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엿이나 먹어라
간의 경풍을 확인한 그는 인모의 얼굴을 좀 더 찬찬히 살폈다.
다행히 인모의 얼굴에 윤기가 흘렀고, 오색(五色)이 뚜렷했다.
이 모든 것을 살핀 후, 그는 인모의 치료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야경증은 때가 되면 자연치유가 됩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가족들이 심한 불편을 겪을 뿐만 아니라, 아이의 성장도 더디게 됩니다.”
리청하는 그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잘 아시겠지만 아이들의 성장 호르몬은 수면 중에 많이 분비되는데, 수면의 질이 떨어지니 성장에도 방해를 받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치료가 가능하다면 자연 치유되기를 무작정 기다리실 일만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 애가 크지도 않는 것 같고 신경질도 자주 내고, 너무 힘들어요. 원장님. 자연치유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제가 먼저 죽겠어요.”
“하하. 얼마나 고충이 크신 지 충분히 이해됩니다. 고칠 수 있으면 고쳐야죠.”
“고칠 수 있을까요?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고 하던데요?”
“여러 가지 치료방법이 있습니다. 인모에게 투약할 한약 처방도 있고요. 하지만 굳이 한약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그러면 우리 인모 치료가 쉽다는 말씀인가요?”
리청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인모의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이 만나는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여기를 한방에서는 행간혈(行間穴)이라고 합니다. 이 행간혈을 삼릉침으로 사혈하면 만족할만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치료는 해봐야 압니다. 미리 자신할 수는 없는 일이고요.”
“사혈이요? 피를 뽑는다는 말씀이시죠? 체하면 손가락 끝을 바늘로 찔러 피를 내는 것처럼 말이죠?”
리청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낫는다고요?”
리청하는 조금 허탈한 표정으로 또 물었다.
이렇게 간단히 치료가 된다면 지난 몇 달 동안 왜 그 고생을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말이 믿기 어려워서 이기도 할 것이다.
“100% 낫는다고 장담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치료 후 며칠은 예후를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 만일 효과가 없다면 그 때 한약을 써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봐서는 굳이 한약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네요.”
“침은 아프지 않나요? 애가 무서워할 것 같아서 침은 안 맞힌 거거든요.”
“당연히 조금은 아픕니다. 삼릉침으로 찔러야 하니까요. 하지만 아주 잠깐입니다.”
리청하는 잠깐 망설였다.
“계속 고통 받는 것보다는 잠깐 아픈 게 낫지 않을까요?”
“예. 치료해 주십시오.”
그는 의료용 장갑을 꼈다.
그런 다음 행간혈 주변을 소독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삼릉침으로 행간혈을 사혈했다.
머뭇거리면 더 힘들다.
그는 두 손으로 치약 짜듯 주변 부위를 눌렀다.
그러자 시커먼 피가 나왔다.
아이는 침을 찌를 때는 가만있다가 피를 보자 울기 시작했다.
“침은 아프지 않나보네요?”
“그러게요.”
그는 검은 피가 만족할 만큼 나오자 그 부위를 다시 소독했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밴드를 붙였다.
“이 밴드는 내일 아침에 떼시면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꼭 당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조금 전에 한 치료는 인모에게만 해당되는 치료법입니다. 만일 효과가 있더라고 주변 분들에게 소문을 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아이에게는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이 날 수도 있으니 꼭 지켜 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
장인모의 치료가 다 끝났는데도 선 회장은 아무 소식이 없었다.
두 분의 대화가 꽤 길어질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1시.
그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아차차!
선 회장이었다.
-예. 회장님.-
-아이구, 허 원장. 이거 주무시는데 전화 한 거 아닌가 모르겠네?-
-맞습니다. 코오∼ 자고 있었는데 전화하셨네요.-
-미안하네. 미안해.-
-약주를 많이 하셨나보네요?-
-아, 술? 많이 마셨지. 기분 좋게 마셨더니 술이 하나도 안 취하네.-
-리진 회장님하고 자리가 즐거우셨나보네요?-
-아, 즐겁다마다. 우리 너무 잘 통하더라고. 아, 그리고 우리 형님 동생하기로 했어. 알고 보니 내가 한 살 위더라고.-
-잘 되셨네요. 일은 잘 진행 되셨고요? 아함!-
그는 슬쩍 하품을 한 번했다.
그러건 말건 선 회장은 혼자 신나있었다.
-됐어. 성공했어. 이번에 성원생명과학에서 나온 화장품하고 발모제에 대해 리진 회장님께 말씀 드렸더니 큰 관심을 보이시더라고. 하하하.-
-잘 됐네요.-
-그 외에도 서로 도울 일이 있으면 돕기로 했어. 나보고 베이징에 한 번 오래.-
-아! 저 오늘 광고 계약 정식으로 했습니다. 저 광고 찍으러 갈 때 같이 가시면 되겠네요.-
-그래도 되지만 나 혼자 가도 돼. 우리 서로 번호 땄거든.-
-잘 따셨네요. 이젠 제가 중간에 안 껴도 두 분이 직접 연락하시면 되겠네요?-
-그래도 자네 도움이 필요할 때도 많지. 아무튼 고맙네. 허 원장. 이게 다 자네 덕분이야.-
-아닙니다. 회장님.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그래서 말인데, 허 원장 지금 한의원 말일세. 거기 세 들어 있는 거지?-
-예. 맞습니다.-
-그 건물 내가 사줄까?-
-회장님이 왜요?-
-왜는 왜야? 자네 그 정도는 받을 자격 충분하지. 지난 번 미국 기업 인수 잘못해서 날릴 뻔한 돈이 몇 조나 되는데도 손톱만큼도 뭘 바라질 않았지, 오늘 일도 그렇지.-
-괜찮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내가 미안해서 그렇지. 나 경우 없는 사람 아냐.-
-제가 지금 있는 건물은 죽은 건물이라서 살 가치도 없습니다.-
-그렇지? 내가 봐도 그 자리는 아냐. 허 원장이니까 잘되는 거지.-
-아유! 아닙니다.-
-그러면 보자! 지하철 역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은 걸로 하나 사줄까?-
-회장님. 거긴 지금 제가 있는 건물보다 몇 배는 비쌉니다.-
-비싸봤자지. 아, 내가 사준다니까.-
-아닙니다. 저는 제가 받을 돈만 받겠습니다.-
-아아, 정말 사람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네.-
-팔짝 뛰실 일 전혀 아닙니다. 받을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안 받는 겁니다.-
-이보시게.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한의사생활 청산하고 우리 회사에 들어와 일 배우자. 그게 좋겠어. 자네라면 한 10년만 경험 쌓으면 큰 회사 하나 맡을 수 있어. 아냐. 10년도 안 걸려. 3년이면 충분해. 그러자. 준영아. 회사에 들어와서 경영수업 받자. 엉?-
-그건 제가 싫다고 이미 말씀 드린 것 같은데요.-
-왜 싫어? 왜?-
-그 큰 회사를 제가 어떻게 경영을 하겠습니까? 저한테는 지금 한의원 경영이 딱 맞습니다.-
-어허! 요즘 세상은 자네처럼 지나치게 겸손한 것도 비호감이야. 사람들이 재수 없어 한다!-
-겸손이 아니라 솔직한 제 생각을 말씀 드리고 있는 겁니다.-
-자꾸 못한다고 하지 말고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봐. 그리고 우리 민경이도 한 번씩 만나서 데이트로 하고.-
-저는 민경 씨는 좀.-
-아니, 꼭 결혼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한 번 만나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보라는 말이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만나보고 아니다싶으면 그 때 그만 두면 되는 거지. 처음부터 쉴드칠 건 없잖아.-
-됐습니다, 회장님. 제 결혼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여튼 이 자식은 내가 말하는 건 다 싫대. 다. 다. 야, 인마. 네가 그렇게 잘 났냐? 네가 그렇게 잘 났어?-
-회장님. 화만 내지 마시고요.-
-너 같으면 화 안 나겠냐? 다 거절, 다 퇴짜. 에라이, 이 천하의 나쁜 놈아. 이 재수 없는 놈아. 엿이나 먹어라. 퉤퉤퉤. 에이.-
딸깍.
선 회장은 일방적으로 끊었다.
준영은 자다가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뭐? 엿이나 먹으라고? 천하의 나쁜 놈! 우와! 우와아아아아!”
그는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
사흘 뒤 선 회장이 한의원으로 쳐들어왔다.
점심시간 바로 직전에.
선 회장은 그를 일층 백반 집으로 끌고 갔다.
“뭐 드시겠어요?”
혜리가 물었다.
“우리 아무거나 줘요. 제일 맛있는 걸로.”
선 회장은 물 한 모금을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나, 조금 전에 리진 회장한테 연락 받았는데, 이름이 뭐더라? 리청하 아들?”
“장인몹니다.”
“그래. 그 아이가 지금까지 야경증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대. 최근에는 매일 밤마다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는데, 사흘 동안 한 번도 안 깨고 그렇게 잘 잔대.”
그는 선 회장이 못마땅해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밥 먹을 때도 얌전하게 잘 먹고, 공부하는 시간도 훨씬 길어지고. 정서적으로도 훨씬 안정되고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리 회장이 자네한테도 전화했나보네?”
“리청하 씨가요. 오늘 아침에 전화 하셨어요. 고맙다면서요.”
“그랬겠지. 리 회장이 나한테 뭐라는 줄 아나? 허 원장 같은 사람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면 믿을만하다면서 화장품하고 발모제 계약하재. 하하하.”
“잘 됐네요.”
“물론 성분 검사야 하겠지만, 리 회장이 자네를 철석같이 믿더라고. 팔꿈치도 딱 한 번 맞았는데, 지금까지 하나도 안 아프대.”
“다행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업 분야도 구체적으로 의논을 하자고해서 실무자들하고 며칠 후에 중국 갈 생각이야.”
주문했던 음식들이 식탁위에 차려졌다.
“나야 자네하고 가고 싶지만 거절할 게 뻔하고. 자, 어서 먹자고.”
선 회장은 우거짓국 국물을 몇 번 입에 넣더니,
“캬아! 국 좋다. 아주 시원하네.”
“회장님 혼자 많이 드십시오. 저는 회장님께서 주신 엿을 하도 많이 먹었더니 며칠째 배가 고픈 줄 모르겠습니다.”
“내가 엿을 줬다고? 무슨 소리야?”
“모른 체 하실 겁니까? 리진 회장님 만나신 그날 밤에, 저한테 전화하셔서 ‘이 천하의 나쁜 놈. 엿이나 먹어라’, 하시면서 엿을 얼마나 많이 보내셨는지 먹어도 먹어도 줄지를 않습니다. 다 먹으려면 앞으로도 한 삼 년은 걸릴 것 같은데요.”
“엥! 내가? 엿을 보냈다고?”
“그러면 누구 얘기하는 줄 아십니까? 설마 모른다고 발뺌 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 아아! 하하하. 나 그 날 리 회장하고 술 많이 마신 거 알지?”
“술주정하신 거라는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군요?”
“그래. 술주정한 거네. 술주정. 나 술주정 귀엽게 한다는 말 자주 들어.”
“귀엽게요?”
“그럼. 아, 술 취한 사람이 뭔 말을 못 해?”
“그러면 저한테 지하철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빌딩 사주겠다고 하신 말씀도 술주정이시고요?”
“내가 그런 소리까지 했어? 야아, 나 그날 완전히 개 됐네, 개 됐어. 아우, 술 끊어야겠는데.”
준영은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서 드시게. 이 집 음식 맛 좋네. 맛집이야. 맛집. 하하하.”
선 회장은 이번에는 나물 무침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자네 이젠 돈방석에 올라앉을 날도 얼마 안 남았어. 안 그런가? 화장품하고 발모제 중국에서 대박나면 성원생명과학 주가가 몇 배가 오를 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닌가?”
그는 선 회장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야아! 휴지조각이 될 줄 알았던 주식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줄이야.
뭐, 하긴 그것도 자네 복이지. 아냐. 복이 아니라 실력이지. 자네의 그 혜안. 인정해. 자네 능력, 내 그건 인정하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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