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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 님의 서재입니다.

배같은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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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까르
작품등록일 :
2020.01.17 23:48
최근연재일 :
2021.02.27 22:00
연재수 :
8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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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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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글자수 :
487,621

작성
20.08.19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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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6. 메마른 기억 - 3

DUMMY

잠시 뒤 승하강식 바리케이드가 열리자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출입 차량으로부터 멀어졌다. 차는 뒤로 후진해 반대 차선으로 방향을 돌렸다. 유나가 차를 향해 메롱하던 것도 잠시 운전석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차에 비상등이 들어왔다.


"모처럼 보는데 너무 삭막한 거 아니야?"


나는 운전자를 보자마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검은색 롱코트에 검정 단색 슬랙스 바지. 넥타이 우측 상단에 자그마한 금속 재질 브로치까지 내 눈에 익숙한 옷차림이었다. 유나 앞에 다가선 모습을 보니 확실했다. 더글러스 국내 본사 영업부 하부장님이었다.


하부장님이 유나의 머리에 손을 대려 하자 유나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뒤로 물러섰다.


"알짱거리지 마!"


"아빠의 노고를 몰라보네. 맞는 학교 보내주고 용돈 꼬박꼬박 챙겨주는데 뭐가 불만인 거야?"


"진짜 아빠는 돈밖에 몰라! 가라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는 제자리에 멈춘 채 지켜볼 뿐이었다. 제법 면식이 있어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말이다. 하부장님은 이내 한숨을 짧게 내쉬다 그대로 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알겠지?"


"가기나 해!"


잠깐이지만 하부장님의 씁쓸한 표정이 내 눈가에 잡혔다. CLS클래식이 도로 쪽으로 진입해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잠시 뒤 유나는 내쪽으로 다가와 내 오른손을 양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내가 뭐라 얘기하려 했지만 유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날 끌고 입구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급함에 신경 쓰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나가 사는 아파트동 출입문 부근에 들어서자 유나는 내 손을 놓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동안 나는 비뚤어진 모자와 마스크를 바로 잡고 있었다.


"계집 사생활이 참 고귀하시네. 내가 이상한 시선으로 볼까 봐 그래?"


"잠깐 좀 빡쳐서 그런 거야."


유나는 입술을 헐뜯으며 인상을 쓰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내게 오라며 손짓했으나 나는 손가락으로 X자를 그리며 출입문 밖에 서있었다.


"시험 기간이야. 다음 주에 만나서 얘기하자."


"잠깐이면 돼. 나랑 같이 있어줘."


"장학금이 걸린 문제야. 양해 부탁할게."


지금 멋대로 도망칠 순 없었다. 저 불같은 계집 성격상 섣부른 판단은 되레 화를 자초할 것이다. 나는 출입문 유리문에 가까이 다가가 유나와 대면했다. 유나가 처음엔 뾰로통한 표정을 짓나 싶더니 눈매가 축 늘어진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눈 쪽에 매트한 질감이 짙은 데 반해 평소 신경 쓰던 눈 화장은 그동안 봐왔던 화장에 비해 조촐한 편이었다. 유나가 몸을 조금씩 움직여 오른쪽에 위치한 유리문이 수시로 열렸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제자리에 멈춰있었다.


"그만 고집부리고 잠깐만, 어?"


"요즘 뜸했던 거 이해해. 다음 주면 시험 끝나니까 언제 날 잡아서 그때 만나자."


"오빠마저 그럴 거야!"


유나의 갑작스러운 호통에 나는 흠칫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없어 다시 유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나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자존심만 쌔서 제멋대로 굴기 바빴던 회장 계집은 질겁한 채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내가 몸을 움찔거릴 사이 유나는 뒤로 돌아선 채 홀에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뛰어갔다. 얘기의 맥락을 파악하니 유나가 하부장님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세세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만큼 나는 시험 외에 냉혹하게 굴어야만 했다.


'그래. 다음 주면 되는 거야...'


이 시간 이후로 나는 오로지 시험에만 몰두했다. 자연스레 호흡을 맞추면서 일탈이 오지 않도록 책상 옆에 33 큐브 한 개를 올려두었다. 쉬는 시간마다 큐브를 이리저리 뒤섞은 뒤 큐브 기록대에 양손을 대고 다 맞춰 다시 양손을 대는 것으로 기록을 내곤 했다. 이번 주 일요일까지 하면 닷새 연속 밤을 새우고 공부하는 나였다. 1학년 때부터 해온 터라 익숙할 법도 했는데 이전 민후 형과의 일정 때문인지 조금은 뻐근한 느낌이 들었다. 책상 위는 에너지 드링크로 한가득 쌓였고 시계고 휴대폰이고 컨디션에 방해될 요소들은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공부하다 의식적인 감각에 아침이 찾아온 걸 보면 일정을 성공적으로 보낸 것이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루어지는 1학기 기말고사, 나는 월요일부터 컨디션을 자연스레 맞추기 위해 점심시간 때 스튜디오 안에 들어와 시간을 할애했다. 마치 화장 안 한 듯 자연스럽게 보이는 화장을 다루는 것과 비스무리한 느낌이었다.


아침부터 학생들의 살가운 눈초리로 인해 교지편집부 계집이 신경 쓰였지만 나미 선배가 교지편집부 부장과 만나 얘기를 나눈단 소식에 상황을 일단락해두었다. 문제는 다른 쪽으로 때마침 스튜디오 바깥쪽 문으로 미로가 들어와 내게 다가왔다.


"선배! 유나하고 무슨 일 있었어요? 문자도 안 받으시고."


"미안. 하교한 뒤로 휴대폰을 본 적이 없어서 그랬어."


"참. 시험 기간이라고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미로 말대로 화장대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눈가에 깊게 파인 다크서클과 충혈된 눈, 쏙 빠진 볼살까지 환자를 연상케 하는 몰골이었다. 미로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휴대폰으로 SMK 채팅창을 보여주었다, 그러더니 스크롤을 한껏 올린 뒤 천천히 내리기 시작했다.


"선배도 알겠지만 선유파도 선배파도 조금씩 주는 추세였잖아요. 그런데 어제부터 이상한 소문이 채팅방에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오늘은 아예 마비 수준에 이른 거 있죠?"


나는 미로가 손으로 가리키는 주요한 답글들을 면밀히 확인해갔다. 대충 흐름을 요악하면 교지편집부 기사가 SMK 계집에게 유입되어 미로파들로부터 나를 향한 비난이 끝없이 이어졌던 것이다. 극성 미로파 계집들은 선유까지 싸잡아 비판하며 SMK의 모순된 부분을 뿌리쳐야 한다는 내용들이 줄을 지었다. 이런 전개라면 나는 미로를 볼 수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얼굴빛이 초췌한 상태였다.


"이게 유나와 무슨 상관이길래?"


"보통 이러면 유나가 일일이 중재해서 여론 잠재우기 바빴을 텐데, 주말 내내 무플이니까요. 제가 직접 얘기를 나누려 해도 읽지도 않으니 답답한 거 있죠?"


"회장 계집, 삐쳤네."


"네?"


미로가 의아해하는 모습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창문 너머로 매미 우는 소리가 크게 들려올 터였다.


"정확하진 않지만 일단 배경은 그랬어."


미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 더 이상 반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단 사실에 놀란 듯 짧게 경탄하는 뉘앙스가 보였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아, 아뇨! 굉장히 잘하셨어요."


"유나 일은 내가 수습할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마. 내일 시험이잖아."


"네, 선배."


벌써부터 잡을 일정들이 하나둘씩 쌓여만 갔다. 나는 벌써부터 다가올 미래에 진절머리가 났지만 지금은 잊어야만 했다.


나흘 동안의 시험은 내게는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오랜 답답함을 차례차례 해소할 수 있어 후련한 듯하면서도 내게 개인적인 자유를 누릴 시간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생각에 씁쓸한 감정이 나돌았다. 가끔씩 학생들의 뒷담이 들려왔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일정 하나하나에 집중할 뿐이었다.


'끝났다.'


모든 시험 일정을 마치고 나서는 교문 앞 풍경이 그토록 공허할 수 없었다. 몇 주간의 압박에 또 다른 압박으로부터의 해방감, 단 하루라도 누릴 수 있는 이 고결한 시간에 나는 몸을 비틀거리며 본능만 믿고 하굣길에 접어들었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뒤쪽에서 들려오더니 이내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온몸이 지쳐 얼굴이 어떤지도 어떤 목소리인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강연아, 강연아!"


그 자리에서 그러면 안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성을 잃었단 의식만 잠깐 오간 채 그대로 생각을 그만두었다.


정신이 드는 순간 나는 교문 앞 상황을 돌이키며 제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내 집에 온전히 도착해 거실 소파에 누워 파란색 모포를 덮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본 순간 주방 쪽 식탁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해보니 선유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잡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내가 입을 열려던 차 선유도 인기척을 느껴 그대로 몸을 돌려 나와 대면했다.


"언제 일어났어?"


"방금 전에. 여긴 어쩐 일이야?"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야!"


선유가 자리를 박차고 나오더니 내 양쪽 볼을 손으로 가볍게 잡아당기며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갑자기 교문에서 누가 실성했다길래 가봤더니 얼굴이 반쪽 난 네가 있었다고."


"맞네. 나 기절했던 거구나."


"응급차 부를까 주변에서 난리가 났었는데 나랑 누님이 부축한 덕분에 집까지 올 수 있었어."


"누님?"


나는 바로 옆에 있던 누나 방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누나 방은 굳게 닫혀 있었다. 이론상으로 보면 될 법했지만 상황상으로 보면 놀라울 따름이었다.


"다연 선배 힘 좋으시더라. 처음엔 양쪽에서 어깨 한쪽씩 잡고 이동하려 했는데 선배 페이스가 너무 빨라서 중간에 조금씩 거들기만 했었어."


"그래?"


선유 앞에선 누나가 어떻게 보였을지 의문이 들었다. 평소 누나라면 내게 한껏 웃어주며 얘기도 나누고 오늘 저녁으로 뭘 먹을지 서로 토의하곤 했다. 그러나 선유에게 직접적으로 묻고 싶진 않았다. 이미 비밀 하나가 탄로 난 이상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모처럼 선유가 내게 선의를 베풀어 줬으니 나는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어 남은 식료품들을 확인했다.


"이참에 온 거 밥이라도 먹고 갈래?"


"역시나. 네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배달 음식 시킨 지 좀 됐어."


"뭐?"


나는 냉장고 문을 닫고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선유는 휴대폰으로 배달 명세서가 찍힌 화면을 내 앞에 흔들어 댔다. 시킨 메뉴 가짓수만 봐도 식탁 가득 메울 수준의 지출이었다.


"선유 너, 괜찮겠어?"


"내가 얻어먹었던 스테이크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에 내가 조금이라도 더치페이를 주장하려 했지만 선유는 특유의 귀검사 같은 자세로 내 행동을 저지했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다른 쪽일 터였다. 나는 선유를 지나 누나 방문을 흘깃 보다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선유에게 들키지 않도록 은밀하고 침착하게 교복 바지에서 휴대폰을 꺼내 자판을 두들겼다.


'누나,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 누적 30만 자 돌파!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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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62. 가족 망쳐놓기 上 - 2 20.10.27 41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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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60. 메마른 기억 - 7 20.09.18 36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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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메마른 기억 - 5 20.08.31 29 0 11쪽
58 57. 메마른 기억 - 4 20.08.24 36 1 11쪽
» 56. 메마른 기억 - 3 20.08.19 30 0 11쪽
56 55. 메마른 기억 - 2 20.08.10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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