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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날의 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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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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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5화 - 장 보듬 왕자

DUMMY

"불구왕자는 움직일 겁니다." 그가 말했다. "그것만은 확실하지."


이 외진 바닷가는 몸을 숨기기에 좋았다. 어느 모자란 처녀가 빠져죽고 그 잔해가 섞여들었다던 카마메야 해안의 바닷물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 검은 절벽에 달려들었고, 흰 포말로 무너지며 철퍼덕 쓰러졌다.


곳곳에 바위 사이를 쪼아먹는 바닷새를 보고 있자니 불쾌한 상상이 고개를 든다.


진흙 철퍽거리는 소리를 모셔온 지 12년째. 그것은 부끄럽지도 괴이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군사는 어디서 모을 작정이오?"


근처에서 낚아온 물고기를 작신작신 씹어먹던 우르델 라이오민이 입을 열었다. 입안에서 조금 탄 껍질이 바삭거렸다. 그의 이빨은 생선뼈도 쉽게 부쉈다.


"물론 저하께서 거병하신다면 나도 당장 내가 가진 걸 다 내놓고 뒤를 따라 종군하겠소. 하지만 많지는 않을 겁니다."


그는 말하면서 이마를 조금 긁었다. 빈정거리는 말투 속에 은근한 채념마저 섞여있었다.


"아마 우리가 가진 걸 다 내놓아도 병사가 오백이 넘기 힘들겠죠. 것도 대부분 용병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당신이 말한대로 그렇게 된다면, 뭐, 적은 수로도 큰 전과를 올릴 수 있겠지. 허나 왕비와 장 마피가 버티고 있는 한 언젠가는 한계가 옵니다. 거기다 우리는 민심을 얻어야 해요. 돈 때문에 싸우는 놈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알게 되면 비웃지 않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소?"

"명예를 아는 용병도 많소."

"그런 놈들은 비싸지. 거기다, 그런 방법으로 자기 집에 들어가야 하는 왕자님 심정도 생각해 보시오."


우르델은 꼬지를 바닷물에 푹 담갔다가 다시 탁탁 튀는 불 위에 놓았다. 물고기는 금세 말라서 굳은 바닷물이 달라붙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이보다 좋은 시기가 없다는 건 당신도 부정하지 않잖소."


우르델은 미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얼굴 탓인지 버릇 탓인지, 이 자는 웃을 때마다 꼭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때로 지금 이 퍽퍽한 먼지가 썩은 기름처럼 잔뜩 낀 세상이나 지금 화재로 두는 누군가의 치부며 결점을 겨냥했고, 때로는 본인도 뭔지 모를 때가 있었다.


"흐림자르드."


이번에는 그 대상이 확실해보였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젊고 강한 우르델은 왕자를 위해 토벌전쟁에 나가 보상금을 받아온 전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성채의 본 주인들을 증오했다.


"그래, 그 오만한 미오벤 새끼들, 잘 됐지. 고생 꽤 한다던데."

"왜 그런 말을 합니까, 또."

"솔직히 난 슬슬 늑대원숭이들이 좋아지려 하오."

"남의 불행을 비웃는 건 악덕이오."


이 자는 곧잘 대화를 이런 주제로 끌고 가곤 하였으니 말이다. 장 보듬 왕자를 모시는 해안의 신하들은 우르델이 입가에 희미한 조소를 띄우기 시작하면 애써 주제를 딴 곳으로 돌리곤 하였다. 그는 세상을 우러를 바에 비웃기로 결정한 사람이다. 또 방금 그 말에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봐요, 밉포 공, 말 한 번 잘했소. 당신을 가르친 사제가 대단한 도덕심을 그 눈둥아리에다 잘 각인시켜 준 것 같은데, 솜씨 한 번 좋구만. 내 뭐 좀 물어보지. 지혜를 빌려줘보시오."


우르델의 빈정거림에 밉포가 반응했다.


"그만합시다."

"한 번 말해보죠, 불난 세상에 사다리를 놓으려 하는 자들은 어떤 지옥에 떨어질 것 같소? 사다리 자체가 악일까, 놓는 인간이 악일까. 사다리가 악이 아니라면 왜 그걸 쓰는 인간은 갑자기 악해지는가?"

"그만하죠, 그만하자고요."

또 시작이다. 밉포는 다른 이들같은 말재간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기분이 더럽고 불쾌해질 때까지 갔다가 결국 짜증을 내야 한다.

"왜 갑자기 이야기가 산으로 갑니까. 저하를 위한 이야기를 하자고 온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래도 말이 통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장 보듬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 자도 쉽게 고분고분해진다는 것이다.

우르델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날이 어둑해졌고, 그의 눈이 어슴푸레한 빛을 냈다. 언제 봐도 신묘한 광경이다.


고대 레날의 위대한 혈통을 물려받았다던 라이오민 가문은 그의 존재로 그간의 허풍을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 역사가 깊은 가문이 아닌데도 그 한 가지 사실만큼은 아버지에서 아들에게로 전설처럼 내려온 것이다.


허나 이는 남동으로 머나먼 제국의 황실(특히 이곳에 더 진하게)이나 그곳의 음습한 골목에 이르기까지 번지고 퍼져있다는 그것과는 달랐다. 그들이 받은 건 천 년이나 흘러서 섞이고 흐트러진 변방이었다.


'끝자락 말단의 씨 약한 가계, 그것도 가문의 모자란 막내 따위를 던져주니 감사히 모신 게 시작이었으리라.'


밉포는 우르델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지난 이백년 간 라이오민 가문의 남자들은 짙은 턱수염을 풍성하게 길렀으며, 대체로 검거나 갈색인 머리카락을 유지했다. 몰락했던 집안을 다시 일으켜세운 필빕 라이오민의 씨앗이 긴긴 가계 하나의 특징을 결정지을 만큼 끈적거렸던 탓이다.


그러니 우르델이 태어나기 전까지 그들이 주장하는 혈통이란 그저 말뿐이라 할 수 있었으나, 밀카 부인이 그를 베었을 때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어미 뱃속에서 영그는 동안 수백년 전 어느 조상이 핏줄에 남긴 한 자락 특징이 발현된 게 분명했다. 아이가 깊게 타오르는 하늘색 홍채와 조금 길쭉한 모서리 모양의 동공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그 눈은 보는 사람마다 감탄과 동시에 꺼림칙한 그늘을 드리웠다. 특별한 기능은 없는 것 같고 본인도 말하기를 타인과 그리 큰 차이도 없는 듯 하나, 역시 생긴 게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도마뱀처럼 예리하게 찢어지는 눈은 나이를 먹을수록 어떤 복수심을 간직한 듯 보였고, 이빨은 날카로워서 자주 혀나 볼을 씹었다. 답지 않게 먹는 습관이 얌전한 건 그 탓이 컷으리라.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그는 더러워져도 되는 잡옷을 입은 채 간 하는 걸 깜빡한 생선을 미리 떠 온 바닷물에 찍어먹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과 두 딸이 있는 33살의 사내이고,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우르델 라이오민은 배가 난파된 그날 이후 궁정을 빠져나와 이곳 변방의 해안도시에서 상업에 종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왕비를 어떻게든 왕자와 만나게 할 수만 있다면...."

"그러기 위해 우선 군사적인 우위를 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즉각 분쇄될 것이오."

"그래야지. 그래도 장 마피가 걱정이오. 자기를 유일한 계승자라 믿고 있을 터인데."

"그것도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지. 일단 경비를 매수하는데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시민도. 일단 왕위를 잡고 나면 그런 건 푼돈이 될 테니까."

"우리가 돈 때문에 이 일을 합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말이."


그들은 잠시 더 불가에 앉아 어떤 식으로 군대를 조달하고 그것을 움직일지 논의를 거쳤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왕국 전역의 산과 들, 강과 언덕, 강성한 영주들의 성벽이 되살아났다. 그동안 나머지 물고기들은 그냥 타게 두었다.


말에 오르는 우르델을 배웅할 때 이미 서녁은 별로 총총하고 풀벌레가 짖어댔다. 바람이 조금 세졌다. 그의 망토가 거칠게 휘날렸다.


우르델이 뭐라 말했지만 바람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요?"


가까이 가서야 그가 고개를 바짝 숙여 소리쳤다.


"저하께는 내가 온 걸 말하지 말라고요."


물론이다. 이런 말들로 굳이 심사에 혼란을 가져다 드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야지!"

"나중에 또 봅시다."


라이오민은 저 멀리 멀어졌고, 이제 밉포는 해안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저 멀리 바다를 쳐다보며 검을 꼭 쥐었다가 다시 성으로 돌아갔다.


장님과 귀머거리와 철퍽거리는 진흙이, 한물 간 사제와 충직한 조각가가 있는 곳으로.


해안 절벽 꼭대기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이모랄은 탑의 모습이다. 마른 해초와 굳은 소금이 달라붙어 외부는 구릿구릿하고 창문은 파도를 피해 한 방향으로만 놓았다. 가끔은 그곳으로 힘껏 솟구쳤다가 땅에 내리박히는 바닷물이 보였다. 창문 아래에 그런 파도로 쓸려온 물고기나 게가 보이면 하인들은 재빨리 내려갔다.


안쪽은 아늑했다. 왕자와 함께 외딴 섬에 표류했다가 살아돌아온 여섯 명의 신하들은 뭍에 닿자마자 사비를 털어 이 성을 지었고, 아직까지도 매년 보강하여 편안한 요새로 다듬었다. 금세 바닥에 가득해지는 흙먼지만 아니라면 삶을 안온히 보내기에 더없는 장소였다.


그들은 안온한 삶 따위를 위해 이모랄을 세우지 않았다.


밉포는 귀머거리 하인을 한 명 붙잡고 수화를 했다.


"오늘 내 저녁은 괜찮으니 내 몫도 너희들이 먹어라."

"알겠습니다, 영주님. 영주님의 방은 언제쯤 청소하면 될까요."

"내가 말하기 전까진 하지 마."


하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밉포는 그가 몸을 돌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것이 이 성의 규칙이다. 누구도 허락하기 전까지 침실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러니 당연 보아서도 안 된다. 밉포는 가능하다면 성의 모든 하인들을 장님으로 채워넣고 싶었다. 아쉽게도 절반은 귀머거리다.


방 한 켠에 벽난로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 장식도 없는 검소한 벽난로를 지나쳐 몇 침실 왼편에 난 문을 두드렸다. 멀리서 보면 그저 벽의 일부로 보이는 문이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고, 잠시 후,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라."


벽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갔다. 그리고 닫았다. 닫는 게 중요하다. 그는 지난 십년 간 이 문을 닫는 걸 잊은 적이 없다.


여기서는 왕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장 보듬은 사람 세 명이 앉아도 모두 가릴 듯한 거대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항상 그랬다. 그 쪽에 왕궁이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 몸으로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말을 못하는 늙은 조각가가 조용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밉포가 왕자에게 다가갔다.


"전하."


잠시 후 들려온 대답은 이랬다.


"저하라고 불러야지."

"죄송합니다."

"어디에 다녀왔나?"

"잠시 시장에 다녀왔습니다."

"그래... 뭐 특별한 건 없었지?"


혼자만 하는 생각인데, 아마 왕자는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위엄을 지키기 위해 그러지 않고 있다는 걸 밉포는 누구보다 잘 안다.


왕자에게 세상일을 들려주는 건 그만둔 지 오래였다. 들뜬 상상을 부추기는 건 더 큰 실망을 가져오는 법이고, 그럴 때마다 하루종일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니.


"없었습니다. 흐림자르드는 아직 수복하지 못했다 하더군요."


왕자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하려 했다.


"미오벤은 오만의 대가를 치른 거야.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지. 역사적으로 그런 최후를 맞은 왕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신하들은 오죽할까."

"참으로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화는 끊기고 왕자는 다시 저 창문 너머의 고향집을 바라보는 듯했다. 밉포도 이만 대화를 끝내고 성주 역할로 돌아가려 했다.


'조금 배가 고픈가? 빵 몇 조각에 치즈와 잼이면 충분하겠지. 끓인 물도 조금. 먹으면서 장부를 뒤져봐야겠어.'


그는 열어놓은 창문에 들어오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허리 앞에 두 손을 모았다. 솔직히 말해, 돌아가고 싶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요즘들어 장 보듬 앞에 서면 할 말이 많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가까이서 왕자를 모셨으나 친하지 않았고, 단순히 신하와 주군 사이의 일반적인 거리보다 더 먼 간극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다. 용건을 전하고 간단한 안부만 묻고 나면(가끔씩 벌어지는 긴 논의를 제외하면) 곧장 돌아가 벽문을 닫은 뒤 비릿한 변방의 성주 역할로 홀가분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왕자를 모시려면 수입이 필요하다. 이는 전적으로 영주에게 달렸다는 생각으로 정당화해볼 수 있겠으나, 최후에 모든 것을 본연의 질서로 환원하실 주님 앞에 부모의 입으로 하여금 당신께서 부여하신 이 밉포라는 이름을 엄숙히 걸어야 할 때면, 솔직히 말해 이쪽이 더 편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불충하다 여기는 이는 없길 바란다. 그는 왕자를 모심에 부족함이 없도록 하고 있다. 정작 본인은 거의 항상 보리죽과 잡곡빵에 가끔 고기를 조금 먹고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오래된 회색 튜닉에 거의 벗겨지려 하는 가죽 벨트를 동여맨 것인데도, 여지껏 한 번도 충성과 의무를 저버린 적이 없다.

그는 할 일이 많았다. 밤 늦게까지 편지를 쓰거나 보고서를 읽는 일은 예사고 낮에는 자기가 임명한 지역 출신 관리들과 보이지 않는 씨름을 이어간다.

밉포는 그 일을 어느정도 즐겼고, 피곤해도 근면하게 임했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른 이들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이곳저곳에서 수입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세금과 보호비를 내고, 월급을 주고, 계약금에 성 유지비며 공공시설 수리비, 건축비, 묵직한 생활비를 낸다.

대륙 동남부 일대에 위세를 떨치는 트로투아 가문이 있고 그들의 통치가 현명하고 공정하다 하여 보호비를 낸 채 신하로써 충성서약을 했다 하지만, 이모랄의 영주는 금전적으로 부당한 요구가 들어오면 즉각 국왕 법정에 탄원하여 적극적으로 싸웠고(물론 때를 보아가며 조아리는 쪽이 많으나), 반면 자신의 영지에서 아주 약간의 이득이라도 힘 차이로 밀어붙여 사소한 쟁탈로 끝내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단 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끌어다 금고에 집어쳐넣었다(이 역시 자주 눈치를 본다).

이렇게 절약하여 남는 돈은 다른 신하들과 공유하는 계좌에 올려 사업에 투자하고, 법을 잘 모르거나 알아도 신경쓸 여력이 없었던 소작농들이 그들 자신이 속한 지방의 세속법에 의거하여 귀족에게 내놓도록 명령된 잔바리 땅들을 매입한 뒤, 적절한 가격이 될 때까지 소작을 주었다. 나쁜 땅은 개간하고 길들여 되팔았다. 자잘한 땅 거래를 자주 하며 아주 약간씩 소득을 올렸다.

이 모든 것이 오직 장 보듬 왕자 한 명을 위함인데, 그러니 그가 왕자를 대하는 감정이 사랑도 아니고 우정도 아니고 오직 차마 겉으로 표현할 수 없는 쌓이고 쌓인 정과 충성, 의무에 얽매여 있다 하더라도, 이따금 약간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을 제한다면 누가 감히 그를 불충하다 비난할 수 있겠는가?

아비시의 밉포는 낮가림이 심한 데다 숫기 없는 성격이고, 공무를 제외하면 말이 많지 않았다. 어릴 적 고향에서는 사내 애들을 주로 따라다니는 역할이었고, 여자애들과 놀 때는 근처에 서서 지금 짓고 있는 이 미소가 최선이라는 듯 쭈뼛거리며 서있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소년이었다.

둘이 있다가 셋으로 늘어나면 혀가 굳어버리고, 다시 둘이 되어도 그닥 말이 많지는 않았다. 그저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망명왕자를 대할 때조차 이런 성격을 고쳐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급한 업무가 있다고 말하면서 나가야겠다. 뭐 어쨌든 그건 사실이니까.'


그는 방안에 홀로 틀어박혀 눈물 훌쩍이던 울음이 벽을 뚫고 침실로 들어오던 밤을 기억했다. 그때 왕자는 어렸다. 밉포가 비밀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기적 기어와서는 다리에 진흙을 묻혔다. 어른이 되며 울음을 참는 법을 익혔다 하여도 그는 여전히 고독하여서 근처 보필하는 늙은 조각가를 제외하면 성에 부딪혀 저 멀리 날아가는 파도가 친구이며 손님은 창틀에 내려앉는 새뿐이다.

이번에도 심한 죄책감을 느끼며 그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났다. 진흙이 철퍽거리는 소리. 공기가 방울을 내며 무너지고 찰흙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늙은 조각가가 굽은 허리를 끌고 일어나 왕자에게 다가갔다. 잠시 후, 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밉포,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죄송합니다."

"늦은 걸 책망하는 게 아니야. 할 말이 있어서야."


왕자가 말을 이을 때까지 또 꽤나 기다려야 했다.


"일전에 자네가 말한 거 말인데,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지금 상황에선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겠지."


밉포는 이 말을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가능한 한 어떤 감정도 내비치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도, 방금 자기가 한 말이 말실수가 아닐지 그는 걱정해야 했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도. 우리 모두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게 아니었나?


그 일은 여섯 명의 신하들이 모여 논의 끝에 결정한 방법이었다. 수많은 거부와 의심이 있었으나, 그 말을 왕자에게 전하는 것이 밉포의 일이라는 데엔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그런 사실이 정해지자마자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했고.


'이럴 때만 생각이 맞지. 망할 자식들.'


왕자는 수 년 만에 아주 큰 화를 냈었다. 그의 입에서 "반역자, 모사꾼, 배반자, 간신, 나를 이용해먹는 놈들," 등등의 심한 욕지거리가 나왔고, 진흙이 꿀럭거리는 소리로 변한 뒤에도 수 분 간 이어졌다. 그 뒤로 한 달간 밉포와는 말도 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내가 자네들보다 지혜가 부족했던 모양이야. 그래, 아무래도 이런 몸으론 그렇지. 게다가 잘 되기만 한다면, 장 보듬 왕자의 이름도 훼손되지 않을 거야."

"그렇습니다, 저하."

"사람은 구했나?"


솔직히 말하면, 그는 왕자가 다시는 이 화재를 꺼내지 않을 줄 알았었다. 그래서 자신도 거의 잊으려 했다.


"....아직입니다."

"구하는대로 말해줘. 내 그 자와 직접 대화를 할 테니까."


'....어떻게요?'


밉포는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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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3화 - 네 사람을 기억하라 23.04.03 19 0 14쪽
24 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23.04.01 27 0 18쪽
23 21화 - 무당 사는 동굴에 귀인이 찾아왔다 23.03.28 17 0 15쪽
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1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3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3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4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8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5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8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3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30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10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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