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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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다.
희미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조종석을 감싼 장갑이 비틀려 벌어져 있었다.
새어든 빛 속에 희미하게 떠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조종석 사물이 전부 쓰러져 보였다.
고램이 90도로 쓰러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안전장치를 해체하고 몸을 빼자 가슴에 찢어지듯 통증이 느껴졌다. 갈비뼈가 나간 듯 했다.
"헙, 으윽~!"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리곤 욕지기가 올라왔다. 서둘러 조종석 해치를 열고 토해내기 시작했다.
"우웨엑 우욱···."
토사물에 피가 섞여있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나마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정신이 좀 들었다.
주변은 온통 고램 폐기장이었다.
팔다리가 끊어지고 부서지고 뒤엉켜 쓰러져 쌓여있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수천기의 고램이 정면으로 맞붙은 전장이었다.
기억나는 것은 적의 기사단의 돌격에서 발생하는 오러필드에 튕겨져 날아가던 모습이었다.
모국인 에덜라드와 북쪽의 크로비스는 근 100년째 전쟁 중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살아있었다.
조종석 좌석 뒤에서 검을 꺼내들었다.
비척이며 겨우 고램에서 내려와서는 검을 안아들고 주저앉았다.
전투가 끝난 전장의 폐허, 적이던 아군이던 후속 처리부대가 올 것이다. 그리고 어느 쪽이냐에 따라 이후 자신의 운명의 결정될 것이다.
"어~이 여기 생존자가 있다. 이쪽이야"
폐허 속을 익숙하게 헤집고 작달막한 노병이 다가왔다. 그 뒤로 흰색바탕에 뾰족한 십자무늬 에덜라드 깃발을 단 작은 마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아군의 부대였다. 아군이 이긴 모양이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어졌다.
"기사님 괜찮으십니까?"
다가온 노병이 수통을 건네며 물었다. 희미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전황은 어떤가요?"
"대승이랍니다. 이미 적의 요새 정문 앞까지 밀어붙였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그렇군요. 읍, 쿨럭 쿨럭"
물을 마시다 기침을 하자 피가 섞여 나왔다.
"이런 부상이 심하시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쇼. 어~이 여기 기사님이 부상당하셨다. 의료마법사를 불러 빨리"
뒤따르던 무리들 중 한명이 알았다는 듯 손을 흔들자 로브를 입은 마법사 한명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왼편의 폐허 한편을 보고서더니 엉덩방아를 찌었다. 그리곤 소리쳤다.
"으악, 저저저 적이다!"
마법사가 앉은뱅이 자세로 엉거주춤 뒤로 기어가는 맞은편에 검은 기사정복의 사내가 검을 끌며 나타났다. 크로비스의 기사단원 이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긴장감에 쌓였다. 아군의 후속부대의 기사는 아직 보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적의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기사인 자신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자신을 보고 있었다.
"별수 없겠군요···."
물통을 넘겨주고 검을 들고 일어나자 왼쪽 옆구리가 찢어질듯 아파왔다.
"으윽···."
"괘 괜찮으시겠습니까?"
"최선은 다해 보겠지만 장담은 드릴수가 없습니다···."
"자 잠시만 버티고 있어보십쇼 후딱 선임기사님을 불러올 테니···."
노병은 날쌔게 의료마법사에게 다가가더니 일으켜 세우곤 수레 쪽으로 달려갔다.
'스르릉.'
검을 빼들자 낮게 차가운 소리가 났다. 상대방은 소리에 익숙한 듯 반응해 고개를 돌렸다.
옷에는 금술이 수놓아 져 있었다. 단순 고램 라이더가 아닌 크로비스의 기사단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기사단은 정예중의 정예였다. 최소한 엑스퍼트 중급이상에 상당한 경험을 갖춘 이들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신출내기에 부상자인 자신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적이 아니었다. 다행히 적의 부상은 자신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다.
일격, 단 한번으로 끝을 내야 했다.
밀려오는 통증을 무시하고 마주섰다. 상대는 왼손을 오른쪽 허리 깊숙이 부여잡고 있었고 검은 여전히 내려잡은 상태였다.
목표는 적의 왼쪽 목의 경동맥!
이것저것 잴 것도 없이 모든 힘을 다해 스쳐지나 며 배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크로비스의 기사는 짚단을 밴 듯 풀썩 쓰러져 내렸다.
뒤돌아보니 그의 왼손은 허리의 쏟아져 내리는 내장을 부여잡고 있던 것이었다.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시체 주변은 순식간에 피로 흥건해 졌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실제로 맨몸의 적을, 사람을 마주하고 검을 휘두른 건 처음이었다. 그 십 수 년의 검술 수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람을 직접 벤 것도 처음이었다.
검을 들어올렸다.
칼날에 서서히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저물어가는 황혼이 검신에 물드는 듯 검신을 붉게 물들이며 핏방울은 날밑손잡이 장식에 고이기 시작했다. 일리아드가문의 문장인 검은 와이번의 부조가 피에 젖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에 격한 통증과 함께 어지러워졌다.
쓰러져 내리는 귓가에 검을 쥐어 주던 이가 하던 얘기가 들려왔다.
"펠릭스 살아서 돌아오너라."
"살아 돌아오면 자리를 마련해 주마 펠릭스."
"살아 돌아오면 자리를···."
"기사님! 기사님···!"
멀리 희미하게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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