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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ster 님의 서재입니다.

펠릭스전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夢ster
작품등록일 :
2014.12.22 00:00
최근연재일 :
2016.12.2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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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31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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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

DUMMY

272


"펠릭스! 지금이야!"

"오!"

'쾅!'

칼의 신호가 떨어지자 펠릭스는 자신이 상대하던 마이티 고램을 오른쪽으로 몰아붙이고는 재빨리 떨어졌다.

"어? 왜?!"

펠릭스가 갑자기 멀어지자 상대는 의아해 하다가 곧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왼쪽에는 어느새 길버트 경의 나이트급 고램이 다가오고 있었다.

"엇! 우 우리 편은? 우리 소대장님은 어디로 간 거지?"

"네 뒤에 있다! 이 멍청아! 어서 비켜!"

"예?!"

그러나 길버트 경은 순순히 상대 마이티가 비켜나도록 놔두지 않았다.

"어딜! 그렇게는 안 되지!"

'쿵!'

"크헉!"

길버트 경의 화이트 고램이 검을 휘두르자 상대 마이티 고램은 뒷걸음질 치다 자기 소대장의 나이트급 고램과 동선이 엉켜버렸다.

"상황 종료! 합류합니다!"

그사이 적의 나머지 마이티 고램을 쓰러트린 칼과 펠릭스의 마이티 고램이 남은 적의 고램 두기를 둘러싸며 다가왔다. 3대2의 상황. 적은 별 반항을 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모의 훈련 종료!"

훈련을 마친 두 소대의 라이더들이 고램에서 내려 예를 표했다. 상대 소대장은 붉으락푸르락 하는 얼굴로 자신의 소대원들을 흘겨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다른 소대원들의 얼굴은 온통 흙빛이었다. 특히 자신 때문에 소대가 전멸하는 빌미를 줬던 마이티 고램의 조종사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저사람 혼나겠는 걸?"

"뭐, 좋은 경험했다고 생각해야지. 실전에서 당하는 것보다야 낫잖아?"

"하긴, 그나저나 이러면 우리는 6연승인가? 슬슬 01포메이션도 익숙해진 거 같군."

"그래. 아직 몰아넣는 타이밍이 좀 불안한 거 같지만. 이정도면 실전에 써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저녁 반성회 때 어디 다시 한 번 짚어보자고."

칼과 펠릭스는 새로 도입한 고램 전술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새로 도입한 01 포메이션의 훈련은 순조로웠다. 01은 단순히 이름에 숫자를 매긴 게 아니었다. 소대 고램의 포메이션 및 이동 동선 형상을 본 딴 이름이었다.

올해 길버트 소대의 신입 라이더인 칼과 펠릭스는 실력이 뛰어났다. 이 포메이션은 두 사람의 실력을 최대한 살리려는 전술이었다.


우선 칼과 펠릭스의 두기의 마이티를 소대 왼쪽 0의 위치에 두고 자유롭게 서로의 자리를 바꾸도록 했다. 두 사람이 호흡도 잘 맞는 것을 감안한 배치였다.

반면 길버트 경의 나이트급 고램은 1의 위치와 모양대로 진형의 오른쪽에서 적의 나이트급 고램을 상대하며 전후진의 직선으로 움직였다.


이 전술은 적의 미니트 전력을 먼저 줄이는 게 목적이었다. 칼이나 펠릭스, 어느 쪽이던 중앙에 서는 마이티가 적의 미니트를 길버트 경의 이동경로로 몰아넣었다.

그러면 조금 전의 모의 훈련에서처럼 적의 미니트는 길버트 경과 상대의 나이트급 고램 사이에 갇혀버렸다. 그렇게 몰아넣은 적의 소형 고램을 길버트 경이 압박해서 그 뒤에 있는 적의 나이트급 고램까지 두 대의 적 고램의 발을 묶어두는 것이었다.

그 사이 칼과 펠릭스가 남은 적의 미니트를 재빨리 처치한 후 합류하는 게 전술의 요지였다.


두 사람에게 안드레아 경이 다가오며 물었다.

"여~ 어때? 모의 훈련은?"

"안드레아 경. 저희야 당연히 또 이겼죠!"

"레인저들의 모의 훈련은 어땠습니까?"

"아, 우리는 오늘도 분위기가 별로야."

칼과 펠릭스의 질문에 안드레아는 손으로 뒤를 가리켰다. 레인저 소대는 리차드슨 경을 중심으로 심각하게 토론 중이었다.

"설마 오늘 훈련에서 진겁니까?"

"아니, 이기기는 이겼지. 하지만 우리는 지금 승부가 문제가 아니야. 여차하면 전술을 통째로 바꿔야 할 판이야."

"전술을 통째로요?"

"그래, 너희도 알다시피 우리 레인저 소대도 고램 소대처럼 전력이 상당하거든."

안드레아 경의 말에 칼과 펠릭스도 동의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길버트 소대는 사실 리차드슨 경의 레인저 부대 중심으로 운영되어왔다. 나이트급 고램의 조종자인 길버트 경의 실력이 살짝 떨어지는 탓이었다. 원래 소대의 가장 강한 전력이 되어야할 나이트급 고램이 그런데다 레인저들의 전력이 강하다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소대는 마법사부터 기사들까지 대부분 성향이 공격적이잖아. 거기다 지금 너희들 고램 소대의 01 포메이션도 어느 정도 공격 위주고. 사실 맴피스 마법사나 피셔의 성향을 보자면 용케도 지금까지 참아왔구나 싶을 정도지."

"그렇군요. 하지만 까딱 덮어놓고 레인저들이나 고램들이 돌격하고 나면 뒤에 남은 일반 병사들이 크게 피해를 볼 수도 있을 테니."

"그렇지. 그러니 이제는 상호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라도 바꾸긴 바꿔야 하는데, 문제는 지금까지 부대를 방어 위주로 운용해왔는데 이제 와서 기본 틀을 고치는 셈이거든. 아마 쉽지 않을 거야."

안드레아의 말에 펠릭스는 속으로 잠시 뜨끔했다.


안드레아의 말대로 분명 지금 소대 전체 운용을 공격적 성향으로 돌리는 게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보통 다른 소대 구성을 보면 레인저 소속 기사들 중 두 명 정도는 갓 엑스퍼트에 올라온 기사들이거나 아직 오러 유저 수준의 신입 기사가 포함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리차드슨 경 휘하의 레인저 기사들은 레논을 제외한 전원이 엑스퍼트 중급이었다.


심지어 소대의 중심이 되는 마법사 맴피스는 레벨이 4서클이었다. 대부분의 소대 마법사들이 3서클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전력은 충분했다.


거기다 이번 모의 훈련에서도 증명되었지만 칼과 펠릭스의 고램 조종 실력도 보통이 아니었다. 둘 다 신입이었지만 실력만은 어지간한 중견 마이티 고램 라이더들 정도 수준은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동부 전선 전체의 분위기가 상당히 방어적이라는데 있었다. 에덜라드나 크로비스나 서로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피하는 분위기였다. 최전방의 기본전략인 매복은 방어, 순찰, 적의 이동경로 확인, 대규모 침입의 감시 등이 주목적이었다.

소대단위 고램 전투가 벌어져 서로 한기만 위험에 처해도 바로 지원을 요청하는 마법신호가 하늘로 올라갔다. 서로 극도로 고램 손실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당연히 리차드슨 경의 레인저 부대도 그동안 애써 공격성향을 눌러 방어 위주의 운용을 해왔었다. 동부전선 대다수의 부대가 그랬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공격 위주로 소대 전체 성향을 바꾸려는 것이었다.


펠릭스는 조심스럽게 그 이유를 자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다. 일부러 펠릭스에게 고램 격파의 공을 세울 기회를 주려는 길버트 경의 배려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펠릭스가 막 그 얘기를 물어보려는 순간이었다.

"안드레아 경, 저기···."

"어라? 작전관 이잖아?"

"그러네요? 무슨 용건일까요?"

세 사람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 길버트 경과 몇몇 부대 선임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 부대 작전관이 다가와 뭔가 말을 건네고 있었다.

칼과 펠릭스들이 미들사이드 요새에 온 첫날 베인브릿지 사령관 옆에 있던 두 참모 중 한사람이었다.

베인브릿지 사령관과 부대 최고선임인 길버트 경은 사이가 별로 좋지 못했다. 당연히 베인브릿지 사령관의 부관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베인브릿지 사령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예, 대공세에 관한 작전회의가 제법 길어지는 모양입니다."

"흐응! 그렇다면 뻔하지. 또 길버트 경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려는 거지."

"도움을요?"

"그래, 쯧!"

세 사람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작전관은 연신 길버트 경과 선임기사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소대별 훈련과 소대간 훈련이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부대전체 합동훈련이었다. 요새 전 병력이 동원되는 훈련이었다.


미들사이드 요새소속의 경비부대 등 상비군을 제외하고도 최소 300백대이상의 고램, 500명 이상의 레인저 기사들, 그외에 3500명이 넘는 마법사에 일반 병사들이 동원되는 대규모 훈련이었다. 적이 중계진을 돌파했을 경우를 상정한 방어 및 퇴각 태세를 정비하는 목적이었다.


베인브릿지 사령관은 여전히 부재중이었다. 남아있는 작전관은 척 봐도 새파랗게 젊었다. 기껏해야 칼이나 펠릭스보다 서너 살 더 많을 정도였다.

보나마나 귀족 출신이라는 간판으로 얻어낸 자리일 것이다.


베인브릿지 사령관이야 10년이 넘는 복무연수의 관록과 경험으로 어떻게 했다지만 5000이 넘는 인원의 부대 전체 합동훈련은 저런 새파란 애송이가 감당 할 수준이 아니었다.




미들사이드 요새 북쪽 평원은 고램과 병사들이 일으킨 흙먼지로 온통 북적였다.

"프랭크 소대! 전진! 전진하라고!"

"우익! 마법사들은 너무 나가지 말라고 몇 번을 얘기해!"

"펄먼! 산악에서 병사들을 모두 불러들이라고 했잖아!!"

"어떤 멍청이가 벌써 신호를 쏘아올린거야!!"


고램의 통신관이 시끄러웠다. 지휘천막 아래에는 지휘를 맡은 몇몇 선임기사들이 마법사들의 수정구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뒤에서 지켜보는 젊은 작전관이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훈련을 위해 요새에 보관 중이던 비싼 통신용 수정구를 대거 꺼내온 탓이었다.


고램간 통신은 전달 거리가 상당히 짧았다. 고램 상호간 접촉한 상태가 아니라면 고램 자체 통신거리는 백여 미터 정도였다.

통신 거리를 넓히기 위해서는 중계 장치인 통신용 수정구와 직접 마나를 주입할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했다.


특히나 이정도 규모의 훈련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크기와 결정도를 가진 통신 수정구와 제법 상위 서클의 마법사가 필요했다. 예를 들면 4서클 정도의 맴피스 마법사 같은.


부대는 공격과 방어, 둘로 나뉘어 모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모두 바쁜 와중에 중앙의 지휘소 경비를 맡은 칼과 펠릭스는 고램에 타고서 느긋하게 훈련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귓전을 시끄럽게 때리는 부대 통신만 아니라면 그야말로 관람 중이었다.


부재중인 베인브릿지 사령관을 대신해 선임기사들 중 가장 선임인 길버트 경이 전체 훈련을 지휘하게 되었다. 특히 4서클의 맴피스 마법사도 소속되어 있었던 덕에 소대원 전부가 지휘소 주변에 배치 받았다.

며칠간 지휘소를 꾸리느라 고생은 했지만 덕분에 지금은 편안하게 훈련을 감상하게 된 것이었다.


"흐음, 확실히 학교에서 배운 이론하고는 많이 다르네."

"아! 저러다 좌측이 뚫리겠다."

"예비대를 더 빨리 내 놓아야하는 거 아냐?"

"설마 우리도 막으러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 다시 막았어! 역시 빈센트 소대야!"

"아~ 젠장! 역시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돼!"

칼과 펠릭스는 손에 땀을 쥐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3대 단위의 소규모 고램 소대 전투가 아니었다. 3대씩 3개 소대가 임시로 10인대를 구성해 열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몇 개의 전열로 구성된 전선 좌측과 우측 후방에는 각각 20여대로 구성된 예비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고램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후 전장의 전술형태는 오히려 퇴보했다. 고램을 상대로 어떤 재래식 무기도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티 급 고램이라도 5서클의 마법을 튕겨버렸다. 조종석 앞 장갑에 숨겨져 있는 대 마법방어용 마법진 때문이었다.


공성용 투석기나 대형 몬스터 사냥용 쇠뇌 같은 물리적 투사무기가 그나마 약간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효과가 있다는 정도였다. 그나마도 고램이 대처하기 어려울 정도의 물량으로 밀어 붙이거나 근접 거리에서 불시에 공격해 운 좋게 명중했을 때의 얘기였다.


아무리 고램이 인간의 움직임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기사는 기사였다. 오러를 끌어올린 상태의 라이더들은 날아오는 투석이나 쇠뇌의 활 정도는 동채 시력 만으로 양단해버렸다.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고램의 거검이 있었다. 넓은 면을 가진 고램의 거검은 임시방패로도 쓸 수 있었다.

한마디로 고램의 적은 오로지 고램 뿐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다보니 고램간 대규모 전투는 검과 검이 부딪히는 원시적인 고대 보병 위주의 전술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고램전에는 궁수도 없었고 고램을 태울 기마도 없었다.


그런 전술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크로비스군이었다. 고램의 기사단을 대처할만한 기술을 찾아낸 것이었다.


엑스퍼트 중급이상의 기사들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말을 타고 돌격하면 오러로 둘러싸였다. 일명 오러필드로 불리는 이 기술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그저 엑스퍼트 중급의 기사들이 같이 모여서 돌격하는 것만으로 조건을 만족시키지는 않았다. 서로간의 호흡, 간격, 타이밍, 오러의 조절 등 복잡한 조건을 만족하기 위해 상당한 훈련을 거쳐야만 가능했다.


그러나 크로비스 군은 그 기술을 고램으로 해냈다. 지금은 동서 두 제국과 에덜라드에도 고램으로 오러필드를 구사하는 기사단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국가의 고램 기사단도 크로비스의 고램 기사단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에덜라드가 지금까지 크로비스 군을 상대로 대규모 고램 전을 회피한 이유가 단순 고램의 자체 수급이 어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로서 고램간 전투는 인간으로 치면 검사와 기사단, 두 병종으로 구성되게 되었다. 하지만 고램으로 오러필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사들이 말을 타고 구사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힘든 조건을 만족해야 했다. 때문에 전선의 고램 기사단은 숫자가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선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것이다.


당연히 동부 전선에는 기사단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 모의 훈련에는 검사와 검사, 즉 검을 든 고램들이 열과 진형을 갖춘 채 서로 마주하는 전투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정도도 칼과 펠릭스, 둘 다 영지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칼은 2학년 겨울, 형인 브랜든과 함께 게일 경의 50기의 고램 부대를 구원하러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상대는 대형 몬스터들이었다.

그것도 전투는 사실상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학교 수업에서 배운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이런 대규모의 고램전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크~ 역시 고램 간의 대규모 전투는 색다르군!"

"왜? 칼! 너도 저런 대부대를 끌어보고 싶어?"

"흐흐, 왜? 펠릭스, 넌 아냐? 보기만 해도 뭔가 가슴속에서 끓어오르지 않아?"

"하하! 녀석도!"

"두고 봐! 펠릭스, 언젠가 남부의 고램 부대를 이끌고 나도 저렇게 선두에 설날이 올 테니까!"

"아~ 그러셔?"

펠릭스는 놀리는 듯 대답했지만 내심 부러운 심정이었다.


기사나 전설속의 영웅이 되어 수많은 부하 동료들을 이끌고 몬스터나 적군의 무리 속으로 진격해 들어간다. 그렇게 인류를 구하거나 구국의 영웅이 되는 꿈은 어린 시절 누구나 꾸었을 모습이었다.


지금도 소년들의 꿈은 크게 바뀌진 않았다. 단지 최근에는 그 이상이 기사에서 고램 라이더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수km에 달하는 전장! 지축을 흔드는 굉음! 평원가득 흩날리는 흙먼지! 남자라면 이 광경에 가슴 벅차지 않을 리 없었다.


거기다 지금 칼과 펠릭스는 고램 라이더가 되어 조종석에 앉아있었다. 눈앞에는 비록 훈련이었지만 바로 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그 꿈이 바로 한걸음 앞에 다가온 듯 한 느낌이었다.


"그래 칼, 너라면 아마 해 내겠지."

펠릭스는 칼의 마이티 고램을 흘깃 살피며 혼잣말을 했다. 칼이라면 충분히 해낼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눈앞에 얼핏 대군을 지휘하는 칼의 모습이 보이는 듯도 했다.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훈련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야간이 되자 고램 전투는 멈추고 레인저들 위주의 산악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산악 곳곳에는 마법사들의 야광신호탄이 불을 밝혔다.


칼과 펠릭스가 지키고 있는 지휘소로 드나드는 사람들의 수가 뜸해졌다. 두 사람은 적의 고램 침투를 대비하기 위해 배치되어 있었기에 고램간 훈련이 끝난 상황에서는 사실상 별달리 신경 쓸 일이 없었다.


펠릭스와 칼의 고램 발치에는 소대의 예비 라이더인 레논 경과 드비어스 경이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 막 드비어스 경이 누군가 들고 온 서류에 싸인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펠릭스가 입을 열었다.

"이봐 칼."

"응?"

"그동안 생각해봤는데. 우리 새 검술 만드는 거 말이야."

"음, 그게 왜?"

"그거 네가 만들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지? 사실은 나 때문에 하는 거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얼마 전에 드비어스 경이 아침 훈련을 할 때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그때는 몰랐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드비어스 경이 말한 게 그런 뜻으로 한 것 같아서."

"···."

칼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도 칼도 자신의 발치에 있는 드비어스 경의 모습을 보고 있으리라.

"우리 소대 전체적인 전술방향을 바꾸는 것 말이야. 그것도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길버트 경은 내가 공을 새우기를 원해서 일부러···."

"펠릭스!"

칼은 펠릭스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응?"

"세비안 녀석이 왜 너를 나한테 보냈을까?"

"뭐?"

"펠릭스 네가 있던 제6훈련소, 원래는 고램의 수리와 라이더의 재활을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라며?"

"그랬지."

"세비안 녀석은 내가 있는 이곳이 아니라 아마 어디든 다른 고램 소대로 널 보낼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왜 하필이면 널 나한테 보낸 걸까?"

"글쎄?"

"나도 한동안 세비안 녀석의 의도를 몰라서 고민했는데, 녀석은 아마 내가 널 지켜주길 원했던 게 아닐까?"

"날?"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세비안 녀석이 펠릭스 너에게 진 은혜를 갚겠다고, 그 때문에 나한테 빚을 지겠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세비안 녀석 어딘지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은 녀석이었잖아?"

"그래, 그렇긴 했지···."

칼의 말을 듣고 난 펠릭스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왜? 자존심 상하는 거야?"

"아니,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 신세가 참 처량하구나 싶어서. 세비안도 그렇고 칼, 너도 그렇고 그리고 스승님에게도 그렇고 나는 신세만 지는구나 싶어서."

"녀석, 아무튼 생각해봤는데 너한테는 미안하지만 차라리 잘 됐다 싶더라고."

"뭐가 말이야?"

"3년 후면 나는 제대할 거야. 알지? 남부를 위해서해야할 사명이 있으니까. 내가 제대하고 나면 곧 남부에는 신생 수호기사단이 생길거야. 물론 기사단장은 이 몸이 맡을 거고 우리기수 졸업생들이 주축이 될 거야. 그리고 아이샤님과 함께 남부의 몬스터들을 싹 쓸어버리겠어!"

"아~ 그래그래. 비슷한 얘기를 이미 몇 번이나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

"저런, 남의 얘기하듯 하지 마! 펠릭스, 너도 참가하는 거라고! 너한테 특별히 내 부관으로서 고램 부대를 맡길 생각이니까 말이야. 내가 누누이 얘기했었지? 남부로 오라고."

"하지만 나는··· 너도 알잖아?"

"아~ 물론 알고 있지. 그러니까 말했잖아? 세비안 녀석이 의도한 거든 아니든 간에 앞으로 3년은 내가 널 최대한 지켜줄게. 나야 어차피 펠릭스, 널 우리 남부로 끌어올 생각이었으니. 이참에 빚이던 부담이던 팍팍 얹어주고 나중에 실컷 부려먹으면 되겠다 싶었거든."

"뭐야? 하하! 너 이 녀석!"

"아니 그보다 좋은 생각이 났어! 같이 열심히 노력하는 거야. 서로 실력도 쌓고 실적도 쌓는 거지. 마침 스승님과 소대의 방향도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흐르는 것 같으니. 앞으로 탄생할 남부 신생 수호기사단의 부 기사단장이 엑스퍼트 중급도 못된다면 체면이 안서잖아?"

"얼씨구! 네 맘대로 부 기사단장이야? 그래서! 3년이 지나면? 그래도 여전히 나는 여기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나야 일단 제대를 해야겠지. 하지만 그때쯤이면 아마 펠릭스, 네 사정도 상당히 나아져 있을 걸? 어쩌면 스승님이 추진하시는 연서가 잘 먹혀서 같이 제대하게 될 지도 모르고 혹은 누가 알겠어? 펠릭스 네가 그 동안 공을 세우거나 50기를 격파하고 작위를 받고 제대하게 될지···. 가만 그건 좀 곤란한가? 내가 부려먹기 힘들어 지잖아!"

"뭐야?"

"하하하!"

"크크큭!"

칼의 마지막 말에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흐음~ 그래도 3년에 50기라. 그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야."

"괜찮아! 펠릭스, 부담 갖거나 초조해 하지 마. 네 사정은 잘 아니까. 거기다 다소 늦어도 그때까지 남부가 정리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걱정 말고 천천히 와도 돼. 네가 처리할 몬스터는 충분히 남겨둘 테니."

"그거 눈물 나게 고맙군. 하지만 그래도 만약 일이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여전히 내 상태가 이대로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땐 어쩔 거야?"

"어~ 그때는···."

그러자 갑자기 두 사람의 통신 회선에 외부 회선이 끼어들었다.

"그때는 내가 돌봐주도록 하지. 나야 여기 군에 평생 몸담을 예정이니. 유능한 고램 라이더 겸 경험 많은 부관이 꼭 필요하거든. 그러니 펠릭스, 자네처럼 10년 넘게 장기 복무가 예정되어 있는 사관이 있다면 나야 대환영이지."

"헛! 스승님?!"

"이런, 설마 지금까지 다 듣고 계셨던 겁니까?"

그러자 이번에는 피셔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멍청이들! 당연하잖아! 지금 여기 맴피스씨 앞에 얼마나 큰 수정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부대 전체 통신을 다 들을 수 있다고! 니들 대화가 다른 곳으로 흘러들어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하라고."

피셔의 말에 칼과 펠릭스는 놀라서 헛숨을 삼켰다. 까딱했으면 부대 전체 통신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생중계 될 뻔했던 것이다.

"야! 칼! 그보다 너 거기 수호 뭐 시기 기사단에 내 자리도 있는 거지? 너 전에는 너희 가문에 새로 기사를 들일 여력이 없다며?"

"저런, 피셔 경, 그건 제가 독단으로 만들 기사단입니다만. 오시는 건 환영합니다만 제 명령을 들으셔야 할 텐데요?"

"그거야 상관없어. 그보다 돈은? 보수는? 부 기사단장 정도지위는 줄 테지? 내가 펠릭스 녀석보다는 오러력이 높잖아?"

"음, 아마 일단은 무보수가 될 텐데요? 그리고 부 기사단장 직은 모두 예약되어 있습니다만."

"뭐야? 야 인마! 너! 부대 선임을 그렇게 무시하고도 앞으로 군 생활이 편할 거 같아?"

"그렇게까지 협박, 아니 말씀하신다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고램 조종을 연습하세요. 남부 수호기사단은 전원 고램 조종이 필수가 될 테니까요. 그러면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뭐? 갑자기 그런!"

고램 조종 얘기를 꺼내자 피셔가 당황했다. 그러자 이번엔 드비어스 경이 끼어들었다.

"피셔, 자네가 진지하게 고램 조종연습을 하겠다면 내 적극 도와주지. 밤낮으로 특별히 엄하게 말이야."

"아 아니! 그 그게!"

가뜩이나 무뚝뚝한 드비어스가 힘주어 말하자 피셔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레논 경이 끼어들었다.

"저런, 피셔 경, 무의 수련도 다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젠 고램 조종 연습도 다시 시작하시려고요? 드디어 피셔 경이 기사로서 눈을 뜨셨군요. 정말로 기사의 귀감입니다. 이거 내일부터는 해가 서쪽에서 뜰 모양입니다."

"뭐 인마!"

"아니, 아앗! 아니요! 그게, 존경한다고요. 존경한다니까요!"

"하하하하!"

"크크크큭!"

통신을 타고 요란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길버트 소대원들이 웃고 떠드는 사이 훈련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올라갔다. 드디어 미들사이드 요새에서의 최종 일정이 끝난 것이었다.




계절은 한여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일이면 다시 중계진으로 출발을 앞둔 부대원들은 식당 앞 야외 테이블에서 마지막 회식을 즐기고 있었다. 술이 나오고 고기가 나왔다.


펠릭스는 이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마치 고향 장원에서 추수가 끝난 후 페어필드 할아버지가 열던 마을잔치 같은 분위기였다.

아니 마음 편히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별로 없었던 펠릭스에겐 오히려 더 화목한 분위기였다.


안드레아 경은 드비어스 경을 앞에 두고 또 슬금슬금 약을 올리는 모양이었다. 마치 사이 나쁜 첫째형과 둘째형이 싸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피셔 경과 레논 경은 고기를 앞에 두고 티격태격 하고 있었다. 말썽꾸러기 형제가 음식을 앞에 두고 투정을 하는 듯했다.

칼은 에스턴 병대장과 맴피스 마법사와 무언가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친우와 이웃아저씨들이 자신의 집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비록 고향 장원은 아니었지만 이 자리에는 형제도 친구도 이웃도 모두 함께하고 있었다.


그리고 밝게 웃으며 술잔을 나누는 길버트 경과 리차드슨 경.


펠릭스와 칼은 그날 저녁 이후로 길버트 경을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문득 자신은 다른 감정으로 길버트 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언가 그리우면서도 안타까운 그 느낌. 어릴 적 바로 옆 가까운 곳에 있어 바라면서도 얻지 못했던 그 무엇이었다.


펠릭스는 길버트 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느끼던 그 감정을 속삭였다.

'아버지···.'




"아~ 젠장! 재수 없어!"

피셔는 오늘도 연신 같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 여기가 싫습니까?"

"당연하잖아! 고기! 고기가 없다고!! 아악~!"

피셔가 펠릭스의 고램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피셔의 말은 마이티 고램의 조종석 바닥에 난 환기구 틈으로 작아져서 들렸다. 펠릭스는 마이티 조종석에서 그저 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미들사이드 요새의 훈련을 마친 펠릭스들은 다시 중계진으로 배속되었다. 이번에는 중부 중계진 이었다.

동부 중계진이나 서부 중계진과 달리 이곳은 과거 산이었던 지역이었다. 피셔가 저렇게 난리를 치는 이유는 이곳에는 다른 두 중계진과 달리 배식에 고기가 나올 확률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두 중계진과 달리 주변에 밭이나 가축을 사육할 장소가 부족했다. 거기다 인근에 사냥을 할 숲도 없었다.


이곳은 동부전선의 주요 요충지로 에덜라드와 크로비스 양군이 서로 좋은 위치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산의 나무나 숲을 통째로 베어낸 지형이었다.


펠릭스와 피셔는 순찰을 나온 참이었다. 과거 참호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산등성이 아래를 돌고 있었다. 말이 참호지 고램의 기동을 대비해 마치 도시의 대로처럼 넓은 폭을 가지고 있었다.


"이봐! 펠릭스, 조심해! 어디서 적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예!"

펠릭스는 반쯤 건성으로 대답하곤 산등성이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했다.


이곳은 중계진들 중에서 가장 복잡한 지형을 가지고 있었다.

산등성이와 언덕이 복잡하게 솟아 있는가 하면 여러 대의 고램이 모일만한 평지도 있었다. 거기에 십여 년간 인간이 만든 참호와 고랑까지 복잡하게 더해져 마치 이상한 세계의 미로 같은 풍경이었다.


고램이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계단을 천천히 오르며 펠릭스는 오른편을 바라봤다.

멀리 동부 산맥 아래로 동부 중계진이 담당할 키 작은 나무숲 지대가 보였다. 울창한 나무숲이라 녹색 외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 서서히 왼편으로 마이티의 머리를 움직였다. 점점 지대가 높아지며 정면에 중부 중계진이 담당하는 복잡한 산줄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여름 임에도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 황량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높낮이의 차로 인해 시야가 완전히 확보되지 않는 지형이었다.


이번에는 서쪽 중계진이 담당하는 익시투스 산맥 아래를 보기위해 머리를 왼쪽으로 돌렸다. 펠릭스는 도착하자마자 자신이 매복을 했던 지역을 찾아보려고 했다.


고램이 계단을 올라갈수록 눈 위치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산등성이 아래로 낮은 평지가 보였다. 그 왼쪽으로 멀리 익시투스 산맥 자락이 보였다.


펠릭스의 마이티가 산등성이 정상에 완전히 올라설 무렵이었다.

"어!"

왼쪽으로 완전히 고개를 돌리자 거의 바로 옆에 미니트 한대가 역시 산등성이에 올라서고 있었다. 자신의 맞은편에도 똑같이 고램이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펠릭스의 마이티가 빠르게 움직였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허리를 왼쪽으로 돌리며 오른손의 검은 어느새 올려 베기 자세에 들어가 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날 엔필드와의 사냥터에서 경험한 느낌과 비슷했다. 위기감이나 조급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움직이는 게 당연한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적은 아직 펠릭스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펠릭스가 방금 그랬던 것처럼 미니트의 머리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이며 주변 상황을 관찰하는 듯했다.

그런 상대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동시에 상대의 생각이 들리는 듯했다.


뒤늦게 펠릭스를 발견한 적은 검을 중단으로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군! 중단 수평 베기? 늦어!'

펠릭스는 상대의 자세만으로 움직임을 미리 예측했다. 상대는 펠릭스의 예측대로 중단 수평 베기를 할 요량으로 허리를 왼쪽으로 돌리며 양팔을 들어 움직였다.

상대의 그 벌어진 왼팔 겨드랑이 틈을 펠릭스의 검이 파고들었다.

'치지직! 캉!'

미니트 고램의 왼팔이 잘려나갔다. 마치 정비를 위해 왼팔을 분리해 낸 것처럼 몸통에서 깔끔하게 잘려 떨어졌다.


올려 베기를 마친 펠릭스의 검은 상대 머리 위쪽에 멈춰있었다. 검에 주입한 오러의 양과 휘두르는데 들어간 힘은 가감 없이 정확히 팔을 잘라낼 정도였다.


펠릭스가 왼팔을 잘라냈음에도 상대의 허리와 오른팔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멍청이! 무리한 움직임이야!'

펠릭스는 이번에도 상대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왼팔이 잘려나가 몸의 균형을 잃을 위험이 컸음에도 상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큰 동작으로 한손 수평 베기를 하려하고 있었다.

펠릭스는 지체 없이 대각선 아래로 자신의 검을 내려베었다.

'쓰덩! 텅! 카카캉!'

상대의 머리 위에서 내려쳐진 펠릭스의 검에 상대 미니트의 머리 대부분과 오른팔이 어깨 안쪽부터 잘려나갔다.

'쿠쿵! 콰쾅! 쿵쾅!'

무리하게 허리를 돌리던 상대 미니트는 그 반동으로 올라왔던 계단으로 다시 떨어졌다.


"휴우-!"

펠릭스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았건만 실제 걸린 시간은 적을 발견하면서 내뱉었던 "어!"하는 감탄사와 동시에 검을 두 번 연속으로 휘두른 후 참았던 숨을 내쉰 두 호흡 사이였다.


"좋았어! 펠릭스! 끝장을 내버려!"

어느새 올라왔는지 피셔가 흥분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피셔 경! 고램 전투 중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위험하잖습니까!"

"닥쳐! 닥치고 우선 끝장부터 내라고!"

"예, 예!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입니다."

펠릭스는 천천히 적이 올라왔던 계단으로 다가갔다. 계단 입구에 들어서자 그제야 흥분이 밀려왔다.

피셔에게는 애써 평범한 척 대답했지만 심장이 쿵쾅 거렸다. 그러나 불안한 흥분이 아니었다.


상대의 양 팔과 머리를 잘랐다. 완파였다. 펠릭스의 첫 격파 기록인 것이었다.

'좋았어! 좋았어!'

펠릭스는 속으로 신명나게 소리를 지르며 상대를 바라봤다.


'덜컹! 쿵! 쾅!'

미니트 고램은 뒤로 넘어진 채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양팔이 잘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머리가 절반이상 잘려나갔으니 볼 수도 없었다.

두려움에 감히 조종석을 열고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으리라.


조금 전 전투 중에 펠릭스가 느끼던 신기한 감각은 사라졌지만 그런 것이 없어도 펠릭스는 생생하게 적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펠릭스는 자신의 검을 거꾸로 잡아 쥐었다. 그리고 상대의 조종석 위로 가져갔다.

"뭐해? 서둘러!"

펠릭스가 잠시 머뭇거리자 산등성이 위에서 피셔가 소리쳤다. 그러나 펠릭스는 차마 검을 내리꽂을 수가 없었다.


발버둥 치는 적을 보자니 문득 사냥에서 잡았던 무스가 떠올랐다.

그때 죽어가던 무스도 커다란 눈망울을 껌벅거리며 거대한 몸으로 몇 번인가 발버둥을 쳤었다.


"슬펐어···."

거기다 칼이 했던 얘기도 떠올랐다.


"포로로 잡혀왔다가 노예로 남부에 팔려온 크로비스의 노기사였거든. 겨울에 영지인근 몬스터를 상대할 때 가끔 보는 기사였는데···. 우울하고 늘 수심에 잠겨있고 시간이 날 때면 북쪽을 바라보곤 하더라고."


자신의 검 아래에서 발버둥치는 미니트의 모습에 죽어가던 무스와 칼이 얘기하던 포로가 된 크로비스의 노기사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펠릭스!!"

피셔가 다시 재촉했다. 펠릭스는 검에 오러를 씌워 내리꽂았다. 연녹색의 오러 전달액체가 마치 피처럼 펠릭스의 마이티 고램에 튀었다. 발버둥 치던 미니트 고램의 움직임이 바로 멎었다.


"야 인마! 너 일부러 그런 거지!"

펠릭스가 전과물 확인을 위해 적 미니트의 양팔과 머리를 줍고 있자 피셔가 소리쳤다. 펠릭스의 마지막 일격 때문이었다.

"서둘러야 할 겁니다."

펠릭스는 피셔의 질문에 대답대신 북쪽 평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펠릭스가 쓰러트린 소대의 나머지로 보이는 적의 고램이 다가오고 있었다.

"쳇!"

적을 확인한 피셔는 펠릭스와 같이 산등성이로 다시 올라갔다. 그곳에서 피셔와 펠릭스는 다시 산등성이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펠릭스의 마지막 일격은 조종석을 뚫지 않았다. 대신 허리 부분의 오러 전달용액 펌프와 코어가 있는 곳을 찔렀다. 즉 상대 조종사는 살아있다는 말이었다.


과연 계단 아래에는 쓰러졌던 미니트 고램의 조종사는 다른 두 고램의 엄호를 받으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피셔가 말했다.

"펠릭스, 너 언젠가 후회할지도 모른다!"

"예. 그럴지도 모르죠···."

펠릭스는 혼잣말을 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피셔의 말대로 오늘의 결정을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몰랐다. 살아남은 저 기사가 언젠가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들을 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는 아직 적의 피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은 그런 일로 자신이 받을 양심의 가책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상대는 보복을 하거나 쫓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자!"

적의 상태를 확인한 피셔가 신경질 적으로 소리 쳤다. 피셔의 말에도 펠릭스는 잠시 더 그곳에 머물렀다.


어찌되었던 오늘은 기쁜 날이었다. 무려 첫 완파였다. 칼도 아직 반파 기록뿐이었다. 자신이 먼저 완파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래 지금은 이걸로 된 거야···."

잠시 첫 승리의 여운을 만끽한 펠릭스는 스스로 다짐하듯 말하고는 돌아섰다.


작가의말


좀 안좋은 개인적인 집안 사정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글이 늦어졌습니다.


그냥 조용히 글이나 적으며 살 수 있으면 정말 좋겠는데...




며칠 가능하면 성실연재? 를 흉내 내 볼 생각입니다.

매일 연참은 힘들지 모르겠고.

가능하면 격일 정도 연재를 해 볼 생각입니다.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선작 숫자가 생각보다 많이 줄어들지 않았더군요.

감사하고 죄송스러워서...


부족한 글 계속 봐 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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