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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 님의 서재입니다.

배같은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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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까르
작품등록일 :
2020.01.17 23:48
최근연재일 :
2021.02.27 22:00
연재수 :
85 회
조회수 :
4,797
추천수 :
77
글자수 :
487,621

작성
20.09.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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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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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60. 메마른 기억 - 7

DUMMY

"선배 보세요! 이게 아빠가 보내준 샘플들이에요."


"오, 기대 이상인 걸?"


"선유 너도 와서 봐봐. 네가 입을 거잖아."


"진짜 입어야 돼?"


대화 분위기는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원목 다이닝 테이블 위에 놓인 하련의 휴대폰으로 삼삼오오 모일 때 나는 자리에 가만히 있다 울리는 진동벨을 보고 주문한 음료를 받으러 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을 각각 건네주자 모두는 고맙다 가볍게 말한 뒤 다시 화젯거리에 집중했다. 내 앞에 놓인 아이스티 한 잔처럼 서로 거리감이 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민후 형 관련된 일들은 결국 내 중심으로 돌아가기에 괜한 참견으로 서로 불편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지 않았다.


1시간 정도 후, 셋은 아직까지도 대화의 장을 이어갔고 나는 빈 플라스틱 잔 속 얼음들을 입안에 녹여 먹으며 가끔씩 건네는 질문에 짧게 대답해갔다. 주로 아버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선배 소희 아시죠? 얼마 전에 저한테 문자가 왔는데 우리 학교로 입시 지원서 넣었다는 거 있죠?"


"정말? 피부는 좀 어떻대?"


"피부과 다니면서 점점 호전되고 있다고 보내줬어요. 물론 여기 계신 흑기사 님 덕분이죠."


하련의 얄궂은 미소에 나는 마시던 아이스티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저어댔다.


"괜한 참견이다. 그나저나, 소희 3학년이었구나."


그렇다는 건 유나를 비롯한 암호중학교 여학부가 선배·후배 없이 교내 질서를 어지럽힌단 뜻이었다. 전교 부회장인 유나가 그 정도라면 회장은 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학교를 개판으로 만들어 놨을까 싶었다. 내가 마스크를 쓴 채 똥씹은 표정을 짓던 중 맞은편에서 우리 학교 학생회에 관한 얘기가 오갔다.


"오퍼레이터 작업 미리 해놔야 하지 않을까? 저번에 늦장 부렸다가 학생회한테 엄청 깨졌잖아."


하련은 손사래를 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신경 쓰지 마! 선유 너도 알다시피 저번 학생회는 하나같이 꼰대 투성이었잖아."


"그랬던 것치곤, 이번 학생회도 제법 빡세지 않았어?"


나미 선배는 말을 마치고 남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하련을 보고 있었다. 하련은 턱에 손가락을 두며 위를 쳐다보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이나 서기는 나쁘지 않았어요. 그 사이코 부회장이 문제였던 거죠."


확실하게 짚자면 회장은 눈에 띠지 않아 존재감이 없었다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질적 권리는 회장의 절친 지간인 부회장이 차지했다. 차별과 탄압을 막고자 'FLAT' 슬로건을 내세워 위세를 떨친 부회장의 모습은 많은 학생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하련의 경우 레미 활동을 위해 점심을 일찍 해결하려던 중 우연찮게 따돌림당하는 3학년 선배를 몸으로 밀쳤고 이를 빌미로 부회장과 언쟁을 벌였던 적이 있었다. 말 따라 하련이 이를 얘기하자 나미 선배가 양손을 저으며 하련을 상대하고 있었다.


"너그럽게 이해해줘. 일부러 그랬던 것도 아니잖아."


"진짜! 제가 3학년 선배들 속사정까지 알 리 없잖아요. 이번에 그 부회장 동생이 출마한다던데 절대 안 뽑을 거예요!"


어느새 화젯거리는 부회장에 관한 푸념으로 변해갔다. 나는 나미 선배와 하련의 얘기를 경청하던 중 옆에 물끄러미 서있던 선유와 눈을 마주쳤다. 선유가 주변 눈치를 보며 내게 신호를 보내는 걸 봐선 민후 형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게 어떻냐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테이블 위에 검지 손가락으로 짧게 X자를 그리며 나미 선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싶었지만 나미 선배를 이번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부쩍 지나 일몰에 가까워지자 서로 짧게 대화를 나누다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재빨리 영수증을 들고 카운터로 향하던 중이었다. 다들 눈치채기 전에 내 카드로 결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미 선배가 뒤따라 오는 바람에 각자 해당된 금액을 송금 어플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페를 나오자마자 하련과 선유는 내게 짧게 작별인사를 건넨 뒤 건너편 횡단보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련은 어찌나 많이 샀는지 양쪽 다 쇼핑백들로 한가득이었다. 선유가 옆에서 거들지 않았다면 집도 못 갈 정도로 휘청거렸을 것이다. 내가 흐트러진 모자챙을 가다듬을 동안 나미 선배는 힐이 담긴 흰색 종이 쇼핑백을 양손으로 쥔 채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


"발은 좀 괜찮으세요?"


"덕분에. 이래서 인맥이 중요한 거구나?"


"수험생이니까 조심하셔야 돼요. 끝나고 못 누리면 아쉽잖아요."


"히힛, 숙지할게."


나는 나미 선배와 잠시 발을 맞출 수 있었다. 지하철 출입구를 지나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나는 우측으로 나미 선배는 직진으로 가야만 했다. 옆에는 착공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도청이 보였다. 둥글게 조각난 수풀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갔고 한가운데 둥글게 패인 광장에선 몇몇 인원들이 공연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 위로 구름이 조금 낀 보랏빛 하늘은 나를 잠시 더위로부터 잊게 만들 정도로 공허한 느낌을 주었다.


"마지막 행사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나미 선배와 대면했다. 나미 선배는 웃고 있었지만 섭섭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듯 조금은 표정이 굳어갔다.


"레미 참 재밌었는데. 나랑 같이 면접했을 때 기억 나?"


"당연하죠. 처음엔 놀이공원 같은 분위기라 놀랬는데 알고 보니 하련이 허겁지겁 짰던 거였죠?"


"맞아. 레미는 매년마다 면접 오프닝을 만드는 전통이 있거든. 저번에는 시험 직후에 면접 일정이 잡혀서 하련이가 제 컨디션이 아니었어."


"벌써부터 하련이 차기 면접 오프닝을 어떻게 만들지 걱정이 앞서네요."


그 순간 나는 분위기에 맞지 않는 빈말을 내뱉었단 사실을 알아챘다. 바로 빈말이었다 정정하고 싶었지만 나미 선배는 되레 반색을 표했다.


"2학기부터는 하련이랑 승준이만 대표로 있으니까 바삐 움직여야 될 거야. SMK라는 벽이 만만치 않잖아."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그 망할 계집들, 학교만 개판 아니었으면 이러진 않았을 거예요."


어느덧 횡단보도에 다다르자 나미 선배는 주변을 둘러보며 신호를 보는 듯했다. 그 후 아까처럼, 아니 더 진중해진 모습으로 나와 대면했다. 바람이 불어 나미 선배의 검고 긴 생머리가 조금씩 찰랑거렸다.


"강연이는, 레미에 들어온 걸 후회하지 않아?"


"네? 그게 무슨 뜻이죠?"


"그거야 레미의 존폐 여부에 관해 들먹이려 한 데다 SMK에 반강제적으로 들어가 계속 고생만 하잖아. 그냥 그때 네 뜻 따르고 오퍼레이터에 뒀으면 이렇게까지 일이 안 커졌을 텐데..."


횡단보도에 녹색 등이 들어왔지만 나미 선배는 건너지 않았다. 그저 감정을 호소한 채 나를 향한 자책감을 표출할 뿐이었다. 나는 여러 차례 기회를 놓쳤었다. 보는 앞에서 SMK를 거절하는 것도, 축제 이후 상황을 흐지부지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민후 형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모두 주변 분위기 앞에 무력해져 내 입장을 강경히 내세울 수 없었다. 되레 일만 벌여놓고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기 십상이었다. 분명히 날 귀찮게 하는 기억들인 걸 알면서도 나는 메마른 대처로 이를 방임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부, 내 미숙함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미 선배 앞에서 나조차 자책하려 들면 분위기만 망칠 것이다. 지금이라도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내가 되어야만 했다. 의식의 흐름을 통해 나는 어떡하면 좋을지 생각해냈다. 나미 선배가 고개 숙인 채 말을 잇지 못하자 나는 모자챙을 뒤로 돌린 뒤 제자리에 앉아 나미 선배와 시선을 맞추었다. 나미 선배가 날 보자마자 감정에 북받쳐 글썽이려 했지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상황을 덤덤히 지켜보았다.


"선배. 지금부터 선배 머릿속에 민후 형 관련된 일은 없었던 겁니다."


"뭐?"


"이제 남들에게 일 벌이면서 복잡하게 굴고 싶지 않아서요. 원래 돕기로 했던 선유도, 하련도 모두 이번 일에 가담치 않도록 연락해 둘 거예요."


그제야 나미 선배는 손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나는 곧잘 자리에서 일어나 나미 선배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지 마. 그러면 또 너 혼자 힘들 거잖아!"


"어차피 선배랑 교지편집부 일로 바쁠 예정이잖아요. 선유나 하련도 오랜만에 하는 무대 행사에 초점을 맞추는 게 완성도가 높을 거라 생각해요."


"강연아, 이건 부담이나 효율 따위의 문제가 아니야. 그저 힘든 너를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계속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다 나비 효과만 자극하고 말았어요. 이번만큼은 분위기도, 누군가에게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 싶어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모자챙을 앞으로 돌렸다. 물론, 시선은 그대로 나미 선배를 향했다.


"무대 행사 전까지 확실하게 매듭짓고 오겠습니다."


그 후 나는 나미 선배에게 가볍게 손을 흔든 뒤 우측으로 돌아 집으로 향했다. 내가 먼저 나서야만 새롭게 짤 판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채팅 어플로 선유와 하련을 방으로 초대해 짧게 문자를 올렸고 이내 선유와 하련의 당혹스러운 듯한 답글들이 줄을 지었다. 초반에는 반박의 답글이 날차게 이어졌지만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설득한 끝에 둘은 어느새 내 입장을 이해하고 응원해줬다. 걱정에 찬 답글들 앞에 나는 둘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할 뿐이었다.


내가 부엌에 들어가 저녁거리를 만들어 식탁에 세팅하기까지 누나는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하질 않았다. 누나가 좋아하는 강낭콩피 삼겹살볶음이니까 내가 방에 들어가 문자를 주면 일찍이 나와 먹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이행하기 위해 휴대폰을 킨 순간 나는 익숙한 이름과 문자 내용에 눈을 떼지 못했다.


'오랜만이야! 혹시 시간 있어?'


나는 바로 방에서 소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소파 팔걸이에 두었던 모자와 마스크를 찬 뒤 민후 형과의 채팅창으로 들어가 자판을 두들겼다.


'지금 바로 갈게요. 어디로 가면 돼요?'


'지금? 그럼 월스트리트 아파트 쪽 카페거리로 올 수 있어? 좀 멀면 데리러 갈게.'


'괜찮아요. 신호등 두개 건너면 금방이니까요. 도착하면 문자 드릴게요.'


올 것이 왔다. 연속적으로 할 일이 생겼지만 일요일을 놓치기엔 너무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카페거리에 들어설 무렵 나는 기진맥진한 채 가쁜 숨을 내쉬기 바빴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아웃렛에서 많이 걸었던 탓이었다. 민후 형이 말해준 대로 월스트리트에서 호수공원으로 진입하는 계단 부근에 작은 철제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카페 에빗'이라 쓰인 폰트식 led 전광판에 고급스러운 검은색 배경의 간판이 보였다.


'여기겠지?'


나는 카페 정면에 배치된 유리창 너머로 오른쪽 중간에 앉아있던 민후 형을 찾을 수 있었다. 민후 형은 날 보자마자 웃으며 손을 흔들자 나도 맞춰 손을 흔들려는 순간.


"어?"


순간 잘못 봤나 싶어 양손으로 눈을 비빈 뒤 다시 민후 형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민후 형 맞은편 소파석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파트는 7부작으로 완필됩니다.

늦게 연재된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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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65. 가족 망쳐놓기 上 - 5 20.11.17 25 1 12쪽
65 64. 가족 망쳐놓기 上 - 4 20.11.10 29 1 11쪽
64 63. 가족 망쳐놓기 上 - 3 20.11.03 26 1 11쪽
63 62. 가족 망쳐놓기 上 - 2 20.10.27 39 1 11쪽
62 61. 가족 망쳐놓기 上 - 1 20.10.19 46 0 12쪽
» 60. 메마른 기억 - 7 20.09.18 33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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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58. 메마른 기억 - 5 20.08.31 2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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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40. 마땅한 복수? - 5 20.05.13 3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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