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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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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01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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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DUMMY

영주의 자리에서 백벽은 야트막한 선으로 보였다. 거스러미 같은 윤슬이 어스름에 잠들었다. 외부인들이 이 땅에 와서 가장 먼저 놀라는 것이 바로 저 물빛이다. 백벽은 벽이 아니었다. 험지를 갈가리 찢어놓은 돌땅에서 수십 개의 군도와 바위산맥, 황야와 마른 계곡이 난교하듯 얼크러진 반경 수백 리의 땅덩이가 너무도 간단하게 백벽이라 불렸다. 바닷물이 한가득찼다가 빠지는 날이면 그곳에는 수많은 웅덩이가 생기고 사방에서 반사되는 강렬한 햇빛에 번쩍이는 소금으로 말라갔다. 병사들은 신발을 암염바위에 미끄러뜨리며 보부상 조각배를 쫓아내고 시름거리는 해삼이나 물고기를 건져올렸다.

그곳의 바위들은 모두 하얬다.

불구왕자는 저녁마다 그쪽이 잘 보이는 옥상에 가서 찬바람을 맞았다. 서풍은 뒤에서 불어온다. 태양을 빨갛게 갈궈대는 신의 나라에서 온 봄바람이 수백 리 임야를 짖치고 칼처럼 찢어졌다. 동향의 여로는 바람마저 무장하니 옷은 짖이기고 머리는 산발했다. 백벽의 곳곳 고랑과 초목 사이를 떠돌다 기다란 흑나라 깃발에 부딪혀 힘없이 늘어졌다. 게헨나는 그런 곳이다.

지금쯤 점점이 떨어진 군영에 웅크린 병사들은 마지막 따뜻한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을 야속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군이 앉은 카미엔 성은 태양을 등진 점이었다. 점은 커지면 밤이 됐다. 그러면 온 군영에 횃불이 오른다. 오늘은 평소보다 불이 일찍 피어올랐다. 황혼이 소화되는 밤의 밥통에서 그 빛들은 물에 반사되는 반짝이와 함께 오손도손 명멸했다. 영원히 떠지지 않을 하얀 눈꺼풀 같았다. 그 옆으로 드러누운 산맥이 이어졌다.


장 부당은 느긋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는 속을 상아로 채운 우아한 금잔에 입술을 갖다댔다. 향신료를 넣고 데운 술의 열기로 잔끝은 기분 좋게 데워져 있었다. 통에서 꺼낸 지 한 달도 안 된 포도주는 검고 달콤했다.


"콜렛이 돌아오기 전까진 진군할 수 없어. 그러니까 그 얘긴 더 이상 꺼내지 말아."


그의 기분만큼이나 느긋한 잔치가 저녁까지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곳의 소란은 접시에 부딪히는 식기처럼 웅성거리며 깔끔했다. 심하게 취한 사람은 없었고, 하인들은 내내 천천한 걸음으로 달콤한 과자 조각을 돌리고 있다. 이미 주방에서부터 밀가루가 계란과 설탕, 버터에 흠뻑 젖어 화덕으로 희롱당하는 음탕한 향내로 손들은 안달을 낸다.


말트레는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백벽의 병력들을 끌고 오는 건 아니겠죠?"

"설마." 부당은 웃어넘겼다. "그 녀석들은 거기 있으라고 해야지. 이 전쟁은 온전히 우리 일이야."


수많은 구릉과 계곡, 황야와 강가에 점점이 이어진 군영의 체계를 그들이 지난 수십년 자르고 첨삭해왔기에 그곳 사정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전방에 있는 병사 한 명에게 휴가를 주기 위해 본부에서 출발한 전령은 한 곳 한 곳 길을 물어가며 물결치듯 바뀌곤 하는 현지의 상황을 알아서 톺아내야 했다. 병력을 빼오는 일은 쉽지 않을 뿐더러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게헨나 땅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꼭 콜렛이 와야만 하는 건가요? 저희끼리도...."

"콜렛이 거기서 사람을 데려와야 해. 아주 중요한 사람이지. 그 사람이 없으면 일이 시작이 안 돼."


부당은 하인이 쟁반에 받쳐 가져오는 구운 과자를 하나 집으면서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다. 고소하고 달콤하고 축축한 냄새가 났다. 빵 같은 과자는 뭉친 솜처럼 부서졌다. 요리사는 설탕과 계피를 아끼지 않았다.

말트레는 과자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자기한테까지 비밀로 부치게 되었는지 그 사정만이 궁금하다. '내가 콜렛보다 못 미덥다는 건가?' 굳이 사람을 백벽으로 보내야 했다면 그녀가 갔어도 됐을 일이다.

말트레는 2에서 3으로 밀려나는 굴욕감을 목 뒤로 천천히 녹여먹었다.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아니. 자넨 몰라. 나도 잘 몰라."


부당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뱃속에 들어간 음식의 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사실 아무도 모르지."

'더 이상은 안 되겠어.'


말트레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없이 쟁반을 갖다대고 있는 하인을 눈짓으로 쫒아냈다. 그 시선은 백작에게 돌아가지 않고 김이 오르는 밥그릇을 향했다. 장미물로 반죽한 파이 속은 샤프란으로 양념된 닭볶음이 채워져 있었다. 기름에 바짝 구운 닭껍질이 들어갔고, 햄과 계란과 빨간 콩과 파란 멜론이 속에 버무려졌다. 그녀는 침울하게 생각했다.


'군대는 해산이야. 이 상태로는 죽도 밥도 안 돼.'


왕궁에서 동쪽으로 까마득 돌뿌리 많은 땅덩이에 게헨나는 백국으로 뿌리내렸다. 카미엔 성이 제 속을 부여잡고 쏟아내는 잔치의 불기는 어수룩한 밤처녀의 머릿결에 힘입어 가파른 언덕 아래 도열하고 사주를 경계한다. 이렇게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면 안광을 번뜩이는 늑대원숭이 몇 마리가 먼 불가에 서서 냄새를 맡다가 굶주린 그늘속으로 다시 사라지곤 하였다. 언덕 아래에 천막을 드리웠기에 타지에서 찾아온 병사들은 희희망청 놀았다. 남은 고깃조각을 던져주는 말단 경비가 선임에게 뒤통수를 얻어맞는 광경은 흔한 목가였다.

이들은 쥘센 왕국의 밭과 가축을 불태우러 이곳에 왔다. 그런데도 백작은 며칠 째 행동이 없다. 더 이상의 휘하 소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카미엔에 모인 건 영주들이 직속 병사와 기사들을 대동하여 꾸린 소수의 집단 뿐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래, 요즘 세상에 휘하 소집이라니. 허나 전쟁이 용병으로 돌아간다고 형편좋게 생각한들 장 부당이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건 여전했다. 말트레는 용병 얘기를 꺼냈을 때 백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계약에 소집에 행군까지. 너무 느려. 그건 내게 생각이 있어.'


말트레는 당장 묻고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죠, 저하? 군대없이 칭왕을 하시려고요?'


말트레는 며칠째 왕자를 설득했다. 서둘러야 한다고, 전령이 출발하지 않았으니 왕궁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고, 초장부터 확실하게 눌러놓아야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그 말들은 은근했다. 은근한 눈빛과 말들이 자연스레 힐난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어찌나 노력해야 했던지!

부당은 곡언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슬쩍 얼버부리는 말들만 돌아오는 상황에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노망' 이었다. 말트레는 부당이 술에 취해 헛소리를 늘어놓던 순간을 기억했다. 아아, 전령을 위협한 건 실수였다.


'내가 성급한 짓을 했지?'


다음날 아침에 술 깨고 나서 그가 한 말은 이랬다. 돌이킬 수 없는 선전포고.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그녀가 존경해 마지않는 부당의 실행력을 생각한다면, 지금쯤 그들은 쥘센 변경의 성들을 우회하여 가는 동안 밭들을 불태우고 마피의 가신단에게 고통을 주고 있어야 했다.

허나 군대는 연회에 한창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에타는 어디있지?'


말트레는 이 자리에 와서 처음으로 그녀의 존재를 의식했다. 백작의 장녀이자 막내이자 유일한 적녀 고명딸은 사슴같은 파란색 눈으로 탁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말 없는 시녀들 사이에 앉아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소중한 몸에 적절한 행동만을 담아 접시에 내는 모습. 저 아이가 필요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카미엔 성은 요새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불구왕자의 어여쁜 별장에 가깝다. 대문에서 현관을 지나 바로 열 다섯 칸 계단을 오르면 웅장한 홀이 우뚝 서고, 손님들은 밖에서 본 성이 이렇게나 넓었었나 하는 의심에 사로잡힌다. 성의 한 면은 벽보다 유리가 많았다. 넓은 창 너머 수백 리 시야를 가로막는 건 암것도 없다. 손님들은 이곳에서 백작의 선물을 받고 흥청망청 놀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말트레는 백작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식객들을 둘러보았다. 첫날의 흥분은 사라졌다.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영주 두 명이 은근히 그녀를 찾아왔다. 즐거운 이야기로 대화를 거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주제는 지나치기 힘든 부분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솔직히 저도 백작님께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 지는 모릅니다. 그저 기다릴 뿐이죠. 그분이 이해 못할 행동을 벌인 적은 없으니까요."


애선퍼드의 영주 겔라리셋 도몬은 삼십을 막 넘긴 한창 때의 나이로 굵은 몸통에 우직한 팔다리로도 모자라 수북한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 말트레는 백벽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그의 말이 가소로웠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모를까 말트레는 이 자를 선봉에 세울 생각이 없었다. 본인도 그것을 원하리라.


"백작님께서 백벽을 떠나신 지 반년 쯤 됐던가요."


뒤이어 늙은 수염을 기른 그람펠드가 끼어들었다.


"요양이죠. 예, 확실히 옛날같진 않으시죠. 평생 일했으니까 쉬어야 할 때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백작님께선 곧 돌아갈 겁니다."

"돌아가요? 어디로요?"


말트레는 그가 은근한 비아냥을 보내고 있다는 데에 놀라 그만 말실수를 했고, 그람펠드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웃으며 "왕궁이죠.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요." 하고 덧붙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영주들도 같이 웃었다.


그람펠드의 영지는 백벽에 가까웠다. 말트레는 그의 말을 기꺼이 들을 요량이었지만 하는 말은 거의 비슷했다.


"백작님의 진정한 재량은 그 엄한 추진력에 있지요. 그분에게 어떠한 생각이 있다면, 저도 굳이 의심할 생각은 없습니다. 비서장께선 백작님의 수족과 같아 항상 붙어 다니니 무언가 들은 말들이 있었겠죠?"


역시나, 말트레는 그가 백벽에서 함께 복무할 때 보였던 친절한 태도들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 쓸쓸해졌다. 얼굴 절반을 뒤덮은 흉터가 생긴 이래 그녀를 여자랍시고 면전에서 하대하는 자들은 급격히 줄었다. 허나 그람펠드는 그 전에도 친절했다. 흉터가 욱신거리는 기분이 드는 지금, 말트레는 본인의 얼굴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 지 상상했다.


'평소와 같곘지. 거울로 본 것처럼.'


젊었을 때는 나름 특이한 매력으로도 보일 수 있었겠지만 피부가 다 쭈그러진 지금은 그저 흉할 뿐이다. 본인의 나이를 자각한 이래 말트레는 그것이 엄혹함으로 보이도록 항상 노력해왔다.

완고한 자들에게 이런 건 통하지 않는다. 그람펠드는 완고했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면 저희도 계속 여기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아직 다른 병력들이 모이지 않은 줄 알았지요. 그런데 우리가 마지막이더라고요?"


그래서 지금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재빨리 머리를 굴리고 있다. 그람펠드는 백벽의 장교가 아닌 휘하 영주로서 항의를 보내온다. 그리고 그 항의는 정당했다.


흔히 그렇듯 머리가 하얗게 셀 수록 판단력이 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들은 부당의 나이를 생각했다. 백작은 전쟁에서 너무 멀어졌다. 말트레는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게 분했다. 그 분함은 저녁 잔치까지 이어졌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게.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면서? 그러면 왜 그렇게 서두르지?"

"백작님이 저를 신뢰하시지 못하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저한테라도 계획을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안심할 수가 있겠어요?"

"그만해, 말트레. 이 얘기는 그만하자구."

"그러시지 말고 귀띔이라도 해주시면 제가 다른 사람들까지 설득해보이겠어요. 저야 당연히 백작님을 주님 다음으로 신뢰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을 이해시켜줘야 하는 순간이 저에게도 오지 않겠어요? 가신단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나요?"

"....나이를 먹어서 귀가 어둡네."

'꼭 술 취한 사람과 떠드는 것 같군.'


말트레는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반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행동들이, 그러니까 백작의 허가 없이 군대를 해산시키는 생각까지 어지럽게 떠올랐다. 그녀는 곧바로 자기 자신을 바로잡았다.


'주제 넘는 행동은 안 돼. 너는 백작이 아니고 이 사람의 아내도 아니야. 너는 백작의 집사장이고, 지금까지 그거면 충분했어.'


그런 눈치를 파악한 부당이 그녀를 쳐다보면서 끙 소리를 냈다.


"자네 내가 요즘 마음에 안 들지?"


자세를 고쳐앉는 그의 목소리는 뚜렷한 노기를 띄었다. 이쯤되자 말트레도 그간 참아온 게 있는지라 짐짓으론 공손하나 속은 할 테면 얼마든지 해보자는 심정으로 배짱을 놓았다.


"이 기회에 확실히 해두자구. 내가 누군지 말해봐. 응, 내가 누구야?"

"게헨나 백작이시죠."

"그리고?"

"선왕의 장자시고요."

"그리고?"


백작은 집요하게 물었다. 말트레가 기가 차서 웃자 백작이 못을 박는다.


"나는 불구지."


말트레는 여전 미소띤 채 한숨한다.


그들은 가능한 한 요상히 보이지 않도록 자연스레 행동했으나 근처에 있는 사람들까지 속이긴 어려웠으니 백작의 첩과 여식들은 하나둘 접시에서 손을 때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전파되었다.


'또 시작이군.'


그런데 그녀의 귀를 띄인 건 평소의 술주정 같지 않은 백작의 안온한 말씨였다. 말트레는 백작을 다시 보았다. 조금 찡그리고 있었지만 백작의 눈은 맑았고, 언뜻 총기마저 서렸다. 드디어 대화할 생각이 들었나 보고 은근 마음이 놓이나 아직 화는 풀리지 않았다. 이를 어떻게 푸는가는 백작의 몫이다.


"나는 불구인데도 게헨나 백작이 되었어. 그 둘이 양립하기 힘들다는 건 나도 알지.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자네는 다 알잖아. 나와 함께 그 모든 걸 봤잖아. 자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자네는 게헨나 백작의 비서장이야. 나랑 가장 가까운 자네가 나를 믿지 않으면 어떻게 내가 아랫것들한테 명령을 하달하고 지지를 얻지?"

부당은 왼손을 흔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자네는 나를 무엇으로 먼저 보아야 할까? 불구일까, 백작일까?"

'술 취한 늙은이.' 말트레는 자기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는 놀랐다. 반드시 고해할 일이다.

"저하께선 게헨나의 백작이십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지금은 백작같지 않으세요."


술자리의 혼동에 책임을 떠넘기더라도 상당히 주제넘는 말이었다. 서자들이 불편하게 쳐다보았다.

부당은 웃어넘겼다.


"자네가 나보다 병법을 잘 아나?"


말트레 역시 웃었다. 그 웃음은 부정도 긍정도 될 수 있다.


"저는 지난 수십년 간 백작님을 곁에서 모셨습니다. 말 그대로, 곁에서요.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하잖아요? 요즘 들어 백작님을 보면, 중요한 것을 잊고 사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눈가가 굳더니 조금 떨렸다.


"내가 잊은 것 같아?" 부당은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뭘 잊은 것 같은데?"


분위기가 홀 전체에 묘한 기운으로 점점 이르러 식기 부딪히는 소리마저 잦아들었을 때에도 부당은 말트레의 웃음을 웃음으로 돌려주지 못했다. 눈치 빠른 하인과 하녀들만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레 과자와 음식을 돌린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상황 속에서 부당의 말은 너무나 똑똑히 들렸다.


"자네는 내가 잊었다고 생각하나?"

'무엇을요?' 말트레는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존을 책봉했던 날을 내가 잊었다고 생각하나?"


한참 뒤에 부당이 덧붙였다. 잔을 쥔 왼손에 핏줄이 올랐다. 백작은 하나 남은 팔을 강하게 단련했다. 다시 한 모금의 술을 조금 입안에 넣고 그 손은 풀처럼 파들거렸다.


"내가 그 일을 세 달이 지나고서야 알았던 걸 잊었다고 생각하나?"


전방에서 황후를 옹립한 뒤로 유독 격렬해진 사자인들이 날뛰던 시절, 어렵사리 찾아온 전령의 편지를 받았을 때 백작은 먼지 낀 햇살 아래 포로들을 처형하고 있었다.


"게러릿 타우가 날 백작이라 부른 걸 잊었다고 생각하나?"

'어찌 잊겠습니까.'


그 때 부당은 손님을 맞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전방의 먼지와 땀소금을 뒤집어쓴 채 적당한 나무로 급조한 땟목에 앉아있었다. 바람 많은 아침이었다. 한쪽엔 소금에 절인 사자인들의 머리통이 밀린 검사를 기다리며 날파리와 놀아났다. 그날은 백작의 팔이 잘린 날이었다. 단단히 봉합된, 잘린 팔의 단면에서 철판에 지진 열기가 아지랑이를 피워댔다. 몸이 이래서 아플 일도 없다고 농담하던 부당은 갑자기 찾아온 전령을 올려다보았다. 게러릿 타우는 눈부신 백마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그는 말에서 내려 왕실의 인장이 엮인 문서를 조용히 읽어내렸다. 문서의 종이는 검었다. 낭독이 끝난 뒤 부당이 뭐라 말을 했다. 묻는 것 같았다. 게러릿은 조용히 대답했다. 그들은 말을 오래 나누지 않았다.


부당은 전방 처형장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들었다. 전령은 배웅없이 돌아갔다.


그 아침에 나부끼던 먼지가 세상 반대편에서 흙으로 쌓여있을지 모를 만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말트레는 한 가지 의문을 떨치지 못했다. 게러릿 타우, 지금은 죽어 무덤에 묻힌 왕비의 사촌. 그저 사람을 시켜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 그가 직접 왔을까?


당시에도 말트레는 그런 생각을 한 채 벌어진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멍했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다만 게러릿은 분명히, 부당을 백작이라고 불렀다. 희미한 소리를 들었고, 입모양을 보았다. 이는 얼마 뒤에 부당 본인의 입으로도 확인됐다. 그러니까, 며칠 전 그 전령이 한 짓을 먼저 한 것이다. 그 때 마루아에서는 이미 개관식이 끝나고 존 골이 왕좌에 앉아있었다. 겁이 많다던 그 사내는 기침을 삼키며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존 부당 티레스터, 게헨나 백작, 백벽의 관리자. 그 의미는 명백했다.


부당의 아버지는 불구인 장자보다 유약한 사남을 선택했음이다.


장 부당은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그는 충성맹세의 편지를 작성했다. 그리고 곧장 전선으로 돌아갔다. 백벽에 사자인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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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3화 - 네 사람을 기억하라 23.04.03 19 0 14쪽
» 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23.04.01 26 0 18쪽
23 21화 - 무당 사는 동굴에 귀인이 찾아왔다 23.03.28 17 0 15쪽
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1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3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3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4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8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4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8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2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30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10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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