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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날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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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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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09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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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DUMMY

안색을 보아 숫돌에 칼 가는 소리가 밖으로 세어나갔음을 깨닫고 에카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건 그렇다 치고, 수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에서 원장과 자크 수사가 먼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적 드문 채마밭이었다.


이렇게 깜깜한 밤에는 사람의 형체 말고는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가 없어 다만 그들이 밤공기를 맞으며 뒷짐 진 채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손은 씻었느냐?"


멀리서 그녀를 보자마자 둘 중 한 명이 대뜸 이렇게 말했다.

에카는 달빛에 의지하여 조금 더 뚱뚱한 쪽이 원장일거라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그 말로 자신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식사 할 때 손을 씻었습니다만, 부끄럽게도 오기 전에 칼을 갈았습니다."


봄이긴 하나 밤은 겨울같아 숨 쉬면 입김이 맑았다. 원장은 옷감의 양으로 보아 두텁고 촘촘한 양모는 따뜻하여 짜장 한 마리 양이었다.


"날카롭게 준비했느냐?"

"예."


원장의 입김이 가장 컸다. 그는 살살 움직여 몸에 열을 내고 있었다. 에카는 입을 조심해 말을 할 때도 조금만 열었다. 밤이 깊어서 조용한 말도 선선히 꽂혔다.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자 그들은 에카를 성벽 아래 절벽길로 데려갔다. 이따금 모래와 울퉁거리는 것을 제외하면 길은 잘 닦여져있었다.


에카가 긴장한 마음을 풀 겸 하얀 입김을 배경으로 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지상의 기운이나 운수 따위를 점쳐보고 있을 때, 돌연 자크가 깨끗한 천을 건내주며 가져온 제구들을 거기에 넣으라 하였다.


에카는 그 선명하게 염색한 흰색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달빛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니, 되레 달빛으로 참 하얬다. 그것은 촘촘하게 짠 리넨 바랑이었고, 한가운데 십자가를 세긴 실은 누에 명주였다. 완전 새것이었다.


'어찌 이런 물건을.'


그녀는 그것이, 비록 이교의 물건이라 할지라도 제구는 어느 것 하나 교회의 규칙 아래 있어야만 한다는 원장의 뜻일 거라 짐작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전임 원장 때는 이런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녀와 원장 간에 작은 오해가 생겨났는데, 그의 입장에서 보아 그건 절대로 에카에게 준 것이 아니라 잠시 제구만 담아두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신분적으로 보아도 그녀는 그런 물건을 받을 수도 소지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혼란으로 머리가 어지러운 탓에 그러한 사실을 잊어버렸고, 에카는 그녀대로 이에 대해 따로 말이 없었으니 준 것으로 순진하게 생각하고는 수도원을 떠날 때 바랑 속에 넣고 갔다.


원장은 이후 그러한 사실에 대해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망각하고 싶었던 것도 있을 테고 워낙 부유한 곳이라 없어져도 표가 나지 않아 그랬을 수도 있을 터이나, 가장 큰 이유는 이후 왕국에 찾아올 거대한 전란 탓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루아얄 주교로 올라 전쟁 끝에 찾아온 평화 속에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어느 봄날에 불현듯 그러한 사실이 까마득한 옛날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때는 이미 클라르코 수도원에 찾아온 무당의 일이나 죽은 자의 제령 따위는 어릴 적 아이가 밤길을 무서워하던 추억처럼 제 삼자의 입장으로 감상할 수 있는 미련이 되었으며, 그 아이도 이후 대리 순례를 그만두고 클라르코를 찾지 않았으니, 그저 아까운 맘으로 적적할 뿐이다.


에카는 넋 놓아 그 보드라운 결을 매만지고 있다가 뒤늦게 짐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수사님."


이 당시에는 설마 이걸로 제령비를 퉁칠까 걱정도 들었으나 일단 지금은 관계 없는 이야기다.


두 번째 모퉁이를 돌자 그곳에서 절벽이 돌연 오목하게 들어갔다. 아래쪽 숲에서 바람이 세게 불어오는데 밤 이슬을 머금었나 젖은 흙 냄새가 나니 당장 비나 천둥이 내릴 듯하였다. 으슬으슬 추워졌다. 먼 동쪽 하늘은 먹구름에 밤보다 검었다.


절벽에 난 계단을 타고 문 안으로 들어가니 이상할만치 고요했다. 저 깊은 안쪽에 횃불이 어슬렁, 말소리가 들렸다. 통로는 좁았고 계단은 가팔랐다. 둘이 앞장서고 원장은 조심조심 뒤를 따르는 와중에 그들은 작은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 수도원에 불목하니로 일하던 사내다. 내가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잘 알지는 못 했지만, 죽기 몇 달 전부터 남과 잘 지내지 못하고 예배도 게을리해서 좀 잘 챙겨주려고 했지. 덕분에 광증은 피할 수 있었다만, 일이 이렇게 된 게다." 자크는 합장하며 묵주를 매만졌다. "성 노한이시여, 저희에게 이 상황을 직시할 용기를 주소서. 그렇다면 마땅히 주신 시련으로 알고...."

"살아난 건 무덤에 묻힌 뒤였나요?"


에카의 말에 그는 생각을 더듬었다.


"그랬지. 땅 밑에서 무덤을 부수고 흙을 파해쳐놨더구나. 그러느라 쏟은 피를 추적해서 잡을 수 있었다. 개와 말들을 다 풀고 화살이며 횃불이며, 사냥창에, 석궁도 있더구나. 난 우리 수도원에 무기가 그리 많은 줄 몰랐다. 물론 우리 선대분들 중에서도 외침에 맞서 무기를 든 위인들이 몇 분 계시긴 했었지."


자크는 말하며 자주 이마를 찡그렸다.


"하지만, 그때는 뭐랄까, 사람을 사냥하는 기분이 들더구나. 난 사냥이라면 차라리 토끼나 새가 좋은데. 밭을 다 파해쳐놓는 토끼는 악하지만 고기는 맛있고 가죽도 쓰임새 있지 않느냐?"

"수사님 토끼들이 가여워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자 그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너는 이곳에 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작년 10월 28일날 토끼의 무리가 돌연 득세하여 포우유 지방의 소중한 밀밭을 황폐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우리 방당크 주교의 영역 아래 있는, 꽤 큰 규모의 농촌이었지. 그분께서는 저 악마의 하수인 노릇하는 짐승들을 타일러도 보고 겁박도 해보셨으나 들어먹질 않아 결국 파문을 내리셔 영역 휘하 근방 사냥꾼들에게 토끼 덪을 놓고 화살을 쏘아 사냥하도록 종용하셨고, 영주들에겐 각자 소유의 숲에서 일정 마리의 토끼를 사냥할 수 있도록 허가하라는 공문을 전하셨다. 우리 교인들에게도 파문당한 토끼들에 한해서는 중생을 위한 사냥을 허락하셨지.


그 결과 인근 시장에 고기와 가죽이 많아짐으로 사람들은 맛있게 먹고 입었다. 악함을 교정하여 선함으로 다루는 이런 사례야말로 주님의 오묘한 이치 아니겠니?"

"자크, 내 그분 하시는 바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비 오듯 땀을 흘리는 원장이 뒤에서 응수했다. 그는 부들거리는 다리를 쥐어잡으면서도 삿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쉬어도 서서 쉬고 가능한 한 호흡을 가라앉혔다. "이번만은 주교께서 과했어. 포우유 토끼가 문제면 고것들만 잡아 족치면 될 일이지 왜 굳이 근방 토끼의 씨를 다 마르게 하셨나?"

"원장님 제가 감히 말을 드리자면, 한 곳의 토끼가 문제를 일으키면 다른 곳의 토끼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자명한 바 아니겠습니까?"

"그럼 문제가 났을 때 조치하면 될 것 아닌가? 다른 것도 아니고 토끼인데 말이야. 짐승이 선이나 악 따위를 분간할 수 있단 말인가?"


에카는 그 말이 옆에서 듣고 있기에 난감한 논쟁으로 퍼져나가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자크 수사는 논쟁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또 그닥 할 말도 없어서 그저 코 밑을 슥 닦았다.


"그래, 흙이 다 파해쳐졌었지. 그러면 뭐랬더라?"

"그 정도로 힘이 세다면 보통 자가 들린 건 아닐 거예요. 하지만 수도원 인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으니, 또 그렇게 강한 자는 아닐 테고요."


그녀가 대답했다.


"강하면 물리치기 어려울까?"


에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서서 원장을 기다리는 동안 대화가 끊겼기 때문이다. 곧 계단이 끝나고 바닥이 이어졌다.


"그 남자의 이름이 뭐였죠?"

"버벡. 버벡일 거야."


그는 이름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분이 평소에 죄를 지으며 살았나요?"

"다행히 회개는 했겠지만, 뭐, 불목하니가 저지르는 죄를 지었겠지. 그건 왜 묻느냐?"


대화는 또다시 끊기고 말았다. 저 앞에서 놀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덜 미안할 것 같아서요.'


그들이 들어간 지하는 춥고 축축하고 어둡고 차갑고 이상한 곳, 나무와 오래된 돌과 모래와 검게 칙칙 썩어내린 짚으로 성긴 궁륭이었다.


에카는 잠시 서서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연기에 막혀 그만두었다. 경비들은 화로 빛에 의지하며 옹송그렸다. 모두 훔나인이었다. 그들은 에카를 알아보았다.


들고있는 저 창들은 곰 같은 걸 사냥할 때 쓰는 물건으로, 날 뒤에 가로대가 있어 살에 박혀도 저기서 막혔다. 창의 넓은 머리가 천장을 향했다. 인근에서 공납이든 뭐든 받아온 물건들, 모두 성의 대장간에서 벼려진 것들이다.


그중 하나는 그녀도 처음 보는 형태인데, 끝에 가시 박힌 반고리가 달리고 중앙에 뾰족한 창날이 불쑥 튀어나온, 간악한 물건이었다. 사람은 무기를 보면 그것에 당하는 자신을 상상해보는 법이니 에카는 특히나 소름이 돋아 이 어두운 곳에서 잠시 겁을 먹었다. 그러다 이렇게 마음을 먹었다.


'내가 저런 창칼보다 더 무서운 걸 상대하는 사람인데 왜 고작 이런 데 겁을 먹어야 하나, 쪽팔리게.'


신기하게도 환기가 잘 되는 곳이었다. 원장이 횃불을 들어 벽이나 바닥 등을 살펴 보는 사이, 자크는 그들 중 한 명을 붙잡고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나머지는 에카와 대화하며 간단히 농을 던졌다. 자기 수도원 안에서 세속 여자와 남자가 자연스레 말을 나누는 광경이 원장의 눈에는 고깝게 보였겠으나, 그저 흘끔 하고는 못 본 척 했다.


하여튼 자크가 경비에게 물었더니, 놀랍게도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실은 꽤나 전에, 그러니까 목욕을 다섯 번 정도 할 시간 전이었을까요, 갑자기 큰 소리가 났습니다. 제 생각엔, 벽을 부수는 소리 같았습니다만, 감방 벽은 두껍게 흙을 쌓고 콘크리트를 얇게 칠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부순 거죠. 아마 지금쯤 흙을 파고 있을 겁니다."


하여 자크가 미온한 대응을 꾸짖자 대꾸하길,


"올라가봤자 누가 저희 말을 듣겠습니까. 어차피 저 몸으론 파봤자 오래 못 갑니다. 힘은 세도 몸은 인간이니까요. 굳이 감방에 들어가 자극할 바엔 여기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 그러면, 벽을 부수기 전까진 저게 뭘 하고 있었지?"


경비가 대답했다.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자크도 더 이상 뭐라고는 하지 못하고 말이나 몇 번 던진 뒤에 다시 앞장섰다. 경비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쇳문을 열고 들어가자 온통 어둠이었고, 다들 곧장 들어가지 못해 에카를 먼저 보냈다.


저 안쪽에 아무도 부수지 못한 그 무쇠 철장이 있으리란 걸 그녀는 알았으나 깜깜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발이 퍽 무거웠다. 앞에서 두 손으로 휘두르는 쇠칼이 날아온다 한들 그것이 머리에 박혀 두개골을 쪼개버리기 전까지는 깨닫지도 못하리라. 그들은 향수 뿌린 천으로 하관을 덮고 들어갔다.


고인 물과 곰팡이 냄새에 이런저런 악취로 일대는 끔찍했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해서 에카는 처음에 그 "똑" 소리를 듣고 놀랐다.


시체 썩은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각사각 흙을 파는 소리였다. 진한 피냄새.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열자마자 훅 끼치는 그 악취에 다들 움찔 놀랐다.


깔짝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저것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을 좀 비춰보지, 자크 수사, 도통 보이지가 않는구먼." 원장이 재촉소리를 냈다.


황급히 횃불을 들이밀자 검고 굵은 창살이 드러났다. 바닥은 물이 고여 이상한 점균류나 거뭇한 이끼 무리가 불쾌하며 푹 젖은 채 널렸다. 이곳저곳에 성난 발자국이 있었고, 그 발자국은 감방 구석에 난 구멍을 가리켰다. 놈은 다시 흙을 파기 시작했다. 소리는 그쪽에서 들려왔다.


"이곳은 사방이 막힌 지하요. 그런 짓을 하면 흙만 파게 될 거요."


원장이 말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굴 안쪽을 유심히 보았지만 헛일이었다. 그리 멀리 가지 못했던 것이다. 한치 앞 모르는 어둠에 가려 이미 저 안쪽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간 줄로 다들 짐작하고 있었으나, 횃불을 더 가까이 들고 가니 돌연 모습이 드러났다.


남자는 굴을 파는 게 아니라 단순 흙을 파는 것인지도 몰랐다. 혹은 자기 덩치를 터무니없이 크게 생각했거나.


"성 아캄이시여...." "성 오모리데스여...."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마음 속으로 좋아하는 수호성인을 찾았다.


그들은 이제껏 소용이 없다는 것을 수없이 확인해 보았기에 주문을 외거나 신성한 제구를 들고 위협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열심히 묵주를 만지며 주기도문을 몇 번 욀 뿐이었다.


짐승 같은 엄니 사이로 피침을 흘리는 남자가 미련한 굴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엄니는 확실히 살아있던 시절에는 없었던 것이다. 굵고 예리했다. 잇몸뼈를 부수며 찢고 나와 양 볼을 뚫었고, 위로 크게 구부러졌다. 강제로 벌려진 입술 사이로 보니 아래쪽에서도 비슷한 것들이 한 쌍 나오는 중이었다. 앞니는 모두 빠지고 뾰족한 새 것이 자랐다. 핏기 없는 살에서 죽은 피가 빼짓 나왔다. 죽은 뼈에서 강제로 뽑아낸 머리카락이 얼굴을 떡진 산발로 가렸다.


"내가 제대로 본 건지 모르겠는데, 저 이빨이...."

"네, 그렇네요." 원장이 묻자 자크가 대답했다. 그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세 더 자랐습니다. 머리도 그렇고요."


버벡은 도시 아낙이 빨래하듯 쪼그려 앉은 채 손은 여전히 굴 속에 가있었다. 신 들린 남자는 갑작스러운 인광에 눈을 찡그렸다.


"안녕하시오."


상황에 들어맞지 않는 언어. 엉망인 입에서 나온 말소리는 질려서 꺽꺽거리고 짐승의 그것같았다. 수도원장은 이성적으로 대화하려 했다.


"죽은 사람의 몸을 헛되이 뺏고 있는 이유가 뭐요? 그 사람은 회개하고 장례를 치렀으니 이제는 주님 품에 가 있소. 아니면 그분이 보내신 곳에 있거나. 그 몸이 가 있을 곳은 무덤 속 관이란 말이오.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저 파놓은 흙은 다 뭡니까, 당신이 도로 메꿔놓을거요?"


"내 옛날부터 흙장난을 좋아해 그랬소."


그림자가 일렁거려 제대로 포착할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보이다가도 가려졌고,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때에 다시 드러난 그 모습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철창 사이로 횃불을 넣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은 손은 종일 흙을 팠던 것으로 보였다.


"어릴 적엔 자주 토굴을 파면서 놀았지. 내가 살던 나라에선 말이오. 거기선 하루종일 흙을 퍼도 다시 자라고 이렇게 손이 깨지지도 않았소."


버벡은 망가진 두 손을 들어보였다. 그것은 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들은, 처음에 저것이 축 늘어진 가죽장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 돌벽을 부수느라 손뼈가 조각났을 것이다. 죽은 인간의 손은 흙을 파는 세심한 동작을 하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둔기마냥 앞으로 처들고 벅벅 긁어댔으리라. 손톱 빠지고 가죽 벗겨진 손은 달라붙은 피흙으로 뻑뻑했다. 뼈는 부러져서 말랑했다. 바닥에 고인 물이 굴 속으로 들어가 온통 진흙이었다. 진흙에 피가 섞였다.


"이름이 뭔가요?"


에카가 앞으로 한 발 다가갔다. 신들린 자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더니 흐린 눈에 총기가 서렸다. 손도 내려놓았다.


"므레무스."


그가 자세를 고쳐앉았다.


"므레무스, 당신은 지금 죽은 자의 몸을 멋대로 이용하고 있어요. 그분을 두 번 죽이는 짓이나 다름 없죠. 어서 당신의 세상으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이 자는 이미 죽어서 몸은 없어진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니 껍질을 잠시 쓴다 한들 누가 뭐라 하겠냐."


므레무스는 손으로 땅을 짚으며 굴에서 나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이야, 우리 땅은 점점 줄고 있다. 이제는 좁아 터져서 가장 하찮은 신부터 내쫒고 있지. 나도 그렇게 쫒겨나왔고, 그러니 이런 식으로 죽은 자의 몸을 빌리는 것 밖에 하는 일이 없다. 나는 너희들이 죄라고 부르는 것을 지은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

너 같은 무당을 나도 많이 봤다. 나도 한 때는 너희들을 도와 저 발악하는 놈들을 몇 번 보냈었다. 허나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너희들도 죽어가는 인간에겐 자비를 베푸는 법인데 어찌 죽어가는 신들에겐 무자비하냐?"


므레무스는 말하면서 몸에 박힌 쇠뇌살을 뽑아버렸다. 시위끝을 팔둑에 대고 눌러서 반대쪽으로 밀어넣은 것이다. 그리고 뽑아낸 화살촉에 검댕이처럼 묻은 녹을 덜렁거리는 손가락에 대고 긁었다.


"남의 몸을 얻고 죄를 짓지 않은 신은 없었어요."

"죄라고. 죄.... 죄라고..." 므레무스는 그 말을 입에 담고 천천히 곱씹었다. "너는 그 죄라는 말을 좋아하니?"

"죄는 좋지 않은 거죠."

"누가 가르쳐줬을 것 같은데. 그것은 교회의 사제인가 원의 수사인가. 아니면 모(母)인가 부(父)인가."


봉두난발의 뭉치 사이로 신 들린 남자의 눈이 은근한 힐난으로 빛을 발했다. 에카는 대꾸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므레무스가 다시 말했다.


"약간의 복수를 할 뿐이다. 내게 창칼을 준 놈한테 똑같이 창칼을 주는 게 잘못인가?" 그는 뽑아낸 살을 피비린내 나는 화살더미에 던져버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너희들이 나를 도울 줄 알았다. 어찌 그리 된 게야? 누가 너를 그리 유들거리게 만들었어. 네가 밀라 에카냐?"


에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무릎 위에 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그래. 밀라 에카야, 내 얼굴을 잘 봐라. 나는 너희를 알고 너희는 나를 안다. 지난 수백년간, 나는 이 나라 계곡의 모든 산들바람을 다루었다. 네가 계곡에서 바람을 맞을 때, 그것은 언제나 나였다. 바람이 네 몸을 쓸어가면 너는 늘 기분이 좋았지. 너나 너희 부모나 조상들이 계곡에 대고 기도를 하면 나는 알았다는 뜻으로 이렇게 바람을 주었다."

므레무스는 양 손을 가슴 앞으로 들어 올리더니 소중한 아기를 안아 건내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렇게 말이야.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십자가를 쥐고 다닌다 한들 저 자들에게 너는 이교도일 뿐이야. 노예나 다름 없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축이 되는 게다. 왜 그걸 모르느냐?"

"저는 그런 건 잘 모릅니다. 배운대로 할 뿐이고요." 에카는 양 손을 사타구니 앞으로 공손히 모은 채 대답했다. "당신이 있어야 할 곳은 지금 여기가 아니잖아요. 그만 한을 풀고 좋은 곳으로 가세요. 저희가 도와드릴테니."

"저희라고 하는구나." 연약한 인간의 몸은 신이 말하는 것을 다 담지 못했다. 허나 깊게 탄식했다. "누구와 더불어 저희인 건지 모르겠다. 놈들이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 아이를 낳으라면 낳을 테냐? 좋은 곳이라니. 놈들이 나를 죽이라 해서 이렇게 찾아온 거 아니냐? 좋은 곳이라니....."


므레무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몸이 썩어들어갔기에 장기들은 제 역할을 잃었다. 이제 신이라는 이름도 아까울 잿더미는 그만한 신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불어올 바람만 기다림이 야속할 뿐이라면, 무당은 거기에 훅 바람을 불며 빗자루를 들이대는 존재. 이대로 잊혀 늙고 죽을 바에야 살해당하는 편이 마지막 장엄을 드리는 길이다.

에카는 씨근거리는 숨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평수사 한 분의 팔을 꺾어버렸다고 들었어요."

"나는 쫒기고 있었고, 정당방위였다."

"저희도 정당방위였다면요?"

"또 저희라고." 무레무스는 오래 웃지 못했다. "옛날에 너희들은 이것보단 예의를 차렸는데. 그 제물과 차례들은 어디로 간 거냐. 나는 한참이나 목 마르고 배고팠다. 난 굶주린 채로 이 땅에 내려왔단 말이다."

"그 점은 저희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녀가 저자세로 들어가자 신도 의젓하게 몸을 쭉 빼고 언성을 높혔다.

"반신으로 내려간 자들은 장군이나 왕이 되었고, 신이 떠나가도 성소에 들여 그 몸에 금물을 씌웠다. 지금은 이게 뭐냐? 왜 내가 이런 거지 똥통에 있어야 해?"

"신께서 계셔야 할 곳은 이런 곳이 아니죠." 에카는 주위를 둘러보다 다시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 인간의 몸속도 아니고요."

므레무스는 눈을 크게 떴다. 이제야 그녀의 옷차림을 알아본 듯 했다. "왜 수녀처럼 입었느냐?"

".....규칙을 따르는 거죠."


이 신이란 자는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바닥에 질질 끌려 늘어졌다.


"네가 수녀가 아닌데 수녀옷을 입는단 말이냐? 저놈들이 입으라 한 거냐? 그 옷을?"

"제가 스스로 입은 겁니다."


그녀가 얼른 말했다. 허나 좋은 대답이 아니었다. 좋은 대답이 가능한 질문이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머리가 따끔거렸다.


"왜?"

"교회에선 교회의 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므레무스가 손을 휘둘렀다. 오물이었다. 더러운 것이 하얀 수녀복에 철퍼덕 부딪히더니 흘러내렸다. 그리고 귀한 바랑에도. 남자는 그녀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뚝 그쳤다.


"벗어라." 므레무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에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깊게 스며든 얼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전부터 생각하던 거지만, 신이란 분들은 하나같이 말이 안 통하네요."


그들이 훔나인의 언어로 대화했기에 다른 이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멀뚱 서있었으나, 그녀가 품에서 시퍼런 막칼을 꺼내는 모습만은 똑똑히 보았다.


'그러니 저희도 강경 대응을 할 수 밖에요.'


그것이 그녀를 슬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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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0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1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29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0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3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2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3 0 16쪽
»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7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6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4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7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2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29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1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9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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