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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ster 님의 서재입니다.

펠릭스전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夢ster
작품등록일 :
2014.12.22 00:00
최근연재일 :
2016.12.2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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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1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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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262

DUMMY

262


아침부터 산행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콜마르령에서 태어나 자란 펠릭스였다. 더욱이 후기 레인저 교육 때는 매일같이 산을 올랐었다. 하지만 같은 동부산맥이라고 해도 북쪽은 또 달랐다.


"휴우~"

펠릭스가 가쁜 숨을 한번 내쉬자 뒤따르던 궁수가 웃으며 물었다.

"왜? 벌써 지친 겁니까? 펠릭스 경?"

"아, 아닙니다."

"하하하! 너무 무리할 필요 없어요. 처음 따라온 사람들은 다들 얼마 못가서 후회하니까."

"예. 그 말을 지금은 이해 할 것도 같군요."

펠릭스는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길버트의 소대가 중계진에서 미들사이드 요새로 돌아갈 날이 며칠 남지 않은 때였다. 아침부터 피셔 경이 호들갑을 떨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다급하게 부탁하는 모습이었지만 다들 고개를 저으며 피셔를 피했다.


사냥 때문이었다.

엔필드를 필두로 한 소대 저격수 다섯 명이 사냥 허가를 받은 것이었다. 그동안 엔필드를 열심히 조르던 피셔의 성화 때문이었다.

엔필드는 당연히 이 일의 원흉?인 피셔를 동행시키려 했지만 피셔는 다른 소대원에게 일을 떠넘기려 했다.


거기에 선뜻 나선 것은 의외로 펠릭스였다. 심지어 피셔는 펠릭스에게는 부탁도 하지 않았었다. 지켜보던 레논과 칼이 걱정하며 말렸지만 펠릭스는 가볍게 무시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조금씩 후회하고 있었다.



펠릭스들이 들어선 중계진 서쪽의 익시투스 산맥 동쪽 사면은 입구부터 경사가 급한 지형이 이어지고 있었다.

원래 익시투스 산맥은 중단부터 정상까지 급격하게 가파른 지형이기는 했다. 또 오랜 전란기간 산 아래의 숲과 경사가 낮은 비탈지대를 주둔하는 중계진 병사들이 여러 이유로 깎아버린 탓도 있었다.

이곳 중계진은 사실상 동부산맥 속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거기다 엔필드를 비롯한 소대 전문 궁수들의 발걸음과 움직임도 펠릭스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엔필드들은 북서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산길이 나 있는 곳을 걷는 게 아니었다. 일행은 사람이 지나간 적이 없는 곳만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아침 일찍 출발한 일행은 거의 쉬지 않았다. 단 두 번 큰 새 두 마리를 사냥할 때 외에는 계속 이동하는 상태였다.

심지어 점심은 움직이며 건량과 물만으로 간단하게 마쳐버렸다. 신체능력과 오러가 일정수준의 극한에 달해 엑스퍼트에 오른 펠릭스 조차도 혀를 내두를 움직임과 체력이었다.

'휴~ 괜한 짓을 한건지도 모르겠군.'

펠릭스는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펠릭스가 사냥에 자원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우선은 주요 소대원 몇몇과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다행이 그 점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피셔는 대단히 기뻐하며 펠릭스가 없는 동안 펠릭스의 경계근무부터 다른 일을 봐주겠다고 했다. 반면 또 한사람 펠릭스가 기대했던 사람에겐 아무래도 역효과였던 모양이었다.


소대원들은 긴급 출동을 대비해 항상 준비해둔 배낭을 머리맡에 두고 있었다. 펠릭스가 막사에서 자신의 배낭을 지고 나서자 지휘자인 엔필드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이후로 엔필드는 줄곧 말없이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가끔 멈춰 서서 바닥의 흔적을 확인할 때 외에는 일체의 다른 행동이나 말이 없었다.


원래부터 이들 소대 전문 궁수들은 말수가 적은 이들이었다. 엔필드의 경우엔 특히 심하긴 했지만 산에 들어온 후로는 더더욱 근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어딘가 초조한 기색도 보였다.


그나마 펠릭스를 돌봐주는 일을 담당한 듯 한 두 사람이 가끔 펠릭스에게 말을 걸어주는 정도였다. 그러니 엔필드나 궁수들과 조금 거리를 좁혀볼까 하는 목적은 절반만 성공한 셈이었다.


"그나저나 우리 쉬기는 하는 겁니까?"

은근히 걱정이 된 펠릭스가 뒤따르는 다른 궁수들에게 물었다.

"글쎄요? 하하!"

"펠릭스 경은 별명이 '동부의 마스터 몬스터 슬레이어'라더니 산은 별로 타본 적이 없는 모양입니다?""끙~ 여러 분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도 겨울이면 영지의 수색대 활동이나 순찰조로 나름 산은 좀 타 봤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이건 좀···."

"하긴, 몬스터 몰이와 사냥은 좀 다르긴 하죠. 허허허."

펠릭스를 뒤따르던 궁수 한사람이 손을 들어 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가 점심도 먹으면서 이동한 이유는 여기 산의 동편기슭에서는 해가 빨리 지기 때문입니다. 날이 밝을 때는 충분히 이동하고 어두워지면 빨리 쉬는 게 좋죠."

"그렇군요. 야간 사냥이 아닌 다음에야···."

그제야 펠릭스는 서둘러 이동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겨울 몬스터 몰이의 수색대는 추운 겨울이라도 산속에서 야숙을 할 때가 있었다. 어두워져도 임무에 따라서는 계속 주둔하며 경계활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반면 지금 사냥의 경우는 강제된 임무가 아니었다.


중계진을 나선 사냥팀은 길면 사나흘정도 사냥을 했다. 운이 나쁜 경우는 토끼나 새 같은 것만 몇 마리 잡아오는 경우도 있었고 더 나쁜 경우는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성적이 나쁜 경우 주변에서 비웃음을 살지는 몰라도 벌이나 징계를 받지는 않는 반 자율적인 활동이었다.


물론 큰 사냥감을 잡으면 상당한 인기와 명성을 얻을 수도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식도락은 이곳 전선 3대 오락 중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펠릭스가 선뜻 사냥에 따라나선 이유는 사냥 때문도 아니었다.


펠릭스의 진짜 목적은 조용히 집중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그동안 수련해온 자신의 동부 검술에 드비어스 경, 안드레아 경에게서 받은 가르침, 그리고 무의 수련 까지. 한번쯤 종합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때 사냥을 간다는 얘기가 나왔던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펠릭스는 마법사인 맴피스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냥터 지기들은 산이나 숲에서 혼자, 혹은 많아봐야 둘이서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 그러면 보통은 말수가 적어진다더군.'

펠릭스에게 주사위를 가르쳐줄 때 맴피스가 한 말이었다. 나름 조용한 산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안되겠군. 오늘은 이정도로 하지."

어두워진 무렵이었다. 한참 무언가 흔적을 쫓는듯하던 엔필드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펠릭스를 제외한 사람들은 별도 명령이 없었음에도 각자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자주 나와 봤던 이들인지라 말하지 않아도 각자 분담된 일을 잘 알았던 것이다.

펠릭스만 뭘 해야 할 줄 몰라 서있자 펠릭스를 뒤따르던 병사하나가 손짓해 불렀다.

"펠릭스 경은 지금부터 저와 사냥을 갑시다."

"예? 우리 둘만 요?"

"예."

남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남자의 이름은 호른이었다.

호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낭을 내려놓고 간단한 밧줄만 챙겨들고 나섰다. 펠릭스도 밧줄만 들고 뒤따랐다. 호른은 걸어가며 밧줄을 이용해 조그만 올가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길이 30cm 정도에 주먹이 넉넉하게 들어갈 만한 올가미였다.

"이게 뭔지 알겠습니까?"

"예. 본적 있습니다. 토끼 올가미군요."

펠릭스는 바로 알아맞혔다. 겨울 영지에서 용병들이나 병사들이 만든 것을 본적이 있었던 것이다.

"오~ 역시, 마스터 몬스터 슬레이어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군요. 하하하!"

"아~ 그 이름은 제발, 그건 진짜 허명입니다."

"왜요? 고블린 겨울 둥지에 떨어졌던 건 진짜라면서요?"

"윽! 그 생각은 두 번 다시는 하기 싫은데···."

"하하하하!"

두 사람은 인근 덤불숲으로 향하며 몇 개인가 토끼 올가미를 만들었다. 깊은 산중에 해가 넘어가며 날이 제법 어둑어둑 했음에도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호른은 어둠속에서도 능숙하게 산짐승들의 흔적을 찾아냈다. 머지않아 덤불 너머 평지에 위장되어있는 토끼 굴도 발견했다.

"입구에 덫을 놓을 건가요?"

"아뇨, 토끼는 주변에 여러 입구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입구가 아니라 공통적으로 찾아가는 길목에 두는게 상식입니다. 예를 들면 화장실이나 샘물가로 가는 길목 같은 곳이죠."

호른은 펠릭스와 토끼의 흔적을 되짚어 나갔다. 곧 두 사람은 토끼 굴 주변 덤불속에 짐승들의 길로 생각되는 곳을 발견했다. 그곳 주변에 올가미를 몇 개인가 설치하고는 다시 빠져나왔다.


"잘되면 아침은 토끼고기가 되는 겁니까?"

"그건 어려울 겁니다. 손질을 해야 되니까요. 오늘 겪어봤듯이 아침에는 일어나면 바로 움직여야 하거든요."

"그렇군요."

펠릭스로서는 아쉬운 대목이었다.


펠릭스나 엔필드의 궁수들이 준비해온 휴대식량은 하루치 정도였다. 나머지는 싫으나 좋으나 산에서 자급자족해야했다. 그럴 능력이 안 된다면 사냥은 가지 말라는 뜻인 듯했다.


저녁은 아마도 오다가 잡은 새 요리가 될 듯했다. 사냥물을 먹고 나면 맛없는 휴대식량뿐이었다. 그러니 덫을 설치하며 펠릭스는 은근히 아침을 기대했었다.

토끼 고기는 상당히 맛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엔필드 씨는 뭘 쫒고 있는 겁니까? 우리 상당히 북쪽으로 온 거 같은데. 이러다 조만간 한 달 전에 우리가 매복하던 지역에 닿는 거 아닙니까?"

"가끔 그런 수도 있죠. 아마 엔필드 대장이 적당히 조절할 겁니다."

호른은 길을 가다가 잠시 멈춰서며 말했다. 마침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조금 전 행렬이 이동하던 산길이었다.

"여기, 이게 아마 엔필드 대장이 쫓던 흔적일겁니다."

"어디···."

호른이 가리킨 바닥의 흔적은 희미했다. 날도 어두웠지만 밝았다고 해도 펠릭스 로서는 구분하기 힘들어 보였다.

"음~ 저는 모르겠군요."

"그렇겠죠. 며칠 된 흔적이니까. 그럼 어디 이 흔적과 같이 비교해 보시죠."

호른은 이번에는 일어서서 펠릭스의 얼굴 높이에 있는 나뭇잎을 가리켰다.

"어!"

펠릭스는 자신의 얼굴 옆에 있는 잎을 보자 바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잎이 반쯤 뜯어 먹혀 있었다.

"이걸 뜯어먹었다는 건 상당히 큰 녀석이군요."

"예, 어디보자."

호른은 옮겨 다니며 바닥의 흔적과 뜯어 먹힌 잎의 위치로 대충 크기를 계산했다.

"무스입니다. 몸길이 3m 이상이군요."

"3m! 상당하군요."

의외에 크기에 펠릭스는 살짝 놀랐다.


무스는 펠릭스도 알고 있었다. 사슴종류로 수컷은 큰 뿔을 가지고 있고 순하지만 발정기에는 상당히 거칠어지기도 했다. 보통 2.5m정도인데 3m면 엄청 큰 녀석이었다.

펠릭스는 호른의 설명에 따라 바닥의 흔적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잡을 수 있을까요?"

"글쎄요? 맹수는 아니니, 따라잡기만 한다면 가능성은 높을 겁니다. 다만 엔필드 대장의 태도가 좀···. 아무래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그래요? 역시 피셔 경대신 제가 따라 온 것 때문에 그럴까요?"

"글쎄요? 거기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호른은 그 후 펠릭스에게 동물의 흔적을 구분하거나 사냥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면서 저녁 식사에 쓸 향초나 버섯, 장작으로 쓸 마른 나무나 풀잎을 모아서 돌아왔다.


두 사람이 돌아오자 저녁과 야숙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메뉴는 예상대로 오다가 잡은 새 구이였다.


느슨한 비탈 사면에 길게 흠을 파고 바닥에 자갈을 깐 후 불을 지폈다. 그 위로 납작한 돌들을 얹어 연기가 바로 피어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연기는 길게 난 흠을 따라 자연스럽게 위쪽으로 흘러가 여러 방향으로 난 구멍으로 흩어졌다.

고기는 손질한 후 뱃속에 채집해온 향초와 버섯 등을 넣었다. 그리고 껍질을 벗기지 않은 감자와 함께 마무리한 고기를 큰 잎으로 겹겹이 싼 후 흠을 팔 때 모아둔 흙으로 감싸 불속에 넣어 찌기 시작했다.


고기가 익는 동안 사람들은 야간 불침번 순서를 정하고 잠자리 바닥을 팠다. 나중에 그 바닥에 불을 지피던 흠속의 자갈이나 돌들을 넣어 보온을 유지할 샘이었다.

고기는 여섯 명이 먹기에 양은 많지 않았지만 야외에서 먹는 감자와 향초를 채운 새고기 찜은 별미였다.


첫날 펠릭스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간만의 산행에 지쳐 아침 교대시간까지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다음날도 비슷한 일정이었다. 일찍 일어난 일행은 자리를 정리하고 새벽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아침은 건량과 물로 대충 때웠다. 그나마 끓여놓은 차가 있었다.


펠릭스와 호른이 야밤에 놓은 덫에는 4마리의 토끼가 잡혀있었다. 손질할 시간이 없었기에 그대로 토끼를 허리에 차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점심은 역시나 가면서 해결해야 했다.


거의 북쪽 전선의 매복지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아니야. 역시 아니야."

갑자기 흔적을 쫓아가던 엔필드가 멈춰서더니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왜 그래 대장?"

"아무래도 사냥감을 놓친 모양이야."

"그런···."

엔필드의 말에 선임 병사 두 명이 앞으로 나섰다.

세 사람은 한참 흔적을 보며 심각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결국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간다는 결정을 내렸다.

사냥은 실패한 셈이었다.



다시 남쪽으로 길을 되짚어 내려온 일행은 일찍 캠프를 쳤다. 첫날과 달리 가파른 오르막을 걷지도 않았고 반 정도 가다 다시 돌아온 참이었다.

거기다 저녁은 아침에 잡아놓은 토끼가 있었다.

'오늘은 나름 생각할 여유가 있겠어.'

어제와 달리 체력이 남아있던 펠릭스는 속으로 안도했다. 나름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 같았던 것이다.


펠릭스는 호른과 함께 병사들의 수통을 모아서 나섰다. 이번에는 물을 구해오기 위해서였다. 호른은 특이하게도 펠릭스를 데리고 나무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 물을 구하신다면서, 여긴 샘물 같은 건 없어 보입니다만."

"산속에 여간해서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죠."

호른은 단검을 꺼내들더니 나무에 다가가서는 단검으로 두드려보기 시작했다.

"이 나무들은 백단나무라고 동서 산맥 양쪽에 모두 자생하는데 속에 수액이 흐릅니다. 나무에 귀를 대 보세요."

펠릭스는 호른의 말에 따라 수통들을 내려놓고 나무로 다가갔다. 나무는 표면이 온통 백색이었다. 펠릭스가 바짝 붙어 귀를 대자 '쪼르륵'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군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호른은 몇몇 나무 둥치를 '통통' 소리가 나도록 두드려 보더니 그중 서넛을 골라 표시를 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에 단검 끝을 돌려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찾기는 쉬운데 이게 고역이죠. 백단 나무는 표면이 단단해서 건축 목재로도 쓰이는데 구멍 뚫기가 쉽지 않습니다."

잠시 호른이 애를 쓰는 모습을 보던 펠릭스는 다가가서 호른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보세요."

"예?"

"제가 해볼게요."

펠릭스의 말에 호른은 자신의 단검을 넘겼다. 단검을 받아든 펠릭스는 곧 단검에 오러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펠릭스의 의도를 알아차린 호른이 당황해서 물었다.

"아! 그거 살살 할 수 있습니까?"

"예?"

"다 잘라버리지 말고 살짝 구멍만 뚫어야 합니다."

"음, 알겠습니다. 한번해보죠."

호른의 말에 펠릭스는 잠시 단검을 바라봤다. 폭이 좁은 양날 단검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보통 라운들 대거를 썼다. 라운들 대거의 날은 송곳처럼 뾰족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궁수들은 양쪽에 날이 있는 가는 검신을 가진 단검을 썼다. 사냥물의 가죽을 벗기고 손질하기에는 궁수들의 양날 단검이 유용했지만 지금 상황에선 라운들 대거 쪽이 훨씬 유용했다.


그러고 보니 펠릭스는 단검에 오러를 주입해본적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금속이라 어느 정도 오러의 전도율은 있을 테지만 오러를 주입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사들의 검과 비교하면 편하지 못할 것이었다.

'거기다 살살 하라는 말이지?'

펠릭스는 호른이 구멍을 뚫으려고 하던 나무를 쳐다봤다. 라운들 대거가 아닌 양날 단검으로는 그냥 확 베어버리는 게 일은 쉬워보였다. 나무는 정말로 단단해 보였다. 호른이 살짝 뚫어놓은 나무 표면은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음~ 천천히, 약하게."

펠릭스는 오러를 단검 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처음이었다. 생사를 건 전투에서 검에 오러를 주입하는 것을 천천히 약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연습이나 훈련이 아니라면 최대한 있는 힘껏 주입해서 휘두르는 게 보통 상식이었다.

펠릭스는 평소와 달리 천천히 조금씩, 세세하게 팔을 통해 끌어올렸다. 단검의 끝에 희미하게 오러가 맺히고 있었다.

"오~ 역시, 기사는 기사군요. 대단합니다. 정말 언제 봐도 신기하다니까요. 하하."

그 모습을 신기한 듯 호른이 보며 말했다.

"뭘요."

쓰게 웃으며 대답한 펠릭스는 백단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막 구멍을 뚫으려던 참이었다. 그 순간 문득 펠릭스는 지금 자신이 단검에 오러를 주입한 과정이 안드레아 경이 설명한 압축기의 훈련과정과 비슷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몸의 다른 곳에는 거의 오러를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검 끝에만 오러를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흠?'

멈춰선 펠릭스는 단검을 쥔 손을 들어 올려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펠릭스 경? 갑자기 왜?"

호른의 물음에도 펠릭스는 답이 없었다. 가만히 단검을 보던 펠릭스는 눈을 감고 다시 단검에 오러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단검에 씌인 오러가 점점 굵어지더니 한차례 일렁이며 변하기 시작했다.

"핫!"

'파팍!'

펠릭스는 낮은 기합성과 함께 단검을 빠르게 나무에 찔렀다 뺐다.

"헛?!"

호른은 나무에 생긴 자국을 보며 놀란 눈을 떴다. 백단나무에는 마치 송곳으로 찔러 만든 듯 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분명 자신의 단검으로는 생길 수 없는 구멍이었다.

구멍에서는 곧 한 방울씩 수액이 떨어졌다.

"그래, 이런 방법도 있었군."

펠릭스는 만족 한 듯 단검을 쳐다봤다. 흐르는 수액이나 호른의 놀란 표정에 상관없이 혼자서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다시 주변 백단나무에도 몇 개인가 같은 수법을 이용해 구멍을 뚫었다.


"호른씨? 뭐하세요?"

"아? 아차차!"

펠릭스가 일을 마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호른은 서둘러 수통들을 가져갔다. 나뭇잎으로 수통 입구에 깔때기를 만들고는 수액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후 호른은 펠릭스로부터 다시 자신의 단검을 받았다. 그리고는 잠시 자신의 단검과 펠릭스, 그리고 백단나무에 뚫린 구멍을 신기하게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대체 어떻게 했는지 물어보고는 싶은데 보나마나 자신이 답변을 이해하기 힘들 거 같았던 것이다.

"자, 그럼 수통이 채워질 동안 우리이제 뭘 하죠?"

"매운 토끼 스프를 끓인다니 어디 다른 넣을만한 재료가 있나 한번 살펴보죠."

두 사람은 곧 주변 수풀을 돌면서 먹을 만한 것들이 없는지 찾기 시작했다.


그냘 저녁은 꽤나 풍족했다. 토끼 두 마리로 매운 스프를 끓였다. 고추나 매운 양념은 주방에서 가져온 것이 있었다. 그 외에 채집해온 버섯과 향료들을 넣었다. 어제 캐어 남은 감자도 손질해 넣었다.

가져온 보급식량의 비스킷과 함께 먹으니 여섯이 먹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남은 사람들은 남은 토끼 두 마리도 손질했다. 바닥에 구멍을 파고 Y자 나뭇가지에 토끼를 거꾸로 매달았다. 곧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꺼낸 후 그대로 나뭇가지에 끼워 반 훈제를 했다.

내일 돌아가면서 먹게 될 식량이었다.



펠릭스는 여유 있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라고 해도 찻잎을 넣은 게 아니었다. 침엽수입을 꺾어 넣고 약간의 설탕을 넣은 이른바 야전 차였다. 딱히 맛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쌉싸래한 맛이 숲과 잘 어울렸다.


펠릭스는 혼자 조용히 앉아 조금 전 단검을 이용해 수액을 채취하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그 속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펠릭스는 살짝 흥분하고 있었다.

"검은 손의 연장이라···."

검술을 연습할 때 흔히들 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오늘 단검을 쓸 때 페릭스에게 특별하게 떠올렸던 말이었다.


라운들 대거가 필요한 상황에서 일반 단검이 주어져 있었다. 아니 어차피 그 상황에서 정작 구멍을 뚫는 것은 오러의 힘이었다. 말하자면 둘 중 어느 쪽 단검이 있었다고 해도 결국 단검은 펠릭스 자신이 오러를 발출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렇다면 검에 주입하는 오러를 집중해서 라운들 대거처럼 뾰족하게 활용할 수 없을까?'

오러 자체는 무형이니 도구의 형태에 상관없이 자신이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펠릭스의 그 생각은 유용했다.


'검술에 강과 유가 있다면 오러의 활용에도 그렇지 않을까? 제식검술을 펼치면서 오러의 운용은 유연하고 세밀하게 한다면? 혹은 그 반대라면? 그러고 보니 검에 마음을 싣는다고 했었지? 그 마음이라는 게 사실은 오러의 특질이라면? 실제로 어둠의 오러도 그 원인은 마음의 흐트러짐에서 시작하지 않던가?'


한 가지를 깨우치니 오러의 운용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단검으로 평소와는 달리 작고 세밀하게 오러를 발휘하려다보니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러자 검술의 특징에 대해서까지 사고범위가 확장되고 있었다.


펠릭스의 동부 검술의 기본은 제식검술이었다. 가문의 기사들이 몰래 펠릭스에게만 전수한 특유의 검술이 섞여 있는듯했지만 아무튼 일단 펠릭스도 제식검술 파였다.

일단 안드레아 경의 말대로 펠릭스는 제식검술을 계속 유지할 필요는 있었다. 고램 조종과 제식검술은 떼려야 뗄 수없는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전날 드비어스 경이 보여준 그 중검술은 아마도 그런 패도적인 제식검술의 수련의 한 극에 달한 기술일 것이었다. 움직임은 화려하지 않고 둔해보였지만 위력만큼은 강력했다.

그러나 그 기술은 아마도 엑스퍼트 중급의 수준은 되어야 펼칠 수 있어보였다. 타고난 오러가 약한 펠릭스가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단순한 제식검술을 익혀 그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어쩌면 펠릭스는 평생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러니 더 빨리 더 위의 경지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서부검술도 익혀둘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어둠의 오러의 유혹을 받고 있는 펠릭스의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상위 단계의 엑스퍼트에 도달해야 했기에 더 그랬다.


안드레아 경이 보여준 서부 검술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어떤 공격과 방어에도 변화무쌍하게 대응 가능한 검술이었다. 화려한 외형을 제외하고라도 분명 안드레아 경의 말대로 검술의 완성도나 그 수련의 깊이는 서부검술 쪽이 우위로 보였다.

펠릭스가 아는 엑스퍼트가 되는 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오러가 약한 펠릭스로서는 좀 더 수준 높은 검술의 길을 택할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검술을 모두 익히기는 무리라는 점이었다.


거기에 펠릭스가 방금 찾아낸 오러의 활용법의 이점이 있었다.

펠릭스는 그 방법에서 무언가 두 검술의 연결점을 찾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러 위주가 아닌 상위 엑스퍼트로의 길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 두 검술에 모두 통달할 수는 없지만 오러의 활용으로 두 검술의 장점을 모두 취할 수는 없을까? 제식검술에 세밀하고 유연한 서부 검술식의 오러를 운용한다면? 혹은 그 반대로 서부검술에 강하고 집중적인 제식검술에 쓰이는 오러의 운용법을 응용한다면?'

무언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펠릭스가 한창 깊은 생각에 빠지려는 순간이었다.

"펠릭스 경!"

"헛? 예?"

"엔필드 씨에게도 차 한 잔 전해주지 않겠어?"

"예, 그러죠."

차를 끓이던 궁수 한사람이 펠릭스에게 잔을 건넸다. 펠릭스는 살짝 아쉬워하며 컵을 받아 들었다.


엔필드는 야영지에서 조금 떨어진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었다.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전선에서도 항상 저렇게 혼자서 높은 곳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 홀로 있었다.

선임 기사들은 전선에 나가면 엔필드는 따로 경계근무나 업무를 짜지 않았다. 하지만 야밤에 늘 늦게까지 혼자 경계근무를 섰다. 도대체 잠은 언제 자는지 알 수 없었다. 따로 주어진 업무가 없어도 쉬지 않았다. 알아서 사냥을 해 오거나 무언가 소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했다.

일반 병사라기보다는 에스턴 병대장처럼 준 사관같은 느낌의 인물이었다. 실제로 소대에서나 부대에서도 이들 경험 많은 베테랑 전문 궁수들은 그렇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엔필드 씨, 차 한 잔 드세요."

펠릭스가 나무아래에서 말했다. 그러나 엔필드는 아무 반응 없이 맞은편 숲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휴~"

펠릭스는 하는 수 없이 나무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다행이 수직으로 뻗은 나무가 아니었다. 구불구불 굽어있어 컵을 한손에 쥐고도 충분히 올라갈 수 있었다. 다만 잔가지가 많아 몸이나 옷 여기저기에 걸릴 뿐이었다.

외부에서 보면 엔필드가 있는 위치를 가려줄 테지만 올라가려는 펠릭스에게는 그냥 성가실 뿐이었다.

"엔필드 씨?"

"흠? 아! 고맙군."

겨우 올라온 펠릭스를 알아차린 엔필드는 펠릭스에게서 컵을 받아들었다. 다시 내려가려던 펠릭스의 몸에 무언가 걸렸다.

"응? 뭐지?"

돌아보니 나뭇가지 하나가 펠릭스의 허리에 찬 검집에 걸려있었다. 펠릭스는 풀어내기 위해서 검집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묶여있는 검집은 여간해서 허리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제 6훈련소에서 글랜포드 교관에게 검을 돌려받을 당시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고 꽁꽁 싸맨 탓이었다.

"아~ 이런, 하는 수 없지."

펠릭스는 어쩔 수 없이 검을 뽑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스릉~'

검을 반쯤 뽑아든 순간이었다.

"응? 어?"

펠릭스의 눈에 무언가 빠르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헛!"

'쉬익~'

'챙~'

엉겁결에 검을 빼들어 반사적으로 막은 펠릭스는 깜짝 놀라 곧 튕겨나간 물체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뭐야? 뭐지?"

그러나 이미 해가지고 어두운 상황이라 어디로 튀어나갔는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 물체가 날아온 방향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쉬익~'

"엎드려!!"

"어엇!"

위에 있던 엔필드가 다급하게 펠릭스의 몸을 감싸며 나무 아래로 굴러 내렸다.

'땅~!'

두 사람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엔필드와 펠릭스가 있던 나무둥치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화살은 둥치에서 흔들리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적이다! 저격이다!!"

펠릭스를 나무 뒤로 끌어당기며 엔필드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작가의말


소설 타이핑을 원래 Sigmarion3라는 일본제 HPC로 했습니다.

PDA에 키보드가 달린 녀석입니다.

원래 글을 좀 써볼까 하고 한 10년 전에 샀던 녀석인데...


그동안 이런저런 핑계로 미뤄오다 작년부터 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오래된 기기의 숙명인지라...

배터리는 완충되도 오래가지 않아 전원을 상시 연결하지 않으면 쓰질 못하고 

메모리도 간당간당하고 메모리 슬롯 하나는 맛이 갔으며 화면도 어둑어둑 해졌습니다.

결정적으로 키보드 아래에 고무패킹이 하나씩 헐어지거나 찢어져 갈수록 키감이 엉망이군요.

일단 잘 쓰지않는 키보드의 고무패킹과 교체를 했지만...


예전에도 PC로만 글을 써보려고 노력을 해 봤는데...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거나 다른 할 수 있는게 많으면 결국 딴짓을 하게 되더군요.


돈도 없는데 노트북을 사야할지.

노트북은 마음에 들만한 녀석이 있을지.

글만 쓰려는데 노트북 씩이나 필요할지.

또 사서 글에 집중은 할 수 있을지.


낡아서 점점 폐기처분이 되어가는 기기를 보고 있자니 

오만 잡생각이 나는군요.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또 분량으로 떼웁니다.


부족한 글 봐 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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