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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 님의 서재입니다.

배같은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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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까르
작품등록일 :
2020.01.17 23:48
최근연재일 :
2021.02.27 22:00
연재수 :
8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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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8
추천수 :
77
글자수 :
487,621

작성
20.10.27 12:30
조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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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62. 가족 망쳐놓기 上 - 2

DUMMY

얘기가 오간 후, 나와 민후 형은 카페를 나와 야광 다리에서 발을 맞추었다. 보랏빛 하늘의 여름날 저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호수와 가장 근접한 야광 다리 쪽은 인적이 드물었다. 호숫가 주변으로 갈대들이 성황을 이루었고 물가가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민후 형의 멋쩍은 표정에 나는 야광 다리에 팔을 걸친 채 너머로 보이는 어둑한 전망대로 시선을 향했다. 전망대 우측으로 다리 조명들이 짧게나마 빛을 내었다.


"민후 형. 차기작 준비는 하셨어요?"


"차기작?"


민후 형은 눈을 희번덕 뜨다 손에 턱을 괴며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 직시하기 바빠서 생각도 못해봤어."


"나중에 설정하면 출판사 측에서 곤란해하지 않을까요?"


"괜찮아. 애초부터 '가족 망쳐놓기'는 내 존재를 어필하려고 만들었던 거지, 메인 작품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거든. 조금씩 실력 쌓고 제대로 된 웹툰을 보여줄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래도..."


민후 형은 매사에 당돌하면서도 둔감한 모습이었다. 민아에게 안길 소원이 이토록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싶었다. 나는 민후 형이 한 말을 떠올리며 소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부모와 관련이 없다, 그렇다는 건 민후 형이 웹툰을 끝낼 시기에 부모와의 진전도를 높일 생각이 없기 때문에 소원의 조건이 이뤄지는 거라 판단했다. 어쩌면 민아는 이 이상의 복수극을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크게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그거야 나는...


'어?'


무언가 머릿속에서 크게 번뜩이는 순간 민후 형은 내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나는 민후 형을 붙잡고 싶었지만 대화의 맥락을 제대로 짚지 못해 그대로 민후 형이 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민후 형이 떠난 뒤에도 나는 방금 전 생각들을 되뇌며 모자챙을 만지작댔다.


'난,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거지?'


갈대밭 사이로 모기들이 맴돌더니 몇 마리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곧잘 가까이 다가온 모기를 양손으로 가볍게 잡아냈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시험 기간이 지난 첫날, 학교는 벌써부터 선거 유세로 성황을 이루었다. 학생회의 영향권이 타 학교에 비해 상당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전임 전교 회장은 마지막 업무를 묵묵히 해결해나갔고 부회장은 마치 계속하겠다고 어필하는 듯 'FLAT' 슬로건을 내세우고 다녔다.


점심시간, 나미 선배는 미로와 승준과 같이 교지편집부 동아리 대표들과 얘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동안 나는 학교 도서실에 들어와 책을 읽고 있었다. 몇몇 1학년 남학생들은 도서실 입구 쪽 컴퓨터에 앉아 낄낄거렸고 도서 위원들은 책들의 배열을 보고 알맞게 정리하고 있었다. 작년 공붓벌레 시절 늘상 보던 풍경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강연이는 쉬고 있어. 우리가 맡아서 할게.'


'나중에 부를 때 잘 와주면 돼. 가 있어.'


원래 나는 레미 활동을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선유와 하련이 스튜디오 앞길에서 막아서는 바람에 그대로 쫓겨나는 꼴이 되었다. 배려 차원이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한 켠으로는 무안한 감정이 들었다.


점심시간 막바지, 내가 도서실을 나오는 순간 휴대폰으로 문자가 여럿 도착했다. 승준에게 온 것이었다.


'선배! 미로 선배가 잘 어필해준 덕분에 원만하게 해결됐어요 저번에 올렸던 소식지는 바로 편집해서 게시할 거예요'


나는 김 빠지다 겨우 미소를 지으며 채팅창 자판을 두들겼다.


'다들 고마워. 마음 같으면 직접 나서고 싶었는데.'


'나미 선배가 말리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ㅠㅠ 시험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이제 마음 편히 가지세요 ^^'


그랬다. 나미 선배도 나를 배려해주었다. 다들 결국 나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었던 걸까? 조금은 머쓱해진 나였다.


정규 수업부터 하굣길에 집에 오기까지 내가 별 탈 없이 여유를 가져본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또다시 누나와의 냉전이 이어질 것이다. 간과했던 바로 누나는 망할 아줌마와 만났던 이후, 은정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서로 다시 만나지 않았을 거라 확신할 수 없었고 은정이 어떤 말로 누나를 현혹했을지 가늠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은정과 망할 아줌마의 사이가 좋았단 것. 즉, 내가 유리한 위치에 서지 못하도록 압박했을 것이다.


아직 누나가 들어오지 않은 집은 한적하면서도 꿉꿉한 느낌을 주었다. 거실 너머로 트인 창문을 열어 환기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누나와의 눈치싸움에 무심하면서도 신경 쓰여 괜스레 화가 났다. 나는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침착해. 이러다 가족 싸움으로 번지고 말 거야!'


아버지가 애써 잡은 꿈의 터가 망할 아줌마가 사는 동네와 같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굴욕일까? 더 이상 아버지를 문제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엔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깊으신 분이었다.


나는 내 방에 들어가 책상 위에 놓은 마른 부직포를 몇 장 뽑아냈다. 그 후 이곳저곳 마른 먼지가 낀 곳들을 일일이 닦아냈다. 시험 기간 동안 손대지 않은 탓에 부직포마다 먼지가 한가득 붙었다. 그럼에도 내 격정적인 심정을 가라앉히긴 역부족이었다. 이제야 큰 산을 넘었는데 직면할 문제에 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교복에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일그러진 표정과 함께 얼굴이 후끈거렸다. 불현듯 망할 아줌마가 저지른 악행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날 밤, 아버지께 들었던 바로 망할 아줌마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 페미니즘 운동의 일환이었다 주장했단 것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어떻게 누나하고 저를 두고...'


'어른들의 사정이 참 복잡하지. 결국 아정이는 애 낳고 그대로 전공 살려서 유능한 디자이너가 됐으니까.'


'아버지께서도 계획이 있으셨잖아요. 누나나 저나 나이 좀 되면 취직길 열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늦을 거라 생각했던 거야. 친구들이 성공하는 모습에 자신을 죄이고 있었으니까.'


'아버지, 너무 너그럽게 대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망할 아줌마를 사랑했다. 그렇기 때문에 망할 아줌마가 성공가도를 달리는 모습을 기뻐하면서도 곁을 떠났단 사실에 슬퍼하시곤 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에 한숨만 내쉬어댔다.


'아정이가 미숙했던 건 사실이니까. 가족을 이루기엔 우리가 너무 급했던 거야. 서로 성숙한 어른이 되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때 아버지께서 흘리는 눈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웃고 계시지만 자식에게 말하긴 제법 무거운 얘기 었으니 말이다.


'그래, 그러면 된 거야. 아정이는 가부장제 사회를 극복한 멋쟁이니까. 엄마한테 나는 너무나 과분한 남자였어.'


아버지는 거짓말쟁이다. 망할 아줌마에게 과분했으면 자식을 두 명 이상 낳을 생각 따윈 없었을 것이다. 누나도 나도 모두 망할 아줌마가 원해서 태어났으니 말이다.


망할 아줌마가 그 짓거리를 하게 된 건 아버지와의 학력 차이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고졸인데 반해 망할 아줌마는 국내 최상위 대학교의 의류학과 수석 출신이었다. 당시엔 취업 경쟁이 지금보다 나은 편이라 망할 아줌마는 사실상 취업을 따놓은 당상이라 떠들어 댔다고 한다. 아버지와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외모는 확실히 타고난 것 같았다. 학창 시절 여학생들의 관심이 싫어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검은색 뿔테 안경을 달고 다녔으니 어디서나 먹히는 외모였단 것이다. 고졸을 끝내고 현역 복무를 마친 아버지는 두발 규정을 준수한 채 안경도 벗은 외모로, 복무지였던 일산 근처 신도시를 서성이며 먼 곳에서 오는 큰아버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때 식당에서 망할 아줌마를 우연히 만났고 아버지의 비쩍 마른 외모에 망할 아줌마가 첫눈에 반했다는 것, 이게 모든 악연의 시작이었다.


'저기, 이 근처에서 군인 하시는 거예요?'


'그, 그, 충성! 병장 이성운은 200X 년 1월 4일부로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아버지의 능청맞은 거수경례에 망할 아줌마는 그대로 넘어가 연락처와 주소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이전부터 남성 의류들을 다룬 망할 아줌마는 아버지께 여러 옷들을 입히며 대용 모델을 시켰다. 그렇게 몇 개월 간 파트너로 다니면서 사이가 맞다고 착각한 망할 아줌마는 아버지와 된통 사고를 쳐 아이를 가지고 말았다. 그 아이가 나의 누나, 이다연의 탄생이었다.


그대로 망할 아줌마는 임산부라는 이유로 취업에서 동떨어져 아버지와 가정을 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열거하니 나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짓고 말았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어.'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검은색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집 밖을 나서기 바빴다. 마침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유나 녀석, 지금쯤 들어왔겠지?"


가기 앞서 나는 미로에게 온 SMK 정보들을 확인해보았다. 유나의 영향력이 줄었는지 간만에 채팅창이 식은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그만큼 날 만나면 어떤 폭력성을 드러낼지 가늠할 수 없었다. 유나네 아파트동에 다다를수록 나는 긴장한 채 미로와 채팅을 주고받기 바빴다.


'선배 진짜 갈 생각이에요?'


'그래야 응어리가 일찍이 풀리지 않겠어? 저 망할 계집이 되레 다른 사람한테 피해 끼치게 하고 싶진 않아.'


'그래도... 유나 빡치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요ㅇ.ㅇ;;'


'몰라 ㅡㅡ 까짓 껏 싫다 그러면 선유파 맡으라 그러지 뭐. 이판사판이다.'


유리 보안문에 다다르는 순간, 나는 침을 꼴딱 삼키며 검지 손가락을 번호판에 향했다. 몸을 떤 채 코앞에 멈춰 서자 곧잘 눈을 꾹 감은 채 유나네 호수를 눌러갔다. 버벅거리며 수신된 소리가 들리자 나는 깊은숨을 내쉰 뒤 유리벽에 몸을 기대 인상을 찌푸렸다.


"하유나, 나다. 얘기하러 왔는데...!"


갑자기 유리문이 열림에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 가까스로 틈에 끼일 위험을 감수했다. 오가는 인원이 없다는 것은 유나가 원격으로 열었단 뜻이다. 벌써부터 불안이 엄습하는 상황에도 나는 평정심을 이어가야만 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3층에 도착하니 이미 모든 준비는 끝나 있었다. 대문은 활짝 열려있고 그 옆에 교복을 입은 유나가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오랜만이네. 망할 오빠."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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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69. 가족 망쳐놓기 下 - 1 20.12.07 34 1 12쪽
69 68. 가족 망쳐놓기 上 - 8 20.11.30 30 1 11쪽
68 67. 가족 망쳐놓기 上 - 7 20.11.30 23 1 11쪽
67 66. 가족 망쳐놓기 上 - 6 20.11.24 28 1 13쪽
66 65. 가족 망쳐놓기 上 - 5 20.11.17 30 1 12쪽
65 64. 가족 망쳐놓기 上 - 4 20.11.10 29 1 11쪽
64 63. 가족 망쳐놓기 上 - 3 20.11.03 30 1 11쪽
» 62. 가족 망쳐놓기 上 - 2 20.10.27 42 1 11쪽
62 61. 가족 망쳐놓기 上 - 1 20.10.19 48 0 12쪽
61 60. 메마른 기억 - 7 20.09.18 36 0 12쪽
60 59. 메마른 기억 - 6 20.09.08 30 0 12쪽
59 58. 메마른 기억 - 5 20.08.31 30 0 11쪽
58 57. 메마른 기억 - 4 20.08.24 36 1 11쪽
57 56. 메마른 기억 - 3 20.08.19 30 0 11쪽
56 55. 메마른 기억 - 2 20.08.10 30 0 11쪽
55 54. 메마른 기억 - 1 20.08.03 30 0 11쪽
54 53.빛바랜 거울 - 7 20.07.27 37 0 13쪽
53 52. 빛바랜 거울 - 6 20.07.20 38 1 14쪽
52 51. 빛바랜 거울 - 5 +2 20.07.13 40 1 13쪽
51 50. 빛바랜 거울 - 4 20.07.06 38 0 12쪽
50 49. 빛바랜 거울 - 3 20.06.29 38 0 12쪽
49 48. 빛바랜 거울 - 2 20.06.25 36 0 12쪽
48 47. 빛바랜 거울 - 1 20.06.22 36 0 12쪽
47 46. 어긋난 조각 - 6 20.06.15 32 0 11쪽
46 45. 어긋난 조각 - 5 20.06.09 36 0 11쪽
45 44. 어긋난 조각 - 4 20.06.04 40 0 11쪽
44 43. 어긋난 조각 - 3 20.06.03 45 0 12쪽
43 42. 어긋난 조각 - 2 +1 20.05.20 39 2 11쪽
42 41. 어긋난 조각 - 1 20.05.15 32 0 13쪽
41 40. 마땅한 복수? - 5 20.05.13 4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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