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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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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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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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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5.07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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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31

DUMMY

무림맹주인 패왕검 상관월이 기거하는 태사전 주위를 둘러싼 담장을 끼고 돌아 뒤쪽으로 가자 숲에 둘러싸인 십여 채의 작은 전각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무림맹의 원로들이 기거하는 곳. 원로원이었다.

안내하던 사내가 한 전각 앞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육전호를 바라보았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십시오.”

육전호는 잠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난 뒤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훤한 대낮이었지만 대청은 조금 어두웠다. 그 대청 한 가운데, 갖가지 기이화초를 그린 열두 폭 병풍을 배경으로 하얀 도복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머리에는 남화건(南華巾)을 올린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낯익은 일광과 세광이 나란히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나아가 큰 절을 올렸다.

“육전호라 합니다.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으음…… 옥양이라 하네. 내가 자네를 불렀네.”

육전호는 고개를 들어 옥양이라 하는 눈앞의 도인을 바라보았다. 육십여 세 쯤 되었을까. 호리호리한 체구에 맑은 눈빛을 한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거기 앉도록 하게.”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육전호를 살피던 옥양이 의자를 권했다.

“내가 무림맹의 일에 시달리다보니 그동안 사문의 일에 너무 무심했네. 옥허 사형께서 새로 제자를 들였는데도 모르고 있었어.”

탄식을 하듯 말을 하던 옥양이 천천히 차를 따르더니 육전호에게 권했다.

불을 밝힌 등에서 새어나온 부드러운 빛을 따라 은은한 차향이 감돌았다.

“자네가 옥허 사형의 제자가 된 사연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네. 한데…… 사 개월이 넘게 외지에서 고생을 하다 돌아온 자네를 급히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태산파와의 일 때문이라네.”

육전호는 옥양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구요서와의 비무란 것을 알았다.

한 모금을 넘기자 따뜻한 기운과 함께 쌉쌀한 차의 풍미가 느껴졌다.

“자네는 그동안 변방을 다니며 임무를 수행하느라 몰랐겠지만 자네와 구요서의 비무 때문에 한동안 여기저기서 말이 많았네.”

육전호는 옥양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구요서와의 비무 당시 자신이 의도적으로 행한 일이었지만 결국 문제가 된 것 같았다.

호박색의 맑은 찻물이 찰랑거렸다.

“태산파에서 사문에 자네의 신분에 대한 확인과 함께 항의를 해왔네. 태산파의 주장대로라면 자네의 죄는 기사멸조의 죄에 해당하는 바…… 자네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대로 조사를 해서 장문인께 보고를 하기로 했네. 그것 때문에 자네를 불렀네.”

찻잔을 통해 손끝으로 전해지던 온기가 차츰 식어갔다.

“정당한 비무를 함에 있어 자신의 사문을 속이는 일은 강호의 도의에 크게 어긋나는 일. 뿐만 아니라 사문의 청규를 따르자면 기사멸조의 죄에 해당하는 중대한 일이니. 묻겠다, 자네는 어찌하여 사문을 부정하고 비무에 응했느냐?”

옥양의 목소리는 그의 성품을 말해주는 듯, 나지막했으나 힘이 실려 있었다.

무당과 자신과의 인연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악연으로 점철된 것만 같았다. 그 아득함에 육전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네가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자네를 보호해주지는 못할 것이니, 어찌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얘기해 보게.”

힘이 실린 옥양의 다그침에 육전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이제껏 북방의 전장을 전전하느라 강호의 경험도 일천하거니와 무림의 도의는 물론 문파의 배분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가 무얼 알고서 그리 했겠습니까. 언젠가 만나 뵈었던 현진 도장께서 제게 그리 하라 말씀하셨기에 그리 했을 뿐입니다.”

육전호의 말이 끝나자 듣고 있던 옥양의 얼굴에 당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현진이 그리하라 시켰다고?”

“네, 그렇습니다.”

옥양과는 달리 육전호의 목소리는 얼굴표정 만큼이나 담담했다.

“이게 무슨…… 가서 현진을 불러 오너라. 어서.”

옥양이 명을 내리자 안절부절못하며 서있던 세광이 대전 밖으로 급히 뛰쳐나갔다. 함께 서 있던 일광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육전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정녕 현진이 그리하라 시켰단 말이냐?”

“네,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현진이 네게 무어라 했는지 정확하게 얘기해 보거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보이고 있는 옥허자였다.

육전호는 금가장에서 현진도장을 만났던 상황과 당시에 오갔던 얘기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무당의 무공은 배웠으되 정신은 못 배웠다 하셨습니다. 옥허자께서 저를 당신의 제자라 여기지 않으시기에 심법을 내리지 않은 것 같다 하시며 다른 이에게 함부로 무당의 속가제자라 말하고 다니지 말라 하셨습니다.”

육전호의 얘기를 듣고 있던 옥양의 얼굴이 점점 구릿빛이 되어갔다. 분노가 치민 듯 탁자를 내리쳤다.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대청을 뒤흔들었다.

탁자의 검은 표면에는 옥양의 손바닥 자욱이 깊게 패였다. 그러나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은 흔들림조차 없었다.

“일광. 너도 그 자리에 있었느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육전호를 노려보다가 옥양의 갑작스런 질문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깜짝 놀라는 일광이었다.

“네…… 있었습니다. 사숙조.”

“지금 이 아이가 말한 게 모두 사실이더냐?”

“사실입니다.”

“허어, 이럴 수가…….”

일광을 통해 사실을 확인한 옥양이 허탈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숙조, 현진사숙께서 이…… 이…… 이 육전호에게 그리 말씀하신 것은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옵니다.”

일광이 다급하게 변명을 하자 옥양이 또다시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놈, 일광! 속가제자라 하나 너에겐 사숙뻘이 될 터인데 이 무슨 해괴한 망발이더냐!”

지켜보던 육전호도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 순식간에 전각 안을 뒤덮었다.

“요, 용서하십시오. 사숙조.”

어느새 바닥에 부복한 일광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서릿발 같은 기운을 의도적으로 뿜어내던 옥양은 어느 순간 기운을 거두었다.

자신의 기세를 받으면서도 큰 동요 없이 앉아있는 육전호가 놀랍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일광을 통해 자신이 몰랐던 육전호와 무당파 사이의 갈등을 깨달은 것이었다.

옥양은 다시 의자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버린 차를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육전호에게서 배분에 따른 호칭을 듣지 못했다. 자신에게는 마땅히 사숙이라 칭해야 했으나 교묘하게 피하고 있었다. 사형뻘 되는 현진을 말할 때도 그런 것 같았다. 육전호의 사부인 옥허 사형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금 전, 문파의 배분을 모른다는 육전호의 말이 떠올랐다. 일광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육전호는 무당의 배분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배분을 부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육전호 자신이 배분에 따른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배분에 따른 대우를 못해주겠다는 무언의 항변 같았다. 어쩌면 현진 때문에 사문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육전호 본인의 응어리 진 마음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입 안을 감도는 차의 뒷맛이 씁쓸했다.

사실 속가제자와 적전제자 사이의 갈등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육전호의 경우와 똑 같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일들이 예전부터 심심치 않게 있어왔다. 그리고 그런 부분은 사람과 사람의 일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 육전호를 만나 그 기도와 눈빛을 보게 되자 이번 일을 그리 편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욱일승천하는 화산파의 기세에 뒤로 밀려나 내려앉은 무당파의 성세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맑고 차면서도 허한 육전호의 눈빛을 보다가 깨달았다. 근래에는 볼 수 없었지만 기억 속에선 익숙한 눈빛이었다. 이미 자신은 육전호의 저런 눈빛을 아주 오래전, 지금은 우화등선을 했거나, 은거를 한 사문의 몇몇 어른들에게서 가끔씩 보면서 자랐다. 무당파를 무림 제일의 검문이라는 반석 위에 올려놓은 분들이었다.

검(劍)의 내면 깊숙이 감춰져 있는 그 외롭고도 험한 수행의 길을 엿본 자 만이 보여줄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근래에 들어 조금씩 퇴색되어가는 무당파를 다시 빛내 줄지도 모르는 동량(棟樑)이었다.

안타까웠다. 설령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속가제자 한 명을 감싸 안지 못하는 무당의 협소해진 기품이 안타까웠고, 그런 자신의 사문을 애써 멀리하려는 육전호가 안타까웠다.


옥양과 육전호가 제각기 생각에 빠져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였다.

“사숙. 찾아계시옵니까.”

전각의 문이 열리며 현진이 들어왔다.

이곳으로 오면서 세광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었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현진을 말없이 노려보던 옥양이 육전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잠시 나가 있게. 내 다시 부를 것이니.”

적전제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인지도 몰랐다.

육전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옥양을 향해 목례를 한 후 전각을 나왔다.

마음이 복잡했다. 그동안 응어리졌던 것들이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몇 걸음을 옮기기도 전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후회스런 감정이 몰려왔다.

처음 만난 옥양자의 면전에서 마치 할아버지한테 어리광을 부리듯, 치기어린 언행을 보인 것 같았다. 부끄러웠다.


무작정 걷다보니 주위의 모습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무림맹의 최고수들이 기거하는 원로원답게 잘 꾸며진 정원들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여러 가지 관목과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작은 정원들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며 십여 채의 작은 전각들을 두르고, 그 외곽으론 또 한 겹의 소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는 원로원의 모습은 선계의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았다.

육전호는 잘 꾸며진 길을 따라 따스한 봄볕을 쬐며 걸음을 옮겼다. 크고 작은 나무를 중심으로 웅장하게 꾸며진 곳도 있었고 꽃과 작은 관목을 보기 좋게 배치해 아기자기한 멋을 보이는 곳도 있었다. 아마도 전각 주인의 취향에 따라 정원의 모습도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갖가지 관목과 분재, 괴석이 즐비한 정원으로 들어섰다. 입구에 있는 작은 연못에는 연잎들이 무성했고 팔뚝만한 잉어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 안으로 들어서자 한 중년 사내가 한 자 정도 되는 작은 도(刀)를 들고 분재를 다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허락 없이 남의 정원에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주저 없이 발걸음 돌렸다. 그때였다.

“이리 오게.”

육전호는 뒤에서 들려온 중후한 목소리가 왠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아 돌아봤다. 분재를 다듬던 중년 사내가 어느새 뒷짐을 진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중년사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사내의 시선이 분재들이 놓여 있는 석단을 향하고 있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잠깐 기다려보게.”

중년사내는 육전호를 불러 놓고는 분재들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저기 구석에 적송 분재 보이지? 그걸 이쪽으로 옮겨주게.”

육전호를 세워 놓은 채 잠시 고민하던 사내의 입에서 엉뚱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네?”

“나이가 들수록 힘쓰는 일을 하기가 점점 싫어져. 부탁하네.”

중년사내의 말을 듣고 있던 육전호는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체격을 한 중년 사내의 입에서 나올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더구나 여기는 이름만 대면 모든 강호인들이 알 수 있는 무림맹의 고수들이 머물고 있는 원로원이었다.

중년사내를 바라보았다. 영준한 외모에 호방한 기품이 넘쳐흘렀다.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했지만 붉은 혈색의 얼굴은 그리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알겠습니다.”

잠시 사내를 바라보던 육전호가 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말한 적송(赤松) 분재를 들어 옮겼다.

“저쪽에 있는 회양목도 이리로 옮겨주게. 아, 여기 낙상홍은 그쪽을 옮기고……”

육전호는 군말 없이 중년사내가 시키는 대로 분재와 괴석을 석단의 위아래로 부지런히 옮기고 배치했다.


“흠…… 이제 좀 볼만 하군. 이리 와서 한 번 보게.”

몇 걸음 떨어져 정원 석단 전체를 조망하던 사내가 부르자 곁으로 다가가 섰다.

괴석과 관목, 분재의 어울림은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움이 넘쳐흘렀다.

“어떤가? 자네가 보기에는.”

중년 사내의 질문이 들려왔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눈에 들어오는 화려함이나 아름다움은 없었으나 조화로웠다.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어울림이었다.

두 사내가 정원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이, 어린 시비가 정원의 한쪽에 있는 탁자로 차를 날랐다.

“차나 한 잔 하세.”

“네.”

육전호는 자신을 이끄는 중년사내의 뒤를 따라가 앉았다. 시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개의 잔에 차를 따랐다. 차향이 퍼지는 가운데 바라다 보이는 정원은 육전호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정원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던 중년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 성도는 잘 지내고 있던가?”

“네……?”

육전호는 무심결에 대답을 하다 놀라고 말았다.

자신은 이미 눈앞의 중년사내가 사실은 환갑에 가까운 나이이며 남궁성도의 아버지인 제왕검 남궁우란 것을 알고 있었다.

남궁성도를 판에 박은 것 같은 사내의 모습은 이곳이 무림맹 원로원이 아니라 어느 성시의 저잣거리였어도 한 눈에 알 수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궁우는 자신이 남궁성도와 아는 사이란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육전호의 반응을 지켜보던 남궁우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몇 달 쯤 전에 성도가 서신을 보내 왔더군. 자신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고 자네에 대한 얘기만 상세하게 적어 보냈어. 그 글을 보고 어떤 녀석일까 상상해 봤는데 자넬 처음 보는 순간 알겠더군. 하지만 자네가 날 찾아오는데 다섯 달이나 걸릴 줄은 미처 몰랐네.”

“죄송합니다.”

호탕하게 웃는 남궁우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무림맹으로 돌아가면 자신의 아버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라던 남궁성도의 말이 떠올랐다.

무림맹으로 돌아와 종리연과 비무를 하던 당시, 원로원으로 제왕검 대협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려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 있었을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었다.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원인이었다.

오늘의 만남 또한 우연이었지, 의도한 만남이 아니었다. 거듭 죄스런 마음이 들었다.

“괜찮네. 자네를 책망하는 게 아니야. 변방에 있다 어제 돌아온 것도 알고 있네. 한동안 자네 때문에 무림맹이 시끄러웠거든. 알고 있나?”

육전호는 남궁우가 말하는 것이 조금 전까지 옥양이 말하던 그것임을 알 수 있었다.

“네, 사실은 그것 때문에 원로원에 왔습니다.”

육전호의 말은 듣고 있던 남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사문의 일이라 내가 뭐라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내 아들 성도가 자네를 아우처럼 여긴다 하니 나한테도 자네가 아주 남남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한테 한 가지만 당부하겠네. 들어주겠는가?”

남궁우의 목소리는 낮고 정감이 어려 있었다. 고개를 숙였다.

“네, 어르신.”

“자네가 자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당파와 연을 맺었고 지금 그 연이 자네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은 성도에게 들어 알고 있네. 하지만 자네가 지금 그 연을 끊으려 한다면 무당의 무공을 버리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네. 아마도 무당에서는 자네의 단전을 폐하고 사지의 힘줄을 끊는 것이나 쇄심동(鎖心洞)에 가두는 것으로 그 연을 정리하려 할 것이네. 그게 무당의 청규야.”

“알고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불편한 관계일 지라도 그것이 인연이라면 인연이네. 자네가 자네의 길을 찾아 올곧게 걸어간다면 불편한 관계는 언젠가는 자연히 해결될 터이니 일부러 끊으려 하지는 말게. 사람의 성정이란 게 늘 한결같지는 않은 법이니 미래의 일을 미리 재단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네. 알겠나?”

“네, 명심하겠습니다.”

육전호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자 바라보던 남궁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사실 제일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한데…….”

“어떤 방법입니까?”

남궁우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끊자 육전호는 궁금한 마음이 일었다.

“그게…… 자네가 무당파가 어찌해 볼 수 없는 경지에 오르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겠나?”

남궁우의 엉뚱한 얘기에 육전호의 기대감이 팍 사그라졌다.

“가당치도 않은 말씀을…… 어떻게 제가…….”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법이라 하지 않았나.”

남궁우는 한참을 호탕하게 웃었다.



시비가 따르는 찻물이 찰랑거렸다.

육전호가 남궁우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지도 벌써 반 시진이었다.

남궁성도의 정위군 시절 얘기를 주의 깊게 듣던 남궁우가 멀리 정원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객이 오는 군. 자네를 찾는 것 같아.”

육전호도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잠시 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정원의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세광이 육전호와 함께 앉아있는 남궁우를 보더니 깊게 허리를 수그렸다.

“그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육전호가 일어서자 남궁우가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옥양자는 사리분별이 명확한 분이네, 말을 듣고 이해하기 보다는 말하는 이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게.”

“네, 어르신.”

육전호가 목례를 했지만 남궁우는 무언가 아쉬운 듯 했다.

“내일이라도 시간이 된다면 찾아오게, 자네한테 할 말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할 말이란 게 뭔지 궁금했지만 눈앞에 놓인 고개를 넘는 게 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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