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1,022,438
추천수 :
7,844
글자수 :
212,785

작성
12.04.19 07:35
조회
27,086
추천
247
글자
23쪽

20

DUMMY

멀리서 조그맣게 들려오는 종소리로 미루어 보아 시간은 이미 자시 초. 모두가 잠든 깊은 밤이었다.

봇짐을 정리하던 육전호는 문득 생각이 난 듯, 품속에서 하얀 비단 손수건을 꺼냈다. 서문영영이 흑금단두와 함께 주던 때와는 달리 그동안 땀에 절어 그 색이 바래있었다.

하얀 비단이 누렇게 변한 것처럼 그 여자의 마음도 변해버린 것일까.


약속했던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지만 서문영영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겨우 며칠간이었지만 약속시간을 어겨본 적이 없는 서문영영이었는데.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어쩌면 사람을 보내어 자신이 오지 못하는 사정을 알려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기다렸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깊어갈 수록 육전호의 가슴도 타들어갔다. 그렇게 한 시진이 흘러갔다.

더 이상의 기다림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며칠 동안 함께 보냈던 순간들도 의미가 없었다. 모든 것이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숙소로 돌아가던 무거운 발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그 여자의 체취를 맡은 것도 같았다. 하지만 달빛이 쏟아지는 뜰과 좁은 길 어디에도 그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손수건을 몇 가지 물건과 함께 봇짐 속에 집어넣었다. 이것으로 준비는 끝났다. 두어 시진 후면 조원들과 함께 세가를 나서 무림맹으로 귀환할 것이다.

육전호는 길을 나설 준비가 된 차림 그대로 침상에 올라앉았다.

혁련세가와 혼담이 오간다는 강소미의 말을 듣고 난 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런 결과는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몰랐다. 또다시 가슴이 아려왔지만 지금으로서는 잊는 것이 최선이었다.

무거운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서문영영으로 인한 상심 때문인지 전신에 퍼져 있던 진기가 평소와는 달리 맥없이 단전으로 모여 들었다.



담무원의 빈자리가 가끔씩 조원들을 침울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여정은 편안했다. 비록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인적이 드문 곳을 골라 이동하는 방식은 여전했지만.

두 달 가까이 안휘성과 절강성을 떠돌다 돌아온 무림맹의 경비단 숙소는 오래된 고향집처럼 육전호를 맞아주었다.

조원들과 어울려 요란스럽게 숙소 청소를 하고는 목욕을 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한 일상이었다.

“어이, 전호. 조장 호출이야. 회의실로 가봐.”

외출이라도 하려는 듯 말끔하게 차려입은 등오가 섭평위와 함께 육전호의 방문을 열고 서 있었다.

“네, 그런데 어딜 가십니까?”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는 육전호를 바라보며 등오와 섭평위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무릉도원이지. 함께 가지 않겠나?”

“무릉도원……? 전 괜찮으니 두 분이서 다녀오십시오.”

육전호는 황급히 두 손을 들었다. 두 사람이 평상시에 즐겨 찾는 곳은 그동안 귀가 닳도록 들었다.

육전호는 등오와 섭평위가 숙소를 나서며 낄낄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게. 편히 앉게나.”

계응걸이 각종 문서가 어지럽게 쌓여 있는 탁자에 코를 박고 있다가 육전호를 반겼다. 붓을 놀리고 있던 것으로 보아 모종의 문서를 꾸미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무슨 일입니까?”

“별 것 아니야, 이번 임무에 대한 보고서를 올려야 하는데…… 담무원의 사망경위에 대한 자세한 진술이 필요해. 그리고…… 요 며칠 동안 자네 안색이 어두워 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는지 얘기해 줄 수 있겠나?”


곁에서 본 담무원의 최후를 기억나는 대로 모두 얘기했다. 하지만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대충 얼버무렸다. 회의실을 나온 육전호의 입에서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상심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계응걸의 눈을 속이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근래에 들어 운기행공 중에도 호흡이 흐트러지며 기혈이 들끓는 일이 잦아졌다.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봉천우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이라도 구해볼 생각이었지만 봉천우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검을 들고 숙소를 나섰다.

내력과 운기행공에 관한 것은, 유세명의 가르침을 받은 후부터는 늘 혼자서 풀어야할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조용한 장소를 찾아 운기행공을 하며 차분히 문제점을 찾아 볼 요량이었다.

연무장에는 다른 조의 몇몇 경비대원들이 요란한 기합을 내지르며 청살검진을 가다듬고 있었다.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지켜보던 육전호는 주위를 휘휘 둘러보고는 연무장을 빠져나와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무림맹의 수많은 전각들 뒤로 검은 숲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무림맹의 내부였지만 처음 와보는 길이었다. 아담한 전각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는 골목을 몇 번 돌아 빠져나오자 울창한 소나무 숲이 길을 가로막았다. 태이산 자락에서 무림맹의 내부로 이어진 숲이었다.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 사이로 우거진 잡초를 헤치며 한동안 걷고 있자니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듯 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던 육전호의 눈앞에 넓고 환한 공간이 나타났다. 최근에 누군가가 정리를 한 듯, 말끔하게 다듬어진 십여 장 정도 되는 공터에 밝은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운기행공은 물론 한바탕 검무를 추기에도 적당한 장소였다.

피식 쓴웃음이 새어나왔다. 적당한 공터를 보자마자 무공수련을 할 생각을 하는 자신은 천생 무인이었다.


수령이 족히 수백 년은 되었을 법한 커다란 소나무 밑동에 결가부좌를 튼 육전호는 눈을 반개(半開)한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공터를 휘감던 싸늘한 가을바람이 옷자락을 가볍게 흔들더니 곧 어두운 소나무 숲으로 몰려갔다.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단전을 채운 진기는 육전호의 의지에 따라 임맥과 독맥, 충맥으로 흩어져 흐르기 시작했다. 오직 운기행공에만 집중해야 할 순간이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상념들을 하나씩 지워갔다. 하지만 지우면 지울수록 떠오르는 서문영영의 모습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을 잊으려 애쓰는 육전호가 서운한 모습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다 남궁세가를 떠나오던 그 날이 떠올랐다. 또다시 가슴이 아려왔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조약돌 하나에 고요하던 연못에 파장이 일듯이 임맥과 독맥, 충맥을 일정하게 돌아가던 진기의 흐름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며칠 전부터 비슷한 기미가 보였지만 오늘처럼 심하지는 않았었다. 어찌 대처할지 몰라 잠시 당황하는 사이, 흐트러진 진기의 일부가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충맥(衝脈)의 일부 혈도가 경직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파란 불꽃이 일었다. 말로만 전해 듣던 주화입마(走火入魔)의 전조였다.

충맥을 따라 정수리로 오르던 진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행방향의 혈도가 굳어가자 갈 곳을 몰라 우왕좌왕거리고 있었다. 다급했다. 충맥의 곳곳에 뭉쳐있는 진기를 자신의 의지대로 다루기 위해 애를 썼다. 제어하려는 육전호의 의지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아무 곳으로나 뛰쳐나가려는 진기 사이에 힘겨운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고요한 숲 속에는 싸늘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육전호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던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렸다. 석상처럼 앉아 있던 몸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이 점점 커졌다. 참을 수가 없었다. 절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움직임이 점점 더 맹렬해지는 진기를 마냥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정신력이 이미 한계점을 지나 있었다.

‘심마(心魔)…….’

언젠가 들었던 봉천우의 탄식이 생각났다. 심마였다. 혼란스러운 감정의 결과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수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격렬한 분노와 안타까운 감정이 교차했다. 허탈했다. 겨우 이런 초라한 최후를 위해 그렇게 발버둥 치며 살아왔던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들끓었던 짧은 순간이 지나자 의식이 차츰 멀어져가는 것을 느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수련생들이 모두 돌아간 오후. 금성무관의 작은 연무장에는 열네 살의 어린 육전호가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육전호를 바라보며 웃고 있던 초로의 노인.

“내 너에게 초식을 잊어버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부님! 너무 어려워요. 언제는 초식의 형(形)이 엉성하다 하시더니 또 언제는 초식을 잊어버리라 하시고…….”

분한 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외치는 육전호를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허허…… 천지에 흩어져 있던 지극한 기(氣)가 모여 생기(生氣)를 만들고, 잠시 머물다 다시 흩어지길 끊임없이 반복하니 형(形)에 대한 집착은 네 눈을 멀게 하고 화(禍)를 부를 뿐이니라. 흐르도록 놔두어라, 집착을 버려라.”

“…….”

어린 육전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지긋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노인을 원망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말을 노래하듯이 늘어놓는 사부였다. 분한 마음에 그저 눈물만 찔끔거렸다.


어린 시절, 고향 무창의 금성무관에서 수일명검(守一明劍)를 배우던 때의 일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듯 생생하게 보였다. 군문에 들기 일 년 전쯤에 있었던 일이었다.


‘흐르도록 놔두어라. 집착을 버려라.’


그 시절 이후로는 한 번도 기억나지 않았던 사부의 말이 왜 하필 지금 떠오르는 것인가.

의문도 잠시, 곧 사부의 말을 곰곰이 음미했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떤 현기(玄機)가 깃들어 있는 말이었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집착이었다.

서문영영에 대한 집착의 감정과 그걸 부정하고 잊으려하는 이성의 갈등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와 욕망이 자기애(自己愛)와 서로 뒤엉키며 불러일으킨 최면인지도 몰랐다.


육전호가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자신의 본 모습 하나를 찾아 가는 사이, 어느새 육체의 흔들림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흐르던 땀도 메말라갔고 타는 듯이 검붉게 달아올랐던 얼굴도 희미한 홍조만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꿈을 꾸는 것처럼 무의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얼굴을 부드럽게 스치고 가는 바람을 느꼈다. 귀밑머리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의 마음이 이럴까. 질투와 욕망, 분노와 두려움 등 온갖 감정의 찌꺼기로 가득 차 혼란스럽던 마음이 텅 비어있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다 일어난 것처럼 허허로우면서도 충만한 기분이었다.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미쳐 날뛰던 진기는 언제부터인가 고요히 흐르는 강물처럼 독맥(督脈)을 타며 흐르고 있었다. 대추(大椎)을 지나 뇌호(腦戶)을 거치더니 백회(百會)를 가뿐히 타고 넘어 상성(上星)으로 치달았다. 절정의 경지로 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임독양맥(任督兩脈)이 어느새 연결되어 있었다. 완전한 소주천(小周天)이었다. 그동안 간절히 바라던 것 중에 하나였지만 기쁜 마음이 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 것처럼 덤덤한 기분일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변화가 일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의식중에 보았던 예전의 기억이 계기가 되었을 터였다.

금성무관의 사범이자 자신의 사부였던 그 노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십년 가까이 그 노인에게서 무공을 배웠지만 노인의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때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런저런 의문점이 보였다. 강호에 무수히 떠도는 전설처럼 그 노인도 숨어있는 고인이었을까.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 고향 땅을 밟게 되면 물어보리라 다짐하며 사부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하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었다.

‘초식에 대한 집착은 네 눈을 멀게 할 뿐이니라.’


머릿속에서 천천히 수일명검을 펼쳐보았다. 금성무관의 사부가 가르쳐주었고 자신이 십 년도 넘게 꾸준히 연습한, 지극히 화려한 초식 그대로였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무언가 알 수 없는 두터운 장막 같은 것이 느껴졌다. 두 번, 세 번을 계속해서 펼쳤다. 무희가 춤을 추듯이 화려하고 복잡하기만 할뿐 실전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해 오던 초식들이 조금은 달라보였다. 그 화려함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면 또 다른 모습의 초식이 등장할 것만 같았다.

어제까지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수일명검의 다른 면을 살짝 엿보게 되었지만 그 온전한 모습을 보려면 시간을 두고 정진을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이 들었다. 무공을 보는 자신의 시야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수일명검에 대한 고민을 뒤로 미루고, 이번에는 유운검법과 삼재검법의 초식들을 차례대로 그려보았다. 이번에도 역시 처음 펼쳤을 때는 몰랐지만 두 번 세 번 반복하자 달라진 점들이 보였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두 검법의 초식들이 예전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큰 틀에서는 바뀐 것이 없었지만 미세한 부분에서 그동안 자신이 익혀온 검법들과 조금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변화된 초식들이 오히려 자연스러웠으며,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변화한 모습이 어쩌면 그 검법들의 원래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거나 아니면, 자신의 신체와 내력에 걸맞게 변화한 것이라는 직감이 들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눈을 떠보니 주위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운기행공을 시작한 후로 적어도 두 시진 정도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천천히 도인체조로 몸을 풀었다. 근육과 관절 마디마디에서 서서히 열기가 퍼져 나와 온 몸을 천천히 달구기 시작했다.

검을 꺼내 들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결 정순해진 진기가 힘차게 사지백해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넓은 초원을 달리고 싶은 본능에 발을 구르며 흥분하는 야생마처럼 붉은 기운이 요동을 쳤다. 잠시 숨을 죽이다 기운을 풀어주었다.

“타앗!”


용트림하듯 하늘로 솟구치며 검을 뻗었다. 경쾌하게 밟아가는 걸음마다 힘이 실렸다. 온몸의 진기와 근육들이 의지에 따라 빠르고 섬세하게 반응했다. 찌르고 치며, 베고 휘두르는 검의 궤적은 명쾌했고 부드러웠다. 호랑이처럼 앞을 보며 짧고 강한 기합으로 기운을 북돋았다. 호흡 하나하나에 우주(宇宙)의 기운이 내 것이 되고, 나의 기운이 우주가 되었다. 검(劍)과 내가 하나가 되며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 거침없이 나아가며 우주를 가르고 시공(時空)을 갈랐다.


무려 반 시진이었다. 육전호는 무아경에 빠진 채 전력을 다해 삼재검과 유운검을 펼쳤다. 그리고 그대로 흙바닥에 주저앉았다. 몸속에는 단 한 점의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바탕 거센 광풍이 불고 지나간 것처럼, 숲 속의 작은 공간을 휘감아 돌던 낙엽과 풀잎과 흙먼지들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온 몸에서 비 오듯 땀이 흘러 흙바닥을 적시고 있었으나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 무엇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에서는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수많은 편린들이 맹렬히 지나가고 있었다. 말의 조각인지, 글의 조각인지 아니면 그림의 조각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히 그 가운데 무엇 하나를 붙잡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뿐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많은 편린들이 알 수 없는 공간 너머로 흩어지고 사라지더니 머릿속이 텅 비어갔다. 아쉬웠다. 하지만 왜 아쉬운지도 몰랐다. 멍한 눈빛을 한 채 주저앉아 있을 뿐이었다.

또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순간, 시커먼 비구름이 소리 없이 몰려오듯이 갑자기 허망함이 밀려왔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외떨어져 억겁의 세월을 보낸 것만 같았다.

어느새 양 볼을 타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감정의 범람을 막고 있던 마음속의 무엇 하나가 툭 무너지면서 소리 없는 울음은 곧 통곡으로 바뀌었다. 낯 선 곳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목을 놓아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동요하던 감정이 차츰 진정되자 육전호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숲 그늘에 검은 그림자가 서있었다.

무언가 큰 깨달음을 목전에 두고 놓친 것만 같은 기분에 빠져 정체불명의 인물이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것도 몰랐다. 육전호는 그런 자신을 크게 자책하며 재빨리 바닥에 뒹굴던 검을 잡아갔다.

“적은 아니니 성급하게 굴지마라.”

젊은 여인의 낮게 가라앉은 차가운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빈터로 걸어 나와 달빛 아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이었다. 목소리만큼이나 차가운 인상을 지닌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십대 중반 쯤 되었을까. 육전호와 비슷할 정도로 큰 키에 이목구비가 크고 선명했으며 검은 무복 차림에 허리에는 한 자루의 고색창연한 검이 매달려 있었다.

낯 선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당황한 건 육전호였다. 말문이 막혔다. 그런 육전호를 잠시 응시하던 여인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좋은 유운검이었다. 삼재검 역시.”

달빛을 받아 시퍼렇게 빛을 내는 검을 든 채 엉거주춤 서 있는 육전호는 그제서야 말문이 트였다.

“경비단의 육전호라고 합니다. 누구십니까?”

“종리연, 난 종리연이다. 무림맹에 객의 신분으로 머물고 있다.”

“…….”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지만 육전호의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더구나 처음 보는 육전호를 아랫사람인양 편안하게 대 하고 있었다. 당연히 불쾌해야 했지만 왠지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육전호가 다시 침묵에 빠지자 이번에는 종리연이 질문을 던졌다.

“무당의 제자인가?”

“네, 속가제자입니다.”

“…….”

“…….”

“엿보려고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곳은 내가 수련장소로 꾸며놓고 사용하는 곳. 오늘은 생각지 않게 네가 먼저 와 있었고.”

여전히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육전호는 종리연이 자신의 연무과정을 지켜본 것에 대해 미안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등장할 때부터 불편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제가 추한 모습을 보여 드린 것 같습니다.”

“아니다. 무당의 유운검법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만 너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맹렬하게 펼치는 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속가제자라니…….”

“무당과는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가끔 무당파의 장로들이 보타문을 방문하곤 해.”

“아! 남해 보타문. 그곳 출신이군요?”

“그래.”

육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강호의 지식이었지만 남해 보타문이 검의 명문이었다. 더구나 대대로 배출하는 검후는 무림에서도 우러러 볼 정도였다. 이번에 출행한 검후 역시 금가장주의 호위과정에서 대단한 무위를 선보인바 있었다.

“얼마 전에 금가장주를 보호하기 위해 검후가 왔다들었는데 일행인가요?”

“아니, 난 혼자 왔다.”

종리연의 알 듯 모를 듯 묘한 말을 듣고 있던 육전호는 어쩌면 그녀가 소문 속의 그 여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재차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은 일지 않았다. 우선은 오늘 자신에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렇군요.”

“…….”

“오늘은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육전호는 종리연에게 포권을 취해 예를 표하고는 몸을 돌렸다. 앞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이 숲을 감싸고 있었다.

“육전호라 했던가?”

막 공터를 벗어나던 육전호의 뒤로 종리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회는 또 오는 법, 너무 아쉬워할 것 없다.”

“무슨……?”

종리연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육전호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숲의 어둠 속에 잠긴 채 서 있는 육전호를 잠시 바라보던 종리연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맑고 투명하면서도 쓸쓸한 눈빛이었다.

“한산(寒山)으로 가는 길을 묻는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지막한 독백이 노래처럼 곡조를 타며 들려왔다.

“길은 따로 없다 여름에 얼음도 아니 녹고…… 해가 나도 안개로 덮이는 곳…….”

끊길 듯이 희미하게 이어지던 노래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종리연의 독백을 음미하던 육전호는 기이한 느낌에 빠져 들었다. 마치 종리연이 눈보라가 치는 어둡고 험한 산을 홀로 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부대끼며 양팔로 가슴을 감싸 안은 채 밤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는 종리연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던 종리연이 입을 열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손바닥에 놓인 한 줌 모래와 같은 것이다. 움켜잡으려 하면 할수록 흘러내리는…….”

종리연의 말을 듣는 순간, 육전호는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오늘 자신이 겪었던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종리연에게 다가갔다.

“제 마음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지만 스스로도 그게 뭔지 확신을 못하겠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나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을 따라왔지만 도가(道家)라 해서 그 깨달음이 특별히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길은 여러 갈래일지라도 산 위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은 매한가지인 것처럼…….”

“…….”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는 듯 종리연의 눈동자가 흐려지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어두운 하늘로 흩어졌다.

“오늘 네가 무아경 속에서 펼쳤던 유운검과 삼재검은 아직 네 것이라 할 수 없다. 그걸 네 것으로 온전히 만들어 간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정진을 한다면 얻고자 하는 깨달음은 다시 네게 기회를 줄 것이다.”

“기회가 또 온다는 의미가 그것이었군요.”

“그래.”

육전호의 질문에 짧게 대답을 한 종리연이 등을 돌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조언 감사합니다.”

가부좌를 트는 종리연의 모습을 바라보던 육전호는 목례를 하곤 몸을 돌렸다. 연공을 시작하려는 그녀를 붙잡고 자신이 궁금해 하는 것을 물어 볼 수는 없었다.

밤이슬이 내려앉은 수풀을 헤치며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음영잔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감사드립니다 +90 12.05.15 20,665 24 -
35 34 +94 12.05.13 31,334 358 8쪽
34 33 +94 12.05.11 25,933 351 10쪽
33 32 +107 12.05.09 26,618 309 11쪽
32 31 +138 12.05.07 26,948 317 18쪽
31 30 +69 12.05.05 25,005 260 9쪽
30 29 +73 12.04.30 27,057 240 12쪽
29 28 +45 12.04.28 24,927 215 15쪽
28 27 +45 12.04.27 26,130 241 10쪽
27 26 +67 12.04.26 24,857 243 16쪽
26 25 +50 12.04.25 25,061 223 19쪽
25 24 +46 12.04.24 25,590 231 15쪽
24 23 +92 12.04.22 27,181 275 21쪽
23 22 +44 12.04.21 25,805 212 15쪽
22 21 +52 12.04.20 25,643 241 17쪽
» 20 +80 12.04.19 27,087 247 23쪽
20 19 +41 12.04.18 24,506 204 16쪽
19 18 +33 12.04.16 25,021 200 12쪽
18 17 +33 12.04.15 25,386 189 14쪽
17 16 +33 12.04.14 26,493 217 16쪽
16 15 +37 12.04.13 27,134 223 19쪽
15 14 +29 12.04.12 25,925 208 13쪽
14 13 +29 12.04.11 25,853 205 14쪽
13 12 +38 12.04.10 26,610 195 16쪽
12 11 +23 12.04.09 26,238 184 11쪽
11 10 +17 12.04.09 26,727 174 14쪽
10 9 +24 12.04.08 27,555 178 15쪽
9 8 +18 12.04.08 27,534 176 11쪽
8 7 +25 12.04.07 29,086 180 16쪽
7 6 +15 12.04.07 31,162 17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