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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남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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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김영남
작품등록일 :
2016.04.16 23:31
최근연재일 :
2017.03.19 01:53
연재수 :
11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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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79
추천수 :
528
글자수 :
687,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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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08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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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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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저녁 -64

DUMMY

[오후 15시 10분, 병원]


늦은 점심을 때울 요량으로 병원 식당을 찾았다. 방문객이나 문병 온 사람들이 찾는 식당이다. 음식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간이 싱겁다. 동진은 멀건 설렁탕을 수저로 휘휘 젓다가 식탁 위 소금 병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


동진은 소금 병을 내려놓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청이가 음식이 담긴 식판을 들고 맞은편에 앉는다.


“싱겁게 먹으면 신진대사에도 좋고, 각종 암에도 면역력이······.”


동진은 자신도 모르게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을 잇던 청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렇게 웃는 모습 처음 봐요. 보기 좋네요.”


“편식도 몸에 안 좋긴 마찬가집니다.”


청이가 수저를 들다 말고 깔깔대며 웃는다. 항상 음식에서 파를 골라내던 터라, 최 교수가 애처럼 편식을 다 하냐며 구박했더랬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녀는 설렁탕을 한 수저 떠먹더니, 자연스럽게 미간을 좁힌다. 동진은 슬쩍 소금 병을 집어 들었다.


“박시연 선생님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처음 만난 곳도 언니 진료실이었죠?”


말을 하면서도 청이의 시선은 온통 소금 병에 가 있다. 동진은 소금 병을 슬쩍 그녀 쪽으로 밀었다. 자연스럽게 소금 병을 집어 들던 청이가 소금 병과 이쪽을 번갈아 바라본다.


“앞으로는 먹는 거 가지고, 서로 뭐라 하지 맙시다.”


청이가 또 다시 깔깔대며 웃는다.



병원 내 마련된 카페로 자리를 옮긴 동진은 맞은편에 앉은 청이 눈치를 살폈다. 커피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슬쩍 이쪽을 돌아본다.


“왜요?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동진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는 다시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씩씩하고 당당하다. 그렇지만, 뭔가 다르다.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 그 안에 차가운 실루엣이 드리워져 있다. 전날 공원에서 만난 여자와 같은 눈빛이지만, 그것과는 또 다르게 느껴진다.


전날 체험했던 지옥의 세계, 그곳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여자의 시선. 어떤 통쾌함이나 호기심, 증오 따위는 찾아 볼 수 없는 눈동자. 그건 마치 반짝이지만 투명한 유리알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무런 감정 없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던 모습. 사람이지만, 인형을 보는 듯했고. 말을 하는데, 괴리감이 느껴진다. 그게 얼마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지, 동진은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언제부턴가, 청이의 눈동자도 그렇게 바뀌고 있다.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슬퍼하는데, 투명한 눈망울은 고요한 심연처럼 파랑조차 일지 않았다.


“동진 씨는 결혼 안하세요?”


난데없는 질문에 동진은 하던 생각을 멈추고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결혼은 생각해 본적 없습니다.”


“왜요?”


청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눈동자 가득 호기심이 어려 있다. 유리알이 파르르 떨려든다. 왠지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아직, 아직은 아닌가보다.


“저 같은 사람에게 누가 시집오려 하겠습니까.”


동진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가족도 없는 홀몸에, 변변한 직장도 없는 신세. 갑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부끄러움이 밀려 올라온다. 사실, 이제까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살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마음속을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면 한 사람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행복했던 시절. 우리는 소년과 소녀로 불렸었다. 눈앞에 앉은 기세등등한 아가씨와는 다르게 소녀는 허약하고 말이 없었다. 매일 여동생과 같이 다니던 소녀는, 어느 날인지 잔뜩 수줍어하며 초콜릿 하나를 내밀었었다. 그리고 그 초콜릿의 비닐이 벗겨지기도 전에 새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수줍음이 애틋함으로 다가올 그 무렵에 말이다.


“왜요?”


그녀가 또 다시 묻는다. 동진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주저했다.


“동진 씨는 좀 가꾸면 여자한테 인기가 많을 텐데요”


“감사합니다.”


청이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맥빠진 표정을 짓는다.


“그게 끝이에요?”


“예?”


“감사합니다가 끝이냐고요.”


청이가 토라진 표정으로 팔짱을 낀다. 동진은 미간을 좁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셈입니다.”


“동진 씨는 평소에 뭐하세요? 보면 매일 바쁘신 것 같던데.”


“평소에 하는 일은······.”


없다. 그냥 성당에 앉아 있거나, 목적지가 없는 길을 망연히 걷는 게 전부다. 그녀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린다.


“가끔 영화도 보고 그러세요. 남들처럼······.”


이번에는 그녀가 뒷말을 흐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동진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학병원 원장의 딸, 거기에 의사라는 직분을 가진 엘리트 여성. 반면, 자신은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떠돌이다. 물론 그런 것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지는 건 아니다.


마음 때문이었다. 과거의 아픔과 고통 속을 허우적대는 그 마음속에, 빈자리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느낄 수 있다. 이 혼란스러운 마음 안으로 들어오면, 그녀는 불행해 질지도 몰랐다. 모든 걸 잃고 자신처럼 변해갈까 두려웠다. 어쩌면 이 역시 또 다른 자격지심일지도.


새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린 소녀, 그 후 모든 걸 버리고 오직 가톨릭 교회법에 따라 살겠노라 맹세했다. 교회에 자신을 봉헌하고 세속에 대해 죽었음을 상징하는 검은색 수단을 입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사제가 되어 하느님께 순종하겠다는 순명서약 하리라 믿었다. 어쩌면 소녀 때문에 사제의 길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느님의 사제가 되는 것만이 새의 날갯짓을 잠재우리라 믿었으니까.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한다.’


루가(누가) 복음 13절 33장. 까마득히 잊었던 복음이 머릿속에 각인된다. 아직, 미련이 남아서일까? 신앙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없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닌가보다. 지옥, 모든 건 지옥을 경험하고서부터다.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렵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그렇게 죽고 나서 하느님은 없다고 믿었다. 아니 없다고 믿으려 노력했다. 그런 삶이 청이가 들어오면서부터 바뀌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하느님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그럴 때면 언제나처럼 손등이 가렵기 시작한다. 동진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등 뒤로 청이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고 싶지만, 지금은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오후 18시 30분, 서울]


낮이 짧아졌다. 저녁 여섯시가 넘으니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단청은 길가를 걷다가 슬쩍 깊 옆 카페를 돌아봤다. 창문 쪽에 앉은 연인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얼굴 가득 행복이 넘쳐흐른다. 그녀는 카페 문손잡이를 잡아가다 슬쩍 놓고 말았다.


이젠 불어오는 바람도 제법 차갑다. 단청은 옷깃을 꼬옥 여미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차를 끌고 왔으면 이 고생 안할 텐데, 다시 돌아가기는 싫다.


“아이참, 줘봐 내가 해줄게.”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연인들, 남자애는 여자가 목에 맨 스카프를 정리해주고 있다.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보기 좋다. 단청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뿜었다.


‘내가 시집갈 때가 됐나?’


이미 혼기가 찬 건 맞다. 그렇지만, 아직 시집갈 생각은 없다. 작은 아빠 단효광은 검사결과를 숨기고 보여주지 않았다. 김무영 과장도 모르는 척 하는 눈치다. 그런다고 모를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다. 이미 검사실에는 그녀가 심어둔 소위 첩자들이 많이 숨어 있었다.


단청은 길을 걷다 말고 잠시 멈춰 섰다. 안 그럴 줄 알았는데, 조금 당황스러워진다. 첩자들의 보고를 받고 대충 짐작한 것과, 막상 검사결과를 받아보는 일은 천지차이다. 작은아빠는 일단 입원부터 권했는데, 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치료약은커녕 병명도 모른다고 했잖은가? 그런데 무슨 입원을 하라는 건지, 저번처럼 침대에 누워서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라는 걸까?


아니, 이번은 그때와 다르다. 당시에는 눈 쪽에만 문제가 있었는데, 지금은 몸 전체에 암세포가 퍼졌다. 좌절하지 말고 힘내라는 응원은 일반 환자에게나 하는 거다. 단청은 근처 벤치에 쪼그리고 앉았다. 처음 시한부 인생임을 알았을 때, 별로 감이 안 왔다. 김무영 과장을 만나고, 연구소 사람들과 수다를 떨 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만나고, 그가 그렇게 떠나버리고 나서부터 뭔가 달라졌다.


다른 사람은 아니더라도 그에게서만은, 힘내라고 이겨낼 거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툭’


손등으로 물방울 떨어져 내린다. 조금, 정말 조금만 서러웠다. 손등위에 있던 물방울이 쪼르륵 굴러 떨어진다. 단청은 손을 들어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러다 슬쩍 손가락에 낀 반지를 내려다봤다. 신부님이 주신 로사리오 반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힘이 되어준 고마운 존재다.


단청은 고개를 들고 사람들이 지나는 거리를 응시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기류가 보인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검은 기운은 언제나 주변을 맴돌았다. 단청은 슬며시 손가락에서 반지를 뽑아냈다. 그와 동시에 검은 기류가 세차게 휘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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