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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ster 님의 서재입니다.

펠릭스전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夢ster
작품등록일 :
2014.12.22 00:00
최근연재일 :
2016.12.2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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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2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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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DUMMY

271


며칠이 흘렀다. 칼과 펠릭스, 두 사람의 저녁 연습에는 첫날 저녁을 제외하곤 피셔나 드비어스는 나오지 않았다.

안드레아와 레논은 그 후로도 가끔 도와주었고 리차드슨 경과 길버트 경도 몇 번 나와서 지켜봤다.

자연스럽게 칼과 펠릭스의 개인 연습은 서로 간 대련보다는 기술이나 각 검술의 장단점을 논하는 쪽으로 이어졌다.


소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분위기에 금방 익숙해진 듯했다. 피셔와 드비어스는 안드레아와 여전히 서먹서먹한 듯했지만 더 이상 이 문제를 언급하여 서로 싸우지는 않았다.




기상 후 기사들의 첫 훈련이 한창이었다. 이날도 오러를 주입한 제식검술을 구령에 맞춰 다 같이 펼쳤다.


"여기까지!"

리차드슨 경의 구령이 떨어지자 기사들은 저마다 숨을 몰아쉬며 쉴 자리를 찾았다. 반면 한쪽에서 펠릭스와 드비어스는 아직도 훈련 중이었다.


다행이 새 검술사건 이후로도 드비어스는 펠릭스와의 아침 훈련을 취소하지 않았다. 여전히 드비어스는 말없이 무뚝뚝했지만 펠릭스에게 가문의 훈련법을 착실하게 전수해 주고 있었다.


"그만"

"하아~"

얼마 후 드비어스의 말과 함께 펠릭스도 중검의 수련을 마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드비어스 가의 제식검술 수련은 일반 제식검술을 더 무겁고 느리게 펼치는 방식이었다. 오러의 절대 양이 상대적으로 적은 펠릭스에게는 아직 힘든 훈련이었다.


훈련을 마친 펠릭스는 오늘도 드비어스의 표정을 슬금슬금 살폈다.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날 자신의 훈련 정도에 따라 드비어스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드비어스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드비어스 경뿐만이 아니었다. 연습장의 다른 많은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축하하네. 얀!"

"드디어 해냈군!"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느 소대의 신입 기사가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있었다. 보아하니 드디어 엑스퍼트에 오른 모양이었다.

중앙기사학교의 올해 졸업생들은 모두 엑스퍼트였으니 서부기사학교나 남부기사학교 출신이리라.


"잘됐군요."

펠릭스가 무심코 내뱉자 드비어스가 슬쩍 곁눈질 하듯 펠릭스를 노려봤다. 펠릭스는 흠칫 놀라서 드비어스의 눈을 슬쩍 피했다. 드비어스의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다.

드비어스는 다시 시선을 새로 엑스퍼트가 된 기사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엑스퍼트가 되어 학교를 졸업한 생도들은 3년 후 제대할 무렵이면 상당수가 엑스퍼트 중급이 되지. 올해 너희들 졸업생들은 모두 엑스퍼트였다며?"

"예···."

갑작스런 드비어스의 말에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칼 경은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고 들었다."

"예, 2학년 때 벌써 엑스퍼트가 되었으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타고난 녀석의 소질로 보나 노력으로 보나 녀석은 아마 올해를 넘기기 전에 엑스퍼트 중급에 오를 가능성이 클 거야."

"역시 그렇겠죠?"

펠릭스도 수긍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 일로 드비어스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펠릭스는 어쩌면 오늘 자신의 훈련 태도가 드비어스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드비어스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었다.

"흥! 그런데 그런 녀석이 갑자기 새 검술을 만들겠다고? 네 생각에 그 녀석이 그럴 필요가 있을 거 같아?"

"예?"

"녀석은 타고난 오러의 재능도 그렇고 검술에 대한 이해도나 완성도도 상당해. 누가 봐도 수십 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재능이지. 거기다 이미 엑스퍼트 중급으로의 실마리도 잡은 것 같은데 거기에 집중해도 부족한 이때에 너와 같이 새 검술을 만들어?"

"···?"

"멍청이! 아직도 모르겠나?"

갑작스럽게 말투가 변한 드비어스의 반응에 펠릭스는 살짝 당황했다. 드비어스는 펠릭스에게 시선을 돌린 후 잠시 쳐다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펠릭스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자리를 떴다.


그 후 펠릭스는 따로 드비어스의 말의 의미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날 오후부터 소대는 상당히 바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 주부터는 본격적으로 소대간 모의 전투가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다.


"01 포메이션! 이게 앞으로 우리가 연습할 기본 전술이다."

길버트 경이 새 고램 포메이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장소는 펠릭스들이 첫날 미들사이드 요새에 도착했을 때 신고식을 치르던 그곳이었다.

설명회 내내 드비어스는 맞은편을 보며 노골적으로 득의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승리의 표정이었다.

드비어스의 맞은편에는 안드레아 경이 앉아있었다. 안드레아는 일부러 그런 드비어스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며칠 전 두 사람은 앞으로 소대 전술을 고램 위주로 할 것인가 레인저 기사들 위주로 할 것인가를 두고 언쟁을 했었다. 지금 길버트 경의 연설은 그 결과였다.

이미 몇 번인가 다른 고램 소대와 모의 전투가 있었다. 길버트 경과 소대 기사들은 그 결과 칼과 펠릭스의 고램 조종 실력을 높게 평가했다.


사실 두 사람의 고램 조종술은 중앙기사학교에서도 1,2위를 다투던 실력이었다. 칼의 실력은 후기 고램 조종 훈련소에서 길버트가 이미 확인했었다. 펠릭스의 실력도 검문소에서 확인했었다. 거기다 실전에서 두 사람은 충분히 제 몫을 해 냈다는 평가였다.

단지 펠릭스가 보였던 조금 불안했던 모습이 걸렸던 것뿐이었다.

"따라서 앞으로는 이렇게 보조를 맞추도록!"

간단한 개요 설명이 끝나자 소대는 식사 등을 위해 잠시 해산했다.


어쩌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다 훈련 계획으로 불려가고 식당에는 칼과 펠릭스 그리고 안드레아 경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쳇! 또 밀이야?"

안드레아는 면 요리인 파스타를 받아들고는 투덜거렸다. 구멍이 뚫린 굵고 짧은 면과 빈즈 콩의 새콤 달콤 매콤한 소스가 같이 부어져 나왔다.

"저런, 안드레아 경도 음식 투정을 하십니까? 제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데."

"이런 이런, 칼 경! 자네 아무리 남부 귀족 출신이라지만 요리에 대해 너무 관대해! 나는 피셔처럼 육식 찬양론자는 아니지만 여기 미들사이드 주방은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이걸 봐! 파스타 면은 반죽을 기계에 넣고 손잡이만 돌리면 나오는 거고 소스는 빈즈 콩 소스를 그냥 부은 거야! 보급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여기 주방장은 요리에 너무 성의가 없어."

안드레아는 투덜거리면서도 스푼으로 푹 떠서 입으로 옮겼다. 잠시 망설이던 펠릭스는 결심을 한 듯 말을 건넸다.

"저- 안드레아 경."

"응? 왜?"

"이런 걸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안드레아 경은 드비어스 경과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겁니까? 아! 물론 모시는 가문의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상하다? 그렇게 원수지간 같으면서도 같이 꼭 붙어 다니고?"

"예···."

"아니 괜찮아. 뭐, 그게 사실이지."

안드레아는 한동안 묵묵히 접시의 음식만 찍어갔다.


두 사람이 모시는 가문은 그다지 유명한 가문은 아니었다. 안드레아는 고든 자작가의 기사였다. 그리고 드비어스는 이웃한 하퍼 남작가의 기사였다.

에덜라드는 외부와 전쟁 시 귀족간의 영주전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툼이나 싸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말이야. 주인이 기침을 하면 아랫것들은 한술 더 떠서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경우가 있거든."

빠르게 자신의 접시를 비운 안드레아가 드디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문제는 그러다 괜히 싸움이 커질 위험이 있다는 거지. 그러니 그럴 땐 차라리 한명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나서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그리고 그 각 가문의 대표로 나선 두 사람이 안드레아 경과 드비어스 경이었단 말입니까?"

"아니, 그게···. 나는 맞는데 드비어스는 아니었어. 정확하게는 그 형이었거든. 그게 일이 꼬이기 시작한 발단이었지."

안드레아의 말에 칼과 펠릭스는 서로 마주보고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영주전은 금지되어 있지만 기사계급 이상의 개인 간 결투는 허용되어 있잖아? 처음에는 둘 다 그냥 주군의 앓는 소리 대신 죽는 시늉만 하러 나왔는데 일이 꼬일 때는 항상 예고나 소리 소문이 없더라고. 사고가 터졌지. 나는 일이 커질까봐 군으로 피신했고 녀석은 형의, 아니 정확히는 가문의 명예를 찾겠다며 얼마 후 나를 쫓아서 입대했지. 그리고 돈을 쓴 건지 협박을 한 건지 모르지만 어떻게 여기에까지 오게 됐지."

"세상에···. 이걸 길버트 경이나 리차드슨 경도 알고 있습니까?"

"원, 녀석들, 너희가 아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를까봐? 그리고 괜찮아. 우리가 같아 있는 건 길버트 경이 조치한 탓이니까."

"아니 어떻게 두 사람이 같은 소대에 있을 수 있습니까? 두 사람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도 어떻게든 떼어놔야 하지 않습니까?"

펠릭스의 말에 안드레아는 잠시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건 서부에 떠도는 유명한 옛날이야기인데 말이야···."

"옛날이야기요?"

"그래, 음- 옛날에 유명한 두 사람의 검객이 있었어. 두 사람은 서로 평생의 라이벌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결국 결투를 벌였고 목숨으로 승자와 패자로 나뉘었지. 그리고 얼마 후 패자의 아들이 승자를 찾아왔어."

"복수를 위해서 재도전 한 건가요?"

"비슷하지만 아니야. 소년은 승자에게 자신을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했지."

"예?!"

"제자라고요?"

"그렇게 놀랄 거 없어. 복수를 위해서 한 행동인건 맞으니까. 소년은 복수를 하고 싶었지만 이미 자신을 가르쳐 줄 아버지는 죽고 말았지.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런 결정을 내린 거야."

"그럼 승자는 그 아이를 제자로 받아 들였답니까?"

"물론이지."

"···?!"

칼과 펠릭스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승자도 알고 있었어. 패자의 아들이 복수를 위해 자신의 제자가 된 것을."

"어떻게 그런···."

"소년은 제자가 된 그날부터 승자의 검술을 비롯해 버릇과 습관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배우고 익히기 시작했어. 언젠가 복수를 할 그날을 위해서 말이야. 한편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승자는 그날부터 잠시도 수련을 개을리 하지 않았어. 아니 그럴 수가 없었지. 자신에게 복수하겠다고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는 제자가 있으니 당연하잖아?"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 십년 후 소년은 복수에 성공하지."

"저런···."

칼과 펠릭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게 끝일까?"

"예?"

"소년은 복수에 성공했지만 승자였던 스승은 그저 모든 걸 잃은 걸까? 생각해봐! 목숨은 잃었지만 누구보다도 필사적으로 자신의 검술을 익혀 자신을 넘어선 제자가 앞으로 자신의 검술을 널리 알릴 것이 아닌가? 안 그래?"

"아!"

"···과연!"

"나와 드비어스의 관계도 비슷해. 처음 우리 사정을 알게 된 길버트 경이 우리 두 사람에게 제안을 했지. 결투는 훗날 우리가 같이 제대하는 날 하도록 말이야. 대신 그때까지 같이 검술을 닦으며 서로 알아가라고 설득 한 거야. 뭐, 주로 드비어스 녀석을 설득하신 거지만."

"흐음···."

칼과 펠릭스는 알 듯 말 듯 한 표정을 띠었다.

"지금은 드비어스 녀석도 그때 일이 사고였다는 걸 알고 있어. 머리로는 말이야. 다만 아직도 가슴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아마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할 거라고 봐."

그제야 칼과 펠릭스는 애매한 두 사람의 관계를 알 것 같았다. 잠시 가만히 혼자 생각을 하던 칼이 갑자기 안드레아에게 물었다.

"그런데 설마 길버트 경이 얌전히 사이좋게 있으라 했다고 두 사람 그동안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까?"

"훗! 그럴 리가!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답은 이미 알겠지?"

안드레아는 대답을 하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칼과 펠릭스도 웃었다. 안드레아와 드비어스, 두 사람 중에 항상 안달해 하는 것은 드비어스였던 것이다.




저녁 개인 시간이었다. 한차례 훈련을 마친 펠릭스는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반면 아직 여력이 남은 칼은 여전히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금은 펠릭스가 사냥에서 깨우쳤던 오러의 운용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펠릭스, 네 이 기술 말이야. 내 흘리기 기술에 접목하면 제법 효과가 있겠는 걸? 어쩌면 이게 서부검술과 제식검술을 통합하는 열쇠가 될지도 몰라."

그러나 펠릭스는 칼의 질문에 답이 없었다. 결국 칼은 질문을 멈추고 펠릭스의 옆에 가서 앉았다.

"이봐 펠릭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거야?"

"응? 아, 길버트 경 말이야."

"길버트 경이 왜?"

"뭐라고 할까, 여러 가지로 너무 잘 해준다 싶어서."

"녀석도. 그럼 좋지 뭘."

"그렇기는 한데···."

칼의 대답에 펠릭스는 그냥 피식 웃었다. 그러나 내심 복잡한 심정이었다.


이곳 미들사이드 요새로 돌아온 후로 펠릭스나 칼에 대한 길버트 경의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두 사람의 훈련 과정에 대해 꼼꼼히 살폈고 저녁에는 무의 수련도 꼬박꼬박 챙겼다.

마치 중계진에서 그러지 못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난지 얼마 후 어둠의 오러 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길버트 경은 아무런 조건 없이 펠릭스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무의 수련에 대해서 알려줬다.


사실 이 정도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대단한 수련법도 아니고 자신의 소대 신입이 어둠의 오러의 유혹에 빠져 끔찍한 난동을 부리는 것을 미리 방지 할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생판 남인 펠릭스를 위해서 선임기사들의 연서를 모와 준다고 했다. 보통 타인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안드레아와 드비어스를 설득해서 펠릭스나 칼의 개인적인 수련에도 도움을 줬다. 아무리 소대장이 부탁한다고 하지만 각 가문의 비전을 그렇게 쉽게 알려주지는 않는다.

칼이 새 검술을 만들어 보겠다는 얘기를 했을 때도 그랬다. 상당히 무리한 부탁이었음에도 드비어스와 피셔를 설득했다.


그리고 오늘 안드레아 경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런 친절은 펠릭스나 칼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 소대의 다른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길버트 경에게서 여러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보였다.

단지 펠릭스는 자신만 좀 더 과한 호의를 받은 것 같았다.




훈련을 마친 두 사람은 숙소로 돌아왔다.

"아! 펠릭스 경, 마침 돌아왔군. 자, 여기 있네."

길버트는 펠릭스에게 책을 내밀었다. 중계진에서 펠릭스에게 빌려갔던 '남부 몬스터 도감'이었다.

"이제 다 읽으신 겁니까?"

"그래, 나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신간이더군. 재미있었네."

책을 받아든 펠릭스는 무심코 책 표지를 봤다.

"어? 어라?"

갑작스런 펠릭스의 반응에 막 돌아서려던 칼과 길버트가 다시 몸을 돌렸다.

"왜 펠릭스?"

"뭐가 잘못되었나?"

"아뇨, 그게···. 여기."

펠릭스는 책 표지의 저자이름을 가리켰다.

'남부 몬스터 도감.','저자 드비어스 홀랜드 백작.'.

표지를 바라본 세 사람의 시선이 묘하게 얽혔다.


드비어스 경의 가문명은 다이슨이었다.

드비어스 다이슨은 서부지역 하퍼 남작가의 기사였다. 드비어스 홀랜드 백작가는 몰락한 남부귀족이었다. 남부에 대대적인 몬스터 침공 전에는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가문이었다고 한다. 그때 남겨둔 재산을 바탕으로 지금은 남부의 동서산맥 여기저기를 떠돌며 자비로 이 책을 출판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드비어스 다이슨과 드비어스 홀랜드. 그저 이름이 서로 같을 뿐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 있었다.

"우연일까요?"

"그렇지 않을까? 같은 이름이나 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칼과 길버트의 말에 펠릭스가 반대의견을 냈다.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드비어스 경 말입니다. 서부 기사이면서 사용하는 검술이 제식검술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남부식에 가깝습니다."

"···."

펠릭스의 말에 두 사람은 반론을 쉽게 내지 못했다.

드비어스가 제식검술을 사용하는 거야 둘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마다 드비어스와 같이 훈련을 하는 펠릭스였다. 아마도 여기 있는 누구보다 드비어스의 검술 수련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역시 무슨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요?"

"으음."

"과연···."


귀족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출생이나 기타 신분상의 변경이 있을시 귀족원에 등록을 해야 했다. 등록에는 돈이 들었다. 영지나 장원을 가진 귀족에게는 푼돈에 불과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몰락귀족들에게는 큰돈 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영지나 경제기반을 가지지 못한 방계귀족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적 계급과 지위가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까운 친족의 경우는 본가의 배려로 장원이나 연금 등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몇 세대 멀어진 먼 방계친족 중에 장원도 없이 연금도 끊어진 상태에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는 기사가문과 동등한 위치의 그냥 그저 그런 사족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그렇게 되기 전에 재산을 모으거나 집안에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인물이 나타나 가문을 다시 세우면 괜찮았지만 그대로 몰락해서 평민보다 못한 처지가 되는 수도 많았다.


때문에 방계 귀족들은 어떻게든 본가의 눈에 들기 위해 분주했다. 조그만 장원이라도 받기위해 동분서주 하거나 쥐꼬리만 한 연금이 끊어질까 늘 노심초사했다.

행여나 영주가 자신이 있는 마을을 방문하면 부리나케 달려 나오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펠릭스는 특히 이런 사정을 잘 알았다. 펠릭스의 장원은 평민출신인 페어필드 할아버지나 어머니 세실리아가 받기에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모계가 귀족가의 방계도 사족도 아닌 평민출신의 사생아인 펠릭스가, 그것도 상당히 보수적인 지역의 동부에서 꽤나 큰 장원을 일리아드 가문으로부터 받게 되자 불만을 가진 주변 일리아드가의 방계와 사족들이 종종 몰려들었던 것이다.


반면 기사가문의 경우 충성의 대가나 큰 공을 세우면 귀족가문으로부터 이름이나 성을 새로 하사받는 경우도 있었다. 귀족가의 성을 받아 해당 귀족가의 사족과 같은 지위와 명예를 누리는 명문 기사가문도 있었던 것이다.


"홀랜드 가문의 기사였다가 어떤 이유로 공을 세우고 이름을 사사받은 후에 남부의 몰락과 함께 흩어진 게 아닐까요?"

"과연! 그렇게 생각하면 남부의 제식검술을 익히고 있는 것도, 드비어스라는 이름도 일단은 설명이 되긴 하는군. 그렇다면···."

"자! 거기까지!"

칼과 펠릭스의 추측이 좀 더 깊어지려고 하자 길버트 경은 두 사람을 만류했다.

"좋은 뜻으로 관심을 가지는 거야 좋지만 때로 너무 과하면 서로가 불편할 수도 있어. 그저 우연 일수도 있고 하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그냥 우리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하세나."

"예."

"···."

길버트 경의 말에 칼은 순순히 대답을 했으나 펠릭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왜 그러나? 펠릭스 경? 뭔가 아직도 할 말이 남아있나?"

"저, 길버트 경. 오늘 안드레아 경에게 드비어스 경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펠릭스는 식당에서 안드레아가 했던 말을 간략하게 길버트에게 들려줬다.

"그래서 말인데, 이미 수년이 지난 지금, 그것도 신입인 제가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두 사람을 정말 같은 소대에 둬도 괜찮겠습니까?"

"흠, 그렇게 걱정이 되나?"

"짧은 시간이지만 두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도움을 받은 거 같아서 말입니다. 솔직히 두 사람이 다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상당히 조마조마합니다."

펠릭스의 말에 길버트 경은 잠시 생각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아마도 얘기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라 판단한 모양이었다.

"분명 드비어스 경이 처음 소대에 왔을 때는 상당히 심각했지. 나도 두 사람의 사정을 알고 난 후 사실 둘을 갈라놓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했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래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않겠더군. 그래서 차라리 두 사람의 관계를 표면화 해버리자는 생각을 했지."

"예? 그럼 아예 사람들이 다 알도록 말해버린 겁니까?"

"그래. 그러면 최소한 다른 사람들 모르게 자기들끼리 몰래 결투를 벌이거나 하지는 못할 테니 말이야."


길버트가 한 일은 간단했다.

군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 간의 결투는 금지되어 있었다. 결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분쟁원인에 대해 기사 심의회의 심의, 허가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보통은 군 입대 전의 개인 사유는 제외되었다.


허가가 떨어지면 일반 결투 절차에 따라 결투자 각자가 보좌관, 참관인, 증인을 선정해야했고 심판 등이 있어야한다.

한마디로 입대 전 개인적인 사유로는 드비어스와 안드레아의 결투는 이곳 군에서 정식 절차로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하고자 한다면 결국 몰래 둘이서만 끝장을 보는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길버트가 두 사람의 사이를 공표해 버리니 그 조차도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혹시나 한 사람이 사라진다면 당연히 다른 한 사람이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후 두 사람을 설득했지. 최소한 군에 있는 동안은 결투를 하지 않도록 말이야."

"쉽지 않았을 거 같은데요."

"당연하지. 하지만 어쩌겠나? 두 사람 모두 기사의 명예 때문이라도 몰래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을 테니 수가 없었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나아지더군. 드비어스 경은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지만 일단 어느 정도 오해는 풀린 것 같고. 몇 번 같이 실전을 겪으면서 돕다보면 신뢰나 정이라고 할까,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을 무시하기 어렵거든."

가만히 듣고 있던 펠릭스가 물었다.

"드비어스 경의 경우 고램 라이더로서의 능력도 상당하던데 고램 라이더로 임명할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음, 나도 원래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고 드비어스 경에게 라이더 자리를 제안했었지. 그런데 거절하더군. 레인저로 남아 안드레아 경의 등 뒤라도 노릴 생각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나봐. 하하하. 아무튼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진 후로 그나마 예비라이더 자리는 맡아주더군. 그리곤 그때부터 저렇게 두 사람은 항상 붙어 다니고 있네."

길버트 경의 말에 칼과 펠릭스는 서로 마주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두 사람은 목숨을 건 결투까지는 아니더라도 몰래 그것도 제법 격렬한 대결을 했을 것이다. 그 결과는 안드레아 경의 승리였을 테고. 그 후에 저렇게 붙어다니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안드레아 경이 점심때 해 준 그 옛날 얘기와 비슷한 이유 때문인 듯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어. 내가 선임기사가 되고난 후에 가장 많이 고민하고 부딪히게 되는 문제가 뭔지 아나?"

칼과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펠릭스 경, 자네의 개인 사정도 그렇지만. 바로 이런 개인들 간의 부딪히는 문제들이야. 차라리 작전이나 임무, 혹은 병사들의 통솔이라면 리차드슨 경이나 에스턴 병대장처럼 복무기간이 오래된 경험이 풍부한 사관에게 맡겨버리면 편하거든."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려는 듯했다. 펠릭스는 가만히 길버트 경의 말들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얘기는 우연히 책에서 발견한 드비어스 경의 이름에서 시작해 안드레아 와의 관계에까지 나갔다.

길버트 경은 두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단하게 설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펠릭스는 그 간단한 단어에 담긴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걸 느끼고 있었다.


길버트 경 스스로도 얘기했듯 사람들은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연은 결코 간단하고 쉬운 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당장 펠릭스 자신의 문제만 해도 그랬다.

길버트 경은 일면식도 없는 펠릭스에게 아무조건 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마도 소대 내에서 펠릭스가 모르는 이런 사례들이 상당히 많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당장 부대 전체로 봐도 분명 길버트 경의 위상은 남달랐다. 우선 무의 수련을 전파하고 있다고 했다. 이곳 동부 전선에서 가장 오래 복무한 사관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부대의 여러 공통의 문제를 조절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대에 무슨 일이 있으면 먼저 길버트 경을 찾아왔다.

그 때문에 중계진이나 미들사이드 요새에서는 길버트 경의 주변에 다른 소대의 선임기사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부대의 사령관인 베인브릿지 보다 더 신뢰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길버트 경이 그저 오래 복무했을 뿐이고 말뿐이며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라면 다른 기사들이 이렇게 따를 리가 없었다.


그러자 펠릭스는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올랐다.


"저기, 길버트 경!"

"음? 왜 그러나?"

막 일어서려던 길버트 경을 펠릭스가 불러 세웠다.

"왜죠? 왜 이렇게 잘 대해 주시는 겁니까?"

뜻밖의 펠릭스의 질문에 길버트 경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저 뿐만이 아니라 드비어스 경, 안드레아 경, 그리고 칼에게 까지···. 아마 다른 소대원들이나 부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이신 듯 합니다만."

그러자 펠릭스의 질문에 자신도 궁금하다는 듯 칼도 펠릭스의 옆으로 다가와 길버트 경을 바라봤다. 빤히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 길버트 경은 창피한 듯 잠시 시선을 돌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작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네들이 생각하기에 에덜라드가 근 100여 년간 전쟁을 하면서 입은 가장 큰 피해가 뭐라고 생각하나?"

"음, 글쎄요? 영토를 잃어버린 것 아닐까요?"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영토는 사실 크게 문제가 아니지."

칼의 대답에 길버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펠릭스를 쳐다봤다.

"설마 문화와 사상의 퇴보··· 인가요?"

펠릭스의 대답에 길버트의 얼굴이 크게 밝아졌다. 자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답이라는 표정이었다.

"정확히 내가 바라던 답이군. 놀라운데?"

"제가 생각해 낸 답이 아닙니다. 제 형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작년 겨울이었죠. 그러고 보니 그때도 이 책을 언급했었군요."

펠릭스는 손에 들고 있던 '남부 몬스터 도감'을 다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련하게 작년 겨울 일리아드 가의 서재에서 형과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 길버트 경을 만났을 때 제 형과 어딘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제 형도 책을 무척 좋아하거든요."

"어휴~ 사실 말도 못합니다. 펠릭스 녀석 학교에 다니던 3년간 형인 에이드리언의 책 심부름 때문에 정신없었거든요. 아마 학교 도서관 책은 죄다 복사해서 보냈을 겁니다."

칼은 조금은 과장되게 쌓아올린 책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하하! 그런가?"

길버트 경은 두 사람의 대답을 들으며 자신의 침상 주변을 슥 눈으로 훑었다.

"뭐, 내 책들은 대부분 내 것이라기 보단 할아버지의 유산이지만. 그렇게나 분위기가 비슷하다니 언제 기회가 된다면 자네 형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군."

길버트 경은 자신의 침상 주변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상당한 양의 책들이 쌓여있었다. 책들을 바라보며 잠시 추억에 젖는듯하더니 다시 칼과 펠릭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서 자네들이 생각하기에 이 전쟁의 목적이 뭐 같은가? 우린 왜 100년 가까이 크로비스와 싸우고 있지?"

"음, 에덜라드 북부 귀족과 크로비스의 남부 귀족간의 영토분쟁이 전쟁의 시작이었으니 땅 때문 아닌가요?"

"그런가? 그 영토가 과연 우리 에덜라드 전체의 문화와 사상의 퇴보를 감수하면서까지 얻을 가치가 있을까? 그렇다면 칼 경, 만약 이 전쟁이 끝나고 말일세. 나라에서 자네에게 이곳 북쪽에 영지를 나눠 준다면 자네는 어쩌겠나?"

"예?"

"자네는 그 영지를 받겠나?"

"그야 공짜인데···."

"그런가? 펠릭스 경, 자네도?"

"당연히 나쁠게 없지 않겠습니까?"

칼과 펠릭스의 대답에 길버트 경은 씩 웃어보였다.


"이곳은 애초에 무역로 로서 상당히 값어치가 있었지. 몬스터의 남부 침식이 있기 전 에덜라드 남쪽의 자유무역도시 크리스티아에서 출발한 물품들이 남부를 지나 수도를 거쳐 이곳 무역로를 통과해 에덜라드의 식량과 레반터의 무역품들이 크로비스로 향했거든. 하지만 남부 무역로가 몬스터의 침공으로 끊긴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무역로 로서의 가치가 없어. 그리고 지금은 오랜 전쟁 탓에 좀처럼 가까이 오지 않지만 여기는 원래 동부산맥과 서부산맥 사이에 낀 협곡 같은 지형이야. 전쟁이 끝나고 조용해지면 상대해야 할 몬스터의 숫자가 상상이 되는가?"

길버트의 말에 칼과 펠릭스는 살짝 오싹함을 느꼈다.


동부산맥의 북쪽에는 대형몬스터가 많이 서식했다. 겨울 펠릭스가 상대했던 트롤들도 동부산맥 북쪽에서 콜마르 령의 동쪽을 돌아서 내려온 녀석들이었다.

심지어 콜마르 령 북쪽 면은 몰려오는 몬스터들의 숫자나 크기도 남쪽과 달랐다. 가끔 트윈헤드오거 같은 보기 힘든 녀석들도 출몰하는 지역이었다.


한편 서부산맥 북쪽도 몬스터의 숫자가 엄청났다. 때문에 서부산맥 북쪽의 서쪽 면과 접하는 웨스터랜드 제국지역에는 매년 많은 용병들이 고용되었다. 특히나 그곳에는 화이트 고램을 만드는 서부 마탑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매년 위험한 대형몬스터 사냥 의뢰가 많았다. 서부 마탑에서 사용할 물품 조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주된 의뢰 이유는 안전 때문이었다.


"끊어진 무역로와 앞으로 몰려들 몬스터들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의미 없는 영토를 얻으려고 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지."

길버트 경의 말에 칼과 펠릭스는 공감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복무를 한지 이제 근 30년이 다 되어가지.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다네. 그 중에는 무사히 제대를 한 사람도 있고 공을 세우고 명성을 얻은 이들도 있지. 하지만 그런가 하면 안타깝게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다네."

길버트 경은 잠시 옛일을 회상하려는 듯 눈을 감고 뜸을 들였다.

"단언하건데 이 전쟁은 진정 쓸데없는 낭비야! 크로비스, 에덜라드 어느 쪽이던 하루라도 빨리 멈춰야 하네! 긴 전쟁으로 우리 에덜라드는 지금 사상과 문화가 퇴보하고 있네. 사상과 문화의 발달은 곧 그 나라의 역사적 발달과 직결되네. 이대로 가면 에덜라드의 역사 그자체가 멈춰버릴 거야. 거기다 이 전쟁은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빨아들이고 있어. 바로 그 사상과 문화를 이어가야 할 젊은이들의 생명을 말이야."


길버트 경의 목소리는 상당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다시 목소리를 낮추고 두 사람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문화란 멈춰있는 게 아니야. 과거로부터 이어져 전해지며 발전하는 거지. 그리고 그 발전의 주역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자네들 청년들이야. 특히 자네들과 같은 귀족가의 청년들이 앞장서서 주도해야 할 의무가 있어. 멈춰있는 역사의 흐름을 다시 움직여 이어가는 것! 그것도 귀족의 노블래스 오블리쥬의 하나라고 나는 믿네."


마치 연설을 하는듯한 길버트의 말이 끝났다. 그제야 펠릭스와 칼은 왜 길버트 경이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들, 군에서 자신이 만난 많은 젊은이들을 그렇게 돕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왠지 가슴 어딘가가 뭉클했다.


"내 생각만 일방적으로 얘기한 거 같아서 좀 미안하군.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신흥 무인귀족 출신이야. 그 전에 내 할아버지는 기사가문 출신이었고. 한마디로 국왕파벌이라는 말이지. 그러니 다분히 왕가와 왕가에 따르는 귀족의 의무, 즉 애국심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위치에 있다네. 하지만 애국심도 그렇고 내 개인의 인생목표 같은걸 타인에게 강요 할 수는 없네. 국가를 위해 꼭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려고 꺼낸 얘기도 아니야."

그러나 칼과 펠릭스는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길버트의 연설 아닌 연설에 상당히 빠져든 표정이었다.


"자네 두 사람은 앞으로 제대하면 뭘 하고 싶은가? 인생에 목표가 있나?"

길버트 경의 말에 칼은 바로 대답했다.

"저는 남부의 몬스터를 몰아낼 겁니다. 그래서 다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남부를 만들 겁니다."

길버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펠릭스를 바라봤다.

"저는···."

펠릭스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저는 한 번도 길버트 경처럼 그렇게 넓은 안목으로 목표를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펠릭스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펠릭스는 꿈이 없었다. 딱히 어떤 목표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기껏해야 알리시아와 가족들과 함께 서부나 레반터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게 인생의 목표일 수는 없었다.

그나마도 지금은 군에 묶여있었다. 그것도 장장 18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방앗간 집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무리하게 기사교육을 받아야했다. 유일한 욕심이라면 어머니와 외가의 가족들과 맘 편히 자유롭게 사는 것이었다.


그나마 뭔가 거창한 인생의 목표를 처음 마주했던 것은 학창시절 칼과 남부 소년들의 꿈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서자인 펠릭스가 남의 인생을 살고 있는 동안 칼이나 남부 소년들은 이미 꿈이 있었다. 그것도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크고 어른스러운 꿈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길버트 경의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길버트 경은 국가의 장래라는 정말로 큰 미래를 염려하고 있었다. 아버지인 일리아드 남작처럼 고작 자신의 영지의 영달을 위해 자신을 이용하려는 조잡한 꿈이 아니었다. 칼이나 남부 친구들이 그리는 지역적 이상의 한계마저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십여 년간 자신의 그 이상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


아무리 억지로 받은 교육이라지만 펠릭스도 나름 고급 교육을 받았다. 학교에서 사관으로서의 교육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은 이처럼 무언가 원대한 꿈은 한 번도 떠올려 보지 못했다.

부끄러웠다.


우울한 표정의 펠릭스의 어깨를 길버트 경이 다가와 두드려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자네에겐 당장 처한 현실만도 처리하기 벅차다는 걸 잘 아네."

"길버트 경."

"칼 경의 목표처럼 거창하지 않아도 돼. 아직 자네는 젊어. 지금부터 장기적인 안목으로 천천히 한번 찾아보게. 꼭 의식적으로 목표를 찾지 않아도 현실에 집중하다보면 또 누가 알겠나? 그게 무언가 더 큰 이상에 도달하는 방법이 될지 말이야."

그러자 칼이 끼어들었다.

"이봐! 펠릭스, 꼭 그런 거 찾지 않아도 돼! 기억나? 남부로 오라고! 알지? 펠릭스, 너라면 언제든지 환영한다니까!"

"칼."

펠릭스는 칼의 말에 웃으며 바라봤다.

'그래, 벌써부터 안달할 필요는 없지.'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길버트 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자! 많이 늦었으니 이만 자도록 하지!"

"예, 길버ㅌ···."

"예, 스승님!"

"응?"

펠릭스가 하려는 대답을 끊으며 칼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 대답에 길버트 경이 돌아서며 쳐다봤다.

"칼 경? 지금 뭐라고 했나?"

"아뇨, 별거 아닙니다. 스승님."

칼은 웃으며 길버트 경에게 또다시 스승님이라 불렀다. 그 호칭에 펠릭스도 깜짝 놀라 칼을 쳐다봤다. 그리고는 그래도 되냐는 듯 길버트 경을 바라봤다.


길버트 경은 두 사람의 시선에 잠시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마치 그 호칭으로 부르는 것을 허락한다는 듯.

"자 그럼, 내일 보세나."

"예! 스승님!"

길버트 경의 말에 칼과 펠릭스는 같이 웃으며 크게 답했다.


작가의말

많이 늦어져 정말 죄송합니다.


변명 하자면

며칠 PC를 만지지 못했습니다.

온라인에 강남 사건으로 시끌벅적 하더군요.

뭔 일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다른 글에 눈이 잘 가지 않는데.

어쩌다 다른 글에 잠시 빠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독서를 제대로 못했더군요.


한창 정신없이 읽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제 글을 쓰려고 했더니 잘 안 써지더군요.

거기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화가 좀...


결국 몇번, 며칠을 글을 쓰다가 다시 갈아 엎고 문단 순서 바꾸고....


어제 올릴까 하다가 다시 한 번 갈아엎고 이제야 올립니다.


늦어진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사과 드립니다.


부족한 글 늘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게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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