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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ster 님의 서재입니다.

펠릭스전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夢ster
작품등록일 :
2014.12.22 00:00
최근연재일 :
2016.12.28 16:59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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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6.2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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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278

DUMMY

278


"으아! 젠장! 길은 어디있는거야?"

"펠릭스! 이 멍청아! 그러다 우리 다 밟겠다! 길은 오른쪽이라고!"

고램의 통신이 계속해서 울렸다.

"칼! 어디로 가는 거야! 네 녀석도 또 벗어났어! 돌아오지 못해!"

"예? 어디죠? 제대로 따라가고 있었는데?"

"이런 젠장! 미치겠군!"

맴피스 마법사와 피셔가 통신으로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초행인 칼과 펠릭스는 계속해서 헤매고 있었다.


동부 중계진이 담당하는 구역은 오른쪽에 동부산맥을 끼고 있었다. 산맥 아래 숲은 온통 작달막한 나무들과 굵은 넝쿨들로 밀림 같았다.

백동나무로 된 숲이었다. 펠릭스가 익시투스 산에서 물을 받을 때 봤던 백단나무와 비슷한 종으로 몸통은 굵고 하얗고 단단하며 가지는 위쪽 옆으로 넓게 퍼졌다. 사철나무로 잎이 무성하여 겨울에도 푸름을 자랑했다.


문제는 이 나무의 크기였다. 다 자라도 약 4미터 정도로 작달막한 나무는 딱 마이티 고램의 가슴부근 턱 아래에 멈췄다. 즉 이곳 동부 중계진이 담당하는 숲에서는 고램을 타고서는 발아래 시야를 확보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고램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정해져 있었고 때문에 지상 유도가 필수였다. 심지어 지상 유도를 위해 소대 마법사에게 그 비싼 통신용 수정구슬까지 지급되는 곳이었다. 그것도 주먹만 한 크기였다.

그러다보니 칼과 펠릭스는 앞서가는 길버트 경의 고램의 뒤통수만 보고 쫓아가는데도 계속 길을 잘못 들고 있었다.


"아! 잠시만, 또 걸렸습니다."

"이런, 거기 꼼짝 말고 기다려! 우리가 가서 잘라 줄 테니!"

"제길,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펠릭스는 자신의 고램을 멈추고 투덜거렸다. 발아래에 덩굴이 걸린 것이다. 고램의 힘으로 끊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러다 주변 가까이 있는 기사들에게 뜻하지 않은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거기다 덩굴 중에는 나무나 다른 넝쿨들과 얽히고설켜 의외로 질긴 녀석도 있었다. 자칫 자력을 끊기 위해 힘을 주다가 중심을 잃고 고램이 쓰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전투와 같은 긴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능한 레인저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끼를 들고 가 끊었다.


"쳇! 대체 여기서는 고램 전투는 어떻게 합니까?"

칼이 투덜거리자 바로 피셔의 호통이 이어졌다.

"멍청이! 그러게 오기 전에 브리핑을 했었잖아! 여기서는 레인저 기사들 간의 전투가 주가 되는 전장이라고! 적도 이곳에선 가능하면 고램 전을 벌이려 하지 않는다고!"

"하긴 이 상황이니."

"하! 그나저나 미치겠군!"

칼과 펠릭스는 고램 조종석에서 짜증을 터트렸다.


초행인 이곳의 시야나 넝쿨이나 백동나무로 된 지형도 문제였지만 한 여름의 고램 조종석은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사방이 막혀있는 조종석에 마이티 고램의 통풍구는 발판 아래에 있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조종석으로 올라왔다.

거기다 조종을 위해 손에는 팔꿈치까지 오는 건틀릿을 차고 있고 다리에는 무릎까지 오는 쇠로 된 장화를 신고 있었다. 오 조작이 될까봐 손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땀조차 함부로 닦을 수 없었다.


"펠릭스, 넌 괜찮아?"

"손발에 땀이 차서 찜찜하지만, 견딜 만 해."

"아니, 그게 아니라 모기 말이야."

"뭐? 모기?"

"그래, 난 언제 들어왔는지 한마리가 돌아다니는 데 미치겠네. 잡지도 못하고 말이야."

칼의 말에 펠릭스는 깜짝 놀라서 자신의 조종석 주변을 살폈다.

"휴~ 나는 없어."

"쳇, 그거 아쉬운걸."

다행이 펠릭스의 마이티 조종석에는 모기는 들어와 있지 않았다. 들어와 있다면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더위 때문에 조종도 어려운데 거기다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기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웽웽 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여름이라도 제대로 기사복장을 갖춘 라이더의 물 곳이라곤 머리와 목 부분뿐이었다. 뻔히 보면서도 물려야 한다는 소리였다.

"젠장! 벌써부터 야간 근무가 기다려지는 걸?"

칼은 펠릭스의 마이티가 발밑의 덩굴을 제거하기 위해 행렬이 잠시 멈춘 사이에 재빨리 모기를 잡으며 투덜거렸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동은 상당히 더뎠다. 겨우 매복지에 도착하자 세 대의 고램은 나무 몇 그루를 기준으로 인근의 나무들을 원형으로 배어내었다.

"자! 서둘러! 까딱하다간 하루가 다 가겠다!"

리차드슨 경이 외쳤다. 병사들은 도끼를 들고 베어낸 나무와 덩굴들로 진지 주변에 방책을 세웠다. 그리고 임시로 지낼 막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칼과 펠릭스는 길버트 경의 고램과 함께 진지 중앙으로 모였다. 세 대의 고램은 서로 마주 본 상태로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팔로는 서로의 몸을 둘러 조종석 부근을 가렸다.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특히 주의해야 해!"

"옛!"

길버트 경은 두 번 세 번 고램 조정석이 외부에 들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한때 적의 궁수들에 의한 고램 라이더들 사망 숫자가 고램간 전투에 의한 사망자 보다 많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길버트 경은 고램에서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대 궁수인 엔필드 에게 점검을 받고 있었다.

"엔필드? 어떤가?"

"예! 이정도면 충분할 거 같습니다."

"좋아! 칼, 펠릭스, 나머지 위장을 부탁하네."

"예!"

길버트 경은 엔필드의 허가가 떨어져서야 고램을 멈췄다. 칼과 펠릭스도 대답을 하고 겨우 고램 조종석을 열었다.

"휴~ 이제야 좀 살 거 같네."

"아! 더워 죽는 줄 알았어."

두 사람은 땀으로 범벅이 된 복장으로 겨우 고램 조종석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나오자마자 두 사람은 입을 딱 벌리고 길버트 경을 쳐다봤다.

"이럴 수가?"

"스승님!"

"응? 왜?"

"그 복장은···."

"세상에! 너무 하십니다! 저희에겐 아무 말도 안 하시고서는!"

"아, 이거? 더워서 말이야. 거기다 이거 모기 예방도 된다네. 하하!"

길버트 경은 팔다리가 짧은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맨몸이 드러난 부분에는 눈구멍이 가는 망사로 된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기사는 항상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물론 피셔 경처럼 그딴 규정 콩죽에 말아먹듯 무시하는 기사들도 있었지만. 아무튼 지금 길버트 경의 복장은 엄연한 기사의 품위 위반이었다. 그동안 칼이나 펠릭스에게 좀처럼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언제 갈아입으신 겁니까?"

"아니 그보다 그 복장 보기에 좀 민망합니다."

마치 여성의 망사스타킹을 여기저기 둘러쓴 해괴한 모습이었다.

"하하, 역시 좀 그렇지? 내 그래서 자네들에게 권하지 않았던 거라네."

"이해는 합니다만."

"정말 시원하긴 합니까?"

"뭐, 안한 것 보다는 낫다고 할까?"

"그보다 그건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흠흠, 그 건에 대해서는 저기, 맴피스에게 물어보게나. 자 그럼."

길버트 경은 스스로도 창피했는지 서둘러 두 사람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고램에서 내려갔다.

칼과 펠릭스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백동나무 숲이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숲 가운데에 고램을 앉혀놓으면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 장점도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모르기 때문에 위장을 했다.


칼과 펠릭스는 마이티 고램의 등 뒤 박스에서 그물처럼 된 위장막을 꺼내 고램들의 머리 위를 덮었다. 그리고 그물 코 사이사이에 나뭇가지와 잎으로 덮어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꾸몄다.


임시 진지의 정비를 모두 마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도착도 늦은데다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을 때는 한참 늦어 뒤늦게야 모두들 저녁을 먹어야 했다..


저녁 메뉴도 준비 할 시간이 부족해 예의 빈즈 콩죽과 빵이 나왔다. 부실한 메뉴에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칼은 저녁을 먹으며 맴피스 에게 물었다.

"맴피스씨도 마법사죠?"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거 안보여?"

맴피스는 자신의 어깨에 그려진 네 개의 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4서클 마법사는 뭐 도박해서 딴 줄 알아?"

"그럼 고램 제작에 대해서도 나름 잘 안다고 봐도 되겠죠? 뭘 좀 물어보려고 그러는데."

"뭐, 내 특기야 공격마법이지만. 그래 뭐가 궁금해서 그러나?"

"고램의 환풍구 말입니다. 대체 왜 아래쪽에만 있는 겁니까?"

"그게 왜?"

"여름이면 쪄 죽을 거 같습니다. 보세요, 저 복장을!"

"맞아!"

칼의 말에 펠릭스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면서 주변의 사람들이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켰다.


길버트 경은 민망스러워 했음에도 여전히 망사 복을 벗지 않고 있었다. 길버트 경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대다수의 병사들은 길버트 경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니 피셔와 몇몇 병사들은 아예 윗옷 자체가 모두 망사였다.


"그냥도 저렇게 더운데 고램 안은 어떻겠습니까? 상상이 되십니까?"

"뭐야 그게 불만이었던 거야? 하긴, 두 사람은 올해 첫 여름이었지?"

맴피스 마법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대체 다들 저 옷은 어디서 구한 겁니까?"

"허가는 그렇다 쳐도 다들 저렇게 입고 창피하지도 않는 겁니까?"

"창피라. 흐흐흐. 글쎄? 그러니까 저게 어떻게 시작됐냐면 말이지···."

맴피스는 음흉한 웃음을 보이더니 칼과 펠릭스에게 바짝 다가와 소리를 낮춰 말했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남자들에겐 말 못할 고민이 있잖나?"

"···?"

칼과 펠릭스는 잠시 맴피스가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해 서로 쳐다보며 갸웃거렸다.

"아! 스스로 해결해야 할 생리적인 욕구 말이야!"

"···!!"

그제야 두 사람은 맴피스의 말뜻을 알아차리곤 얼굴을 붉혔다.

"흐흐흐, 맞아! 바로 그거 말이야! 처음에는 애인이 있는 병사들이 직접 가져온 속옷으로 그 목적을 해결했었지. 그러다 나중에는 애인이 없는 병사들은 새걸 구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저 망사스타킹이 부대에 퍼졌지."

두 사람이 침묵하자 맴피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상품 선전을 하듯 줄줄 외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누군가가 다른 용도에 눈을 뜬 거야. 바로 저런 용도 말이야. 내 생각엔 아마 그 사람도 자네들처럼 고램 라이더였을 거라고 생각하네. 라이더는 조종석에 들어가면 외부에서 볼 수 없잖나? 아무튼 저렇게 만들어 입어보니 기막히더란 말이지. 더위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고 모기도 막을 수 있었으니. 그렇게 여기 동부전선에 저 망사로 만든 물건이 퍼지기 시작한 거야. 어느새 히트 상품이 된 거지. 심지어 여름이면 여긴 망사스타킹이 없어서 못 팔정도라네. 그러니 자네들도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 필요하면 얘기하게. 보급관도 저건 어느 정도 눈감아 주는 편이니까 말이야. 소재는 뭐, 재력만 된다면 역시 레반터산 실크가 최고이긴 하지만 그건 너무 비싸서 불가능 하니. 내가 추천하는 건 탈리아에서 만든 거야. 그걸 수선실에 맡기면 저기 피셔 경의 망사 상의처럼···."

"휴~! 아니요! 맴피스씨! 제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닙니다!"

"응? 그럼?"

"그러니까 저런 걸 입기 전에 애초에 왜 고램 조종석이 그렇게 밀폐되어 있느냐는 말입니다."

"맞아요! 환풍구를 아래쪽 말고 다른 쪽에 낼 수는 없었답니까?"

"다른 쪽? 그러니까 어디로?"

"예를 들면 정면이나 위쪽 말입니다. 아니면 등 뒤라도 좋고요. 왜 하필 뜨거운 지열이 올라오는 아래쪽 입니까?"

그러자 맴피스는 칼과 펠릭스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램 정면 조종석 앞 장갑에는 대 마법 방어용 마법진이 그려져 있네. 마이티 고램이라도 5서클 마법을 정면에서 막을 수 있지. 그런데 통풍구 구명을 내려고 그걸 포기해? 왜? 파이어 볼에 맞아서 통구이라도 되고 싶은가?"

"위쪽에 낼 수도 있잖습니까?"

"비 오면 어쩌려고? 거기다 머리 위 비젼 장치는 마법에 광학기술이 결합된 민감한 장치야. 작동을 위해선 어느 정도 주변공간을 암실로 만들 필요가 있어. 거기다 여전히 거기도 정면 마법 공격의 영향이 미치는 지역이야."

"그럼 뒤쪽은요?"

"거긴 구멍을 내도 거검 거치대나 다른 등에 맨 고램 장비들 때문에 막혀버리지. 거기다 고램 전체 무게와 균형을 유지하고 조종자의 움직임을 전달하는 신호전달체계가 지나가는 곳이야. 인간으로 치자면 등뼈가 있는 곳이라고. 그런데 거기다 구멍을 내?"

맴피스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절대 안 될 말이지."

"아우! 왜, 아예 아래쪽의 환풍구도 막아버려 완전 밀폐로 만들어 버리지 그랬답니까?"

펠릭스가 짜증이 나 말했다.

"허허, 적어도 자네들 숨은 쉬어야 될 거 아닌가?"

그러자 칼도 짜증이 나 말했다.

"거 기왕에 만든 거 마법사들은 대체 고램을 왜 저렇게 타기 불편하게 만들었답니까?"

그러자 맴피스가 두 사람을 보며 씩 웃더니 말했다.

"자네 말을 들으니 예전에 날 가르쳐 주시던 스승님이 해 주신 얘기가 생각나는군. 옛날에도 같은 질문을 한 라이더가 있었던 모양이야."

"오! 그래요?"

"그래, 뭐라고 하셨답니까?"

"최초에 고램을 만든 현자 하이베르크의 다섯 제자 중 누군가가 말하길!"

"말하길?"

맴피스가 잠시 뜸을 들이자 칼과 펠릭스는 맴피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무렴 어때? 우리 마법사들이 탈거 아니잖아! 라고 했다는군. 하하하!"

맴피스의 대답에 칼과 펠릭스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쳐다봤다. 그 틈에 맴피스는 웃으며 냉큼 자리를 떴다.

"망사 셔츠,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게! 하하하!"

잠시 후 두 사람도 그저 허탈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기 대비책이 있다는 것이었다. 궁수들이 병사들과 임시 막사 밖으로 가서 나무뿌리 같은 것을 캐왔다. 그 뿌리를 짓이겨 액을 뿌리자 모기가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 액을 뿌린 후 펠릭스는 초번 고램 대기를 위해 고램 조종석으로 들어갔다. 입대 후 본격적인 첫 여름이었다. 숲에는 야밤에도 이름 모를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역시 하나 구해야 하나? 올해만 지낼 것도 아닌데···."

모기는 달라붙지 않았지만 밤에도 조종석은 덥고 답답했다. 때문에 펠릭스는 진지하게 망사 셔츠를 구매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사건이 터진 건 아침 고램 기동을 할 때였다.

주변 순찰을 위해 고램을 일으키자 녹색의 수해가 서서히 눈앞에 펼쳐졌다. 주변에 고램의 기동 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멀지않은 곳에 위장에 사용한 백동나무 가지를 떨치며 몸을 일으키는 크로비스의 고램이 눈에 들어왔다.

"저 적습! 11시 방향! 크로비스 고램 1개 소대!"

급작스러운 상황에 펠릭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목소리는 맴피스의 수정 구슬을 타고 진지로 퍼졌다.

"당황하지 마라! 아래쪽의 병사들은 아직 적이 보이지도 않아! 우선 적의 고램의 동태를 살펴 의도를 파악하는 게 먼저다!"

길버트 경의 화이트 고램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여섯 대의 고램이 대치했다. 서로 어색하게 서서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거리가 있었지만 어느 쪽도 섣불리 돌격하거나 다가오지 않았다. 동부의 다른 곳에서라면 이미 돌격했을 충분한 거리였다. 하지만 이곳은 발아래 지형이 불안했다.

뛰다가 넝쿨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단순히 창피만 당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여러 가지 이유로 피차 서로 싸움을 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쿵! 콰지직!'

발아래의 나무들을 박살내며 크로비스의 고램들이 먼저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길! 아무래도 놈들도 여기 인근에 진지를 구축한 모양이군!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적 병사들과 접촉! 크로비스 기사들이 옵니다!"

"칼, 펠릭스, 응전한다! 발아래를 주의해라!"

"예!"

다급한 보고와 명령이 고램 통신망을 타고 흘렀다. 길버트 조의 고램들은 상대 고램을 막기 위해 나섰다.


그동안 연습했던 01포메이션은 쓸 수가 없었다. 01포메이션은 때로 급격한 기동이 필요했다. 아니 사실상 이곳에서는 포메이션이나 다수의 협공은 무리였다.

뜻하지 않게 완벽한 1대1 고램 대전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느릿느릿 서로에게 다가가는 와중에 발아래에서 얼핏 빛이 번쩍였다. 누군가 마법을 쓴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 쓴 건지 또는 공격마법인지 신호마법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백동나무 숲에 가려 실패했다는 사실이었다.


'캉! 카캉!'

마법의 빛이 번쩍인 얼마 후 고램들도 각각 격돌했다. 웃기지도 않게 엉금엉금 발을 끌고 와서는 지근거리에 와서야 서로에게 일격을 날렸다.

"쳇! 이게 대체 무슨 꼴이지!"

검을 교환하며 펠릭스는 투덜거렸다. 여유를 부린 다기 보다는 기가 찼다.


고램의 공격은 보통 서로가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오러의 힘만으로는 한 번에 치명타를 줄 수가 없었다. 마치 둔기 같은 고램의 거검의 힘이 합쳐져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단단히 딛고서서 하체를 고정시켜야 했다.

그러나 펠릭스나 상대나 나무와 넝쿨에 신경 쓰느라 검에 힘을 담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다 아래 어딘가 있을지 모를 서로의 아군 병사들이나 기사들을 신경 쓰느라 크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펠릭스가 투덜거리는 또 다른 이유는 상대하는 적 라이더가 암만 봐도 자신보다 한 수 아래였다. 공격이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제대로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발아래의 지형만을 믿고 설치는 것 같았다.

마치 너도 나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데 이정도 실력 차 따위 무슨 의미가 있냐는 듯.

"제길! 마음에 안 들어! 너! 어디 한번만 제대로 걸리기만 해봐!"

상대는 이번에도 펠릭스를 견제만 하려는 듯 살짝 치고는 바로 물러섰다.


"침착해라! 발아래를 주의해!"

대전 중에 길버트 경의 명령이 다시 울렸다. 보통은 고램 전투 시에는 지휘할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전체 전투 지시는 리차드슨 경이 맡아서 했다.

그런 길버트 경이 지금 이런 명령을 한다는 것은 길버트 경이 상대하는 적도 그다지 실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라는 방증이었다.

그러자 펠릭스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녀석들 암만 생각해도 수상한데?"


'텅~!'

상대가 다시 펠릭스에게 가벼운 견제를 날린 후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응? 엇?!"

적의 미니트 고램이 움직이며 만들어 놓은 나무의 잔해들 틈으로 강렬한 오러의 빛이 번뜩이는 것이 펠릭스의 눈에 띠었다.

"누구지? 누구 오러지?"

펠릭스는 자신이 본 오러의 상대를 떠올리려고 머리를 굴렸다. 처음 보는 오러가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소대의 기사들의 오러라면 펠릭스도 알고 있었다.

길버트 소대에서 오러력이 강한 기사는 리차드슨 경과 피셔 경이었다. 그러나 방금 펠릭스가 본 오러는 그 두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방금 오러는 엑스퍼트 중급의 두 사람의 오러보다 훨씬 강하고 날카로웠다.

더구나 그 빛의 주인은 움직이는 스피드가 보통이 아니었다. 오러력이 강한 리차드슨 경이나 피셔 경은 대련 시에 빠른 스피드를 앞세우는 스타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스승님! 이건 함정입니다! 적 레인저 기사 중에 엑스퍼트 상급의 검사가 있습니다!"

펠릭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뭐?"

"뭐야? 정말인가?"

"예! 방금 숲에서 오러를 봤습니다!"

"젠장! 속았다! 이놈들은 모두 미끼야! 칼, 펠릭스, 서둘러! 아군 레인저들이 위험하다!"

갑자기 고램 라이더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동부 전선의 부대는 크게 고램이나 레인저 둘 중 하나를 중심으로 전술을 짰다. 그 점은 적도 마찬가지였다.


적의 레인저 중에 엑스퍼트 상급의 기사가 있다는 말은 레인저 중심의 부대 운용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뒷받침 하듯 펠릭스들이 상대하는 적의 고램 라이더들 실력은 별 볼일 없었다.


현재 길버트 소대는 고램 부대 중심이었다. 하지만 펠릭스들이 오기 전 까지만 해도 레인저 부대 중심의 전술이었다. 레인저들 실력이나 맴피스 마법사의 전력이 상당했던 것이다.


그 말은 설령 상대 기사 중에 엑스퍼트 상급의 검사가 있어도 소대원들은 적의 도발을 거절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어느 쪽이든 피가 흐를 가능성이 높았다.


엑스퍼트 상급이라고 반드시 중급 기사들 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게 그러했다. 한마디로 상대가 아군에게 피해를 입히기 전에 고램 부대가 먼저 적의 고램을 제압하고 적의 지상 병력을 견제해야 했다.


칼과 펠릭스, 길버트 경은 모두 상대하는 고램을 잡기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셋 중 누구도 즉시 상대 고램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이 녀석! 싸울 마음이 없다면 썩 물러서!"

펠릭스가 분노하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펠릭스가 서두를수록 상대는 더 느긋하게 움직였다. 일부러 잔 공격의 횟수를 늘리며 펠릭스를 더 안달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화가 난 펠릭스는 다음번 상대가 공격해 오는 순간을 노렸다. 적이 자신의 오른쪽 상단으로 내려치는 순간 펠릭스는 일부러 제대로 막지 않고 팔에 적당히 힘을 뺐다. 그러자 펠릭스의 검과 약하게 바인딩 된 상대 미니트의 거검의 끝부분이 펠릭스의 검을 밀치고 펠릭스의 마이티의 오른쪽 어깨에 닿았다.

'캉! 치지직!'

오러가 펠릭스의 마이티의 오른쪽 어깨장갑을 태우기 시작했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상대 미니트였다. 설마 적당히 날린 공격이 이렇게 상대에게 타격을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한 모양이었다. 뒤늦게 다급하게 자세를 고쳐 펠릭스를 밀어 붙이려고 했다.

"됐다! 너 잘 걸렸다!"

펠릭스는 그 순간 재빨리 오른발을 뒤로 확 빼며 허리를 오른쪽 뒤로 돌리며 바인딩 되어있던 검도 뒤로 당겼다. 그러자 상대는 제풀에 펠릭스의 오른쪽 옆으로 확 끌려왔다.

'쿵쾅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펠릭스의 오른쪽 뒤로 밀려들어온 녀석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거기서 펠릭스는 일부러 한 호흡을 쉬었다.

보통 이렇게 다급하게 균형을 잃은 녀석들이 다음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웅~!'

커다란 바람소리와 함께 적의 거검을 등 뒤로 휘둘렀다. 그러나 중심을 잃은 탓에 겁을 먹고 상대의 위치도 확인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이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충분히 예상했던 펠릭스는 상대가 휘두른 검이 최고점이 오르자 넓은 오른쪽 겨드랑이 틈새로 파고들며 허리를 베었다.

'푸학~!'

연녹색의 오러 전달 액체가 피처럼 터져 나왔다. 적 미니트 고램의 움직임이 급격하게 무뎌졌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펠릭스는 상대 고램의 오른쪽 발목을 거검으로 잡아당겨 엉덩방아를 찧게 만들었다.

"흥! 이건 변변찮은 실력으로 나를 마음 졸이게 만든 벌이다!"

'쿠쾅!'

미니트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아마 적 라이더 녀석은 한동안 머리가 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펠릭스도 학창시절 '춤추는 에드'를 교육하면서 질리도록 겪었던 충격이었다.


상대를 행동 불능으로 만든 펠릭스는 다른 고램들을 쳐다봤다. 마침 칼도 상대하던 미니트의 목과 한쪽 팔을 날리고 있었다. 길버트 경도 상대 블랙나이트를 무리 없이 몰아붙이고 있었다.

"좋아! 그렇다면 지상은? 맴피스씨? 들립니까?"

"펠릭스! 네 오른쪽이야!"

"헛?! 예? 오른쪽이라고요?"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맴피스의 다급한 고함이 터졌다. 펠릭스의 위치에서 오른쪽이라면 아군 진지 방향이었다. 그 말은 지상의 기사병력이 밀렸다는 뜻이었다.


펠릭스가 고개를 오른쪽 아래로 돌리자 크로비스 군의 기사복장을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고램들이 싸우면서 생긴 나무들의 폐허의 가장자리 끝 나뭇가지 위에 서서 고램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길!"

펠릭스는 볼 것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남자는 펠릭스가 검을 움직이기도 전에 빠르게 숲 속으로 사라졌다. 좀 전에 봤던 적의 그 엑스퍼트 상급의 기사가 분명했다. 펠릭스의 눈으로 쫓기가 어려울 정도의 속도였다.

"이런 안 돼!"

펠릭스는 적의 상급기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몇차례 숲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비명은 엉뚱하게도 맴피스에게서 나왔다.

"으아! 펠릭스! 이쪽으로 검을 휘두르지 마! 잔해가 날아온다고!"

"으앗! 죄송합니다!"

펠릭스는 어쩔 수 없이 서둘러 검을 거두어 들였다.


펠릭스가 한동안 소동을 피우는 동안 고램간 전투가 끝이 났다. 마지막 남은 적의 흑기사를 길버트 경이 가까스로 넘어트린 후 조종석 앞에 검을 내밀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길버트 경! 잠시 멈추세요!"

좀처럼 통신에 나서지 않는 리차드슨 경의 말이 고램 통신과 외부에서 동시에 울렸다. 가까운 곳에서 수정 구슬을 사용하면서 큰 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리차드슨 경의 말에 아군 고램은 모두 동작을 멈췄다. 각각 적의 고램을 하나씩 잡고 있는 상태였다. 칼과 펠릭스가 잡은 미니트 고램들은 행동불능 상태였다. 그나마 둘 다 목숨은 붙어있었다.

어느새 고램 전장 주변의 나무들은 넓게 엉망으로 누워있었다. 조심조심해서 싸운다고 한 것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그 가장자리 한쪽에 좀 전 펠릭스가 봤던 크로비스의 기사가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응?"

"헛!"

칼과 펠릭스는 놀라 탄성을 질렀다.

"길버트 경, 죄송합니다."

통신에서 리차드슨 경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 기사는 우리 쪽 안드레아 경과 드비어스 경을 포로로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상을 당한 모양이었다. 안드레아는 팔을 잡고 피를 흘리고 있었고 드비어스 경도 오른손을 늘어트린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런!"

크로비스의 기사는 아무 말 없이 검을 들어 안드레아의 목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 길버트 경이 상대의 블랙나이트의 조종석에 고램의 거검을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작가의말


277화를 

278화 앞에 붙여야 하나 

276화 뒤에 붙여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분량 문제로 빼서 따로 올렸습니다. 


지금 분량을 보니 잘 했다는 생각도 들면서 역시 그냥 어디 붙였어야 했나 싶은 반성도 되는군요.


오늘 쪽지를 확인하니 또 한분이 후원을...

부족한 글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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