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1,022,410
추천수 :
7,844
글자수 :
212,785

작성
12.04.27 07:00
조회
26,128
추천
241
글자
10쪽

27

DUMMY

붉은 폭죽이 연이어 터졌다.

육전호 일행이 바로 몇 시진 전에 지나왔던 곳이었다. 아무래도 혈사대가 일행의 뒤를 쫓는 것 같았다.

일행은 하서주랑을 통해 중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포기해야 했다.

감숙성 일대의 하서주랑은 무림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일행이 검각의 비급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혈사대 뿐만 아니라 다른 마적떼나 변방 무림인들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기련산맥을 타고 내려가 영등(永登)현을 거쳐 난주로 가는 험한 길을 택했다.


말을 타고는 다닐 수 없는 험한 산과 허리까지 빠져드는 눈밭을 헤쳐 나가길 보름. 육전호 일행의 행색은 중원의 녹림도만도 못한 초라한 모습이었다.

태양이 마지막 남은 빛을 뿌리며 기련산맥 서쪽의 높은 봉우리를 힘겹게 넘어 가던 유시 초.

눈이 쌓인 암석지대를 통과하던 일행은 바위가 삼면을 틀어막아 바람이 들지 않는 곳을 발견하자 곧바로 노숙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큰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고지대여서 겨우겨우 긁어모은 고사목과 관목가지로 불을 지피고 모닥불 주위를 둘러앉거나 누운 채 털가죽을 둘러쓰면 끝이었다.

지니고 있던 육포나 떡 같은 요깃거리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육전호가 봉천우와 함께 일어서자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쉬고 있던 계응걸이 입을 열었다.

“그래, 번번이 미안하지만 부탁하겠네.”

계응걸의 덥수룩한 수염과 부르튼 입술, 지쳐 보이는 눈빛은 다른 조원들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오단서와 그의 호위무사 둘은 살까지 쏙 빠진데다 눈까지 퀭한 모습이어서 더욱 초라해 보였다.

다른 이에 비해 비교적 양호한 행색을 한 육전호와 봉천우가 함께 눈이 쌓인 암석지대를 조심스럽게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제양신공은 익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높은 암석 위에 올라서서 사방을 살피던 봉천우의 말에 육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진기 운용의 궤와는 너무도 달라서…….”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나.”

“…….”

“검각의 개파조사인 우일곤은 본래 낭인 출신이라고 들었다. 어떤 기연을 얻었는지 아니면, 깨달음을 얻었는지…… 어렸을 적 사부께서, 낭인의 손에서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검법이 나왔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이 나.”

육전호는 봉천우의 말을 들으며 천하제일검 곡진자가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절명검결을 익힐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이런 육전호의 마음을 읽은 것인가.

“네가 익히고 있는 유운검법도 절명검결에 못지않은 것이다. 네가 성심을 쏟는다면 오히려 유운검법이 더 나을 것이니 너무 아쉬워하지 말거라. 하지만 제양신공은 상궤를 벗어난 경로도 그렇고…… 그리 뛰어난 심법으로는 보이지 않아. 어쩌면 오랜 세월을 다듬고 보완하며 후대에 전해지는 명문의 심법과는 달리 사문이 없었던 우일곤 혼자서 이뤄낸 심법이기에 그럴지도 모르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네가 제양신공과 절명검결을 필사한 것을 남들이 알게 되면 피바람이 몰아칠 수도 있어. 검각의 후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발설치 말거라.”

“네.”

봉천우의 단호한 목소리에 육전호는 조용히 대답했다.

두 개의 비급을 필사했다는 것을 봉천우에게만 털어 놓았었다. 육전호가 유운검법에 걸맞는 좋은 심법을 탐낸다는 것을 알고 있던 봉천우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가죽에 새겨 놓은 제양신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봉천우의 결론도 육전호가 짐작했던 그대로였다.

육전호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사방을 부지런히 살피던 봉천우의 눈이 빛을 냈다.

“저기 있군.”

봉천우가 가리키는 곳은 거대한 암석지대의 가파른 곳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던 육전호의 눈에도 회갈색 산양(山羊)의 무리가 눈에 띠었다.

“이 방향으로 몰아 올 터이니 준비하고 있어라.”

말을 마친 봉천우가 바람이 꺼지듯 사라져 갔다. 암향표(暗香飄)였다.

손목에서 두 개의 비수를 꺼낸 육전호는 산양이 지나갈 길목을 예상하며 이동을 한 후 적당한 자리를 잡았다.

지니고 있던 식량이 떨어지자 벌써 며칠 째 사냥을 해서 요깃거리를 조달하고 있었다.

눈보라 속을 헤치며 험한 산길을 내달려 온 통에 내공이 그리 강하지 않은 조원들과 오단서 일행은 사냥을 할 기력이 없었거니와 지대가 높아 사냥할 만한 산짐승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팔팔한 봉천우과 육전호가 틈나는 대로 사냥거리를 찾아 산속을 헤매고 다녔다. 오늘은 높은 암석지대에 서식하는 산양의 무리를 빨리 찾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바위 뒤에 숨어 비수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자신에게 비도술을 가르쳐주던 당문휘가 떠올랐다.


사천당가의 방계혈통이었으며 쫓기듯이 정위군으로 내몰렸던 당문휘는 남궁성도와 비슷한 처지였다. 사실 정위군 비찰대 구성원 중 명문출신들은 대개 사정이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비찰대에는 늘 어둡고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쉽게 삶을 포기해버리는 이들도 많았다.

당문휘는 그런 상황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었다. 또한 일신에 지니고 있던 무공도 훌륭했지만 당가 출신답게 암기술은 그야말로 일절이었다. 특히 여덟 개의 비수를 동시에 뿌려 각기 다른 목표를 맞추는 비도술은 어린 육전호의 눈엔 신기의 경지였다. 비록 두 개의 비수를 동시에 던지는 기초단계밖에는 배우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기초단계일 뿐이었지만 비수를 던질 때 사용하는 손가락의 근육과 관절부터 손목, 어깨, 허리, 골반으로 이어지는 각 관절과 근육의 사용법과 비수에 진기를 실어 던지는 법까지 충실히 배웠으니 시간이 있고 노력만 한다면 세 개, 네 개의 비도를 던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자신의 비도술에는 어검술(御劍術)의 무리(武理)가 내재되어 있으니 운이 닿아 그걸 깨닫게 되면 잊지 말고 크게 한 턱 내라던 당문휘의 쾌활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갑자기 돌덩이가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십여 마리의 산양들이 험한 바위산을 질주하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들어 바로 옆에서 터지듯이 부서지는 돌덩이 때문에 산양무리의 진로가 몇 차례 꺾였다.

그렇게 자신이 숨어 있는 방향으로 내려오던 무리의 선두가 서너 장 앞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아마도 불길한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재빨리 뛰어 내려가면서 무리의 뒤에 처져있는 산양을 향해 비수 몇 개를 뿌렸다. 한 마리는 그 자리에서 바로 무너졌고 다른 한 마리는 몇 걸음을 더 뛰다 너부러졌다.

산양의 무리를 내몰던 봉천우가 다가와 어깨를 다독였다.

쓰러져 있는 산양의 다리를 묶은 후 한 마리씩 어깨에 둘러메고 발걸음을 옮겼다.


조원들 모두 낭인 출신이어서인지 날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는 일을 꺼려하지 않았다. 특히 원자춘이 그런 일에 능숙했다.

육전호는 원자춘과 함께 산양 두 마리를 깨끗하게 해체해 저녁거리만 남기고는 모두 바위 위에 걸쳐 놓았다. 기련산맥을 떠도는 차가운 북풍에 금방 얼어붙을 것이었다.

작업을 끝내놓고 산양의 간을 몇 조각으로 잘라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부드러우면서도 달큼한 맛이 일품이었다.

모닥불 위에는 두툼하게 저민 살점들이 기름을 뚝뚝 흘리며 노릇하게 타들어갔다. 지니고 있는 양념이라곤 소금 밖에 없었지만 남부럽지 않은 성찬이었다.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한참동안 고기를 뜯던 조원들이 잠잠해졌다. 육전호도 조원들의 시선을 쫓았다. 바로 옆에 따로 지핀 모닥불 곁에 앉아있는 오단서를 향한 시선이었다.


오단서는 이동 중에도 틈만 나면 비급을 꺼내 읽었다.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마치 비급을 통째로 외워버리려는 것 같았다.

견물생심이었다.

처음엔 오단서의 행동을 보고도 담담해하던 조원들이었지만 몇 번이고 반복되자 눈빛이 달라졌다. 특히 원자춘의 눈빛은 탐욕 그 자체여서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봉천우가 오단서에게 몇 번 주의를 주며 만류를 했다. 그 때문인지, 그 횟수가 줄긴 했지만 밤에 모닥불 곁에서 비급을 살피는 건 여전했다. 조원들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 때문에 오단서의 호위무사들만 고생이었다.

한참동안 뒤적거리던 오단서가 조원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책을 접어 품속에 넣었다.

“그것 참, 이것만 봐서는 소용이 없다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

오단서가 눈을 흘기며 구시렁대자 그때서야 조원들의 시선이 분분이 흩어졌다.

“나이 사십이 다 돼서 이 무슨 추태인지. 에휴…….”

계응걸의 탄식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육전호는 적당히 익은 고기를 들어 시커멓게 타버린 부분을 잘라내었다. 무슨 부위인지 몰라도 군내가 났고 건초를 씹는 것처럼 팍팍했다. 별똥별이 밤하늘을 길게 가르며 지나갔다.


“저 멀리 산등이만 지나면 지척이 영등이요.”

털가죽을 둘러 쓴 채 두 눈만 내놓고 주위 산세를 살피던 원자춘의 말에 오단서와 조원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무림맹에 투신하기 전, 난주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낭인생활을 했던 원자춘이기에 난주 근처의 지리에 밝았다.

육전호와 일행은 거의 한 달 가까이 기련산맥을 헤매고 다녔다.

이제 저 밑으로 보이는 광활한 숲을 가로지르고 그 너머에 있는 산등성이를 넘어가면 뜨거운 음식과 편안한 잠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영등이었다. 영등에서 난주는 불과 삼 일 거리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흐느적거리던 조원들의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음영잔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감사드립니다 +90 12.05.15 20,665 24 -
35 34 +94 12.05.13 31,334 358 8쪽
34 33 +94 12.05.11 25,933 351 10쪽
33 32 +107 12.05.09 26,618 309 11쪽
32 31 +138 12.05.07 26,948 317 18쪽
31 30 +69 12.05.05 25,004 260 9쪽
30 29 +73 12.04.30 27,056 240 12쪽
29 28 +45 12.04.28 24,926 215 15쪽
» 27 +45 12.04.27 26,129 241 10쪽
27 26 +67 12.04.26 24,857 243 16쪽
26 25 +50 12.04.25 25,060 223 19쪽
25 24 +46 12.04.24 25,588 231 15쪽
24 23 +92 12.04.22 27,181 275 21쪽
23 22 +44 12.04.21 25,805 212 15쪽
22 21 +52 12.04.20 25,643 241 17쪽
21 20 +80 12.04.19 27,084 247 23쪽
20 19 +41 12.04.18 24,506 204 16쪽
19 18 +33 12.04.16 25,020 200 12쪽
18 17 +33 12.04.15 25,385 189 14쪽
17 16 +33 12.04.14 26,492 217 16쪽
16 15 +37 12.04.13 27,133 223 19쪽
15 14 +29 12.04.12 25,925 208 13쪽
14 13 +29 12.04.11 25,851 205 14쪽
13 12 +38 12.04.10 26,608 195 16쪽
12 11 +23 12.04.09 26,237 184 11쪽
11 10 +17 12.04.09 26,726 174 14쪽
10 9 +24 12.04.08 27,555 178 15쪽
9 8 +18 12.04.08 27,534 176 11쪽
8 7 +25 12.04.07 29,085 180 16쪽
7 6 +15 12.04.07 31,160 178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