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막힌 것을 열다(開封) 6
“백 가주! 팽가 가주로서 전대 팽가 가주셨던 내 아버님이 백 가주 선친과 어머니에 했던 모든 일에 대해 너그러운 용서를 구하네”
팽진은 일어나 백엽에게 머리를 숙이려했다.
하지만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백엽이 진기를 일으켜 팽진 몸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엽은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말문까지 열었다.
“두 가문 사이 일이라하나 그래도 받들기 민망합니다. 다만, 백가 가주로서 팽가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들입니다. 고인이 되신 아버지도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어머니도 좋아하실 것이고요. 지금까지 소원했던 만큼 앞으로 더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큰 외숙.”
그 말을 끝으로 백엽은 팽가 삼형제에게 머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내공의 힘으로 강제로 팽진을 의자에 앉혔다.
백엽의 눈에, 안도하는 세 외숙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백엽은 늘 외롭게, 북방의 차디찬 움막에 앓아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백가장으로 가서 살아도 되고, 얼마든지 좋은 집 사서 하인 두고 편히 사셔도 되었건만, 인생을 움막과 함께한 아버지다.
짐작은 가지만, 왜 그러셨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그냥 그분의 선택이었기에 존중하고 따랐을 뿐이다.
‘마침내 외가와 화해했어요. 아마 제가 약했다면 외가는 절대로 받아주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거 일일이 신경쓰지 않고 살려고요. 저 잘했죠?’
아버지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위해 무조건 팽가와 화해하고 싶어했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배워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에게 무공을 배웠다.
처가가 무가니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말이다.
‘자식!’
백엽은 처음 만난 날 비무후에, 어머니는 잘 계시냐고 물었더니 잘 있다고 답한 도룡도 생각났지만 그냥 웃어 넘겼다.
어머니가 잘 계시는 것은 분명 맞으니까.
‘어쩌면 세상은 단순하게 사는 것일지도. 무공도 그렇겠지?’
백엽은 해묵은 숙제를 하나 끝낸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장북현을 떠날 때 우연히 금봉과 인연이 되었다.
그리고 음모로 팽가가 함께 엮이면서 외가 사람들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후,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좋은 스승을 만나 무공의 진전을 이루고, 사실 그 덕으로 외가와 화해도 했다.
‘팽가는 어찌보면 남궁가 대신 우리를 택했다.’
백엽이 팽가를 받아들인 이유는, 팽가가 어머니를 복권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궁가와 화해가 불가능하니 생존을 위해 차선책으로 자신을 선택한 것일 수 도 있지만, 동시에 아직도 과거의 앙금을 잊지 않고 있는 남궁가와 더 나쁜 관계가 되더라도 각오하겠다는 의미였다.
결국 팽가는 남궁가 대신 자신을 택한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외가가 우리를 선택함으로써 남궁가와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높여주는 것이다.’
백엽은 다행히 백연이 잘 나서서, 자신이 남궁가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겠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 된 것이다.
백엽은 팽진 가주와 단 둘이 조용히 이야기하는 자리를 별도로 가졌다.
.....
늦은 밤,
백엽 삼남매는 금풍상단으로 돌아왔다.
상단주 부부와, 금봉 그리고 만배검 구인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엽아, 외가와는 잘 이야기 했느냐?”
“예 금숙. 저희야 늘 외가라고 생각했고, 그분들이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래 잘되었구나.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금숙.”
그러다 백엽은 금봉에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향하는 것을 발견했다.
금봉은 여전히 다소곳한 자세로,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이 차를 우려내 일행의 찻잔에 따르고 있을뿐이었다.
“내일 떠난다고 했지?”
이옥란이었다.
그녀는 내일 떠난다는 백엽에게 반드시 해야할 말이 있었다.
금봉의 일이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아닙니다 숙모님. 원래는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하루 더 늦어질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에 곤륜 태헌 사형을 만나고, 점심에는 남궁장천 장로, 그리고 저녁에는 개방 구지신개 선배님과 각원 대사님을 뵙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 대단하구나! 하나같이 평생에 한번 만나기도 힘든 분들이구나!”
하루가 연장 되었다지만, 이옥란의 마음도 모르고 중간에 가로채서 감탄을 하는 사람은 만배검이었다.
“숙모님.”
그때, 백엽이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조금은 급한 목소리로 이옥란을 불렀다.
“왜 엽아.”
이옥란은 백엽이 먼저 금봉이야기를 하나보다 하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내일 아침 세분 외숙과 태헌 사형이 이곳으로 오실거예요.”
“뭐?”
이옥란은 예상외의 답에 놀랐다.
아니 예상외의 답이 아니라, 네 사람이 갑자기 지부로 온다는 이야기에 놀란 것이다.
“아니 너는······, 휴우. 이를 어째.”
“예? 뭐가 문제가······,”
“아니다."
이옥란이 조금 답답한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더니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백엽을 불렀다.
"엽아.”
“예 숙모님.”
“앞으로 손님을 모셔올 때는 미리 이야기해 시간을 주어야 집에서 준비를 한단다. 남자들이야 그냥 먹기만 하면 되지만 말이다. 예아랑 결혼해도 꼭 명심하거라. 알아 들었니?”
“아, 예 숙모님!”
그 말을 끝으로 이옥란은 벌떡 일어섰다.
“예아야. 너도 오너라.”
그리고는 금봉을 데리고 급히 나갔다.
“숙모 저도 도울께요.”
백연이 뒤따랐다.
.....
“그럼 백가장으로 갈거냐?”
“일단은요.”
여자들이 바쁘건 말건 남자들은 술까지 한잔 하며 편히 이야기 중이었다.
모든 시선이 백엽에게로 향했다.
이곳 사람들도 아직 정확한 백엽의 뜻을 몰랐다.
너무 궁금했다.
이제 만검신협을 모르는, 26살 화경 고수를 모르는 무림인은 거의 없다.
그의 향로(向路)에 따라 무림 판세가 달라 질 것이다.
“비록 낭인이지만, 저를 따르는 사람들과 무가를 열고 만검백가라 칭하기로 했습니다. 본가는 당연히 광평에 있는 백가장입니다. 그래서 우선 백가장으로 갈 겁니다. 사천성에 있는 운룡장은 버릴 수 없어 작은 행가로 운영할 계획입니다.”
“······.”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듣고만 있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였다.
“백가장, 좋은 곳이지.”
구인호가 좋은 생각이라는 듯 추임새를 넣는다.
“예 구숙! 저는 먼저 현에 가서 백가장 권리문서를 찾고 한표 총관이 그곳을 무가로 정비할 것입니다.”
백엽은 이미 한표 군사 동의를 얻어 만검백가 총관으로 임명한 뒤였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 즉시 팽가로 가서 어머니를 뵙고, 어머니가 원하시면 외할머니와 함께 백가장으로 모셔올 계획입니다. 그리고 저는······,”
백엽이 금문식을 쳐다보았다.
백엽의 눈에는 감사함과 미안함, 그리고 반드시 이루겠다는 의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지난 세월을 바로 잡을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금숙과 관련된 모든 일을 말입니다.”
“······!”
순간 적막이 몰려왔다.
백엽의 의지가 무겁게 공기를 짓눌러 함께한 사람들 모두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 유언을 따를 것입니다. 검은 든 자로서, 이 세상에 촉촉한 비를 내리려 합니다.”
백엽은 상황을 보아가며 공식적인 개파대전도 할 예정이었다.
“그래 멋지구나 엽아! 너도 갈 노인을 알거다. 지금 그가 장원을 돌보고 있다. 하지만 사람을 보내 보았지만, 아무리 이야기해도 권리문서는 관에서 안 내주더라. 네가 가야겠지.”
“아, 고맙습니다. 금숙! 갈노야가 장원에 계시는 군요. 관리문서는 제가 가야 줄 것입니다.”
“할 일이 많겠구나.”
“예 하지만, 서서히 하나씩 하려고요.”
“그래 응원하마. 이 숙부의 작은 힘이나마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려무나.”
“나도 언제나 응원한다.”
만배검이 또 추임새를 넣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어두워졌다.
백엽이 하려는 일은 결국 전쟁이다.
천의맹 사천분타에는 이미 정마 2만여 고수가 대치한지 20여일이 되어간다.
서로 무슨 꿍꿍이속인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전쟁이 발발할 것은 누가 보더라도 뻔하다.
더구나 이들은 서로가 선발대에 불과하다.
마천도 곧 본대가 올 것이고, 천의맹도 내일 척마군이 출정식을 갖고는 이동 할 것이다.
반면, 아직 사도는 조용하다.
금검과 대결에서 패해 도망간 것으로 알려진 천사검 고천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사도는 이에대한 어떤 반응도 없었다.
어떤 이는, 사도와 마도가 손을 잡기 위해 뒤로 밀고 당기는 협상중이라고 예상했다.
아니면 고천강 문제로 내부 균열이 가속화 되고 있다고 분석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맹이 멸사군을 조직해 먼저 공격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미 강서성과 안휘성 인근에는 맹 무사들이 잔뜩 집결해 있다.
결국 정사대전도 불가피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밌게 해요.”
이옥란이 들어왔다.
내일 아침 조찬 준비를 지시하고 온 모양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엽이의 앞날에 대해서”
금문식이 답했다.
그러자 갑자기 이옥란이 나섰다.
조금전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어서 였다.
“엽아.”
“예 숙모.”
“언제까지 숙모라 할거니? 이제 장모님으로 불러야지.”
순간, 백엽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던 금봉과 눈이 마주 쳤다.
금봉은 얼른 고개를 다시 숙였다.
“맞다. 그건 나도 형수 생각과 같다. 세상에 예아만한 처녀가 어디 있고 너 만한 총각이 어딨느냐? 둘 다 나이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뭐 같은 처지니 뭐라 할 것도 없고······,”
하지만 만배검은 말을 끊어야만 했다.
“아니 삼촌! 나이가 좀 있다니요? 무슨 말이 그래요. 둘 다 한참이죠.”
이옥선이 발끈한 것이다.
“형수님 그, 그건······.”
만배검은 이옥선이 자신을 톡 쏘아 부치자, 계면쩍은 듯 말꼬리를 흐렸다.
만배검은 이옥란의 저런 모습을 처음 보았다.
백엽도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이럴 때는 자기가 나서야 한다.
“모두들 저희 둘을 사랑해서 하신 말씀임을 잘 압니다. 고맙습니다. 다만 예매나 저나 서로가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래서, 조금 시간을 갖자고 예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다 서로 좋으면 결혼하고 아니면 예매가 제 의동생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번에 백가장에 갈 때 예매도 같이 데려 가려고 합니다. 어머니도 뵙고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 믿는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을 믿는다는 표정이었다.
금봉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백엽을 쳐다 보았지만, 백엽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
“금숙!”
이번에는 백엽이 조금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금숙에게 늘 미안해 하면서도 감사하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반드시 은혜를, 백가 가주로서 아버지를 대신해 갚으라 하셨습니다.”
백엽의 진심이다.
백엽도 금문식 부부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자신을 위해 한 일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세상에 그런 사람 없다.
그리고 그 은혜는 아무리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큰 은혜다.
“고맙구나. 엽아. 하지만 나는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존경하는 형님을 위해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을뿐이다.”
“하지만······,”
백엽이 무언가 반박하려 했으나 금문식 말이 조금 더 빨랐다.
“너는 이미 상단을 많이 도와주고 있다. 이번 표행으로 우리는 많은 성과를 얻었다. 상단을 부흥시킬 돈도 벌었고, 불가능하다는 표행을 성공시켜 신뢰도 다시 되찾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는 바로 너다. 너로 인해 팽가와 다시 교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잘하면 남궁가와도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26살 화경 고수가 금풍상단과 함께 한다는 거, 네가 예아 약혼자라는 게 가장 큰 도움이다.”
모두 금문식 이야기가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만배검은 아주 작은 소리로 “암암”하며 격한 동의를 보냈다.
반면 금봉의 고개는 더욱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솔직히 너를 이용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만 현실이 그렇다. 지금도 무림대회 끝나고 문파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의뢰가 쏟아진다. 네 얼굴을 보고 말이다. 표행이 잘못되면 네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하는 믿음이다. 무엇보다 너와 어떻게 해서든지 인연을 맺으려는 행동이다.”
백엽은 금문식 말에 쓴 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이미 풍파가 스스로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맹도 우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승냥이가 우리를 싫어하지만 대안이 없다. 너를 지지하는 세력도 많고, 무엇보다 정사마 대전을 치루기 위해서는 중원 전역을 감당할 수 있는 대형표국이 필요한데 그런 곳은 중원대표국과 우리 금풍표국 둘 뿐이다. 사천쪽은 중원대표국이 오래전부터 담당했으니, 안휘와 강서쪽은 우리가 맡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백엽도 일응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제갈승이 의도한 것은 마천과 사도 도발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 방법이 금풍표국과 팽가의 희생이었고, 그것이 백엽과 악연의 시초였다.
그렇다고 그것을 빌미로 금풍표국의 효용성을 외면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형님,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조카 명성 조금 이용하는 것인데.”
“그렇습니다 금숙.”
백엽이 자신의 편을 들자, 만배검이 가슴 깊이 품어 놓았던 말을 드디어 꺼냈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 엽아!”
“예 구숙.”
“네게 부탁이 있다. 아니 꼭 들어줘야한다.”
“말씀하십시오 구숙.”
백엽은 만배검 표정이 하도 진지해 얼마나 큰 일이기에 저러나 하고 의구심이 솟구쳤다.
그러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도와드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산이 좀 내게 보내라. 산이는 표국일에 딱이다. 산이가 그 요란한 천뢰도법을 펼치기만 하면 산적들이 모두 도망갈 거다. 내가 적당히 훈련시켜 금풍표국 대표두 시키마.”
“예?”
백엽은 너무 갑작스런 예상 밖 이야기에 반문할 수 박에 없었다.
그러다 백엽은 웃었다.
“아니. 그,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구숙!”
하지만 백산은 펄쩍 뛰었다.
그리고 백연은 한마디 안 할 수 가 없었다.
“와우! 정말 잘됐다. 우리 산오라방 드디어 취직했네.”
“여, 연아 그게 무슨······.”
하지만 백연이 더 빨랐다.
“오라방 축하해! 돈 벌어오면 내게 맡기는 거 알지? 내가 잘 불려서 오라방 장가갈 때 줄테니까 염려말고.”
“으하하하”
“호호호호”
갑자기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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