이고 또 채이는 어느 오만한 귀족과 별로 다를 것도 없었고, 그녀 정도로 명석한 두뇌는 연금술사들의 숲에서 마찬가지로 흔하게 봤어요! 우리들중에서 가장 재능이 없던 축인 첼시나 노리스도 실비아 정도의 머리는 있었어요. 아니, 오히려 그 정도 머리쯤은 갖고 있어야 최소한 연금술사라는 문턱에 발이라도 들이밀어 볼 만하죠!”


펠릭스는 대체 누구에게 화가 난 것인지, 그 답지않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뛰어난 재능이라고, 방금 네가 직접 인정했어.”


“언제요?”


“그렇잖아.” 가만히 듣고있던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네 말대로라면, 반대로 실비아라면 언제든지 그 연금술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 아냐? 그리고 네 친구 첼시나 그 노리스라는 사람 정도 머리는 된다고 인정한거잖아.”


“말의 순서를 바꿔서 논리를 펼치지 마요, 올리버. 문장이 참이라고 그 역도 참이라는 보장은 없어요.”


“하지만, 펠릭스. 조금 솔직해져봐. 너말야. 솔직히, 실비아가 조금 마음에 들기는 했잖아?”


펠릭스는 짜증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아닌척을 한들 그도 영락없는 애였다.


“뭐, 그렇기는 하죠.”


“그래. 그래서 처음 만난 바로 다음 날부터 약초 보는법도 가르쳐 주었고, 그 뒤로도 약 만드는 법이며, 이것저것 가르쳐 줬잖아? 심지어는 네 친구 메를린의 집에도 같이 데려갔고.”


“그렇기는 하죠.”


“가게 보는것도 연습시켜줬고.”


“네.”


“바로 어젯 밤에는, 실비아의 그 헛되고 낭만적인 꿈을 어떻게든 이뤄주겠답시고, 무리까지 해 가면서 밧줄의 약을 만들어 줬잖아. 그 재료들, 다시 구하려면 어쩌면 몇 년씩은 걸릴지도 모르는데도.”


“그래요. 그래서, 올리버.” 듣다듣다 더이상은 못 참겠다는듯, 펠릭스가 올리버의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래서, 하고싶은 말이 뭔데요? 날더러 당장 귀족의 저택으로 뛰쳐들어가서 당신 여동생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라, 뭐 이런건가요?”


“아, 아니야. 그러니까······” 올리버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미안해, 펠릭스. 나도 모르는 새에, 실비아에게 정이 들었나봐. 그냥, 어쩐지 계속 허전해서 말야.”


“됐어요 올리버. 그럴수도 있죠. 일찍 결혼했으면 나나 실비아가 당신 아들딸 뻘이니까.”


“그래. 이해해줘서 고마워 펠릭스. 그런데······. 펠릭스. 넌, 정말 괜찮은거야?”


펠릭스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목을 풀고 말했다.


“그래요. 나는 아주 뛰어나고 유능하며 위대한 연금술사니까요.”


“그래······”


끝까지 뻣뻣하게 버티는 펠릭스를 보고 올리버는 다시 먹구름이 꾸물거리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친언니의 면전에 대고 뭐든지 혼자 할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한 실비아는, 식당을 찾지못해 그 넓고 화려한 저택 안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자기의 꼴이 꽤나 우습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반쯤 홧김에 마당으로 뛰쳐나와 슬슬 잎사귀 끄트머리에서부터 낙엽이 지고있는 참나무에 등을 기대 섰을 때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화난 귀족의 모습을 잘만 연기했다.




하지만, 그 연기도 이제는 위태위태했다. 실비아도 귀족의 아가씨로서, 표정을 교묘하게 감추는 기술쯤은 진작에 터득했지만, 뱃가죽을 뚫고 새어나오는 꼬르륵 소리만큼은 그녀로서도 도저히 감출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나무그늘 아래에 잠시 기대 서 있다가, 그대로 스르륵 미끄러지며 풀밭위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옷이 더러워 질 것이 틀림없었지만, 그녀는 이제 그런 것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아예 기세좋게 그녀는 풀밭위에 벌러덩 드러누워버렸다. 무엇인가에 반항하듯, 여전히 심통이난 표정으로. 그렇게 드러누워 촘촘한 나뭇잎 사이로 하늘위를 올려보니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진 먹구름의 무리가 실비아의 머리위를 아른거렸다.


“실비아.”


저만치에서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실비아는 못 들은척 계속 풀밭위에 드러누워 있었다.


“실비아? 자니?”


에밀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갓난아이가 제 어미와 신경전을 벌일 때처럼, 그녀는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었다.


“실비아. 너는 나무그늘을 참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예상을 벗어나는 에밀리아의 말을 들으니, 실비아는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그녀가 살짝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고 나서야 에밀리아는 안심했다는듯 다시 얼굴이 폈다.


“어릴 때도 그랬지. 나랑 싸우거나, 밖에서 시비가 붙거나, 아니면 부모님한테 혼난 날 밤에는 꼭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집 근처 숲에 들어갔잖아.”


실비아는 여전히 뾰루퉁한 표정을 힘겹게 유지했다.


“숲 속에서 길을 잃지도 않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실비아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위험했지.”


조금 실망한듯, 실비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실비아. 왜그래?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왜 화가 난 거야? 아니면, 이제 언니랑은 말하기 싫어?”


“아니야.” 실비아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여전히 풀밭위에 드러누운채 대답했다.


“그럼?”


“몰라.”


에밀리아는 실비아에게 다시 한 걸음 더 다가왔지만, 자신의 여동생을 존중하는 마음에서인지, 그녀의 두 눈 위로 자신의 머리를 불쑥 내미는 짓은 하지 않았다.


“실비아. 나는 네가 여기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내가 알아서 해!”


“알았어. 그래. 더이상 참견 안 할게.”


에밀리아는 살짝 걸음을 뒤로 물리다가, 실비아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실비아. 배 고프지 않아?”


“몰라.”


그러나,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항상 원치 않을 때 원치 않는 반응을 보이곤 했다. 바로 지금의 실비아 처럼. 그녀는 계속 화가난 표정으로 시위를 벌일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위장은 더는 못참겠다는듯 크게 꼬르륵 하는 소리를 내버리고 말았다.


“정말로?” 그 소리를 들은 에밀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몰라!”


“얼마 전에 고용한 주방장. 요리를 꽤 잘해. 바다 건너에서 온 사람이라는데, 그 사람이 원래 살던 지방은 예전부터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이 난 곳이야. 특히나, 붉은 소스를 이용한 파스타를 잘 만드는데, 조개를 넣어 육수를 끓이거든. 정말 맛있어.”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린것 같아, 에밀리아의 얼굴이 조금 더 폈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 부탁하면 금방 네가 먹을 음식 정도는 만들어 줄 거야.”


“몰라!”


“맛있는 디저트도 만들어 주는데. 올해 막 수확한 호박으로 만든 파이랑, 삶은 밤을 으깨어 꿀과 섞어 만든 푸석푸석한 푸딩은 정말 달콤했어.”


다시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났다. 에밀리아는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하며, 실비아의 눈 위로 머리를 살며시 내밀고는 방긋 웃어 보였다.


“언니랑 같이 밥 먹으러 갈까?”


에밀리아가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실비아는 그 자세 그대로 한참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것은 후작부인 에밀리아 콘월에게는 버티기 힘든 무관심이자 침묵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실비아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풀을 털며 말했다.


“그래.”


“그래. 같이 가자, 실비아.”


마침내, 승리의 미소를 띄며 에밀리아는 실비아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러나 실비아는 슬며시 자기 손을 빼내고는, 길도 모르면서 에밀리아를 앞장서 걸어갔다. 실비아의 뒷모습을 보며 에밀리아는 어딘가 쓸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실비아를 따라잡지 않게 조금 느리게 집 안으로 돌아갔다.




에밀리아 콘월의 저택 주방장의 솜씨는, 과연, 저택의 안주인이 말한 것처럼 훌륭했다. 두 사람이 머물기엔 지나치게 드넓은 식당에서, 휑뎅그레한 기분을 느끼며 실비아는 하인들이 가져오는 음식들을 맛보았다.


“맛있지?”


“응.”


한참 그 새빨간 파스타를 먹던 실비아는, 아마 장식용으로 놔둔것 같은, 테이블 한 가운데에 가지런히 모양을 잡아 쌓아둔 빵 조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행복의 연금술 가게 부엌 선반에 잠들어있는 거친 흑빵과 달리, 모두 새하얗고 폭신한 빵조각이었다.


“빵 먹을래?”


“예의에 어긋나는걸. 아직 순서가 아니야.”


“그런게 어딨어.” 에밀리아가 온화하게 웃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런거 신경 안 썼잖아.”


“하인들은?”


“내가 눈짓 한 번만 하면 다들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줄행랑 칠걸?”


“언니. 그런사람 아니었잖아.”


실비아가 조금 웃으며 말하자, 에밀리아 역시 겉으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참.”


“언니. 그래서, 그 연금술 가게에는 왜 갔던거야?”


“아, 우선 식사 마저 하고······”


“대답안해줘?”


먼저 화제를 꺼내준 것은 에밀리아에겐 고마운 일이었지만, 실비아도 무언가 나름대로의 꿍꿍이랄지, 또는 목적같은 것이 있는지, 그녀는 친언니가 듣기에는 조금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그 연금술사. 실력이 좋고 믿을만 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한테 약을 좀 부탁하려고.”


“집에 약사나 의사 있지 않아? 무슨 약이 필요한데?”


에밀리아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려 했지만, 실비아는 그녀를 곱게 놔주지 않았다.


“무슨 약?”


수저까지 내려놓으며 실비아가 물었다. 에밀리아는 자신의 동생의 성격을 알아서인지 어쩔수 없다는듯한 투로, 조금 부끄러운 일을 고백하듯 말했다.


“집 안에, 말썽이 많아. 그래서······”


“그래서?”


“약이, 이것저것 많이 필요해.”


“그러니까, 어떤?”


“제초제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에밀리아는 펠릭스에게 말한 것처럼, 구구절절 필요한 약의 목록을 사무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구충제, 고엽제, 살충제, 쥐약. 거기에, 가능하면 비료라든가, 벽에 덧칠할 회반죽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언니. 혹시, 무슨 딴생각 하는 건 아니지?”


실비아의 말이 비수처럼 에밀리아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에밀리아는 뛰어난 귀부인의 모범을 보이며, 겉으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동생에게 되물었다.


“실비아. 오히려 내가 너한테 묻고싶어. 유서를 남기고 가출했다던 네가, 어째서 연금술 가게에 머물며 연금술사와 동행하고 있는지.”


“언니는 몰라도 돼.”


“그래. 그렇다면, 나도 더이상 안 물어볼게.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는 법이니까. 그럼, 마저 먹을까?”


에밀리아가 다시 웃으며 눈짓을 하자, 실비아는 조금 주저하다가 도로 수저를 집어들었다. 어딘가, 수면 아래를 머무는 흉포한 물고기가 사는 호수 위로 나룻배를 저어 갈 때처럼, 말로 표현하지 못할 긴장감이 테이블 위를 감돌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적어도 겉으로는 웃고 있었다. 그렇게 서늘한 테이블 무드 사이에서 조차 웃을 수 있는 것은, 실비아 로즈베리나 에밀리아 콘월 같은 아주 뛰어난 귀족들 뿐이리라.




그리고 한편, 행복의 연금술 가게의 부엌에서는 펠릭스와 올리버가 거친 흑빵을 마구잡이로 잘라 입안에 넣고, 무슨 담뱃잎을 씹듯 씹어대고 있었다.


“아직도 안 오네.”


“실비아가 허락을 안 해 주나보죠.” 입 안에 음식을 잔뜩 넣고 말을 해 대는 펠릭스에게, 귀족 다움이란 그야말로 눈 씻고 찾아봐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빵 말고 다른 것도 먹어.”


“햄이 있던가요?”


“그래. 돼지 뒷다리살로 만든 햄도 있고, 그 뭐냐. 전에 치즈도 샀을 텐데.”


“치즈요? 비싸잖아요.”


“그래. 실비아가 언젠가 시장에서 사왔던가? 아마 찾아보면 어디 한 덩이 있을걸.”


“내 참. 남의집 부엌을 제 집처럼 마음대로 쓰고 있었군. 나중에 비용을 받든가 해야지.”


“돌아온다면 말야.”


자리에서 일어나 그 문제의 치즈를 찾는 펠릭스를 향해, 올리버가 초를 쳤다.


“돌아오겠죠 뭐.”


“안 돌아오면?”


“안 돌아오면 그걸로 끝인거고요.”


“그럼 그 치즈는 영영 제 주인과 재회할 수 없겠는데.”


“그럼 당신이 대신 먹던가요.”


“사연있는 물건을, 어떻게 건드려? 그러고보니, 펠릭스 너는 미신을 믿잖아?”


“치즈에 관한 미신은 안 믿어요. 그리고, 올리버 당신이 먹기 싫으면 그 다람쥐한테 주던가요.”


“코튼 말이지.”


“그러고보니. 요사이 못 본것 같은데.” 계속 짜증스레 선반을 여닫다가 치즈 찾기를 포기하고 테이블로 돌아온 펠릭스가, 다시 빵조각을 집어들며 말했다.


“그러게말야. 새 주인을 찾아갔나?”


“몰라요. 아무튼, 속이 다 시원하네. 그 다람쥐, 내 손가락을 깨문 적이 있다고요!”


“물릴 만 한 짓을 했겠지.”


“올리버! 편들게 없어서, 이젠 짐승 편을 들어요?”


“그렇잖아. 그 다람쥐가 뭘 알고 너를 물었겠어? 네가 물릴 만 한 짓을 했겠지.”


가만히 빵을 씹던 펠릭스는, 짜증스런 얼굴로 투덜거렸다.


“못되고 멍청한 다람쥐 같으니라고.”


“글쎄. 가만보면, 그리 멍청한 다람쥐는 아닌것 같은데.”


“그럼 두 배로 못된 다람쥐군요. 뻔히 알면서도 나를 놀려먹다니.”


펠릭스는 마지막 빵조각을 입에 억지로 욱여넣고 화풀이라도 하듯 얼굴을 잔뜩 찌푸린채,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우아한 식사를 마친 실비아와 에밀리아는 이제 티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가만히 마주앉아 있었다.


“맛있지? 실비아. 네가 좋아하던 홍차야.”


실비아는 두 손으로 잔을 잡고 느릿하게 들어올려, 잔을 입 가까이 가져다 대고 그 향을 음미했다. 그건 분명 익숙한 향이고, 실비아가 좋아하던 향이었지만, 그녀는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취향이 바뀌었어?”


“아니, 그런건 아냐.”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사랑초의 낭만적일 정도로 달콤한 향이 빠진 찻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실비아가 말했다.


“빵이라도 먹을래? 아니면 과자라도 구워달라고 할까? 아, 디저트가 하나 남아 있었나?”


하인은 큰 죄라도 지은듯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레 회갈색의 푸딩모양 무스가 담긴 조그만 접시를 실비아와 에밀리아의 앞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깜빡했나봐.”


그 하인의 뒷모습을, 어딘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는 에밀리아를 향해 실비아가 말했다. 그녀는 뒤늦게 웃음을 되찾으며 실비아를 돌아보았다.


“그러게.”


“실수할 수도 있지.”


“그래. 맞아. 실수 할 수도 있는거지······”


실비아는 가만히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보았다. 그녀의 언니는 그것을 푸딩이라고 불렀지만, 아무리봐도 무스였다.


“한번 먹어봐.”


그러나 뭐라고 부르든 간에, 그게 맛있어 보이는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실비아는 그 수저를 들어 무스를 살짝 떠서, 입 안에 넣고 오물거렸다. 달콤한 밤과, 꿀의 맛이 느껴졌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조금 받았다.


“맛이 없어?”


에밀리아는 그런 부분은 귀신같이 찾아냈다. 실비아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맛있어. 언니말대로 엄청 달콤하고 좋은 밤이야. 꿀도, 아직 꽃향기를 머금고 있고.”


그러나 벌레먹은 새빨간 밤 적율 보다 풍부한 맛이 훨씬 부족하다고, 실비아는 감히 곧이곧대로 말 할 수는 없었다.


“어딘가 부족하다는 표정이길래. 내 착각이었나봐.”


에밀리아가 웃자, 실비아도 따라 웃으며 수저를 도로 내려놓았다.


“그래서, 실비아.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해, 언니.”


“그 연금술사에 관한 이야기야.”


실비아의 표정이 굳었다.


“이번엔, 네가 아니라 내 이야기.”


“응?”


“그 사람. 괜찮은 사람처럼 보여서.” 두 손으로 잔을 들어올리며 에밀리아가 말하기 시작했다. “거래를 조금 해 보려고 한다고, 아까 내가 말했잖아?”


“응. 그랬지······”


“그래. 그런데, 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말하더라고. 선약을 잡은 손님이 있어서, 그 손님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허락을 받아오기 전 까지는, 나를 위해 일 해 줄수는 없다네.”


“그래? 그런데,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거야?”


“그 손님이, 실비아 너 아냐?”


실비아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맞아.”


“두 달 안에 약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던데.”


“응. 맞아. 시간이 좀 빡빡하긴 하다더라.”


“무슨 약인지 가르쳐 줄 수는 없을까?”


실비아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그러면, 약 이야기는 그쯤 하고. 그래서, 실비아. 그러면, 혹시 나를 위해 그 연금술사를 며칠 정도만 빌려줄 수 있을까?”


“얼마나 필요한데?”


“한, 일 주일이면 되려나······”


실비아는 머릿속으로 달력을 떠올리며 가만히 날짜를 계산해 보았다. 일주일.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긴 시간이었다.


“너무 긴데······”


“언니 부탁인데, 어떻게 안 될까?”


에밀리아가 조금 울상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몰라! 언니, 그런 표정 짓는게 어딨어? 치사해. 마음대로 해!”


그리고 그 표정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 실비아는 잠시 에밀리아를 마주보다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떠나버렸다. 다시 문을 쾅 닫으며 식당에서 나가버린 실비아를 보고, 에밀리아는 황량한 식당에서 쓸쓸하게 웃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예전처럼은 안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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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48화 21.10.31 29 1 34쪽
47 47화 21.10.31 26 1 25쪽
46 46화 21.10.30 27 1 21쪽
45 45화 21.10.30 30 1 31쪽
44 44화 21.10.29 30 1 23쪽
43 43화 21.10.29 26 1 18쪽
42 42화 21.10.28 30 1 23쪽
41 41화 21.10.28 27 1 23쪽
40 40화 21.10.27 32 1 21쪽
» 39화 21.10.27 28 1 21쪽
38 38화 21.10.26 29 1 19쪽
37 37화 21.10.26 23 1 19쪽
36 36화 21.10.25 34 1 21쪽
35 35화 21.10.25 26 1 23쪽
34 34화 21.10.24 32 1 21쪽
33 33화 21.10.24 27 1 21쪽
32 32화 21.10.23 33 1 23쪽
31 31화 21.10.23 29 1 19쪽
30 30화 21.10.22 31 1 19쪽
29 29화 21.10.22 30 1 27쪽
28 28화 21.10.21 30 1 16쪽
27 27화 21.10.21 29 1 30쪽
26 26화 21.10.20 32 1 19쪽
25 25화 21.10.20 27 1 28쪽
24 24화 21.10.19 34 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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