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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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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4.30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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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9

DUMMY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군영으로 끌려와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압수당한 후 뇌옥에 갇히자 원자춘이 주절주절 탄식을 쏟아냈다. 하지만 일행은 모두 아무런 말도 없었다. 한밤중에 혈사대의 습격을 받고 관군에 의해 옥에 갇히기까지의 과정 모두가 꿈만 같았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지…… 이곳이 변방이어서 무림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다고는 하나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영호장의 일이라면 기꺼이 나서줄 상계의 인사들이 있을 터이니.”

개처럼 끌려와서야 겨우 제정신을 찾은 오단서가 맥이 풀린 목소리로 장담을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상이 얼마나 무림인들을 싫어하는지는 천하가 알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자의적으로 흑도와 백도, 마도로 나누어 서로를 구별하며 멸시했지만, 천자에게는 무림인 모두가 나라의 도적일 뿐이었다. 때문에 무림인들이 민가에서 소란을 피우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등 피해를 끼치면 가차 없이 처벌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무림맹과 구주사도천이 중원 곳곳에서 치열하게 세력싸움을 하면서도 관의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여러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진 뇌옥은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서인지 지저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용변을 보는 작은 통은 이미 오물이 흘러넘치고 있었으며 바닥은 축축하고 강한 지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앉아 있기에도 마땅치 않은 곳이어서 오단서와 호위무사를 비롯하여 몇몇 조원은 뇌옥의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비교적 깨끗한 곳을 골라 섭평위를 누인 후 상태를 살피던 봉천우가 인상을 찌푸렸다.

“의식을 잃었어. 빨리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위험해.”

비 오듯이 땀을 흘리며 연신 가냘픈 신음을 뱉어내고 있는 섭평위의 상태는 누가 봐도 위급지경이었다.

“이보시오, 사람이 죽어가고 있소. 도와주시오!”

답답했는지 계응걸이 뇌옥의 창살을 붙잡고 흔들며 소리를 쳤다. 때마침 뇌옥의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군관이 수십 명의 병사들을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끌고 가라!”

군관의 명에 따라 육전호 일행이 갇힌 뇌옥 앞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문을 열고 들어와 한 사람씩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여기 의식불명의 환자가 있소. 도와주시오.”

거듭된 계응걸의 요청에 군관이 섭평위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차피 하루만 지나면 네놈들은 모두 참수될 터인데 이제 치료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군관이 호통을 치자 조원들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병사가 주둔하고 있는 병영의 뇌옥이었지만 조원들은 무림인이었다. 그것도 무림맹의 엄격한 과정을 통해 선발된 일급무사들이었다. 탈출은 불가능하겠지만 죽음을 각오한다면 눈앞의 군사들은 물론 수백 명의 목숨을 더 앗아갈 능력이 충분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살기가 광풍처럼 몰아치자 군관과 병사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이…… 이놈들이…… 사, 사…… 사건의 내막…… 조사…… 며, 명이다…….”

군관이 덜덜 떨며 겨우 말을 마치자 계응걸이 손을 들어 조원들을 진정시켰다.

“국법이 엄하다고는 하나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다면 걸어서 이곳을 나갈 수 있을 것이니 우선은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좋겠습니다.”

계응걸의 말에 조원들의 살기가 조금 누그러졌다.

뒤늦은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군관이 악을 썼다.

“뭣들 하느냐! 어서 끌고 가라!”


의식불명의 섭평위만을 남겨두고 뇌옥을 나온 일행 앞에는 길게 늘어선 군막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새 하늘 높이 솟아오른 태양이 거친 모래폭풍 속에서도 따가운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병사들이 이끄는 대로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각기 다른 군막으로 들어갔다.

육전호가 끌려 들어간 곳에는 입구 좌우에 병사들이 서 있고 막사 한가운데에는 군관 하나가 탁자를 두고 앉아 있었다.

군관을 보고 마주 앉은 육전호는 군관이 묻는 대로 이름과 출생지, 나이, 가족, 경력, 직업을 말했다. 육전호의 정위군 경력에 대해 조금 관심을 보이던 군관은 곧 소월객잔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육전호는 사건의 경위를 무엇 하나 더하거나 빼지 않고 진술했다. 군관은 이를 받아 적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미 이와 같은 일을 여러 차례 겪었는지 권태로운 모습이었다.

한 시진 가까이 조사를 마치고 뇌옥으로 돌아왔다. 봉천우가 섭평위의 명문혈로 진기를 불어 넣는 것을 계응걸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육전호의 물음에 계응걸이 한 숨을 쉬었다.

“모르겠어. 이곳 위소(衛所)의 지휘사(指揮使)가 무척이나 까다롭고 엄하다고 하는 데…….”

“만약에 정말 죄를 물어 우리를 참수하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땐…….”

거듭된 육전호의 질문에 계응걸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앉아서 그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도망칠 방도 또한 없어 보였다. 창술이나 궁술 같은 단순한 외공 한두 가지와 집단전술 정도만 익히고 있는 병사들이었지만 그런 병사들이 이곳 영등에만 오천 명이 넘었다. 그리고 바로 옆의 오초령에도 또 하나의 위소가 있었다. 하서주랑이 군사상의 요충지이다 보니 난주로 이어지는 곳곳에 위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새가 되어 날아가지 않고서는 이곳을 살아 벗어나기가 힘든 상황이었다. 설령 무사히 빠져 나간다 해도 관의 추적이 시작되면 무림맹도 대놓고 자신들을 도와주지는 못할 터였다. 막막한 심정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일행이 한 사람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두 시진이 지나자 원자춘과 오단서를 제외한 모든 일행이 뇌옥으로 돌아왔다. 추후방안에 대해 쑥덕거렸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없었다. 오단서가 영향력을 행사해 이 지역의 상계에서 이곳의 위지휘사(衛指揮使)에게 어느 정도의 위로금을 찔러 주는 방안도 생각했지만 강직하고 깐깐하다는 세간의 평을 듣는 위지휘사이고 보면 실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저 공평무사한 판결만을 바랄 수밖에 없어보였다.

반 시진이 더 지나서야 원자춘이 돌아왔다. 입술이 터지고 코가 크게 부어올라 있었다. 코뼈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계응걸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원자춘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 새끼들…… 말투가 불쾌하네 어쩌네 별 생트집을 다 잡더니…… 그냥 확 쳐죽일까 하다가 겨우 참았수.”

원자춘이 분한 듯이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폭죽이 터지듯이 퍼지는 공기의 파장이 뇌옥 안을 은은하게 진동시켰다.

“그나저나 오부대주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것이오?”

계응걸의 물음에 혼자 있던 오단서의 호위무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소.”

함께 하던 동료는 죽었고 주목적이었던 검각의 비급들도 한 줌의 재가 되어버렸다. 무사히 영호장으로 돌아간다 해도 징계를 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 호위무사는 조원들보다 더 침울해 보였다.


“아아아…… 이봐, 좀 살살해. 아아아…….”

봉천우가 원자춘의 콧구멍 속으로 긴 헝겊 쪼가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조그만 나뭇가지로 콧구멍 깊숙이 헝겊을 모두 쑤셔 넣는 동안 원자춘은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랑곳하지 않고 코를 더듬어 보던 봉천우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됐소. 한 사나흘 정도면 뼈가 붙을 것이오.”

“젠장, 당장 내일 목이 달아날 지도 모르는데, 죽은 후에 뼈가 붙으면 뭐해? 뭐하냐고?”

이죽거리는 원자춘을 외면한 채 봉천우는 오물에 젖어있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지친 모습이었다. 육전호는 그런 봉천우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오단서는 한 시진이 더 지나서야 돌아왔다.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계응걸이 말을 걸 듯 몇 번이나 입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로 조서를 올렸으며 내일 중으로 판결이 있을 거란 얘기를 들은 것은 일행들의 식사거리를 가져 온 병사들로부터였다.

맹물에 곡물가루를 조금 풀어 놓고 소금으로 대충 간을 맞춰 끓인 걸쭉한 국물 한 그릇이 한 끼 식사의 전부였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이 사그라지고 차갑게 식어 갔으나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은 길고도 지루하게 흘러갔다.

위태롭고 황망한 사태에 직면한 일행은 차츰 말을 잃어갔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살이 관통한 손을 제대로 치료조차 못한 소응박이 고통스러운 듯이 젖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 앉은 채 고개를 파묻고 있던 송석구가 알 수 없는 말들을 오랫동안 중얼거렸다. 불경이라도 읊고 있는 것일까. 작은 창으로 쏟아지던 햇빛이 차츰 붉어지더니 어느 순간 어둠이 찾아 들었다. 복도 저 끝에서 타오르는 횃불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사막의 모래 냄새를 간직한 차가운 밤공기가 몸 안을 휘돌고 지나갔다. 단전을 가득 채운 붉고 따뜻한 진기는 여전히 힘차게 주천을 했지만 독맥을 타고 오른 진기는 여느 때와 달랐다. 양 미간 사이의 인당(印堂)과 두 치 위에 있는 신정(神庭) 사이에서 갈 곳을 잊어버린 듯 오랫동안 머무르다 내려오곤 했다. 의념의 제어로부터 벗어난 모습이었다. 잠시 집중을 했으나 곧 포기했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흐름이었으나 마음은 지극히 평온했다. 그로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기의 흐름을 따라 의념이 흘렀다.


뇌옥의 좁은 창을 돌아 나와 광활한 연무장 위를 노닐었다. 수없이 늘어선 군막 위를 돌고 돌다 지쳐 사막으로 흘러갔다. 부드러운 모래능선 위에서 초원의 대기를 만나 하늘로, 하늘로 치달았다. 컴컴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버릴 듯이 솟아올랐다. 보석처럼 빛나는 수만 개의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곳. 사방의 경계가 허물어진 곳이었다. 저 아래 구불구불 이어진 장성 위로 작은 구름 하나가 스치듯이 흘러가고 있었다. 남으로, 남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정지된 듯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내려다 본 세상은 너무나 어둡고 고요했으며 쓸쓸했다.


반개했던 눈을 떴지만 굳어버린 석상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꿈을 꾼 것일까.

의문이 사라져버렸다. 왜 의문이 사라졌는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모든 감정들이 조금은 희석되고 퇴색된 것 같았다.

나지막이 한산을 노래하던 종리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종리연이 내려다 본 세상도 그렇게 어둡고 고요하며 쓸쓸했을 것이다.


또다시 태양은 떠오르고 작은 창으로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일행의 분위기는 여전히 가라앉아있었다. 섭평위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고 소응박은 상처가 악화되었는지, 연신 식은땀을 흘렸다. 나머지일행들도 지쳤는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뇌옥 입구의 철문을 여는 소리가 요란했다.

“드디어 목을 내놔야 할 시간이 된 건가.”

육전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등오가 빈정거렸다.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덩치에 온 몸에 철갑을 두른 삼십 대의 군관이 일행이 갇힌 곳으로 다가왔다. 부리부한 눈매에 꽉 다문 입이 무척이나 완고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군관이었다.

일행을 잠시 살펴보던 군관이 무거워 보이는 입을 열었다.

“육전호가 누구냐?”

운기행공을 하다 일어났던 기이한 경험을 되새기고 있던 육전호는 군관이 자신을 찾자 손을 들었다.

“나와라.”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었다.

문이 열리자 육전호는 군관을 따라 나갔다. 의아해하는 조원들을 남겨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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