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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 님의 서재입니다.

음영잔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임제
작품등록일 :
2012.05.15 07:19
최근연재일 :
2012.05.13 07:04
연재수 :
35 회
조회수 :
1,022,406
추천수 :
7,844
글자수 :
212,785

작성
12.04.09 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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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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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글자
11쪽

11

DUMMY

“젠장, 이놈 이거 미친 거 아냐? 그렇게 혼자 설치고 다니면 누가 봉급 더 준대? 썩을…….”

“그러게, 지가 먼저 살아야 돈맛도 보고 계집도 품는 건데. 아직 어려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나 봐.”

“근데, 계집은 품어 봤을까?”

“꼴을 봐라, 아직 딱지도 못 뗐을 거다.”

“자식들…… 이 나이 때는 다 제멋에 사는 거야. 나도 한 때는 이랬지. 협의에 목숨을 걸고……”

“네 놈이? 잘도 그랬겠다.”

“이 자식이!”


온몸을 휘감고 돌던 충만한 기운이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허물어진 건 도(刀)와 부딪히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던 기운.

온몸의 관절이 흔들리며 무너졌다.

그 짧은 순간, 살아온 내 삶이 차근차근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왜 그 애 모습이 떠올랐을까.

십오 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기억나지 않았었는데.

골목어귀에 살던 소꿉친구.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살아있구나. 이런 생각을 다 하는 걸 보니.


육전호는 의식이 차츰 돌아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놈 뭔 흉터가 이리도 많아?”

“그러게…… 이 흉터는 꽤 큰데? 한 두어 달은 족히 누워있었겠다.”

“야, 몸도 성치 않은 애를 그렇게 쿡쿡 쑤셔대면 어떻게 해?”

육전호는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부위를 눌러대자 눈을 떴다.

“어? 깼다.”

“야, 육전호, 괜찮냐?”

“이 손가락 몇 개인지 보여?”

왠지 반가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었다. 낯선 곳이었다.

침상 주위로 조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봉천우가 아무 탈 없이 일어날 거라더니 정말이네?”

등오가 자신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죠?”

“어떻게 되긴? 겁도 없이 호사영한테 달려들었다 깨진 거지.”

“호사영?”

“너랑 붙었던 키 큰 그놈 이름이 호사영이야, 패천문 묵혈대의 부대주인데 세 명의 부대주 중에서 차기 대주감으로 손꼽히는 놈이지. 그런 놈이 너 때문에 내상을 입고 도망갔으니…….”

히죽거리는 송덕구의 얘기를 듣다 보니 마지막 상황이 떠올랐다.

급히 운기를 해보았다. 내상이 다 낫지는 않은 듯 통증이 일었다.

하지만, 고통과 함께 온몸에 퍼져있는 진기가 빠르게 단전으로 밀려온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히려 전보다 내력이 더 충실한 듯했다.

“왜 그래?”

“내상도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고…… 내공은 오히려 조금 더 증가한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봉천우가 영약이라도 먹였나?”

조원들도 영문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안 보이는 얼굴들이 있다.

“조장과 천우형님은……?”

“조장은 책임자 만나러 갔고 천우는 그 뭐냐…… 화산파의 사매라는 여자가 찾아와서 같이 나갔어.”

“네…… 그런데 여긴 어디죠?”

“금가장이야, 그때 네가 떼굴떼굴 굴러다니다가…….”



서문영영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 전각 앞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자 물어물어 드넓은 금가장의 후미진 곳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막상 부르려고 하니 자신은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작은 뜰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전각 안에서 조금 큰 음성이 들렸다.

그 사람이 깨어났나 보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강호유람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아니 유람이었다.

풍운각과 상무각의 젊은 무인들과 어울려 떠난 유람이었다.

금가장이 있다는 포강은 아주 먼 곳이었지만, 먼 곳은 아름답다.

먼 곳은 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었다.


무림맹을 출발해서 포강으로 오기까지 한 달여 동안은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즐기는 시간이었다. 어제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푸른 강변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마을을 보는 순간, 다 왔다는 생각에 모두들 긴장이 풀렸었나보다. 그렇게 많은 수의 무사들이 가까이 접근하도록 모르고 있었으니.

자신을 패천문의 호사영이라고 밝힌 남자가 칼을 휘둘렀다. 늘 남자다운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던 종남파의 관철오라버니가 호기롭게 나섰다 쓰러졌다. 그 뒤로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악몽이었다. 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버님이 늘 말씀하시던 도산검림(刀山劍林) 비정강호(非情江湖)가 그렇게 무섭고 잔인한 의미인 줄은 그때서야 알았다.

뒤로 물러나 있던 호사영이 어쩌다 한 번씩 앞으로 나설 때마다 주위의 친구, 오라버니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갔다. 내 손에 들린 검에도 처음으로 붉은 피가 묻었지만 더 이상 검을 들고 있을 힘조차 없을 때, 그 남자가 나타났다.

관철오라버니처럼 당당했지만 그처럼 허무하게 쓰러지진 않았다.

그 덕분에 우린 살아날 수 있었다.

마땅히 고마움을 표해야 했지만 그때 우린 정신이 없었고 그는 의식이 없었다.


“무슨 일이야?”

‘헉!’

서문영영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자신이 서 있는 전각의 뜰로 들어서고 있었다.

봉천우라 했던가?

화산파의 소미언니가 사형이라 부르던 남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여기 볼 일이 있나?”

“네.”

“무슨 볼 일?”

“…….”

서문영영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 거리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서문영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봉천우가 전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네.”

마지못해 간다는 듯이 힘겹게 대답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서문영영이었다.


덜컹!

갑작스레 방문이 열리자 조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방문으로 향했다.

봉천우가 서 있었다.

“이제 오는 거야? 전호 깨어…….”

등오는 봉천우에게 말을 건네다말고 입을 다물었다.

봉천우의 뒤로 녹색 경장 차림을 한 여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낮에 봤던 봉천우의 사매라는 여인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이 여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조심스레 내딛는 걸음걸이부터 바람이 불면 휘청거릴 듯 가늘고 부드러운 허리. 수줍은 듯 붉게 달아오른 사슴처럼 긴 목. 붉은 비단끈으로 가볍게 묶어 뒤로 넘긴 찰랑이는 머리카락. 고개 숙인 얼굴 위로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아직 소녀티가 남아 있는 가늘고 섬세한 윤곽의 얼굴은 어느 봄날의 상큼함을 눈으로 보는 듯 했다.

육전호와 조원들은 방 안으로 들어선 서문영영의 자태에 취한 듯 모두들 말이 없었다.

“흠!”

봉천우의 헛기침소리에 모두들 화들짝 놀란 모습이다.

급히 침상에서 내려온 육전호도 어찌할 바를 몰라, 의자를 준비 한다 어찌한다하며 허둥대는 조원들 틈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전호, 널 만나러 온 것 같다.”

봉천우의 음성에 방 안은 다시 한 번 충격과 침묵에 빠졌다.

“네? 왜 절……?”

육전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철들고 나서 남자들 틈에서만 생활한 자신을 아는 여자라곤 해봐야 고향의 어렸을 적 친구들뿐이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꿈속에서 조차 본 적이 없었다.

육전호가 멍해 있는 사이, 분한 기색이 역력한 조원들이 육전호를 향해 살기어린 눈빛을 한 번씩 날리고는 하나 둘 방을 빠져나갔다.

“어제 관도에 있었던 그 일행 중 한 사람이다.”

봉천우도 무심히 한 마디를 던지고는 곧 나가버렸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흐르자 서문영영이 고개를 들어 육전호를 바라보았다.

조금 큰 키에 평범한 얼굴을 한 남자. 자신의 주위에 있는 남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비범함이나 준수함은 찾아 볼 수 없는 남자.

“서문영영이라 합니다.”

“네, 전 육전호라고 합니다.”

쑥스러운 듯 자신의 시선을 피하면서 인사하는 남자. 그리 낮지도, 높지도 않은 목소리. 조용하지만 의외로 힘이 실려 있어 듣는 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를 지닌 남자였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

“…….”

“내원에 소속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네.”

“어제 일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아닙니다. 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방 안에는 탁자 주위로 빈 의자들이 놓여 있었지만 앉으라는 권유 한 마디 없다.

서문영영은 이 육전호라는 사내가 평소 자기가 알고 지내던 남자들과는 조금 다른, 어쩌면 많이 다른 사내라고 생각했다.

한 손에 곱게 쥐고 있던 하얀 비단 손수건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별것 아니에요. 얼른 회복하시길 바랄게요.”

“…….”

“그럼 이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서문영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육전호를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뜰 한쪽에서 봉천우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벼운 목례를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밤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꿈을 꿨던 것일까. 어느새 그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 향기만 방 안을 맴돌았다.

탁자 위의 손수건은 꿈속 그대로 곱게 놓여 있었다. 손을 뻗었다.

늘 거친 옷감에만 익숙해 있던 육전호에게 지금 손끝에서 전해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은 처음이었다.

서문영영. 그 여자의 품도 이렇게 부드럽고 따뜻할 것만 같았다.

방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봉천우가 다가왔다.

육전호는 말없이 손수건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곱게 접은 손수건의 한 부분이 볼록 솟아나 있다. 접은 부분을 펼치자 호두알만한 흑갈색 환약 한 알이 노란 기름종이에 쌓인 채 들어 있었다.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던 봉천우가 환약을 내려놓았다.

“흑금단두(黑金丹頭)야. 혁련세가(赫連世家)의 비전인데 내상을 치료하거나 공력을 증진시키는 효능이 있다고들 하지.”

“그 여자가 놓고 갔습니다. 별것 아니라고 하면서.”

“별것 아닌 게 아냐. 이걸 어떻게 서문영영이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갖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이 알면 문제가 될 거야.”

봉천우의 얘기를 듣던 육전호는 흑금단두를 다시 손수건으로 감싸 가슴 속 주머니에 넣었다. 가슴 한쪽이 따뜻해지는 것만 같았다.

“어때?”

“뭐가요?”

육전호는 봉천우가 무얼 물어보는지 알았지만 애써 모른 척 외면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두근거림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그런 육전호를 봉천우가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심마(心魔)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아무도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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