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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 님의 서재입니다.

배같은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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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까르
작품등록일 :
2020.01.17 23:48
최근연재일 :
2021.02.2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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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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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7,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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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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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빛바랜 거울 - 3

DUMMY

보안 유리문부터 엘리베이터에 집 앞 문까지 모든 과정이 물 흐르는 듯 자연스레 전개되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민후 형은 내게 한껏 미소를 짓더니 내게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최근에 지어진 오피스텔답게 주변 시설은 생활 기스 하나 없이 반들반들했고 내부 또한 천장에 붙은 LED 등에 비쳐 곳곳마다 반짝거렸다. 13평 정도로 보이는 투룸 형식으로 처음에는 스테인리스 싱크대와 하얀색 세탁기, 화장실로 보이는 작은 방이 보이다 본방으로 들어가니 민후 형만의 색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얀색 펄프 재질 벽에 검은색으로 치장된 가구들, 낭만주의 풍의 밝은 색 그림이 그려진 검은색 정사각형 에어컨에 근근이 돋보이는 마린 블루 컬러의 이불과 랜턴이 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좌측에 있던 기다란 책상에는 하얀색 책장과 컴퓨터를 모두 올려놓을 정도로 공간을 빼곡히 채워뒀다.


민후 형은 책장 앞 서류 봉투들을 정리하더니 그대로 컴퓨터 옆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미안. 지금 작업하고 있었거든."


"웹툰 말하는 거죠?"


"바로 저장하고 끝낼 거니까 잠깐만 기다려줘."


"하던 거 마저 하세요. 전 괜찮아요."


"그래? 그럼 빨리 끝낼게."


처음 보는 광경이라 그런지 나는 조금의 설렘과 함께 민후 형의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드로잉 태블릿으로, 손보던 잔상이 그대로 프로그램에 드러나 하나의 그림이 되고 하나의 장면이 되었다. 민후 형의 손놀림을 보고 이 일에 제법 능숙하다는 것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동안 상황을 이어가다 민후 형은 파일을 저장하는 걸 끝으로 프로그램을 종료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기다렸지? 주스라도 갖고 올게."


"아. 네."


민후 형은 정신없게 좁은 공간을 활개하기 바빴다. 그동안 나는 배경화면에 둔 작은 파일들에 시선이 갔다. 작게 함축되어 있어 제대로 윤곽이 잡히지 않았다. 확대해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민폐 같았다.


드로잉 태블릿 옆 서류 봉투에 속 종이들이 여럿 삐져나와 있었다. 뭔가 싶어 들어보니 흑백으로 처리된 그림 인쇄본이 LED 등에 투영되었다. 나는 곧잘 호기심을 거두고 종이를 털어 서류 봉투에 온전히 밀어 넣었다. 서류봉투를 제자리에 둘 즈음 민후 형은 손에 포도 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든 채 내게 다가왔다.


"오늘자 웹툰 올렸는데 뒷씬이 생각날 때 마무리짓고 싶어서 냅다 질렀었던 참이야."


"그랬군요."


"멀뚱히 서있긴 그러니까 앉아있어."


"네."


나는 주스를 건네받아 중앙에 있던 검은색 유리로 장식된 사각형 테이블 앞에 양반자세를 취했다. 민후 형은 컴퓨터 의자에 앉아 잠시 휴대폰으로 무언가 확인하다 이내 나와 대면했다.


"사람들이 참 무서워. 올린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부터 스토리를 면밀히 까는 악플들이 나온다니까."


"형 작품은 악플이 많은 편이에요?"


"제법. 어차피 내 실화를 바탕으로 그리는 거라 어쩔 수 없잖아? 재미를 위해서 각색하는 걸로 비위를 맞추는 거지."


"그렇군요."


내가 마스크를 턱선 쪽으로 내린 뒤 그대로 포도주스를 몇 모금 넘기던 순간, 꽤나 맛이 좋아 무의식적으로 경탄이 나올 뻔했다. 진짜 생포도를 즙낸 듯한 느낌과 끼지 않는 불순물 덕분에 깔끔하고 새콤한 적포도 향만이 내 입안을 스쳐갔다. 동시에 내가 민후 형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나 내심 의심이 들었다.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먼저 말을 해둘까 할 찰나 민후 형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강연이는 내 입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민후 형의 멋쩍은 표정에 나는 대충 무엇을 시사하는지 직감했다.


"가족사 말하는 거죠?


"응. 저번에 말했던 걸 떠올리니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통보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 강연이 네 생각이 안 맞을 수도 있잖아."


"아니요. 저는 대충 어떤 심정인지 공감이 가서 무언의 긍정을 따랐을 뿐이에요. 애초부터 민후 형의 응어리가 컸던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러면 다행이다."


민후 형은 좀처럼 일그러진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러다 책상 위 철제 꽂이함에 들어있던 플라스틱 볼펜을 하나 꺼내들었다. 손으로 이리저리 휘젓다 엄지와 검지로 볼펜을 튕겨대 중지 손가락을 축 삼아 볼펜을 수평으로 돌려댔다.


"진열장을 부수고 온 날부터 이 얘기를 다른 사람들한테도 많이 했었거든. 헌데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그것도 못 버티고 일상생활할 수 있겠냐며 볼멘소리를 내더라고.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감정적으로 굴었던 걸까 싶은 의문이 나날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어. 그때 카페에서 보여준 반응에 내가 놀랐던 것도 이때 받았던 자극이 있지 않았나 싶어."


"그래도 이전에 동기 부여가 있었으니까 바뀐 거 아닐까요?"


"그렇지. 나도 입대 전까지는 비슷한 생각을 품어서 동조하지 못했던 건 아니야. 사회초년생이니까 돈 벌 기간을 어느 정도 보장해줄 줄 알았는데 성인이 되어 일터에 나가면 부모에게 보은하고자 일부 비용을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 예전에 그 망할 여편네는 다니는 공장의 동료 선배 아들은 일할 때마다 항상 월 50은 붙여 보내준다든가 다른 동료 선배 딸은 부모에게 자주 선물해주고 돈도 준다며 칭찬을 아끼지 못한다든가 같은 말을 수도 없이 해댔어. 나는 그 당시 부모에게 주는 돈이 결혼자금이나 미래를 위한 적금으로 쓰이나 싶었으니까."


민후 형이 잠깐 말을 멈추더니 이내 오른손 주먹을 꽉 쥔 채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나는 놀라 자리 주변에서 움츠렸지만 민후 형이 왼손을 낸 채 나를 제지했다. 주먹 쥔 손 사이에 볼펜은 완전히 박살난 채 두 동강 난 상태였다.


"하지만 이건 판타지였어. 내 돈은 끝없이 분출하는 빚으로 이미 탈탈 털린 뒤였으니까. 사회초년생을 홀렸던 이유가 조금이라도 빨리 빚을 청산하기 위해 자식의 미래 자금까지 해치려는 수작이었다니 웃기지 않아? 돈이 없으니까 성인이 된 내게 미래를 버리라고 타일렀던 거라고! 용서할 수 없었어."


민후 형은 부러진 볼펜을 쥔 채 그대로 방 끝쪽 모서리에 있던 휴지통 커서 모양을 닮은 철제 쓰레기통에 있는 힘껏 패대기쳤다. 쓰레기통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에 나는 바짝 긴장한 채 민후 형을 바라보았다. 트라우마에 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닐까 싶었다. 민후 형은 실소를 지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가다듬었다.


"그 빚이 나나 민아를 위해 쓴 거라면 또 몰라. 여편네가 불려놨으면서 아버지를 노동판에 가둬놓고 나는 만화가라는 꿈 앞에 미술학원 한 번도 안 보내주고 아주 가관이잖아. 이건 웹툰에서 그렸던 적 있던 거라 아마 기억하고 있을 거야."


"네. 3화쯤에 아버님 체력이 좋은 이유가 막노동으로 돈을 벌지 않으면 집안이 안 돌아간다고 나오잖아요."


"그때 꼭 그리고 싶었거든. 돈이 없으면 나대질 말던가. 왜 애꿎은 빚이나 늘려서 사람 다 힘들게 만드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어."


민후 형의 분노가 최고조에 달한 것 같아 나는 숨죽인 채 민후 형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민후 형은 이내 인상을 풀며 작게 미소를 지어댔다.


"이걸 PC방 사장님께 까놓고 말하니까 그때 사장님이 날 몇 차례 위로하더니 소고기를 쏴주셨지.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통쾌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어. 사적인 대화를 절제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긴 했지만."


확실히 민후 형이 내뱉는 대화의 무게는 너무도 묵직했다. 내가 망할 아줌마에게 품던 증오보다도 더 깊고 살갑게 배인 듯한 느낌이 들어 내 모습이 일신적인 장난이 아니었나 착각이 들 정도였다. 민후 형이 화색할 만한 화젯거리로 넘어간 게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민후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밖에 있는 냉장고로 향했다. 나는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고 민후 형을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잘 식었네."


민후 형은 녹색빛 차가 가득 채워진 2리터 정도로 보이는 유리병을 그대로 들이키며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유리병을 올려둘 즈음, 차는 절반 이상 빠져 있었다. 얼마나 감정적으로 흥분했으면 이렇게나 목이 탔을까 싶었다.


"이래서 감정적인 컨트롤은 늘 귀찮고 짜증 난다니까. 사람이 본능적으로 '사람 감정을 멋대로 계산하려 들지 마!'라는 격정적인 대사가 와 닿질 않아."


"무슨 말이죠?"


"우리가 무언가에 이성적으로 느껴 완고함을 주장하면 가끔씩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잖아.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감정의 선을 인간이라면 당연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된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어. 시비를 가르는 건 덕이지 도가 아닌데 그 암묵적인 감정 체계를 맹신하고 자연스럽게 여기는 거지. 부모가 사람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탈을 해대는데 그걸 기준 삼아 잣대를 가르는 그 언급은 내게 있어서 최악의 말이 아닐까 싶어."


"그렇죠."


나지막한 대답 같지만 나도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었다. 망할 아줌마가 우리 가족을 유린했던 것처럼 말이다.


원래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민후 형이 작전 회의를 하자는 제의에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민후 형의 하소연에 어떠한 반문도 못한 채 묵묵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민후 형은 유리병을 비우자마자 손으로 가볍게 뺨을 친 뒤 중앙 테이블로 발길을 옮겼다. 책장 가장 왼쪽에 꽂아둔 회색 태블릿을 꺼내더니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놓고 나와 마주 보는 자리에 착석했다.


"본분이 늦어버렸네. 미안해."


"괜찮아요."


민후 형은 태블릿을 킨 뒤 메모장 어플에서 텅 빈 하얀색 화면을 띄우고 펜을 들어 지금 상황을 그림으로 끄적였다. 잠깐 봐도 현 상황을 브리핑하는 중인 게 보이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팔을 괴었다.


"민후 형은, 웹툰 그만둘 생각 없는 거죠?"


멈추던 펜질에 자극이 되었나 싶었지만 이내 다시 그려가며 어렴풋이 미소를 지었다.


"민아의 소원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잖아. 민아 덕분에 이 난세에서 탈출했는데 뭘 못하겠어."


"하지만 아깝잖아요. 형에게 웹툰은 꿈이고 직업이고 인생일 텐데."


"과장되게 해석하면 곤란해. 내가 연재하는 웹툰을 그만둔다는 거지. 다른 웹툰마저 제약받는 건 아니니까. 경험이 있으니까 헤르직션이든 다른 플랫폼이든 금방 익숙해질 거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다 팔을 내리며 허리를 바로 세웠다.


"민후 형은 민아한테 반대로 얘기하라고 지시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작전 회의를 연 게 아니겠어?"


민후 형이 펜을 옆에 내려놓자 작전도가 화면 중앙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인간관계를 표현한 마인드맵을 기본 삼아 지금까지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간결하게 표현해냈다. 내가 맡은 작전이 'FAIL'이 아닌 'CLEAR'로 써진 부분만 살짝 눈에 거슬리는 정도였다. 화면을 응시하는 내 모습에 민후 형은 손가락으로 화면에 그려진 오른쪽 부분을 가리켰다.


"기일에 아버지를 주선해 얘기를 나누는 방향으로 검토하고 있어. 아무래도 그 망할 여편네를 상대로 중재자는 필요할 테니까 말이야. 이전만큼 부담이 되진 않을 거야."


"오."


내게 있어서도 제법 솔깃한 제안임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나쁘지 않네요."


"근데 여기서 장애물이 하나 생겼어."


민후 형이 곧잘 펜을 들어 민아 칸에 위치한 마인드맵을 추가로 그려갔다. 나는 무슨 내용일까 싶어 화면을 주시하다 윤곽이 보이자마자 무슨 말인지 단박에 이해해 손으로 마스크를 가렸다. 민후 형도 펜을 두자마자 실소 섞인 한숨을 내쉬며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에는 '망할 여편네가 강연을 민아 남친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라 적혀 있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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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63. 가족 망쳐놓기 上 - 3 20.11.03 26 1 11쪽
63 62. 가족 망쳐놓기 上 - 2 20.10.27 39 1 11쪽
62 61. 가족 망쳐놓기 上 - 1 20.10.19 4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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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56. 메마른 기억 - 3 20.08.19 28 0 11쪽
56 55. 메마른 기억 - 2 20.08.10 28 0 11쪽
55 54. 메마른 기억 - 1 20.08.03 2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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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52. 빛바랜 거울 - 6 20.07.20 33 1 14쪽
52 51. 빛바랜 거울 - 5 +2 20.07.13 36 1 13쪽
51 50. 빛바랜 거울 - 4 20.07.06 34 0 12쪽
» 49. 빛바랜 거울 - 3 20.06.29 34 0 12쪽
49 48. 빛바랜 거울 - 2 20.06.25 34 0 12쪽
48 47. 빛바랜 거울 - 1 20.06.22 35 0 12쪽
47 46. 어긋난 조각 - 6 20.06.15 31 0 11쪽
46 45. 어긋난 조각 - 5 20.06.09 31 0 11쪽
45 44. 어긋난 조각 - 4 20.06.04 38 0 11쪽
44 43. 어긋난 조각 - 3 20.06.03 44 0 12쪽
43 42. 어긋난 조각 - 2 +1 20.05.20 37 2 11쪽
42 41. 어긋난 조각 - 1 20.05.15 31 0 13쪽
41 40. 마땅한 복수? - 5 20.05.13 3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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