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의 시작-4
재주도 좋지. 어느새 가시와 살을 깨끗이 분리해놓고 생선살을 잘도 줏어먹고 있는 란이었다.
손바닥만한 생선의 살점 삼분의 일 이상이 이미 란의 목구멍 너머로 사라진 걸 확인한 운초의 목소리가 커졌다.
운초;
“뭐하냐? 이거 안주거든! 술도 안 먹는게 어디서!”
란;
“안 먹는 게 아니라 못 먹는 거잖아, 난.”
운초;
“엎어치나 메치나!”
운초가 젓가락을 들어 여전히 생선 위에서 알짱대고 있는 란의 젓가락을 사정없이 밀쳐냈다.
란;
“좀 먹자. 치사하게!”
운초;
“치사? 허어! 기가 막힌다. 그 넓은 방을 지 혼자 쓰겠다는 양심에 털 난 인간이 그게 할 소리냐? 그리고 진짜 네가 뭘 모르나 본데, 우리니까 널 동석시켜 주는 거야. 알간?”
란;
“뭐래?”
운초;
“우리 술꾼들이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누군지 아냐? 술 못 해, 노래 못 해, 춤 못 춰. 하물며 재미난 얘기로 흥을 돋우는 것도 아닌 인간들이 안주발만 당길 때야. 아주 꼴 보기가 싫어!"
란;
"흥!"
운초;
" 그런 인간들은 이 세상에서 싹 다 추방시켜야 한다는 게 우리 술 먹는 인간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아냐, 모르냐? 이 무식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인간아!”
란;
“나도 돈 냈거든!”
운초가 빈 땅콩 접시를 란의 코 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운초;
“그래서 다 쳐드셨잖아요, 이미. 너님 혼자서 싹! 이거 빈거 안 보이냐?”
대답이 궁해진 란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영과 강협을 쳐다보았지만 도움은커녕 슬슬 눈길을 피하는 두 녀석이었다. 심한 배신감을 느낀 란의 입에서 드디어 폭탄 선언이 터져나왔다.
란:
“좋아, 까짓거! 나도 마시지 뭐. 죽기밖에 더하겠어? 줘! 달라니까!”
란이 술병을 집어 들자 모두가 허걱, 기겁을 하였다. 옆자리의 하영이 재빨리 란의 손에서 술병을 낚아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지옥의 서막이 열릴 뻔한 절체절명의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란;
“줘! 나도 마신다니까!”
이정도면 거의 패악질이 아닌가. 운초가 진심으로 흥분했다.
운초;
“뭐하는 짓이야? 너 진짜 최악이다! 이따위로 사람을 협박을 해?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
왠만한 일에는 꿈쩍도 않던 강협마저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중얼거렸다.
강협;
“아직도 기억 나. 내 목덜미에, 속옷에까지 토한게 다 들어가고···.”
운초;
“네 목덜미뿐이냐? 내 등에서도, 하영이 등에서도 토했었잖아. 심지어 내 머리에까지 토를 했다니까. 머리 사이에 토사물들이 껴가지고 그거 하나하나 다 빼내는데. 우웩. 그 냄새 아직도 생각 나. 우웩 우웩.”
말끝에 운초가 헛구역질을 해대니, 강협 역시 속이 니글거리는지 손을 들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제나처럼 하영이 조용히 한마디를 보탰다.
하영;
“환상이 좀 깨지긴 했지. 여자에 대해···”
운초;
”환상? 그게 어디 깨진 정도냐? 나 평생 장가 못갈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때 처음해봤다. 그 뿐이냐? 무슨 벼락이라도 내리치는 줄 알았다. 우와, 세상에! 여자 코 고는 소리가, 아니 사람인 이상 그딴 소리가 어떻게 나올 수 있냐고? 그게 가능해? 나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란;
“코는 안 골았거든!”
강협;
“이도 갈았어, 너.”
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그저 분할 뿐이었다.
운초;
“동기란 이유만으로 죄 없는 우리 셋이 널 업고 집에 데려다 주는데··· 등에다 대고 토한 것만 네 번, 침은 가는 내내 질질 흘려 강을 이루고··· 와아! 그 만리길 같은 길을 오고 가면서 우리 셋이 눈물을 어찌나 흘렸는지. 그 때 생각만 하면···!”
란;
“한번 더하면 백만 번째다. 나 죽을 때까지 할래?”
운초;
“당연하지. 죽어서도 할 거다. 묘비명에 써놓을 거거든. 술도 못 하는 못난이를 친구로 받아준 위대한 인간 여기 잠들다, 고렇게!
하영과 강협이 동시에 실소를 터뜨렸다. 운초는 신이 나 낄낄거렸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란의 마음속에서 우뚝우뚝 살의의 감정이 커가려던 순간, 문득 차분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바꿨다.
하영;
“어떤 분이실까, 저하는?”
한손으로는 턱을 괸 채, 다른 한손으론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하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강협;
“글쎄···.”
말을 받으며 강협이 슬쩍 생선 접시를 란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발끈하려는 운초의 입은 재빨리 술잔으로 막았다.
당장 기분이 좋아져 헤헤거리는 란을 보며 끌끌 혀를 차기는 했지만, 운초도 더이상은 아뭇 소리가 없었다.
하영;
“어떤 사람들은 성군이 되실 자질을 갖추셨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주색에 빠져 서책은 멀리하고, 충언 올리는 자는 칼로 베어 죽이는 걸 즐기는 걸로 보아 폭군의 조짐이 보인다고도 하니···”
운초;
“그런 개소릴 믿냐?”
빤히 쳐다보는 하영의 시선을 받으며 운초가 언성을 높였다.
운초;
“다 개소리거든! 우리 이종사촌 형님이 지난 해까지 여기 계셨는데 주구장창 서책만 끼고 사신단다. 대장이 아무리 신체 단련을 권해도 듣지를 않으실 정도래. 그뿐인 줄 아냐? 보기엔 엄격하시지만 어버이처럼 따뜻하고 어진 마음씨를 지니신 공평무사한 분이시라는 거야.”
하영;
“······”
운초;
“그리고, 저하에 대해 나쁜 말 하는 인간들이 다 누구냐? 다 중궁전 사람들이야. 돌아가신 효원 마마의 소생이신 저하를 폐위시키고, 당신 소생의 영진대군을 왕세자 자리에 앉히겠다 이거지.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니야? 재작년 이곳에 살수들이 들이닥쳐서 저하 시해하려 했던 거, 그것도 다 중궁전 외척인 그 해현공인가 뭔가 하는 놈 소행이라는 거 우리 중에 모르는 사람 있냐고?”
란;
“소리 좀 낮춰. 아무리 외국땅이라지만···”
란의 주의에도 운초의 목소리는 작아지기는커냥 한단계 더 커져 나왔다.
운초;
“내가 뭐 없는 소리 했냐? 세상이 다 아는 일인 걸 뭐. 쉬쉬한다고 가려질 얘기냐고, 이게?”
하영;
“너희 집안은 저하의 외척이신 갈현공 댁과 가깝지.”
나직한 목소리로 하영이 말하자 운초의 눈초리가 대뜸 사나워졌다.
운초;
“뭐라는 거냐? 너 지금 무슨 뜻으로 그 얘기하는 건데? 내가, 우리 형님이 그래서 거짓말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냐? 저하가 보위에 오르시면 한자리 차지할 욕심으로?”
하영;
“내 말은···”
운초;
“말이면 단 줄 아나? 아까부터 너 정말 마음에 안들었거든? 한판 붙어 보자 이거지, 지금? 나와. 나오라니까!”
운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강협;
“왜들 이래?”
운초;
“이 자식이 시비를 걸잖아, 지금!”
강협;
“일단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고.”
강협이 자리에 앉히려 했지만, 운초는 버티고 서서 하영을 노려보았다.
조용히 탁자를 응시할 뿐 하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두 친구를 불안한 얼굴로 란이 번갈아 쳐다보았다.
강협;
“앉으라고! 친구끼리 뭐하는 거야?”
강협이 힘으로 당겨 운초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하영에게 말하였다.
강협;
“사과해라. 듣기에 기분 나쁠 수 있었어. 네 본 뜻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말 요령이 없었다.”
하영;
“미안하다···. 아무래도 내가 좀 흥분했나 봐. 저하가 계신 곳에 오게 되니··· 이해해라.”
선선히 사과하는 하영의 태도에도 운초의 화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예 하영을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리는 운초였다. 아까의 오기가 되살아난 것이다.
하영;
“실은 내가 조금 다른 얘길 들은게 있어.”
란과 강협이 묻는 듯 바라보았다. 운초만은 여전히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술병을 들어 제 술잔에 술을 따랐다.
하영;
“주색을 가까이 하시거나, 사람 죽이길 즐기시지는 않지만, 무색무취 하시다는 거야. 저하는 아무것에도 의욕을 보이지 않으신대.”
하영은 란과 강협에게로, 그리고 외면하고 앉아 술잔을 들이키는 운초의 옆얼굴에 시선을 맞춘 채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영;
“한나라의 왕이 되자면 서책을 가까이 하는 것 못지 않게 신체 단련도 필요한 일이야.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올바른 심신을 유지하기가 힘들고, 그럼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도 없어. 진정으로 성군이 되고자 하신다면 그러셔서는 안 된다는 거지.”
운초;
“그래서 저하를 폐위시키자? 그게 네가 하고 말의 요점인 거냐? 참 어렵게도 얘기한다.”
한껏 비아냥거리는 운초였다.
달래듯 강협이 운초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하영;
“난 그저 알고 싶은 거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눈으로 보고 직접 확인하고 싶은 거라고. 저하가 어떤 분이신지··· 벌써 10년이야. 한나라의 왕세자가 다른 나라에 볼모로 끌려와 1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어. 언제 돌아가실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기한도 없어. 거기다 이제는 대진국의 황녀를 비로 맞이하게 될 상황까지 벌어졌지. 그런데 이 모든 것 어느 하나에도 전하나, 저하의 생각은 들어 있지 않아. 모두 대진국 황제가 결정했지. 우리 인강국은 그저 따라야 할 뿐이고.”
참담한 침묵이 친구들 사이로 잠시 흐르게 두었다가, 하영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하영;
“상황은 더 나빠질 거야. 이런 때 보통의 왕이셔서는 안돼. 폭군이 아니니 괜찮다 위안 삼을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라고. 반드시 성군, 그 이상의 왕이셔야만 한다고 난 생각해. 내 말이 틀린 거니?”
- 작가의말
열심히 쓰고는 있는데,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찾아와 읽어주신 분들 감사드리고요.
읽으신 후 소감, 고쳤으면 하는 점들 있으면 알려주세요.
열심히 반영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 감사!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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