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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공룡

몰락한 천재헌터는 폐급의 헬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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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공룡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2
최근연재일 :
2023.08.14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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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506,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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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0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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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혹한의 균열(4)

DUMMY

‘전에 챙겨둔 거 있지?’


고개를 끄덕인 이찬솔이 주머니를 뒤적여 종이와 펜을 하나씩 꺼내더니 주변을 살폈다.


“잠깐 실례할게요.”


“아, 네.”


마력을 뿜어내며 눈 더미에 방패를 꽂아둔 김성환에게 다가선 이찬솔은 방패에 종이를 대고 내 말에 따라 문구를 하나하나 작성하기 시작했다.


‘대충 네 말에 무조건 복종할 수 있게만 만들면 돼. 노동력은 당연하고, 금전적인 부분도 문제가 없도록. 아. 모든 행동에 네 말이 우선순위가 돼야 한다는 것도 넣고. 그렇지.’


“찬솔씨. 그건······.”


“아, 잠시만요.”


이찬솔이 문구를 작성하고 있는 종이는 영혼계약서다.

혹시 쓸모가 있을지도 몰라 칠성에서 몇 장 챙겨뒀던 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노예 하나 생겼네.


말 그대로 노예계약서가 따로 없었다.

상대방은 이쪽에서 하는 말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목숨을 거는 일일지라도 예외는 없다. 그래도 진짜 죽어버리면 아까우니까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는 칠성을 찾아갈 수 있도록 구멍 하나 정도는 만들어줬다.

반대로 이쪽에서 해줄 건 단 하나뿐이었다.


계약서가 만족스럽게 작성되자 이찬솔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강한나의 앞까지 여유롭게 걸어갔다.

턱 끝까지 차오른 눈 더미에 눈물을 머금은 강한나가 이쪽을 빤히 바라봤다.


“제, 제발······.”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여지껏 오만하고, 폭력적이던 표정과 말투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뭐든 한다고 하셨죠?”


“살려만 준다면 진짜 뭐든 다 할게! 약속해!”


“말로만 하는 약속은 별로 믿고 싶지가 않네요.”


방금 작성한 계약서를 강한나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이, 이게 뭐야?”


“계약서요. 목숨 값으로는 싸죠?”


몸이 묶인 채로 계약서를 대충 훑어보던 강한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씨발! 너. 지금 내가 호구로 보여?”


목숨이 걸린 와중에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하다.


“싫으면 말고요. 저희도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라 막 살려줄 수가 없거든요.”


“으아아악! 악마 새끼! 빌어먹을 개새끼!”


눈 더미에 둘러싸인 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가지고 발버둥치는 모습은 그저 객기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으으윽! 씨발! 어떻게 좀 해보라고!”


“흐음.”


이찬솔이 시큰둥하게 바라보는 사이에도 눈 더미는 아주 조금씩 강한나의 얼굴을 덮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눈 더미가 소량의 마력을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있을 터라 그 공포감은 보기보다 몇 배는 크게 느껴질 거다.


“아, 알았어! 계약서 쓸게! 근데 지금 손을 못 쓰잖아!”


“입이 있잖아요.”


“뭐?”


이찬솔은 살짝 내민 혀로 계약서를 가리켰다.


“이 개새끼가!”


또다시 발악하는 모습이 슬슬 질린다.


“아. 싫음 말던가요.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한다! 한다고! 씨발!”


드디어 원하는 대답을 들은 이찬솔이 강한나의 얼굴로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강한나의 입에서 옅은 핏물이 흐르더니 이내 붉게 물든 혓바닥을 내밀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네.’


고개를 끄덕인 이찬솔은 다시 펜을 꺼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이쪽에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당장 이 순간에서 강한나를 구해주는 일이다.


“빠, 빨리······. 으읍!”


눈 더미가 강한나의 입까지 뒤덮었다.

그 모습에도 여유롭게 계약서를 안주머니에 넣은 이찬솔은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하나 꺼냈다.


『심연의 얼음조각』


등급 : B급 에픽


공격력 : 1


특수능력 : (냉기 Lv.1)


“으읍! 으으으으으읍!”


아까 모서리를 조금 잘라냈던 얼음조각을 꺼내들자 강한나를 뒤덮었던 눈 더미가 심하게 요동치더니 이내 온몸을 뒤덮어버렸다.


“이, 이거 맞는 거죠?”


강한나를 완전히 뒤덮어버린 눈 더미가 옅게 꿈틀거리자 이찬솔은 조금 주춤했다.


‘괜찮아. 눈 더미 속에 넣어.’


팔만 길게 뻗어 새파란 얼음조각을 눈 더미 속에 밀어 넣었다.


파박! 사사사사삭!


“어어? 이거 왜 이래!”


그러자 심하게 요동치던 눈 더미가 얼음조각을 쥐고 있는 이찬솔의 팔로 옮겨 붙기 시작했다.


“푸하! 뭐, 뭐야?”


눈 더미에서 빠져나온 강한나는 잠시 그 상황을 지켜봤다.


“으핫! 으하하! 병신 같은 새끼! 꼴좋다!”


자신이 당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이는 상황에 강한나가 얄밉게 웃어댔다.


‘됐어. 얼음조각만 놓으면 돼.’


당황한 채 주춤거리던 이찬솔이 손에 들고 있던 얼음조각을 놓자 눈 더미는 몸뚱어리 따위 관심도 없다는 듯이 얼음조각을 중심으로 거대하게 뭉쳐들기 시작했다.


‘이 뒤는 기억하지? 원래 하려던 것처럼 하면 돼.’


“찬솔씨! 괜찮으십니까?”


“김성환 헌터님! 빙벽 내려주세요!”


“네, 네? 하지만 마물이······.”


“괜찮아요.”


잠시 고민하던 김성환은 이쪽을 빤히 바라보더니 방패를 번쩍 들어 빙벽을 가라앉혔다.


“크아아아!”


동시에 수많은 설인과 아이스 타이거가 몰려들었다.


“이런 미친! 뒤지려면 너희끼리 뒤져!”


빙벽으로 사방에 깔려 있던 마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자 강한나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발을 굴렀다.


“어허. 혼자 어디가십니까? 계약 조건 잊으신 거 아니죠?”


“······너. 이 개새끼.”


이찬솔이 계약서를 펄럭이자 강한나는 도망가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영혼계약서로 이루어진 계약을 위반하면 목숨 정도는 가볍게 잃는다는 걸 능력 좋은 C급 헌터가 모를 리는 없다.


“쟤들 왜 저래요······?”

마물들이 단숨에 몰려드는 탓에 잔뜩 경계하고 있던 박다미가 말했다.

몰려들던 녀석들은 하나같이 바닥에 넙죽 엎드렸고 덩치가 가장 작은 설인 한 녀석만 얼음조각을 머금은 눈 더미 앞에 서 있었다.

이찬솔을 포함한 일행 모두가 그 광경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설인들은 주기적으로 눈 더미에게 제물을 바친다.

제물의 대상은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어린 설인.

강한나를 집어삼키려던 것처럼 제물의 대상은 그저 마력을 머금은 생명체면 뭐든 상관없지만 설인들의 이상한 관습이었다.


“크아아악!”


얼음조각을 중심으로 허공에서 꿈틀거리던 눈덩어리가 가만히 서 있던 설인을 덮쳤다. 이미 강한나의 마력을 빨아들인 덕분에 눈덩어리는 꽤 기운이 넘쳐 보였다.

설인을 집어삼킨 눈덩어리는 점점 형태를 잡아가더니 동그란 덩어리를 세 개 얹어놓은, 눈사람의 형태로 바뀌었다.


“······저게 보스입니까?”


지금까지의 기세와 다르게 허접해 보이는 외형에 김성환이 힘 빠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이야.’


설인들은 그 녀석을 소환하기 위해 끊임없이 제물을 바친다. 그저 많은 수를 희생한다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 녀석을 소환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매번 저런 허접한 눈사람이나 만들고 멍청하게 물러서는 것뿐이다.


쉬이이이잉.


눈사람의 주위로 눈보라가 더욱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준비해.’


“다들 준비하세요!”


이찬솔의 외침에 김성환과 박다미는 마력을 끌어 모아 각자의 전투태세를 잡았다. 아직 이쪽의 전력을 모르는 강한나만이 멀뚱히 서서 그런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볼 뿐이었다.


“김성환. 너는 쪽팔리지도 않냐? 그래도 유명한 C급 헌터라는 새끼가 저런 애송이 말이나 -”


콰광!


강한나는 모든 불만을 토해낼 수 없었다.

허접하게만 보이던 눈사람은 어느새 덩치 큰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그 손에 들린 새파란 대검이 강한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검을 막은 건 이찬솔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뭐하면 된다고?”


그래도 실력 좋은 C급 헌터라 그런지 상황파악은 빨랐다.

방금 그 한 합을 막아낸 것만으로도 이찬솔은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의 헌터가 아니라는 걸 인지한 것 같다.


이걸 보고도 위아래를 모르면 C급 떼야지.


그도 그럴 게 눈사람 녀석이 내지른 공격은 꽤나 묵직했다. 온갖 스킬을 미리 두르지 않았다면 이 한 합을 막아내는 것도 벅찼을 거다.


‘너랑 김성환은 보스. 강한나는 마물. 박다미는 서포트.’


“이런 공격 피하는 건 다들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한나씨는 주변 마물들 정리해주시고, 김성환 헌터님은 저랑 저 녀석 맡아주세요! 다미씨는 전체적으로 서포트 부탁드리겠습니다!”


마물들을 막아내는 건 김성환에게 시킬 일이었지만 머릿수가 하나 늘었으니 조금 더 수월한 방향으로 써먹으면 된다.


쉬이익!


서걱.


이찬솔이 뽑아낸 검기가 아직 다리는 눈덩어리의 형태로 남은 녀석을 갈랐다.

열심히 달려오던 김성환은 손쉽게 갈라진 눈덩어리를 보고 잠시 주춤했다.


“아직이에요!”


이찬솔의 말대로 눈덩어리는 베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순식간에 본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쐐애애앵!


몸의 재생이 채 다 되기도 전에 휘둘러진 얼음 검에서 수십 개의 얼음조각이 뿜어져 나왔다.


콰가가각!


“크윽······!”


늦지 않은 김성환의 방패와 맞닿은 얼음조각이 산산이 부서졌지만 그 충격이 그리 옅어 보이지는 않았다.


“찬솔씨! 저거 점점 모습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걸 거예요.”


녀석이 완전히 깨어나기 위해선 마력을 머금은 생명체와 더불어 심연의 얼음조각이 매개체가 돼야 한다. 이미 얼음조각을 머금고 있던 눈덩어리에 설인이 제물로 심어져 조금씩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우선 왼쪽 가슴을 노려. 마석은 거기에 있을 거야.’


“네.”


마물임에도 마석을 가지지 못한 눈덩어리는 제물을 통해 빨아들인 마력으로 마석을 생성해 왼쪽 가슴에 심는다.


쐐애액!


콰곽!


힘껏 검을 휘두른 이찬솔이 마석을 노리고 들자 녀석은 반사적으로 검을 쳐들어 방어했다. 무한한 재생이 되는 몸뚱어리를 가지고도 목숨을 지키려는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스킬 : 만월참 Lv.6 효과 발동』


쉬이익!


콰과과곽!


허공에서 검을 휘둘러 새하얀 만월을 그려낸 이찬솔이 녀석의 검을 갈라냈다.


『스킬 : 공중발판 Lv.5 효과 발동』


『스킬 : 양단 Lv.6 효과 발동』


쐐애액!


허공에서 중력을 거스른 듯한 움직임으로 자세를 다잡은 이찬솔이 또다시 크게 검을 휘둘렀다. 허공에서부터 휘둘러진 검은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녀석의 하체까지 양분하며 떨어졌다.


파가각!


조금씩 얼음처럼 단단해지던 녀석의 몸뚱어리를 가르던 검 끝에 마석이 갈라지는 촉감이 정확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눈 더미 위로 착지한 이찬솔은 조금의 쉴 틈도 없이 녀석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파바바바밧!


하지만 그 걸음에 맞춰서 무수한 얼음조각이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쿠구구.


콰과과과과곽!


한발 늦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타이밍 좋게 솟아오른 빙벽이 이찬솔과 녀석의 사이를 갈랐다.


“방어는 맡겨만 두십쇼!”


“고맙습니다!”


김성환의 옆으로 걸음을 옮긴 이찬솔은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마석은 갈랐으니까 형태 잡힐 때까지 조금만 버티면 돼.’


녀석은 마석을 잃었음에도 끊임없이 공격을 퍼부어댔고, 동시에 눈 더미를 몸 이곳저곳에 덮어가며 형태를 바꿔갔다.


쉬이이잉.


파바바밧!


그러는 도중에도 눈보라와 얼음조각은 끊임없이 날아들어 김성환의 빙벽에 몸을 숨겨야 했고, 강한나가 간혹 놓치는 설인이나 아이스 타이거를 상대해야 했다.


쩌저저적.


약 십 분 동안 그 과정을 반복하던 중에 이젠 앞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세진 눈보라 속에서 마치 유리처럼 단단한 무언가가 갈라지는 선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콰창!


그리고는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과 함께 얼음파편이 사방으로 날아들더니 이내 거센 눈보라가 조금씩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후우.”


잔뜩 몰아치던 눈발 속에서 옅은 숨소리가 들려오자 일행들이 하나같이 몸을 떨었다.


‘얼음조각은 명치.’


이찬솔은 새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검을 곧게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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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복수(1) 23.06.20 64 2 14쪽
50 불길 속 눈꽃(6) 23.06.19 59 2 14쪽
49 불길 속 눈꽃(5) 23.06.18 62 2 14쪽
48 불길 속 눈꽃(4) 23.06.17 64 2 13쪽
47 불길 속 눈꽃(3) 23.06.16 69 2 14쪽
46 불길 속 눈꽃(2) 23.06.15 80 2 14쪽
45 불길 속 눈꽃(1) 23.06.14 80 1 13쪽
44 대장장이(4) 23.06.13 77 2 13쪽
43 대장장이(3) 23.06.12 73 2 13쪽
42 대장장이(2) 23.06.11 81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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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스승과 제자(4) 23.06.08 81 1 13쪽
38 스승과 제자(3) 23.06.07 85 1 13쪽
37 스승과 제자(2) 23.06.06 92 2 14쪽
36 스승과 제자(1) 23.06.05 99 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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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혹한의 균열(2) 23.06.01 99 2 14쪽
31 혹한의 균열(1) 23.05.31 110 3 13쪽
30 악마출현(7) 23.05.30 114 3 14쪽
29 악마출현(6) 23.05.29 112 3 14쪽
28 악마출현(5) 23.05.28 109 3 12쪽
27 악마출현(4) 23.05.27 117 3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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