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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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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08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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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DUMMY

오가는 취객들로 흥청망청하던 거리가 한결 고요해지고 거리를 밝게 비추던 청등 홍등도 하나 둘 그 빛을 잃어가던 새벽 무렵.

근방에서 호화롭기로 소문난 소홍객점 삼 층에는 잠을 못 이룬 채 고민에 빠져있는 사내가 있었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를 어깨 위로 길게 늘어트린 채, 분이라도 바른 듯 창백한 얼굴을 한 오십대 초반의 강시 같은 사내가 침상 위에 고요히 앉아 있었다. 소면도귀 양만백이었다.


오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험악한 지경에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충실히 익힌 무공은 구대문파의 장로급만 아니라면 그 누구라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기에 거칠 것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그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이름도 모르는 어린놈 하나 때문에 이 지경이었다.

벌써 한 달가량을 숨어 다녔다.

이제 곧 밝아 올 아침에 항주로 가는 배를 타면 이 어려운 상황은 끝나겠지만 이미 꺾일 대로 꺾인 자존심은 회복할 길이 없어 보였다.


오십이 넘는 나이에도 피곤한 줄 모르고 천하를 주유하던 양만백이 팽가의 그 어린놈을 만난 것은 한 달 전, 하남성(河南省) 신양(信陽)의 단골로 가던 반점이었다.

구석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하던 어린놈의 모습은 한눈에 보기에도 팽가의 자식임을 알 수 있었다. 소매에 하얀 천을 덧댄 촌스런 검은색 무복과 허리에 찬 유엽도(柳葉刀), 굵직한 골격과 커다란 손. 거기에다 이십여 년 전, 자신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었던 단혼일도(斷魂一刀) 팽막여의 젊었을 적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얼굴 하며.

그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당시 입었던 옆구리와 등의 상처에서 통렬한 아픔이 느껴졌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소면도귀라는 별호가 무색하리만큼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자신이 누구인가. 오랜 세월을 무림에서 잔뼈가 굵어 왔다.

식사를 마치고 반점을 나서는 놈의 뒤를 침착하게 밟았다. 그리고는 인적이 뜸한 관도로 들어서는 놈에게 다가가 시비를 걸었다. 때마침 등에 족자 같은 것을 넣어 보관하는 통을 매고 있기에 도둑맞은 그림을 찾고 있으니 그 통 좀 열어 보자고 했다. 누가 명문세가의 자식 아니랄까봐 대뜸 자신을 무례하다고 나무라며 거절을 했다. 면도(緬刀)를 꺼내 들자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짐작을 한 모양이다. 유엽도를 휘두르며 아버지가 어쩌고저쩌고 소리치는 것이 그놈, 팽막여의 아들이었다.

팽막여가 시전하던 무시무시한 혼원벽력도(混元霹靂刀)는 자신에게 지금껏 잊지 못할 큰 상처를 남겼지만 그 아들의 경우는 달랐다. 겨우 삼십여 초를 교환했을까. 보법이 흐트러지는 놈을 쫓아 통쾌하게 목을 날려버렸다. 등에 매고 있던 통은 전리품이었다.

낄낄거리며 그 길로 신양을 벗어나 황천(黃川)으로 내달렸다. 홍등가에 숨어 어린 기생년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며칠 동안 분위기를 살폈다. 비렁뱅이 몇 놈이 기웃거렸다. 척 보면 개방 제자인 줄 온 천하가 다 아는데 저희들만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또다시 며칠 동안 새벽이슬을 맞아가며 안휘성 태화현(太和縣)으로 숨어들었지만 아무래도 이상했다. 자신을 강호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게 했던 본능적인 감각이 위험을 알리고 있었다.

실제로도 자신의 뒤를 밟아오는 것은 개방의 거지들보다는 무림맹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추적자들이었다. 어쩌면 무림맹에서 비밀리에 부린다는 살수(殺手)들을 보내기 위한 척후(斥候)일 가능성이 컸다. 직접 본 후에 판단하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하오문을 통해 패천문의 철혈대주(鐵血隊主) 종시백에게 도움을 청했다.

종시백은 패천문의 일대제자로 젊은 시절 자신과 함께 강호를 주유한 적이 있는 죽마고우였다.

십여 년 전부터 급속도로 세를 불리고 있던 패천문으로 들어오라는 권유를 종종 받았지만 거절해오던 터였다. 구름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은 무림인의 영원한 낭만 아니겠는가. 하지만 무림맹이 자신의 뒤를 쫓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며칠을 숨어 지낸 끝에 구원을 받았다. 종시백이 자신의 휘하 고수 두 명을 보낸 것이었다. 관(官)과 민간인을 이용한 안전한 이동 방법과 경로에 대한 조언까지도 함께.

그렇게 며칠을 불안에 떨며 이곳 수성현까지 왔다. 덕분에 한결 마음이 놓이자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왜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쫓는 것일까. 무림맹의 주요 지휘부를 구성하는 전통의 구대문파도, 육대세가도 아닌 팽가의 자식 하나 죽은 게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그리 큰일이 아닐 터였다. 또한, 객관적으로 보자면 자신은 무림을 뒤흔들만한 초절정의 고수도 아니었고, 무림맹과 경쟁관계에 있는 구주사도천이나 삼대 마교 소속도 아니었다. 그런 수준의 무인을 쫓기 위해 무림맹이 쏟고 있는 인력과 시간은 언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돈이 썩어가도록 남아돌지나 않는다면.

이런저런 고민에 바쁘게 돌아가던 양만백의 뇌리에 순간 전리품이 떠올랐다. 그동안 쫓겨 다니느라 무엇이 들었는지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었다.

서둘러 탁자로 다가가 통의 마개를 열고 들어 있는 물건을 꺼내보았다.

한 폭의 산수화였다.

방 안에 있던 패천문의 무사가 다가와 촛불을 켜려는 것을 막았다. 중추절(仲秋節) 무렵의 훤한 달빛이 없더라도 그림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지나간 세월을 말해주는 듯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기기묘묘한 산의 일부분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글이나 그림에는 젬병인 자신이 무얼 알겠냐마는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솜씨의 그림이었다. 순간 뇌리를 스치는 수많은 전설들.

‘이…… 이게……어쩌면 보…… 보도(寶圖)?’

양만백은 그때서야 머릿속이 환해졌다. 무림맹이 자신을 쫓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그래…… 아마도 엄청난 보물이나 무공이 숨겨져 있는 장소를 그린 지도의 일부분일 것이다. 그래, 그래서 그랬던 것이야.’

양만백은 터질듯 한 광소를 겨우 참았다. 하지만, 가슴 속에선 계속해서 희열이 끓어올랐다. 거지발싸개 같던 자신의 인생이 말년에 이르러 활짝 피게 된 것이었다.

‘그래…… 역시 인생은 한 방이야. 음화하하하…… 어라, 이놈들이……?’

패천문의 무사들도 그림에서 뭔가 범상치 않은 것을 느낀 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양만백은 정색을 하며 서둘러 그림을 말아 통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팽가의 자식이 그랬던 것처럼 등에 둘러메었다. 어차피 잠을 자기는 글렀다. 벌써 어디선가 부지런한 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시진 정도만 기다리면 첫 배가 출항할 시간이었다.

침상 위에 앉아 들뜬 마음을 차분히 다스렸다. 한 때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던 팽가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그런데 왜 팽가의 그 어린놈 혼자였을까. 이리도 귀한 것을 왜 그토록 허술하게 운반했을까. 허허실실의 묘를 쓰던 중이었을까. 새로운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스슥!

누군가 삼 층 난간을 타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기척을 느낀 패천문의 무사 둘이 재빨리 도를 들고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양만백이 잠시 기운을 끌어올려 바깥 동정을 살피다가 손을 들어 무사들을 진정시켰다.

자신 정도의 고수라면 저 정도의 기척만으로도 상대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는 기척도 기척이려니와 무림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호흡이 거칠었다. 아마 객점에 묵고 있는 상인들의 돈지갑을 노리는 좀도둑인 모양이었다.

그 좀도둑은 난간을 타고 살금살금 다가오더니 양만백이 묵고 있는 방의 바로 옆방의 창문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안에서 잠겨 있는 듯 열리지 않자 포기하고 살금살금 양만백의 방 창문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패천문의 무사가 긴장한 듯 양만백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 거렸다.

[어찌할까요?]

[좀도둑이다. 이 방도 창문이 잠겨 있으니 곧 옆방으로 가겠지. 괜히 소란피울 필요 없다.]

비록 좀도둑에 불과했지만 소란을 피워 관(官)에서 알게 되면 여러모로 귀찮아진다.

육 년 전, 북방 이족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 무림은 황제의 권위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명운을 걸고 이족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끼리 아옹다옹 거리며 죽고 죽이는 무림인들은 현 황제의 눈엣가시였다. 백주에 민가가 밀집한 시전에서 분쟁을 벌였던 몇몇 무림인들이 관군의 집요한 추적을 받아 끝내 죄 값을 치른 후로는 거의 모든 무림인들이 가급적이면 민가근처에서의 분쟁을 삼가고 있었다.


양만백의 잠겨있는 방 창문을 몇 번 밀어보던 좀도둑이 옆방으로 이동하는 기척이 들렸다. 한껏 올라가던 긴장감이 조금 떨어졌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퍽!

패액!

창문을 뚫고 방 안으로 하얀 뭉치가 날아들자 패천문의 무사가 본능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번개가 치듯 번쩍이는 도적(刀迹)이 남은 허공에 하얀 가루가 분분히 휘날렸다.

‘헉! 군자산(君子散)이다!’

양만백은 호위무사들에게 경고를 하고는 급히 호흡을 멈췄다. 손엔 어느새 자신의 독문병기인 면도가 들려있었다.

늘 협의를 외치는 무림맹이 설마 이런 치졸한 방법을 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군자산이라니. 자신을 객점 밖으로 끌어내기 위한 수작이었다. 하지만 잘못 짚었다. 자신은 절대 객점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일다경 정도만 호흡을 끊으면 군자산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자신이나 패천문의 호위무사들에게 그 정도 호흡을 참아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 좁은 방안에서는 자신들이 유리했다. 억지로 밀고 들어온다면 어느 정도만 시간을 끌어도 관군이 출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계산을 하고 있던 차에 또다시 무언가가 창문을 뚫고 방안으로 날아들었다.

[건들지 마!]

군자산이 들어 있던 종이뭉치를 베었던 패천문의 무사는 이번에도 반사적으로 발출하려던 도를 힘겹게 멈추었다.

쨍그랑!

날아든 건 조그만 자기병이었다. 그 자기병이 방바닥에 부딪혀 깨지면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걸 본 양만백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번엔 만독곡(萬毒谷)이 자랑하는 흑혈산(黑血酸)이었다. 피부에 닿으면 한 줌의 검은 핏물로 녹아내리기에 여러 독문의 무사들도 경원시하는 맹독이었다.

‘설마 무림맹이 흑혈산을……?’

만독곡은 구주사도천의 아홉 개 주축세력 중 한 곳이었기에 양만백은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검은 연기가 빠른 속도로 좁은 방안을 채워가기 시작하자 패천문의 호위무사들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방의 구석으로 몸을 붙이며 양만백을 다급하게 바라보았다. 빨리 결단을 내리라는 듯이.

잠시 공포와 의구심으로 멍해 있던 양만백의 눈가에 진득한 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

양만백의 침중한 전음성과 거의 동시에 세 인영이 창문을 뚫고 밖으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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