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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 님의 서재입니다.

배같은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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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까르
작품등록일 :
2020.01.17 23:48
최근연재일 :
2021.02.27 22:00
연재수 :
8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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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글자수 :
487,621

작성
20.06.25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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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8. 빛바랜 거울 - 2

DUMMY

나는 이 상황에 변란이 찾아올 거라 예측했다. 이대로 누나가 나오면 나는 바로 남은 아침 거리를 가지고 누나가 먹을 음식들을 준비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나는 아버지와 마주 보고 아침을 먹게 될 터. 이는 서로에게도, 심지어 선유에게도 냉혹한 칼바람이 몰아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누나는 내 눈치를 보기만 할 뿐 이내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감정적인 충돌이 무서웠던 걸까? 나는 이 이상의 트러블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선유도 나와 동일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방금 나온 분 다연 선배 맞지?"


"응."


"나 의심이 많아진 것 같아. 어머님이었으면 어쩌나 싶어서."


'크흑!'


나는 바로 이를 악문 채 선유의 빈말에 분노를 표할 뻔했다.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더 격정적으로 나섰으면 선유 앞에 가정사를 읊는 꼴이 될 뻔했다. 아버지도 이번에는 다소 반응하는 뉘앙스를 보이다 먹은 그릇들을 한 자리에 모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자리를 떠 남은 그릇들을 치우려 했으나 아버지가 손을 저으며 날 막아선 뒤 그대로 모아둔 그릇들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이대로면 선유에게 등을 보인 채 조금씩 일그러지는 표정과 감정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뒤에야 평정심을 되찾아 나는 식탁 위에 남은 냅킨으로 조심히 땀을 닦아냈다.


"여긴 에어컨 바람이 잘 안 들어서 좀 덥지 않아?"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선유와 대면했고 선유는 팔을 흔들며 주변 공기를 몸소 느껴갔다.


"글쎄? 모자 쓰고 땀 많아진 거 아니야?"


"그런가. 매쉬캡으로도 땀을 잘 못잡으니까."


그 후 나는 식탁 위에 있던 에어컨 리모컨을 손에 쥔 채 온도를 낮추는 시늉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설거지를 마친 뒤 손에 남은 물기를 털며 식탁 쪽으로 다가왔다. 내심 걱정이 들었지만 아까 같은 평정심이 묻어난 아버지의 표정은 그동안의 내공이 어떤지 여실히 보여줬다.


"선유야, 혹시 집이 여기서 가깝니?"


"저요? 네. 여기까지 걸어왔었죠."


"그럼 갈 때는 내 차 타고 갈래? 가는 김에 데려다주고 싶은데."


"저, 정말요?"


선유는 곧잘 자리에서 일어나 놀란 듯 몇 보 뒷걸음질 치다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다 손으로 자신의 반대쪽 팔을 힘껏 꼬집어 고통과 함께 격렬한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그래도 돼요?"


"응. 오늘 오후 근무가 있어서. 잠깐 준비할 시간만 기다려주면 바로 데려다줄게."


"물론이죠! 진득이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유와 아버지가 화기애애 웃는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이게 차를 좋아하는 사람끼리의 이심전심인 걸까 싶었다.


예정대로 아버지는 일정보다 일찍 출근길에 나섰고 선유는 현관문 너머로 내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는 아버지의 재치 있는 센스에 감탄하던 중이었다.


오븐에서 익힌 스테이크가 레스팅 될 동안 나는 손으로 누나 방문을 두들기며 식사를 촉구했다. 하지만 누나는 꿈쩍도 않고 내게 냉랭한 무관심만 보일 뿐이었다.


벌써 일주일째 냉전이 이어지고 있다. 누나가 좋아하는 걸로 유혹해도 허사, 우연히 마주치려 해도 철저히 거부하고, 방을 멋대로 들어가면 누나가 방에 나가라며 크게 소리치다 물건에 봉변당하기 일쑤였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나가 반감을 산 채 이런 모습을 보여줄 준 꿈에도 몰랐다.


누나가 뭘 원하는지 대충 짐작은 되었다. 내가 망할 아줌마에게 사과하고 제대로 엄마라고 불러주길 바랄 테고 그러면 누나는 내게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어갈 것이다. 물론 이를 수용할 나 또한 아니었다. 타협하는 한이 있더라도 망할 아줌마를 이용한 공작 따위는 내 자존심이 허락할 리 없었다.


일주일 동안 내 머릿속은 발상과 피드백으로 얼룩져 있었다. 고집을 부리고 싶었지만 자연스레 흘러갈 전개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 나 잠깐 나갔다 올 거니까 그동안 아침 챙겨 먹어. 스테이크라 시간 지나면 차고 질기니까 가능한 빨리 먹기다. 알겠지?"


나는 바로 내 방에 들어가 입을 옷들을 골라갔다. 어김없이 검은색 야구모자에 검은색 마스크를 착용했다. 방을 나오자마자 나는 주방에 들러 누나가 먹기 좋게 식탁 주변 음식들을 가지런히 세팅했다.


마음만 먹으면 문 닫는 시늉을 한 뒤 누나의 뒤를 염탐할 수 있겠지만 누나에게 비칠 이미지만 실추될 것 같았다. 덕분에 현관을 나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까지 누나의 눈치를 보는 꼴이었다. 누나에게 메시지 한 통을 보낸 후 나는 문을 닫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어떻게 하면 누나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질문이 이리저리 맴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순간 공허한 마음과 함께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몸은 나른해지고 눈은 침침해져 뭐 하나 집중하며 볼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1층 홀에 도착해 정문에 다다르는 순간 유리문 주변으로 푹 데워진 공기층이 내 피부를 자극했다.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켜봤지만 조사를 하기엔 글러먹은 뒤였다. 현재 온도 30도, 최고 온도 33도라 적힌 배경화면 위젯과 정문 너머로 보이는 5월 말의 아지랑이는 지금 내 코디를 저격하기 충분했다.


'망했다.'


얼마 후, 나는 상가 내 미용실에 들어가 잠깐 동안의 기억을 지우고자 소파에 앉았다. 바로 위에 에어컨이 있어 몸에 급조된 물기들이 차츰 말라갔다. 헐레벌떡 뛰어와 산만했던 정신도 조금씩 안정세에 접어들었다. 미용실에서 빌린 수건을 소파 옆에 올려둘 즈음 털보 실장님이 손에 아메리카노를 든 채 깔깔 웃어대며 내게 다가왔다.


"고차원적으로 머리를 감고 왔네."


"장난칠 기분 아니에요."


"그럼 무슨 용건? 얼마 전에 커팅했었잖아."


"잠깐 더위가 누그러질 동안만 여기 있을게요."


실장님은 인상을 쓰다 내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그럼 모자하고 마스크는 벗기 그래?"


"그건 안 돼요. 저번에 얘기드렸잖아요."


"으휴, 겁쟁이! 이렇게 한적한 점심시간에 뭔 쇼야?"


"최소한의 방어 태세를 갖추는 거예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실장님의 허탈한 웃음에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도 검은색 완장을 차고 다니는 계집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유행의 흐름이라면 슬슬 거둘 법도 한데 작년부터 쌓인 팬심이 얼마나 독했으면 이럴까란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완장 놀이에 찌든 계집들이 줄어든 편이다. 귀찮다는가 가볍게 즐기려는 마음으로 거둔 경우나 은정처럼 SMK 앞에서 대놓고 보라색 S&M 완장을 차고 다니는 경우 등등이었다.


SMK 채팅방은 항상 미로에 관련된 얘기만 나오고 유나도 차츰 익숙해져 계집들을 중재하는 데 제법 능숙해졌다. 우여곡절 끝에 전제적인 안정세는 다소 회복했다는 뜻이다. 개인적인 문제는 영 꽝인데 말이다.


오후 2시가 지날 무렵,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더위가 펼쳐져 나는 몇 시간째 사람들의 커팅이나 염색, 펌 등을 지켜보았다. 밖에 나가긴 싫었지만 슬슬 시험 기간이기도 하고 집에서 간섭받는 일도 없으니 적기가 되었다 판단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 차례 심호흡을 가진 뒤 미용실 출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벌써부터 땀방울이 터질 것만 같은 숨 막히는 미래였지만 주저할 시간 따윈 없었다. 실장님께 간단히 인사한 뒤 입구를 나오려는 순간이 가장 큰 고비였다.


'어라? 몸이 왜 이러지?'


더위로 생긴 PTSD가 날 멈춰 세우고 말았다. 뒤이어 손님이 찾아오자 내 몸은 문쪽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이를 보던 실장님은 저번처럼 주변 머리카락을 빗자루로 쓸다 조심히 내쪽으로 다가왔다.


"부릴 거면 애매하게 굴지는 마라. 지금이 가장 더울 땐데 어딜 가려고?"


"그렇,겠죠."


결국 나약해진 자존심이 날 다시 소파로 인도했다. 이젠 관람하는 것도 지겨워져 나는 소파 옆 책자에 꽂힌 잡지를 둘러보며 시간을 할애했다. 그중에서 여성 잡지는 여러 인종의 모델들이 각기 개성 있게 다룬 화장들이 있어 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름에 맞춰 배색과 유지력을 높인 조합부터 음영을 강렬하게 심어주는 조합, 자연스러움을 강조한 조합에 전신 화장 등이 있었다.


나는 어느새 어플을 킨 채 잡지에 드러난 화장법과 비슷한 샘플이 있나 살펴보았다. 여유 시간이 생긴 듯 실장님은 이내 내게 다가와 눈을 흘깃댔다.


"그러고 보니까 화장에 관심 있다고 했었지?"


"한 번 깊게 배워두니까 학구열이 생긴달까, 좀 미묘한 감정이네요."


"뭐 어때? 보니까 화장 시뮬레이션 어플을 사용하나 보네."


"아무래도 화장법을 저장할 수 있으니까 데이터적으로 편해서요."


실장님의 손짓 따라 나는 실장님께 휴대폰을 넘겨줬다. 잠시 이리저리 둘러보던 것도 잠시 감탄과 실소가 가미된 엉성한 웃음과 함께 휴대폰 화면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것들이 다 쌩얼 샘플들이야?"


뭔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실장님이 말한 그대로였다.


"맞아요. 사람들이 디자인한 것까지 해서 수십 가지의 민낯 샘플들이 있죠."


"시대의 흐름이 무섭구나. 이것만 있으면 보는 사람마다 쌩얼이 눈에 익겠어."


"저도 그렇게 변했어요. 물론 아직 이 정도 샘플 만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요."


가끔 이렇게 민낯들을 보면 철학적인 고찰이 내 머릿속을 스쳐간다. 화장은 미의 기준, 즉 상대적인 기준에서 평이적인 모습을 보이려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배려와 포용이 아우러져 자기 관리에 고지식한 질타를 주지 않는 문화로 변모해갔다.


그런데 화장만은 여성들에게 철칙으로 여겨지는 암묵적 약속 같다 느꼈다. 화장 기술이 좋든 안 좋든 화장이란 걸 통해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줘야만 하는 걸까? 비만이나 식습관의 경우 살가운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자신의 권리를 멋대로 간섭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를 화장에 빗대면 결국 화장도 하는 사람 따로 안 하는 사람 따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꽃피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화장에 몰입하려는 내 입장으로 봐도 민낯을 공공연히 보이는 문화가 아직은 이르다 생각한다. 이런 데이터적인 변화가 조금씩 생겨나니 진득이 기다리는 게 답일지도 모른다. 이는 왠지 개인주의적인 발상으로 밀고 나간 듯한 심정이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5시에 다다랐다. 미용실에 부는 에어컨의 냉기에 추위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히 몸을 푼 뒤 이번에는 진심으로 실장님에게 인사한 뒤 출입문으로 향했다. 아까보다 훨씬 포근해진 온도에 망설임 없이 미용실을 빠져나왔다.밖은 아직 후텁지근했지만 선선한 바람이 불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오늘 저녁 찬거리가 있나 떠올리던 도중 내 휴대폰에 진동이 두 번 울려 퍼졌다. 메시지가 왔을 때의 진동 패턴이었다. 제법 늦은 시간에 미로가 SMK 정보를 요약해준 건가 싶었다. 오늘은 SMK가 어떤 말썽을 부렸나 인상을 쓰며 확인하려던 도중.


"어라?'


예상과 달리 메시지 발신자는 미로가 아닌 민후 형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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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41. 어긋난 조각 - 1 20.05.15 31 0 13쪽
41 40. 마땅한 복수? - 5 20.05.13 3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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