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1,022,405
추천수 :
7,844
글자수 :
212,785

작성
12.04.13 06:12
조회
27,132
추천
223
글자
19쪽

15

DUMMY

원자춘이 일행의 선두를 맡자 육전호는 소응박, 봉천우와 함께 일행의 흔적을 지우고자 후위에 섰다. 굳이 흔적을 지우지 않더라도 비가 오는 탓에 일행의 흔적을 따라 뒤를 쫓는 것은 어려운 일일 터였다. 하지만, 세 사람은 일행이 남긴 흔적들을 꼼꼼히 지우면서 뒤를 따랐다.

“몸은 괜찮아? 다친 것 같던데.”

“큰 상처는 아닙니다. 지혈도 했고.”

“다행이다.”

봉천우에게도 힘든 일전이었는지 도롱이 이곳저곳이 베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비교적 깨끗한 도롱이를 걸친 소응박이 봉천우에게 다가왔다.

“본대는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글쎄요. 앞으로가 문제겠지요.”

“그렇겠지? 우릴 습격한 그놈들은 패천문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금정산은 무사할 겁니다.”

“패천문이 나서고 거기다가 수라문까지 가세했다는데 무사할까?”

“금정산 곁에는 여의각의 고수들도 있고 무엇보다도 보타문의 검후가 있습니다. 무사할 겁니다.”

“검후가 그렇게 강한가? 자네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나 되나?”

소응박의 질문에 봉천우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말이 없다. 궁금해진 육전호도 봉천우를 바라보았다.

“금가장에 왔던 검후의 무공수위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문의 장로들이 오래전에 만났다던 그 시대의 검후는 결코 당신들의 아래가 아니었답니다.”

“그렇겠지, 단지 검을 든 여자여서 검후라는 별호를 붙이지는 않았겠지.”

소응박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봉천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보타문에서 어려서부터 온갖 정성을 다해 길러낸 여인입니다. 아마 검으로 그 여인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전 무림에서 겨우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봉천우의 말을 듣고 있던 육전호는 속으로 검후와 봉천우를 비교해봤다.

검으로 당대 최고의 성세를 구가하고 있는 화산파다. 그런 화산파에서, 삼십 년 전에 벌어졌던 마교와의 제사 차 정마대전, 사천혈사(四川血事) 당시 뛰어난 활약으로 천하제일검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곡진자에게 가르침을 받은 봉천우다.

그런 그가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라 했으니 검후의 무공수준은 육전호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 봉천우의 겸양이 섞인 얘기겠지만 검후의 나이가 아직 이십 대라는 사실을 놓고 보면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일행은 어느덧 소로(小路)를 타고 있었다. 사냥꾼이나 약초꾼, 또는 산짐승들이 다녔을 법한 아주 작은 길이었다. 희미한 길의 흔적을 따라 반 시진 정도를 걸어가자 작은 개울가 옆 커다란 바위에 등을 기대 세워진 산막(山幕)이 보였다. 원자춘이 먼저 들어가 내부를 확인하더니 지켜보던 일행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계응걸을 눕히고 나니 나머지 인원은 앉아 있어야 할 만큼 좁은 공간이었지만 비를 피해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거기에다 사냥꾼들이 쓰던 것인지 간단한 조리도구도 준비되어있었다. 소응박이 송석구와 함께 육포와 말린 떡을 꺼내고 물을 끓이는 등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봐, 준비됐지?”

원자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큰 바늘과 명주실이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봉천우가 계응걸에게 진기를 불어넣는 것을 보며 육전호는 상의를 벗고 앉았다. 차가운 금속이 살갗에 닿자 섬뜩한 느낌에 전율이 일었다.

“아프더라도 참으라고. 나중에 네 마누라가 봐도 놀라지 않도록 예쁘게 꿰매줄 테니까.”

원자춘의 웃음기를 머금은 불쾌한 목소리가 들리자 눈을 감았다.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바늘이 살갗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명주실이 바늘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지나갔다. 그 실의 돌기 하나하나의 느낌이 고통과 함께 그대로 전해졌다.


저녁 무렵부터 잦아들기 시작한 비는 새벽이 가까워서야 그쳤다. 하늘을 가득 덮었던 구름이 걷히자 나타나는 별들처럼, 맑고 서늘한 기운이 대기에 가득했다.

주변 경계를 구실 삼아 산막 근처에서 운기조식을 취하던 육전호는 가만히 눈을 떴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계응걸의 신음이 밤새 그를 괴롭혔다. 조용히 산막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행들이 서로 구겨져 자고 있는 한쪽 구석에 계응걸이 누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쌀쌀한 새벽임에도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천우형님.”

육전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계응걸의 머리맡에 앉아 있던 봉천우가 고개를 들어 육전호를 보았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날이 밝는 대로 의원을 찾아봐야겠어.”

봉천우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형님…… 흑금단두를 아직 복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육전호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봉천우가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

“네.”

“찬물에 적당히 풀어서 갖고 오너라.”

봉천우는 봇짐에서 흑금단두를 꺼내고 구석에 있던 나무그릇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산막 앞을 흐르는 개울가에 쪼그리고 앉아 그릇에 물을 조금 뜨고 흑금단두를 넣었다. 물에 잠긴 흑갈색의 흑금단두가 천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청량한 기운이 새어나와 육전호 주위를 흘렀다. 서문영영의 고운 자태가 떠올랐다. 별것 아니라고 말을 하던 입술의 나풀거림이 눈에 선했다.

‘그래, 별것 아니야.’

그렇게 자신을 위로했다.


“네가 직접 하는 것이 좋겠다.”

육전호가 봉천우에게 흑금단두를 녹인 그릇을 내밀자 봉천우가 사양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응걸의 머리맡에 앉아 한 손으로 계응걸의 어깨와 머리를 걸쳐 안으며 일으켰다.

“으음…… 왜?”

힘겹게 눈을 뜬 계응걸이 자신을 안고 있는 육전호를 바라보았다.

“조장, 이것 좀…….”

“이게……?”

육전호가 입 앞에 댄 그릇에서 예사롭지 않은 향기가 났다.

“약입니다. 드십시오.”

“이런 향은…… 귀한 것 같은 데…….”

“살아남아서 따님도 다시 보고 그러셔야죠.”

“…….”


흑금단두를 녹인 약물이 천천히 목을 타고 넘어가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약을 마시던 계응걸이 반 정도를 남기고는 그릇을 밀어냈다.

“왜 그러시죠?”

“이만하면 난 충분할 거야.”

계응걸이 입을 닫아버리자 난처해진 육전호가 봉천우를 바라보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봉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장기를 치유할 수 있는 원기(元氣)를 끌어낼 수 있을 거야. 남은 건 네 몫이고.”

“전호, 고맙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계응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렇다고 내 딸을 넘볼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말게.”

다시 자리에 누운 채 육전호를 바라보는 계응걸의 입가에 얄궂은 미소가 감돌았다.


원자춘은 힘겹게 눈을 떴다. 피로가 덜 풀렸는지 몸은 무겁고 머리는 지근거렸다. 자신의 얼굴 앞에 놓인 등오의 발을 치웠다. 상체를 일으키자 온몸의 근육이 아프다고 요동을 쳤다. 지겹도록 내리던 비가 그쳤는지 창을 통해 밝은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잠을 자고 있는 관옥(冠玉)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재수 없는 놈. 화산파의 적전제자(嫡傳弟子)란 놈은 잠자는 모습도 재수 없어 보였다.

봉천우의 앞에 누워 자고 있는 계응걸이 보였다. 간밤엔 그렇게 끙끙대더니 이젠 많이 좋아졌나보다. 새근거리며 자는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다행이다. 유일하게 가깝던 담무원이 죽었다. 계응걸 마저 죽었다면 무림맹 경비단을 떠날 생각이었다.

교육대 시절부터 삼 년 가까이 자신과 함께 고생했던 담무원이었다. 그런 그가 죽었다. 평소 정이 많은 송석구처럼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다. 조장을 대신해 선두로 나섰다. 빗물인 척하며 조금 찔끔거렸다. 저승에 간 담무원도 이런 자신을 이해할 것이다.

이젠 두 번 다시 담무원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침부터 가슴 한쪽이 휑하다. 젠장.

햇빛이 산막 안으로 들어오는 각도를 보니 사시 초는 되었을 거 같다. 평소라면 벌써 일어나 반 시진 정도 무공을 수련하고 아침식사까지 마쳤을 시간이었다. 모두들 코를 골아가며 곤하게 자는 걸 보니 어제의 상황이 어렵긴 어려웠나보다.

그나저나 머리가 너무 아프다. 그리고 어제는 정신이 없어 느끼지 못했지만, 제대로 씻지 못한 일행들에게서 나는 냄새가 지독하다. 산막 안이 온통 땀 냄새와 발 냄새, 피비린내로 가득하다. 환기를 좀 시켜야겠다. 잠깐, 이건 무슨 냄새지? 킁킁……. 온갖 지독한 냄새 속에 숨어있는 가느다란 한줄기 상쾌한 냄새. 뭐야, 이건?


“잘 잤소?”

원자춘의 킁킁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봉천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가 산막의 문을 열어젖히자 숲 속의 시원한 바람이 산막 안으로 불어온다.

“젠장, 그…… 그래.”

떨떠름하게 대답하면서도 원자춘은 뭔가 아쉬운 듯 여전히 코를 벌름거렸다.

“좋은 아침이오.”

봉천우는 산막을 나섰다.

개울물이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이곳저곳을 대충 씻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산막이 있는 조그만 공간과 흐르는 개울가를 제외하고는 첩첩산중이다. 산막 뒤 바위 그늘에 앉아 운기조식 중인 육전호가 보였다. 뒷짐을 진 채 개울을 건너 천천히 숲으로 들어갔다.


내력이 불어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나보다. 산막 쪽에서 검을 질질 끌고 다니는 봉천우의 기척이 느껴졌다. 다른 일행들도 모두 잠에서 깨었을 것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다. 아쉬웠다.

오늘은 독맥(督脈)을 타고 위로 흐르던 진기가 대추혈(大椎穴)을 지나면서도 그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다른 때라면 대추혈 부근에서 지지부진해야 할 흐름이 풍부혈(風府穴)을 지나 뇌호혈(腦戶穴)까지 가서야 힘을 잃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정진한다면 얼마 안가 임독양맥(任督兩脈)이 연결될 수도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일어서야 할 시간이었다. 조심스럽게 내력을 거두어 갈무리를 했다.


다음날 오후.

육전호와 일행은 순안강과 순안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관도 근처의 숲에 은신하고 있었다.

“성문 밖에는 곳곳에 패천문과 수라문의 무사들이 있었고, 성문에서 관군들이 검문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가까이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순안현의 상황을 살피러 갔던 등오가 겸연쩍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됐어, 네 탓이 아니니까. 관군들이 검문을 하고 있다면 그곳에서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어.”

“아무리 패천문이라 해도 민간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무림맹을 상대로 일을 벌일 수 있을까요?”

“본대가 순안에서 배를 타면 남궁세가의 앞마당까지 곧장 들어가. 패천문은 더 이상 쫓을 수가 없어. 그렇다면, 순안에 도착하기 전에 목적한 바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웠다면 무리수를 뒀을 수도 있지.”

계응걸의 창백한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잠시 보였다.

“정보가 필요해. 패천문이나 수라문의 무사를 잡아야겠어.”

“위험하지 않겠소?”

백준서가 두려운 듯이 물어왔다.

“조심하는 수밖엔 달리 방도가 없소. 우선 관도로 가서 매복하기 적당한 장소를 찾아야겠소.”

육전호와 일행은 관도를 방향으로 잡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 각 가량을 나아가자 숲이 끝나면서 관도가 나타났다.


계응걸의 명에 따라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던 원자춘이 관도 위를 올라 무언가를 살피더니 다시 재빠르게 숲으로 뛰어들었다.

“오전에 생긴 걸로 보이는 마차 바퀴 자국이 여러 개요.”

“그래?”

원자춘의 말을 들은 계응걸이 봉천우와 등오를 불러냈다.

“자네들이 정찰을 해줘야겠어.”

봉천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여기에 은신하고 있을 테니까 다섯 명 이하의 하급무사가 접근하면 알려주게.”

“알았습니다.”

계응걸의 말에 따라 봉천우와 등오가 조심스럽게 관도 주변 숲을 따라 순안현 쪽으로 나아갔다.

관도에서 오 장 정도 떨어진 숲에 은신을 한 일행은 십여 명씩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무사들을 가끔씩 볼 수 있었다.

“부상자가 있는 걸로 봐서는 순안현 안에서 싸움이 있었던 게 확실해.”

“그럼 본대는 어찌 되었을까요?”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계응걸의 말을 듣던 육전호는 본대의 안위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어쩌면 서문영영에 대한 애틋한 감정일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무덤덤했으나 흑금단두를 복용하고 난 후로는 서문영영을 생각하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슴 한 쪽이 아렸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찰을 나갔던 봉천우와 등오가 빠른 속도로 돌아오더니 계응걸을 향해 입을 달싹거렸다. 봉천우의 전음을 듣고 있던 계응걸이 일행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적당한 목표물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미리 약속한 대로 백준서와 상무각의 무사들이 매복 장소보다 십여 장 위로 올라가고 소응박과 송석구가 밑으로 내려갔다. 도주로를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일각이 채 안 되어 관도 끝에 일단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각각 한 손에 도(刀)를 들고 서로 얘기를 나누며 점점 매복 장소 가까이 오는 모습을 보자 육전호의 가슴이 뛰고 피가 끓기 시작했다. 그런 육전호의 어깨를 살며시 잡는 손길이 있었다.

[전호, 살기가 너무 짙어.]

갑자기 들려오는 봉천우의 전음에 육전호는 뒤를 돌아보았다. 봉천우가 천천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순간, 육전호는 자신도 모르게 살기를 드러낸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관도 위의 무사들이 이상한 느낌에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봉천우와 조원들이 관도 위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관도를 따라 걷던 네 명의 수라문 무사들이 자신들을 향한 살기를 느끼고 경계를 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챙챙!

차가운 빛을 뿌리는 검과 도가 관도 위에서 몇 차례 어우러지더니 곳곳에 피를 뿌렸다.

“빨리 뒤처리를 하고 퇴각한다!”

뒤에서 지켜보던 계응걸의 외침에 따라 봉천우와 조원들이 늘어진 무사들을 끌고 숲으로 들어가자 육전호도 원자춘과 함께 관도 위에 뿌려진 핏자국과 흔적을 지우고 나뒹구는 무기들을 회수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평온을 찾은 관도 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나가는 가을바람만이 가끔 먼지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을 뿐이었다.


“…… 그때까지 안보이던 검후라는 여인이 마차에서 나오더니 수라문의 수뇌부를 공격했소. 총관과 호법 한 분이 그 자리에서 죽고 여러 명이 중상을 입었소. 그리고 때마침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태운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났던 거요.”

관도로부터 수백 장 떨어진 깊은 숲 속.

살아남은 수라문의 무사 한 명이 손이 뒤로 묶인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고 그런 그를 조원들이 따가운 살기를 뿜어대며 노려보고 있었다.

“살아남은 무림맹과 금가장의 식솔들은 모두 몇이나 되더냐?”

“잘은 모르겠지만 금가장의 식솔들은 금정산과 그 딸을 제외하고 살아남은 자는 열 명이 못된다고 들었소. 무사히 배를 탄 무림맹의 무사들은 삼십 명 가량 된다고 들었소.”

사로잡은 수라문의 무사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모두 얻은 계응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보시오…… 살려주시오.”

더 이상 질문이 없자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술술 불어대던 무사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하면 살려준다 하지 않았소? 제발 살려주시오.”

“물론 살려준다. 하지만, 당분간은 이 숲 속에 있어야할 것이야.”

눈물까지 흘리며 사정하는 수라문의 무사를 노려보던 계응걸이 원자춘을 가볍게 흘겨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육전호는 일행의 뒤를 따라 숲을 헤쳐나갔다. 그렇게 백여 장 가량 전진했을 때 홀로 뒤에 남아있던 원자춘이 따라붙었다. 앞섶에 새로이 생긴 혈흔이 보였다.

“조장이 살려준다 하지 않았습니까?”

원자춘을 바라보는 육전호의 시선과 음성에 노한 감정이 실려 있었지만 원자춘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낄낄거린다.

“물론 살려줬지. 목숨은 붙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육전호는 원자춘이 무슨 짓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관도에서 수백 장 떨어진 곳이었다. 제 발로 걸어 나가지 못한다면 목숨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산목숨이라 할 수 없었다. 원자춘에 대한 불쾌한 감정에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전호.”

바로 앞서 가던 봉천우가 육전호의 어깨를 잡고 멈추어 섰다. 원자춘이 비웃는 듯한 미소를 띤 채 육전호를 바라보더니 봉천우를 지나쳐 앞으로 갔다.

“참아라. 조원들의 안위를 생각해서 한 일이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적이라 해도 며칠을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하는 말입니다.”

“네 말이 옳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쉽게 평정심을 잃어서는 곤란해. 더구나 현재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고.”

“…….”

봉천우의 말에 육전호는 꿀 먹은 벙어리인 양 말이 없다.

“관도에서 매복 했을 때도 그렇고…… 네가 있던 군대에서처럼 살기(殺氣)나 투기(鬪氣)를 함부로 뿌리고 다닌다면 무림에선 살아남기 힘들 거야. 여기서는 너 자신을 감추면 감출수록 상대와의 싸움에서 유리해. 네가 갖고 있는 것을 함부로 드러내지 마라. 상대가 누구든 간에. 알겠어?”

봉천우의 음성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이미 들어 알고 있던 얘기였지만 새삼스러웠다. 매복했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만약 수라문의 고수가 지나가고 있었다면 일행이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실수가 명백했다.

“네, 고맙습니다, 형님.”

육전호의 대답을 들은 봉천우가 어깨를 다독이고는 휘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따르며 한동안 자신을 자책하던 육전호는 곧 새로운 생각에 잠겼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알기에도 무림인들이 흔히 화산파의 후기지수로 꼽는 이 중에 봉천우란 이름은 없었다. 아마 강호경험이 없어서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봉천우의 무공은, 거론되는 후기지수들을 뛰어넘어 매화검수로 추정될 정도이고 강호경험도 가끔은 족히 십여 년은 굴러먹은 것처럼 노회한 모습을 보여주는 봉천우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은 봉천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소문으로 떠도는 얘기와 강소미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전부였다. 무언가 신상에 문제가 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육전호는 봉천우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봉천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리곤 그만 포기했다. 다만, 언젠가 때가 되면 스스로 입을 열 날이 있을 거로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7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음영잔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감사드립니다 +90 12.05.15 20,665 24 -
35 34 +94 12.05.13 31,333 358 8쪽
34 33 +94 12.05.11 25,933 351 10쪽
33 32 +107 12.05.09 26,618 309 11쪽
32 31 +138 12.05.07 26,948 317 18쪽
31 30 +69 12.05.05 25,004 260 9쪽
30 29 +73 12.04.30 27,056 240 12쪽
29 28 +45 12.04.28 24,926 215 15쪽
28 27 +45 12.04.27 26,128 241 10쪽
27 26 +67 12.04.26 24,857 243 16쪽
26 25 +50 12.04.25 25,059 223 19쪽
25 24 +46 12.04.24 25,588 231 15쪽
24 23 +92 12.04.22 27,181 275 21쪽
23 22 +44 12.04.21 25,805 212 15쪽
22 21 +52 12.04.20 25,643 241 17쪽
21 20 +80 12.04.19 27,084 247 23쪽
20 19 +41 12.04.18 24,506 204 16쪽
19 18 +33 12.04.16 25,020 200 12쪽
18 17 +33 12.04.15 25,385 189 14쪽
17 16 +33 12.04.14 26,492 217 16쪽
» 15 +37 12.04.13 27,133 223 19쪽
15 14 +29 12.04.12 25,925 208 13쪽
14 13 +29 12.04.11 25,851 205 14쪽
13 12 +38 12.04.10 26,608 195 16쪽
12 11 +23 12.04.09 26,236 184 11쪽
11 10 +17 12.04.09 26,726 174 14쪽
10 9 +24 12.04.08 27,555 178 15쪽
9 8 +18 12.04.08 27,533 176 11쪽
8 7 +25 12.04.07 29,085 180 16쪽
7 6 +15 12.04.07 31,160 17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