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Kairte 님의 서재입니다.

배같은 동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라이트노벨, 일반소설

Kairte까르
작품등록일 :
2020.01.17 23:48
최근연재일 :
2021.02.27 22:00
연재수 :
85 회
조회수 :
4,887
추천수 :
77
글자수 :
487,621

작성
20.12.20 06:00
조회
29
추천
1
글자
12쪽

72. 가족 망쳐놓기 下 - 4

DUMMY

위치가 좋지 않았다. 구석진 난간을 등지는 내 앞에 은정은 파훼구인 북쪽과 서쪽 길목 한가운데를 가로막았다. 나는 화를 내기보다 은정과 얽매인단 사실에 착잡한 감정을 드러냈다.

"다연 언니 어떻게 회유한 거야? 제법 오래갈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고 있지?"

"언니가 문자로 알려줬으니까."

즉후, 은정은 가늘게 뜬 눈매로 내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모자랑 마스크를 내팽개쳤대? SMK에서 쫓겨난 거야?"

"생각하곤."

나는 은정의 팔을 바라보았다. SMK 완장을 차지 않은 평범한 생활복 차림이었다. 누나가 은정과 연락을 이어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흐름이란 건 누나가 아직 망할 아줌마와의 미련을 제대로 떨치지 못했단 뜻이다. 그러나 나는 은정을 상대로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요 계집은 허울만 뽐내는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평하면서 SMK 모임은 다니나 보네?"

"뭐래? 길가다가 애들 모인 거 보고 와봤던 거야. 그러다 우연히 오빠 실루엣을 봤던 거고."

"그럼 얘기가 편하네."

나는 이성을 되찾으며 은정에게 짓궂은 미소를 지어갔다.

"너는 지금 SMK, 아니, S&M을 비롯한 모든 것들에 버림받았단 뜻이잖아."

예상대로였다. 은정은 실소를 지으며 얼굴을 찡그리더니 생활복 상의 하단 쪽을 양손으로 힘 있게 쥐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정은 손사래를 치며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려 했다.

"그딴 난장판에 어울릴 필요 없잖아? 난 그저 선유 오빠를 좋아하는 거니까."

"봐. 선을 그어버렸잖아. 그런 배짱으로 강당에 어떻게 발 들일 셈이지?"

"웃기지 마! 내가 좋아서 가는 거거든. 누가 탓할 건데?"

벌써부터 피로감이 싹 도는 순간이었다. SMK 주시하는 것도 힘든 마당에 서로 물어뜯고 난리 치는 나날이 있다면 무대 운영에 있어 고초를 겪을 것이다. 많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는 목적과 괴리되는 부분이었다. 이대로면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은정은 SMK 계집들 중에서 선유가 호의를 표하는 몇 안 되는 멤버였다. 이 계집이 SMK에서 나와 혼자 눈치 보며 관람하게 된다면 점점 SMK의 본질이 퇴색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은 어디까지나 2순위였기 때문이다. 나는 표정을 늘어트린 채 은정 앞에서 귀찮은 티를 내야만 했다.

"뭐야? 내가 우스워?"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자. 지금 바쁘니까."

"어딜 가? 오빤 지금 내 앞에 포위되었...!"

큰아버지의 지혜가 또다시 재평가되는 찰나였다. 나는 방심한 은정의 팔을 노려 그대로 등 뒤에 붙여 제압에 성공했다. 은정이 고통을 호소할 틈을 타 나는 재빨리 팔을 풀어 은정을 가볍게 밀쳐냈다.

"야! 어디 가! 야!"

컨벤션 남쪽 난간부터 2층으로 이어지는 넓은 계단 덕분에 은정을 따돌리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타이밍도 맞아 나는 청색등이 켜진 횡단보도를 재빨리 건너갔다. 그 후, 앞쪽 모퉁이에서 좌측으로 꺾어 주상복합 오피스텔 건물 안 샛길로 몸을 숨겼다.

'갑자기 확 나와서 핀잔이나 들고. 귀찮게.'


은정은 또다시 이번 일을 빌미로 나와 누나의 관계를 이간질할 것이다. 어떻게 나와도 상관은 없었다. 나는 이미 누나와의 큰 약속을 짊어진 상태였다.

'이번 주만 조용히 넘어가면 되는 거야?'

'응. 아는 형 일만 끝나면 누나랑 같이 아주, 엄마 만나러 갈 거니까.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거기에 수기로 각서까지 작성해 서로의 손도장을 우측 하단에 나란히 찍어두었다. 망할 아줌마의 얼굴을 보는 건 무척이나 싫었다. 그러나, 이런 이간질 속에서 더 이상 참을 순 없었다. 이 이상 사이가 틀어지지 않도록 전면전을 대비해야만 했다. 나는 조심히 주상복합을 빠져나와 휴대폰으로 다가올 일정들을 확인해갔다. 빡빡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것도 아닌 몇 주가 될 예정이다. 잠시 뒤 햇빛이 내 휴대폰 화면 쪽을 비추어 잠깐 동안 주변에 섬광이 번뜩였다.

'으윽!'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질끈 깜빡였다. 그 후 다시 화면을 보려는 순간.

'!!!!!!'

착란 현상이 일어난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인 건 현실이었다. 앞쪽 한 뼘 정도 차이나는 곳에서 유나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거짓말!'

유나는 점점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그야말로 돌발상황, 모자와 마스크를 차지 않은 걸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몸은 가볍게 떨며 어떠한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아닌가?"

유나는 고개를 갸웃대더니 짧게 뒷걸음질 쳐 내 전체적인 모습을 바라보았다.

"뭔가 닮긴 했는데 분위기가 다르단 말이지."

유나는 인상을 지으며 내 외관을 의심하는 듯 보였다. 생각해보니 나는 얼굴에 여드름으로 범벅이 되어 이전 민낯과도 차이가 확연한 상태였다. 유나의 의심이 계속되는 순간 나는 조금씩 상황을 모면할 작전을 세워갔다.

"뭔데 자꾸 봐요?"

나는 곧잘 코맹맹이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 목젖을 울리면서 나오는 양 같으면서도 찌질한 남고생 같은 느낌이었다. 이에 유나는 눈을 희번덕 뜨며 놀란 듯 보였다.

"뭐야? 사람 잘못 봤나..."

"제가 혹시 잘못한 거라고 있는 건가요?"

"그냥 가던 길이예요."

유나는 의연하게 주변을 빠져나와 상가 쪽 큰 사거리로 향했다. 잠깐 뒤로 돌아 내 모습을 재확인하는 뉘앙스가 보였으나 거기서 그쳤다. 유나가 내 시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주상복합 통로 왼쪽 돌담에 몸을 기댔다. SMK 계집들의 여파를 생각지 못한 실수였다. 나는 재빨리 집으로 헐레벌떡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민낯을 떵떵이 드러내기엔 아직 이른 것 같다.

오늘의 여파로 미로는 SMK 계집들과 채팅창에서 오랫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모임의 목적은 역시나 이번 주 금요일에 나설 2차 원정이었다. 이번 일을 토대로 나는 교문 경비에서 빠지기로 결심했다. 대신 영상을 준비해 SMK를 상대로 으름장을 놓을 순 있었다.

이번 주 목요일 저녁, 나는 아버지께 마네킹 상반신 모형을 건네받아 저번에 쓰지 못한 분무기와 카메라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누나는 문틈을 벌리더니 맹한 시선으로 내가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누나, 위험하니까 피해 있어."

누나가 문을 닫고 나서자마자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배수구 바로 위에 놓인 마네킹 앞에 나는 얼굴 전체를 가리는 플라스틱 고글을 착용한 채 양손에 분무기를 쥐고 있었다.

"간다!"

화장실에서 찍은 영상은 무사히 SMK 채팅창으로 옮겨졌다. 다음날 오후, 나는 스튜디오 화장대 의자에 앉아 SMK 채팅창 상황을 확인해갔다. 예상대로 과열된 반응이 줄을 지었다.

'저런 건 대체 어디서 산 거냐고...'

'강연 오빠 얼굴에 먼저 시험해 본 거라며?'

'왜 저러는 거지???'

오늘도 저번과 같이 정문에 2명, 후문에 2명이 배치되어 SMK 계집들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정문 쪽에 선유가 가고, 후문 쪽에 나미 선배가 지원을 나섰다. 남은 인원들에겐 클렌저가 듬뿍 담긴 분무기를 건네주었다. 나는 시험 삼아 올려뒀던 영상을 다시 재생해보았다. 진하디 진한 매트 쿠션에 빨간 립스틱, 징그러울 수준의 아이브로우 라인에 마스카라까지 치장된 마네킹 얼굴, 거기에 나는 클렌저가 담긴 분무기를 힘 있게 난사해댔다. 관찰자 시점으로 본 결과 마네킹 화장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아예 화장품들과 이리저리 뒤섞여 엉망진창이 되었다. 은정에게 이런 짓을 잘도 벌여놓고 적반하장으로 성질내는 SMK 계집들의 반응은 덤이었다. 물론 이러려고 스튜디오에 있던 건 아니었다.

"이강연! 슬슬 교대 시간이야."

현재 시각, 강당에선 1학년 학생들이 줄지어 투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 학생회 인원들과 몇몇 선생님들이 강당 외곽 테이블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레미 부원들은 강당 무대 양쪽으로 트인 작은 계단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SMK 계집이 안에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하련은 양손으로 손부채질을 하며 화장대를 거쳐 냉장고로 향했다.

"김하련, 밖에 많이 더워?"

"장난 아니야! 왜 에어컨이 망가져선."

하련은 얼굴 곳곳에 진땀을 흘리며 냉장고에서 이온 음료 큰 사이즈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까자마자 입안에 폭포수처럼 발칵발칵 들이키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캬아! 진짜 SMK 것들만 아니었어도!"

나는 뒤쪽 벽에 붙은 일정표를 확인한 뒤 하련과 대면했다.

"이제 슬슬 2학년 투표 차례인데, 진짜 안 할 거야?"

"안 해! 앞에서 그 꼰대 부회장 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고. 으! 짜증 나."

"2번 후보자만 피하면 되는 거 아니야? 듣자 하니 1번은 완전히 대립된 공약이던데."

"내가 괜히 안 하는 거겠어? 내가 뽑고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이러는 거라고."

"어련하겠어. 이제 가봐야겠다."

나는 앉던 계단에서 일어나 조금씩 몸을 풀어갔다. 슬슬 뒤쪽 문을 열고 가려는 찰나.

"늦어서 미안해!"

안쪽 문이 다짜고짜 열림에 하련은 당황한 나머지 이온 음료를 멀찍이 든 채 뒤로 물러났다. 내가 시선을 우측으로 돌릴 즈음, 효린 선배는 화장대에 앉아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뭐야? 기껏 불렀으면서 애들 다 어디 간 거야?"

나는 벙찐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옆머리를 긁적였다.

"선배, 방과 후에 뵙자고 했는데 못 들으셨어요?"

"뭐? 아니야! 나미가 분명히 선거 중에 들어오라고 했어."

하련은 급급히 냉장고 주변을 정리한 뒤 효린 선배에게 다가왔다.

"죄송해요 효린 선배! 나중에 약속 변경된 걸 올렸는데 늦었나 봐요. 지금 부원 애들이 다들 나가 있어요."

"엥? 뭐야, 기대하고 왔는데..."

"더운 데 번거롭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옷은 여기 냉장고 위에 있으니까 한번 보실래요?"

효린 선배는 인상을 축 늘어뜨린 채 하련의 뒤를 쫓아갔다. 그동안 나는 강당으로 빠져나와 우측 계단 앞에 자리를 잡았다. 1학년 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2학년 줄이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왼쪽에는 오퍼레이터를 담당하는 1학년 여학생 후배가 졸린 표정으로 1학년 학생들의 인사를 받아주고 있었다.

전교 2등에 오른 이후 내 여론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들어 갔다. 중2병 오지게 풍긴다고 조롱하던 학생들은 날 볼 때마다 멋쩍은 표정을 지었고, 선생님들은 내 행동거지에 부담을 느끼는 듯 아무 말없이 거리를 두었다. 공붓벌레 시절 느꼈던 경외심보다는 괴짜를 상대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에 가까운 뉘앙스였다. 가끔 나와 눈을 마주치는 학생들의 반응도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투표가 줄줄이 진행되던 중, 나는 우연히 꼽을 줬던 교지편집부 여학생을 발견했다. 크게 한번 지적당한 탓인지 나와 대면하자마자 고개를 홱 돌려 헐레벌떡 강당을 빠져나갔다. 여론은 사실상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아직은 당시 의심을 완전히 떨쳐버리진 못한 모양이었다. 다른 반에 교육받으러 갈 때마다 학생들이 내게 이런저런 일들을 물어봤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독한 이미지가 박힌 건 확실해 보였다.

2학년 줄은 기권표가 많아 생각보다 일찍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다음 교대까지 멍하니 벽에 몸을 기댄 채 하품을 해댔다. 평소에 마스크를 쓴 탓에 입으로 가리는 것마저 잊어버릴 뻔했다. 오른쪽 인원이 교대할 즈음, 누군가 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다연이 동생, 유명인사 다 됐던데?"

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강렬한 발성 만으로 나는 누구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이제 부회장 자리도 끝나가네요. 윤미 선배."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배같은 동생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70 69. 가족 망쳐놓기 下 - 1 20.12.07 34 1 12쪽
69 68. 가족 망쳐놓기 上 - 8 20.11.30 29 1 11쪽
68 67. 가족 망쳐놓기 上 - 7 20.11.30 23 1 11쪽
67 66. 가족 망쳐놓기 上 - 6 20.11.24 26 1 13쪽
66 65. 가족 망쳐놓기 上 - 5 20.11.17 28 1 12쪽
65 64. 가족 망쳐놓기 上 - 4 20.11.10 29 1 11쪽
64 63. 가족 망쳐놓기 上 - 3 20.11.03 27 1 11쪽
63 62. 가족 망쳐놓기 上 - 2 20.10.27 40 1 11쪽
62 61. 가족 망쳐놓기 上 - 1 20.10.19 46 0 12쪽
61 60. 메마른 기억 - 7 20.09.18 35 0 12쪽
60 59. 메마른 기억 - 6 20.09.08 29 0 12쪽
59 58. 메마른 기억 - 5 20.08.31 29 0 11쪽
58 57. 메마른 기억 - 4 20.08.24 34 1 11쪽
57 56. 메마른 기억 - 3 20.08.19 28 0 11쪽
56 55. 메마른 기억 - 2 20.08.10 28 0 11쪽
55 54. 메마른 기억 - 1 20.08.03 27 0 11쪽
54 53.빛바랜 거울 - 7 20.07.27 36 0 13쪽
53 52. 빛바랜 거울 - 6 20.07.20 36 1 14쪽
52 51. 빛바랜 거울 - 5 +2 20.07.13 38 1 13쪽
51 50. 빛바랜 거울 - 4 20.07.06 37 0 12쪽
50 49. 빛바랜 거울 - 3 20.06.29 37 0 12쪽
49 48. 빛바랜 거울 - 2 20.06.25 36 0 12쪽
48 47. 빛바랜 거울 - 1 20.06.22 35 0 12쪽
47 46. 어긋난 조각 - 6 20.06.15 32 0 11쪽
46 45. 어긋난 조각 - 5 20.06.09 34 0 11쪽
45 44. 어긋난 조각 - 4 20.06.04 39 0 11쪽
44 43. 어긋난 조각 - 3 20.06.03 45 0 12쪽
43 42. 어긋난 조각 - 2 +1 20.05.20 37 2 11쪽
42 41. 어긋난 조각 - 1 20.05.15 31 0 13쪽
41 40. 마땅한 복수? - 5 20.05.13 39 0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