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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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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1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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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DUMMY

처음 수일명검을 배웠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금성무관 후원의 작은 연무장에서 사부에게 첫 선을 보일 때처럼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육전호가 건넨 종이를 한참동안 바라보던 남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기대했던 것보다 진척이 무척 빠르구나.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검 대신 붓을 잡아도 되겠어.”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이정도의 구양순체를 겨우 이십여 일을 배워 썼다면 그 누구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거야.”

거듭된 칭찬에 육전호는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쓴 글씨를 보며 즐거워하는 남궁우를 볼 때마다 멀리있는 남궁성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궁세가의 복잡한 사정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서법을 배우고 있는 이는 자신이 아니라 남궁성도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남궁우는 서법을 가르치는 동안 검이나 무공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았다. 육전호 역시 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공을 수련하던 도중에 느끼는 여러 가지 의문점에 대해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남궁우의 흥을 깨는 것만 같았다. 참아야만 했다.


붓을 쥘 때마다 남궁우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용필(用筆)과 운필(運筆)의 법을 생각했다. 강함과 약함, 무거움과 가벼움, 빠름과 느림을 생각하고 구분해가며 붓질을 해야 했고 그 결과는 은은한 묵향과 함께 그대로 종이 위에 드러났다.

서법에 몰두하는 시간들이 지나면서 깨달을 수 있었다.

필법이 몸에 익어갈수록 자신이 수련하는 검법에도 좀 더 세밀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야할 곳이 무수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어쩌면 남궁우는 서법을 통해 자신의 검을 좀 더 냉철하게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남궁우로부터 자신이 써온 글씨의 잘된 점과 고쳐야 할 점들을 자세하게 듣다보니 어느새 해가 태이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붉게 물들어 가는 연무장을 가로질렀다. 조원들이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를 나서고 있었다.

육전호를 본 등오가 한걸음에 다가왔다. 음흉한 미소가 얼굴에 가득했다.

“어이, 전호. 좀 전에 화산파의 강소미가 자넬 찾아 왔었어.”

“네?”

“으흐흐, 옥소반점으로 오라더군. 기다린다고 전해달래.”

“알겠습니다.”

육전호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자 짓궂은 농이라도 걸어 볼 속셈이었던 등오는 머쓱해지고 말았다.

그길로 조원들과 헤어져 옥소반점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서문진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봉천우와 강소미가 잘 되길 바라고 있었지만 서문진철의 처지가 한 때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강소미는 그런 서문진철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곳곳에 등불을 밝힌 낙양의 저잣거리는 여전히 화려했다.

옥소반점은 이미 한 번 가본 곳이어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자 점소이가 다가왔다.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육전호 대협이시죠?”

“육전호가 제 이름은 맞습니다만…….”

점소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협이란 소리에 육전호는 주춤거렸다. 이런 육전호의 반응도 아랑곳없이 점소이는 싱글벙글 거렸다.

“이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육대협.”

촐랑대는 점소이를 따라 손님으로 북적대는 일층을 벗어나 이층으로 향했다. 강소미는 봉천우, 그리고 또 다른 사내 한 명과 함께 창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서 와, 육대협.”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가득한 강소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육전호를 맞이했다.


처음 보는 사내는 곽기승이란 자로, 강소미와 함께 곡양자의 제자였다. 올해 스물여덟의 나이로 봉천우보다는 한 살이 많았지만 입문이 늦어 봉천우에게 사형이라 칭하고 있었다.

봉천우의 소개로 곽기승과 인사를 나눈 육전호는 곧 자리에 앉았다.

“구요서를 혼내줬다더니 그새 분위기가 많이 변했네.”

강소미가 여아홍을 두어 잔은 마신 듯, 발그레한 얼굴을 들이대며 육전호를 살펴보고 있었다.

“못 보던 흉터도 보이고…… 그런데도 뭔가 전체적인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뭐야, 혹시 아직도…….”

“아마 오랜만에 봐서 그럴 겁니다.”

왠지 서문영영을 거론할 것 같은 생각에 육전호는 강소미의 얘기를 잘랐다. 그러자 지켜보던 봉천우가 입을 열었다.

“전호가 요즘 서법을 익히고 있어. 그 때문인지 예전보다는 예기가 많이 갈무리됐어.”

“그랬어? 어쩐지…… 그런데 누구한테 배우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강소미를 바라보던 봉천우가 육전호의 잔에 가득 술을 따랐다.

“무림맹에서 다른 이에게 서법을 가르칠만한 실력을 갖춘 분은 여럿 있지만 전호를 가르치는 분은 아마도 제왕검 대협일 것이다.”

자신이 남궁우한테 서법을 배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얘기한 적이 없었다. 봉천우한테도.

“형님이 그걸 어떻게……?”

육전호 뿐만이 아니라 강소미와 곽기승까지 놀라는 모습을 보이자 봉천우가 미소를 지었다.

“간단히 추리할 수 있는 일이야. 서법을 가르칠만한 이들 중 전호와 연이 닿아있는 분은 남궁우 대협 밖에 없었거든. 남궁우 대협의 자제가 육전호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이니…….”

그렇게 네 사람이 한참동안을 남궁우와 서법을 화제 삼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여기들 있었군.”

듣는 이를 감탄케 하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내가 네 사람을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오게. 오랜만이군.”

곽기정이 일어서며 사내를 반겼다. 강소미와 봉천우도 아는 듯이 목례를 하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 쯤 되었을까. 조각을 한 듯 준수한 외모에 책에 파묻혀 사는 학자처럼 고아한 기품이 우러나오는 사내였다.

자리를 잡고 앉자 곽기정이 육전호에게 사내를 소개했다.

“육소협, 인사 나누게. 여기는 내 친우 제갈군도라 하네.”

“처음 뵙습니다. 육전호라 합니다.”

육전호는 포권을 취해 인사를 했다.

“아! 반갑습니다. 구요서와 비무를 했다는 분이군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제갈군도는 다소 과장된 목소리였지만 꽤나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행동 하나하나에도 왠지 모를 품위가 어려 있었다.

형식적인 겸양의 말이 몇 차례 오고간 후 다시 술잔이 비어 가기 시작했다.

“그래, 사천으로 갔던 일은 어떻게 됐나?”

곽기정의 물음에 제갈군도는 막 마시려던 술잔을 내려놨다.

“말도 말게. 천하의 제갈군도를 보고도 꿈쩍도 하지 않는 여자는 처음 봤네.”

“흠…… 자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여자군.”

두 사람이 한 여인을 두고 화제를 이어가자 듣고 있던 강소미가 끼어들었다.

“사형, 무슨 얘기인가요?”

강소미의 물음에 곽기정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새로 좋아하게 된 여자 얘기야.”

“그 여인이 누군데요?”

거듭된 강소미의 물음에 제갈군도가 나섰다.

“소미도 알 거야. 남해 보타문의 검후.”

제갈군도의 대답에 강소미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검후? 그 언니는 제갈 오라버니보다 연상이잖아요. 그보다도 오라버니가 만나던 그 어린 소녀들은 다 어떻게 하구요?”

강소미가 따지듯이 묻자 제갈군도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크흠,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기는 하다만 무인에게 나이란 허울에 불과한 것 아니겠느냐. 그리고 나도 이제 방황을 끝내야지. 나이도 찼는데…….”

강소미와 제갈군도가 주고 받는 얘기를 들으며 육전호는 술잔을 비웠다.

두 사람이 말하고 있는 보타문의 검후가 자신과 비무를 했던 종리연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얼굴 근육이 굳어졌다. 속에선 알 수 없는 열기가 끓었다. 묵묵히 술을 마시면서 두 사람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무엇보다 종리연의 근황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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