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돈 갖고 튀었다
정은실 씨는 하루 종일 바빴다.
침구실의 침대위에서 치료 받던 환자가 나가고 나면 깨끗하게 정리했다.
혹시 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기라도 하면 다 치웠다.
다음 환자가 들어와서 불결함을 느끼지 않게 말끔하게 청소했다.
뿐만 아니라 세면대에 낀 물 때도 청소하고 의자위도 수시로 닦았다.
“정은실 씨. 그런 일은 안 하셔도 됩니다. 남들 보면 제가 욕 얻어먹어요. 어르신 부려 먹는다고요.”
그는 처음엔 불편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목발을 짚고 한의원을 드나들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원장님도 참! 이제 며칠 후면 용인가서 매일 청소해야 할 텐데, 미리 연습하는 건데 뭐, 어때요? 다 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원장님은 모른 체 하시면 돼요.”
말려도 듣지 않았다.
“정말 놀랍기는 하네요. 이 분 얼마 전까지 목발 짚고 다니시는 걸 봤는데, 그 사이에 이렇게 좋아지다니요.”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환자 분들 중 한 분이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유, 말도 마세요. 원장님께 침 한 번 맞을 때마다 팍팍 좋아지는 게, 뭔가에 홀린 것 같다니까요. 그 쪽은 어때요? 많이 좋아졌죠?”
정은실 씨는 그 환자에게 물었다.
“예. 저도 많이 좋아졌어요.”
“며칠 전에 삐져서 그냥 가시더니 다시 오셨네. 우리 원장님이 한 환자를 붙들고 하도 오래 보니까 기다리다 지쳐서 그냥 가셨죠?”
50대의 여자 환자는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삐진 게 아니라 약속이 있어서요. 그래서 기다리다 간 거예요. 삐진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나, 삐졌어요, 하고 얼굴에 다 씌어 있던 거 내가 다 봤는데요.”
여자는 얼굴을 붉히더니 갑자기 준영에게 화풀이했다.
“아, 원장님은 다 좋은데 한 환자를 너무 오래 보세요. 저만 오래 봐 주시고 다른 분들은 짧게 봐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하.”
정은실 씨는 정말 회복이 빨랐다.
목발을 안 짚고도 걷게 된 건 오래전이고, 허리 통증도 거의 사라졌다.
무릎 통증은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본인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교통사고로 재기불능에 빠졌던 환자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정은실 씨가 한의원 내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다.
적당히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인 말대로, 며칠 후면 어차피 용인으로 가서 몇 시간씩 청소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며칠 전부터 워밍 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정은실 씨. 졸업 기념으로 제가 보약 한 제 지어 드릴 테니 드세요.”
“말도 안돼요, 원장님. 그동안 베풀어주신 은혜만 해도 평생 다 못 갚을 텐데 보약 선물이라뇨! 안됩니다. 빈대도 낯짝이 있지.”
“체력이 약해져서 청소 일 무리하게 하시다가 탈 날까봐 그러는 거예요. 잘못하면 어렵게 얻은 일자리 잃고, 다시 저한테 오시게 될까 봐요.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그래도요.”
“용인까지 들고 가시기엔 무거워서 안 되고, 며칠 뒤에 원룸으로 보내 드릴게요.”
“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많이 드려서, 이젠 그 말씀 드리기에도 민망하네요. 원장님.”
정은실 씨는 눈물만 뚝뚝 흘렸다.
#
건물주 황종우 씨 역시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목 보호대와 목발은 며칠 전에 졸업했다.
정은실 씨보다 치료를 늦게 시작했지만 회복은 더 빨랐다.
심한 노동으로 몸을 혹사 시키지도 않았고, 영양상태도 좋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거의 안 아프네요. 원장님.”
“다행입니다.”
“이 정도만 돼도 일상생활에는 거의 지장이 없습니다.”
“제가 봐도 그러네요.”
그는 황종우 씨의 표정을 살핀 다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런데 오히려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심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계시죠? 지금은 오히려 그 게 더 큰 문제인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원장님.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밤에 잠을 잘 못 잡니다. 전에는 잘 잤거든요. 겨우 잠이 들어도 악몽에 시달려 자다가 깨는 게 하룻밤에 열 번도 넘어요.”
“그러니 하루 종일 피곤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맛도 없고 소화도 안 되고요?”
“맞습니다. 원장님.”
그는 건물주에게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지는 알고 있었다.
정은실 씨에게 전해들은 얘기도 있었다.
“박정옥 씨는 지금도 여전하시고요? 돈도 잘 내놓지 않고, 재결합도 거부 하시나요?”
“제가 거의 매일 설득도 하고 애원도 하고. 그랬더니 쪼오금, 정말 멸치 똥만큼 달라지기는 했거든요.”
“그 정도라도 달라지셨다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집 사람이 마음을 바꿔 재결합 하자고 하기 전에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건물주에게 측은함을 느낀 적이 별로 없었지만 요 며칠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원장님. 그런 건 고칠 수 없나요? 돈 욕심 많은 건 침으로 어떻게 치료가 안 되나요?”
“돈 욕심은 저도 많습니다. 고치고 싶지도 않고요.”
“사실 그 돈 제가 다 번 거거든요. 그런데 세금 안 내겠다고 전 재산 마누라 앞으로 넘기는 바람에, 전 완전히 거지 됐습니다.”
건물주가 정은실에게 한 번에 5만원 씩, 세 번에 걸쳐 용돈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사이에 돈이 오가는 현장을 목격한 차 선생은 그에게 말했다.
“원장님. 우리 건물주 말이에요. 정은실 씨에게 용동 받는 거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던데요. 그냥 어이없다는 생각만 들던데요.”
사람 팔자!
그래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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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원 선수가 치료 받으러 왔다.
세 번째 치료이다.
두 차례에 걸쳐 20개의 경결점을 침으로 풀었다.
첫 번 째 치료에서는 후계 혈에 자침해서 득기했다.
두 번 째 치료에서는 지정혈(支正穴)에 자침해서 득기했다.
세 번째 치료를 하는 오늘은 남은 경결점을 다 풀 생각이었다.
그리고 소해혈에 자침해서 득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해혈 위로 수술 자국이 지나갔다.
차선책으로 영도혈(靈道穴)에 자침해서 득기감을 얻을 생각이었다.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양재원 선수.”
얼굴만 봐도 반은 알 수 있었지만, 그는 그래도 물었다.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원장님. 어제는 오래만에 연습 투구를 했거든요. 처음엔 20개 정도 던져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아, 던져보니까 팔꿈치 상태가 괜찮더라고요.“
“그래서요?”
“그렇게 하나 하나 던지다보니까 50개까지 던졌거든요. 그런데도 괜찮았어요. 통증도 못 느끼겠고요. 무엇보다 인대와 힘줄이 팔꿈치관절을 꽉 잡아주는 느낌! 그런 느낌 정말 오랜만에 느껴봤습니다.”
“많이 좋아진 건 분명하네요.”
“저, 정말 죽고 싶었거든요.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야구밖에 없는데 그만 두면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살아야할 이유가 없거든요.”
재원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살아야죠. 어쩌면 죽는 게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 이제는 희망을 본 것 같습니다. 다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장님.”
재원은 마침내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어린 아이라면 따뜻하게 안아주기라도 할 텐데.
자신보다 더 큰 남자라서?
그는 재원이 눈물을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자. 침구실로 가시죠. 치료 받으셔야죠.”
그는 당초 생각대로 침으로 나머지 경결점을 다 풀었다.
그리고 영도혈에도 자침했다.
다음 번 치료도 이미 머릿속에 그려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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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침구실에서 환자에게 침을 놓고 대기실로 나오는데, 차 선생이 유선 전화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원장님. 황종우님 전홥니다.”
“그래요. 내 방에서 받을게요.”
그는 진료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원장님. 저, 당분간 한의원에 치료 받으러 못 갈 것 같습니다.-
-왜요? 무슨 문제가 생기셨나요?-
-예. 문제도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누라가 어제 뇌출혈이 와서 수술 했습니다.-
-아아! 세상에! 어떡합니까? 어르신. 지금 상태는 어떤가요?-
-아직은 의식이 없습니다. 전화로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고, 아무래도 당분간은 제가 마누라 곁에 있어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셔야죠.-
-아이유, 이것 참.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내가 다 나아가니까 마누라가 쓰러지고요.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걱정이 크시겠습니다.-
-아무튼 한숨 돌리고나서 다시 치료받으러 가겠습니다. 원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곧 쾌차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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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음날 병원으로 갔다.
박정옥 씨는 수술 후 회복 상태여서, 황종우 씨만 만날 수 있었다.
“마누라가 6개월 전에 지인에게 3억을 빌려줬거든요.”
“어르신 지인이요?”
“아뇨. 저는 마누라한테 용돈 타 쓰는 처지인데, 제가 돈이 어디있어서요?”
“······.”
“우리 마누라 고등학교 동창이요.”
“차용증은 쓰셨을 거 아니에요?”
“썼다고 하더라고요. 제 눈으로 확인한 거는 아니지만요.”
“돈에 철저하신 분이 친구한테는 너그러우셨네요?”
“이자를 한 달에 1% 씩 주겠다니 거기에 혹한 거죠,”
“그 정도면 어마어마한 고금리이네요?”
“월 삼백 씩 이자를 꼬박 꼬박 꽂아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그만 돈을 빌려줬나 보더라고요.”
상투적인 수법의 냄새가 강하게 났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약속한대로 삼백만원씩 꼬박꼬박 들어왔겠죠?”
“맞습니다. 그런데 어제 다른 고등학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돈 빌려간 그 친구가 외국으로 튀었대요.”
사기 수법이 전혀 새롭지 않았다.
십 년 전에도, 이 십 년 전에도 써먹던 사기 수법이다.
저 사람에게 빌린 돈으로 이 사람 이자주는 식의 돌려막기 수법.
그러다가 어느 순간 큰돈이 모이면 그 돈 갖고 튀는 수법.
어쩌면 이런 사기수법은 조선 시대에도 있었을지 모른다.
‘빤히 보이는 이런 사기 수법에 어떻게 속을 수가 있지?’
속을 수 있다.
탐욕이 이성을 마비시키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된다면.
남의 바둑은 수가 잘 보이지만 내 바둑은 안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 전화를 받고 박정옥 씨가 쓰러지셨군요? 뇌출혈로요?”
“예. 그게 어제 오후 일입니다.”
“평소 지병이 있으셨나요? 고혈압이나 고지혈증이나 당뇨나, 뭐, 그런 병이요?”
“다요. 원장님께서 말씀하신 병이 다 있었습니다.”
그는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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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수술을 한 지 며칠이 지났다.
박정옥 씨는 여러 가지 장애가 발생했다.
가장 불편한 장애는 좌측 상하지마비와 언어장애였다.
혼자서는 걸을 수 없었다.
목발을 짚고도 걸을 수 없었다.
말을 완전히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말인지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수십 년을 함께 산 황종우 씨와는 의사소통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박정옥 씨는 불편해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잘 놀던 혀가 말을 안 들으니 절망했다.
3 억에 망가진 자신의 몸 상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죽고 싶었다.
우울증이 자신의 코앞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여보. 그 돈 3억은 잊어 버려. 그 돈 찾으려하다가는 당신 죽을지도 몰라! 살려면 그 돈은 내 돈이 아니다, 생각하고 건강이나 되찾자. 응?”
전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미쳤어? 3억이야, 3억. 3억을 어떻게 포기해? 죽었으면 죽었지 난 절대 포기 못해. 아니, 안 해. 그 돈이 어떤 돈인데!”
그러나 박정옥 씨는 달라졌다.
뇌출혈이 그녀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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