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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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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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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25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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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DUMMY

여기저기 검은 연기를 뿜으며 맹렬히 타오르고 있는 불길 주위로 수십 구의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하나 살펴 본 원자춘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 와중에도 오단서와 계응걸은 추대호의 용모파기를 들고 몇몇 부상자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겨우 이 각 정도의 시간이었는데…….”

소응박이 얼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항의 흔적은 많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노새와 낙타 몇 마리, 그리고 먹잇감을 찾은 독수리들이 주위를 서성거렸다. 어느덧 태양이 높이 솟아올라 낯이 가려운 햇빛을 쏟아냈으나 모래폭풍은 여전했다.


“혈사대의 뒤를 쫓아야 해!”

금방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중상자를 끌어안고 질문을 퍼부어대던 오단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추대호는 피습 도중에 혈사대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났다고 한다. 혈사대가 자신들의 본거지인 사막이 아니라 기련산맥으로 향한 건 추대호를 추격하고 있기 때문이야.”

“혈사대가 쫓고 있다면 추대호는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굳이 우리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칫 혈사대와 맞붙었다간 우리도 살아남기 힘듭니다.”

계응걸이 현실적인 방안을 얘기하며 만류하자 오단서가 당황한 듯 보였다.

“반드시 그 놈의 죽음을 이 두 눈으로 확인해야 돼.”

“조원들이 많이 지쳐 있습니다. 혈사대가 추대호를 죽인다면 그 시신을 곱게 묻어주진 않을 겁니다. 혈사대가 떠난 뒤에 시신을 확인해도 늦지 않습니다.”

“으음…….”

거듭된 계응걸의 얘기에 오단서가 침음을 흘렸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추대호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그것보다도 추대호가 지니고 있는 몇 가지 물건을 회수해야 하네. 반드시.”

“제가 받은 명령서에는 추대호를 추포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참하라 했지 물건을 회수하라는 내용은 없었습니다.”

애초의 명령과는 다른 얘기가 나오자 계응걸의 안색이 붉어지며 언성이 높아졌다.

“이보게 계조장, 이번 임무의 책임자는 나, 오단서야. 내 말대로 따르게. 혈사대가 먼저 그 물건을 취한다면 이번 임무는 실패야.”

“저는 조원들을 책임지고 있는 조장입니다. 또한 제가 받은 명령은 오부대주가 말하는 것과 다릅니다.”

반발하는 계응걸을 달래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오단서의 안색이 굳어지자 양 옆에 서 있던 호위무사들도 덩달아 안색을 굳혔다.

“계조장, 다시 한 번 말하겠네. 내 말대로 하게. 따르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어.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즉시 규율대로 자네와 조원들을 처리하겠네.”

최후의 통첩 같은 것이었다. 무림맹의 규율상 명령권자에 대한 불복은 보통 한 팔을 자르거나 심하면 참수형이었다. 조원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잘못된 명령이라 충분히 항변할 수 있겠지만 상대가 오단서였다. 구주사도천과 세력싸움이 치열한 이 시기에 무림맹의 몇 없는 큰 돈줄을 쥐고 있는 영호장의 오단서였다.

조원들 사이에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몇몇은 살기를 띤 눈빛을 하고 있었다. 오단서는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애초의 명령과는 다르게 사사로이 욕심을 채우려 하고 있었다.

“오부대주. 그 물건이 대체 뭐기에 그러쇼?”

조원들 사이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원자춘이 나섰다.

“그건 네놈이 알 거 없다.”

“뭔지 알아야 회수를 하던지 할 거 아니요?”

“크흠…… 그건…… 몇 권의 책이다.”

“호오…… 몇 권의 책이라…….”

주저하던 오단서의 얘기를 듣자 원자춘의 눈이 번들거렸다.

“조장,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소. 이토록 높으신 분께서 우리를 궁지로 내모는 데야 별 수 있겠소? 겨우 은자 몇 푼 받는 처지에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쩌겠소?”

“젠장…….”

싫지만 따라야 한다는 원자춘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계응걸은 고개를 숙였다.

“이보게, 계조장. 이번 임무가 완료되면 내 자네들에게 섭섭지 않게 보답하겠네. 어떤가?”

“섭섭지 않다는 게 얼마를 얘기하는 거요?”

원자춘의 질문에 오단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한 사람당 은자 서른 냥 정도면 되겠나?”

오단서의 갑작스런 제안에 몇몇 조원들의 귀가 솔깃해졌다. 은자 서른 냥은 조원들의 여섯 달 치 봉급에 해당하는 많은 금액이었다. 오단서와 계응걸의 사이에서 눈치를 살피던 원자춘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영호장은 강호에서도 재력이 튼튼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잖소. 은자 오십 냥씩, 어떻소?”

“하하하, 좋다. 그렇게 하겠다.”

원자춘의 제안에 오단서가 지체 없이 승낙하자 오히려 원자춘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입을 벌린 채 멀뚱멀뚱한 눈길로 오단서를 쳐다보다 계응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돈이라면 제 자식도 팔아먹을 놈…….”

계응걸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설령 오단서의 은자 제안이 없었다하더라도 오단서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은자 오십 냥이라면 목숨도 걸어볼 만한 일이었다. 물론 살아남아야 하겠지만. 시시각각 변해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조원들이 흥분했는지 분위기가 술렁거렸다.


아스라이 보이는 기련산맥의 높은 봉우리들은 모두 눈으로 덮여 있었다. 혈사대의 흔적은 하서주랑을 벗어나 기련산맥 아래 넓게 펼쳐진 초원지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가자는 계응걸의 목소리가 들리자 허기져 있던 조원들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요기꺼리라고는 지겨운 육포와 말린 떡 몇 조각이었지만 한 끼 식사로는 충분했다.


“오단서가 말한 책은 아마도 검각의 비급일 것이다.”

봉천우의 말에 육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영호장이 예전부터 많은 돈을 풀어 무공비급을 수집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검각의 비급을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영호장의 재력이라면 사들인 무공도 상당한 것일 텐데 왜 이렇게까지 하면서 검각의 무공을 얻으려는 걸까요. 무력이 필요하다면 낭인을 고용해도 될 텐데…….”

육전호의 말에 봉천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공을 산다고 해도 절정 수준의 무공은 얻기가 쉽지 않다는 거지. 아마도 영호장은 무림의 세가를 꿈꾸고 있는 것 같아. 남궁세가나 혁련세가처럼 무력과 금력을 갖춘. 영호장이 상계에서 벗어나 세가로 발돋움 하려면 가장 필요한 게 무공이야. 자신들이 직접 키운 무인과 돈을 주고 고용한 무인은 그 충성심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있지.”

“그렇다하더라도 영호장과 검각은 예전부터 서로 협력하는 관계였다고 들었는데…….”

“그런 가까운 관계였으니 검각의 무공을 잘 알았을 테고…… 그게 무림의 생리야.”

봉천우의 말을 듣던 육전호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구주사도천과의 일전을 준비하던 남궁세가의 상황도 걱정이 되었다. 무림에서 한 문파의 흥망성쇠는 한순간이었다.


“그만 쉬고 출발하자.”

계응걸의 목소리가 들리자 초원지대의 구릉에 흩어져 있던 조원들이 모여들었다. 멀리 초원지대의 끝에 검은 숲이 시작되고 있었고 혈사대의 흔적은 그곳으로 이어져 있었다.

한참을 달려 숲으로 들어섰지만 곧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커다란 암반지대가 나타났고 말 한 마리가 탈진한 채 죽어 있었다. 거기서부터 수많은 말발굽 자국이 네 갈래로 나 있었다. 정황으로 보아 죽어 있는 말은 추대호가 빼앗아 탔던 것이 분명했다. 오단서와 계응걸이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모여 있는 조원들에게 다가왔다.

“아무래도 여기서부터는 몇 명씩 흩어져 가야 추적해야 할 것 같다. 혈사대가 개개인의 무공은 낮으나 집단전술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추대호나 회수할 물건을 발견 하더라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은밀하게 추적만 해라. 내일 이 시간에 여기에서 다시 만나 서로 수집한 정보를 취합해 대응하기로 한다. 신호용 폭죽이나 호각은 위급한 순간이 아니면 절대 사용하지 마라.”

계응걸의 말이 끝난 뒤 인원을 넷으로 나눴다. 육전호는 원자춘, 소응박과 함께 한 갈래의 흔적을 쫓아 발걸음을 옮겼다. 전나무 숲을 가로질러 이십여 기의 말이 이동한 흔적이었다.

“제기랄…… 아무리 영호장이라지만 은자 오십 냥을 망설임도 없이 덜컥 승낙하다니. 쓸데없이 돈지랄 떨다 죽게 생겼어.”

원자춘은 세 명 밖에 없다는 것이 불안했는지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위군 시절부터 추적에는 경험이 풍부했던 육전호가 선두에 섰다. 혈사대의 말발굽 자국은 너무 뚜렷해서 놓칠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추대호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추대호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습니다. 이쪽으로 지나간 혈사대가 무엇을 보고 추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육전호의 말에 원자춘이 사방을 주위 깊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

“추대호는 검각의 총관을 지낸 놈이야. 무공은 검각의 총관이라 하기엔 부족하지만 술수에 능한 편이지. 다른 곳으로 간 혈사대도 추대호의 흔적을 보면서 쫓는 건 아니야. 단지, 쫓기는 자의 심리를 예측해서 감으로 쫓는 거지.”

육전호도 땅바닥에 있는 흔적들을 살피던 시선을 거두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세 곳과는 달리 자신들이 온 이곳은 말을 타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지형이 완만한 숲이었다.

“내가 추대호라면 말을 타고 쫓아 올 수 없는 험한 지형으로 도망가겠지만 혈사대도 그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그러면 그걸 역이용해서 추대호가 자신에게 불리한 지형으로 간다면?”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추대호에겐 그런 지형입니다.”

육전호의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원자춘이 혼자 낄낄 거렸다.


사막을 매섭게 몰아쳐 기련산맥을 타고 넘던 폭풍이 잦아들었다. 운무에 휩싸인 태양이 중천 언저리를 뿌옇게 밝히고 있었다. 혈사대의 흔적을 쫓아 앞서가던 육전호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야?”

주위를 경계하며 원자춘이 속삭였다.

“이 지점에서 혈사대가 뭔가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육전호의 시선을 따라 원자춘의 시선이 천천히 이동했다. 땅바닥에 난 자국들의 형태와 깊이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이동하던 혈사대는 이지점에서 한데 모여 있다가 다시 빠르게 흩어졌다.

“내 짐작이 맞았어. 추대호의 꼬리가 잡혔어.”

육전호와 일행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가며 빠르게 전나무 숲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각 정도 달렸을까. 육전호의 귓가에 미세한 소리가 잡혔다. 수신호로 원자춘과 소응박을 부른 후 다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청력을 집중했다. 여러 사람의 목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다시 조심스럽게 백여 장을 전진하자 어두운 전나무 숲 한가운데 희미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육전호는 엎드린 채 수풀을 헤치며 이십여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을 했다. 숲이 울창한 곳이어서 대낮임에도 초저녁처럼 어두웠지만 장내 상황은 어렵지 않게 알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전나무를 등지고 한 중년사내가 검을 쥔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었는데 허벅지와 복부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월도(月刀)를 든 채 긴장한 표정으로 포위하고 있는 십여 명의 사내와 활을 든 사내 네 명,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들을 돌보고 있는 사내가 한 명이었다. 이미 몇 차례 격전을 치룬 듯, 중년사내의 근처 땅바닥에는 네댓 구의 시체와 부러진 화살들이 널려 있었다.

“이봐, 그 상자에 어떤 보물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순순히 내어 놓는다면 너를 살려 보내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월도를 든 채 격전지에서 한걸음 물러 선 사내가 중년사내를 향해 기세 좋게 고함을 쳤다. 하지만 긴장했는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였다.

“강호의 무인답게 깨끗하게 죽음을 맞는 게 너희 같은 도적들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 보다는 나을 터…….”

기침을 하는 중년사내의 입가에서 선혈이 흘렀으나 목소리는 낮고도 침착했다. 봇짐과 함께 등에 매고 있던 조그맣고 검은 상자를 땅바닥에 내려놨다.

“믿었던 놈들에게 배신을 당한 채 억울하게 죽어간 백 오십 원혼들이 여기 들어 있다. 가져갈 테면 가져가 보아라.”

말을 마친 사내의 눈빛이 비장했다. 비틀거리던 몸을 바로 세우더니 검을 잡은 손을 올려 기수식을 취했다.

지켜보던 혈사대의 지휘자가 한 손을 들자 월도를 든 사내들이 천천히 중년사내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 있던 활을 든 사내들도 시위를 당겼다. 불과 열 장이 못되는 거리에서 쏜 화살을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티딩!

시위를 놓자 네 대의 화살이 중년사내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퍼버벅!

화살은 중년사내가 등지고 서 있던 전나무에 틀어박혔다. 어느새 중년사내는 바닥을 굴러 월도를 든 사내들의 하체를 쓸어 가고 있었다.

“으아악!”

한 사내가 반쯤 잘려나간 한쪽 다리를 부여잡고 나뒹굴자 다른 혈사대원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사이 또다시 중년사내를 향해 화살이 날아들었다.

“크흑!”

중년사내의 검이 부챗살처럼 주위를 쓸어가자 몇 대의 화살이 맥없이 떨어졌다. 하지만 사내의 몸이 왼쪽으로 크게 틀어지며 휘청거렸다. 어느새 한 대의 화살이 왼쪽 어깨와 가슴 사이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비틀거리며 물러나 다시 전나무에 기대 선 중년사내를 향해 혈사대의 지휘자가 소리를 쳤다.

“이봐, 이젠 그만 포기해. 그게 시신이나마 온전하게 보전하는 길이야!”



“어떻게 할까요?”

육전호의 다급한 속삭임에 장내를 살피던 원자춘이 고개를 저었다. 상대의 무위가 낮다 하더라도 그 수가 이십 명에 가까웠다. 더구나 궁수들까지 섞여 있었다.

“군자산이라도 풀면 월도를 든 놈들은 어떻게 해보겠는데 궁수들이 꺼림칙해.”

“궁수들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육전호가 왼쪽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에 두른 가죽에는 거무튀튀한 비수가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지켜보던 원자춘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게 왜 너한테 있냐? 쓸 줄은 알고?”

“조잡하나마 한 수 배워둔 게 있습니다.”

육전호의 대답에 떨떠름한 표정을 하던 원자춘이 옆자리에 엎드려 있던 소응박에게 속닥거렸다.

바람의 방향을 살피던 소응박이 자신의 봇짐에서 기름을 먹인 종이봉지를 꺼낸 뒤 어디론가 조용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육전호가 궁수와의 일전 계획을 머릿속에서 그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응박이 되돌아왔다.

“그럼 좀 더 가까이 접근해서 기다리자.”

원자춘의 말에 따라 육전호는 숨을 죽인 채 혈사대원들이 위치한 곳으로 조용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육전호와 일행이 모종의 준비를 하는 사이, 중년사내의 몰골은 이미 저승을 넘나들고 있었다. 또 다시 두어 대의 화살이 사내의 어깨와 가슴에 꽂혀 있었고 화살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는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피가 턱과 콧잔등에서 낙숫물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졸린 듯 두 눈을 천천히 껌벅거리는 중년사내를 살피던 혈사대의 지휘자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변방에서나 설치고 다니는 자신들과는 다른 수준의 무공을 갖춘 사내였다. 최소한 일류고수이거나 절정을 바라보는 경지였다. 때문에 대원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자신의 지휘 하에 이십여 명을 거느리고 추적을 시작했으나 지금 제대로 서 있는 수하는 겨우 십여 명. 잔혹하기로 소문난 혈사대주의 노여움을 피하려면 더 이상의 희생은 곤란했다.

상대는 이미 기력을 상실한 듯 보였지만 저 정도의 무인이라면 숨겨놓은 비장의 수가 있을 터였다. 섣불리 접근하기 보다는 원거리에서 활로 공격하면서 상대가 쓰러지기를 기다려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자 안에 들어있을 물건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지켜야 할 보물이 대체 무엇이기에.

화살을 먹여 시위를 당기던 궁수들을 손을 들어 대기시켰다.

“내가 혈사대에서 칼밥을 먹은 지 어언 이십여 년이 흘렀지만 너 같은 놈은 처음이다. 금은보화가 제아무리 귀하다한들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겠느냐? 어리석은 놈.”

혈사대 지휘자의 혀를 차는 소리가 긴장감이 흐르던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래…… 어리석은 놈이지…… 도적인줄도 모르고 내미는 손을 덜컥 잡아 사문이 몰락했으니 충분히 어리석은 놈이지…… 도적놈들에게 쫓기며 천신만고 끝에 중원을 벗어났으나 돈황을…… 돈황을 눈앞에 두고 또 다른 도적을 만났으니……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

힘겹게 쿨럭거리는 추대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거친 턱수염을 타고 흘러 천천히 앞섬을 적셨다.

“사문이 몰락했다고? 네놈의 사문이 무엇이더냐?”

혈사대의 지휘자가 호기심이 동한 표정으로 물었으나 추대호는 말이 없었다. 두 눈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그때 한 혈사대원이 지휘자에게 다가가 속닥거렸다.

“그래? 그 소문은 나도 들었다.”

수하의 말을 전해들은 혈사대의 지휘자는 눈앞에 있는 중년사내를 살펴보았다.

일반적인 상인의 복장을 한 채 죽어가고 있는 눈앞의 사내가 형산파나 검각의 인물일 수도 있었다. 중원과는 거리가 먼 변방이어서 강호의 소식이 늦기는 했으나 형산파와 검각의 멸문은 크나큰 사건이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잠시 중년사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혈사대 지휘자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했다.

‘돈황이라면 검각의 검귀들이 강호수업을 행하던 낭인시장이 있는 곳!’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앞의 중년사내가 검각의 문도일 것 같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이 사내는 몰락한 검각의 보물이나 비급을 갖고서 돈황으로 가는 길이었으리라. 어쩌면 돈황의 낭인시장에는 아직 강호수업중인 검귀들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뒷골이 서늘해졌다.

“더 이상 지체할 필요 없다. 처리해라!”

급히 손을 들었으나 시위를 놓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뭣들 하느냐. 어서…….”

궁수들이 당겼던 시위를 풀며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위태롭게 서있던 중년사내가 천천히 무너지더니 차가운 대지 위에 무릎을 꿇었다. 입가에 달려있던 피거품이 꺼지며 힘겹게 눈꺼풀이 닫혔다. 목이 부러진 것처럼 머리가 가슴을 향해 수그러들었다.

“그래도 확실히 정리하는 것이 좋겠지.”

지휘자가 고갯짓을 하자 월도를 든 한 사내가 나섰다. 무릎을 꿇어앉은 채 죽은 중년사내의 목을 치려는 것이었다. 초승달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진 월도를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

“넌 또 왜 그러느냐?”

금방이라도 내리칠 것 같던 사내가 월도를 치켜든 채 두 눈을 멀뚱거리자 불같은 짜증이 일어났다.

“그것이…… 진기가…….”

“진기가 뭐 어쨌는데?”

화가 치민 혈사대의 지휘자가 월도를 든 사내를 다그치는 순간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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