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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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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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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DUMMY

이쯤에서 잠시 에카가 집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그러니까, 대략 한 달 전 쯤인가, 피투성이의 병사가 말에 오른 채 정신없이 마월 성으로 들어왔던 그날의 일을 서술해야겠다.


그때 에카는 이제 막 여행 전 채비를 마치고 롱퐁투앙의 미라벨라 마쿠지 부인을 만나러 숲을 떠나 출발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런 사람을 만날지 어떨지조차 몰랐지만 일단은 그렇게 되리라는 말이다.


그녀는 거기서 부인을 알현하고 의뢰를 접수하여 바야흐로 공기가 음울거리는 2월 초순에 방당크 수도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초의 목적은 성 레바스티오가 잠든 성당을 향한 순례였다.


그러다 잠깐 들르기만 할 예정이었던 클라르코 수도원에서 자크 수사를 만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략적인 사정을 들어 액수를 협상한 뒤에, 그곳에서 어느 먼 옛날의 잊힌 잡신을 달래어 보내는 굿판을 벌이게 된 것이다.


출발할 당시에는 그녀 앞에 이런 일이 있을지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그 신을 만나게 된 것도, 실은 상당히 뜻밖의 일이었다. 바로 저번 순례에서도 이 부유한 클라르코의 지하 감방에서 제령을 봐주었었기 때문이다. 그때가 한 달쯤 전이었다.


어쨌든 그녀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무릎까지 오는 양말의 끈을 조여 다시 묶고 간촐한 배낭을 등에 얹어매고 있을 때, 이 개릭이라는 남자는 피를 흘리며 말 안장 위에 얹힌 채로 로가슬 성문 앞에 처박히고 있었다. 하인들이 뛰쳐나왔고, 말은 피칠갑한 엉덩이를 흔들며 친한 말구종도 못 알아본 채 사방으로 입질을 해댔다.


개릭은 곧장 성으로 들어가 온갖 치료를 받았다. 가장 놀랐던 건 무엇보다 영주인 콜헨 마월이었다. 영주의 다급한 부름에 도시의 학식있는 사제들이 안장에 올랐고, 대학에서 교육받은 의사에 심지어 학생, 거기다 특별한 쓸모는 없었지만 박학한 지식을 인정받아 뭔가 도움이 될 듯 싶었던 법률 전문가까지 모두 한달음에 달려와 침대 앞에 이르자 한 마리 산송장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아, 이건 하느님께 달린 일이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로가슬 성주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남자를 살려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름난 기사 킬가 렉시스 경과 그의 유능한 부하들이 원인불명으로 횡사한 채 들판에 널부러졌다. 길가를 떠돌던 돼지한테 갓난 아들의 얼굴을 뜯어먹히고 광증에 걸린 농노 부부를 추격하러 말을 타고 떠난 이들 중에서, 그가 유일하게 돌아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말들, 말들은 살아서 그 자리를 떠나지도 않고 미친 듯이 언덕을 달렸다. 제 풀에 지쳐 숨을 헐떡이며 다리를 후들거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겨우 사로잡았다. 그런 식의 계약 외 업무는 추가적인 비용이 드는 법이다.


우선 킬가 경의 친지들에게 쓸 편지를 준비하도록 명령하는 한편 사방으로 꾼을 보냈으나 그날의 생각만 하면 아직도 두 눈에 핏발이 오르고 여즉 소식 하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죽어가는 남자에게 들어야 하는 말이 그야말로 산더미였다. 영주는 이 산송장을 손님 맞을 때 쓰는 좋은 방에 넣고 불을 많이 땠다. 침대에는 파란색 벨벳 시트를 씌우고 자주색 능라 이불을 깔았다.


모두가, 심지어 영주 본인조차도, 어차피 곧 죽을 거라 생각했지만, 일단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죄다 달라붙어 최선을 다했다.

상처를 꿰메고 소독하고,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고, 들러붙은 악마를 꼬찝어 저주하고, 습포로 덮고 방안에 피를 안정시키는 향의 연기를 가득 채우는가 하면, 사내의 혈기를 불러 일으키기 위해 비슷한 나이의 매춘부 여인들을 침실로 불러 함께 잠을 자도록 했다. 평소 그를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그렇게 할 거면 머리가 붉은 여자를 불러야 할 것이다' 라는 의견을 제기하여 이튿날 부터는 그렇게 되었다.

들리는 말로는, 저 멀리 깎은 절벽 너머 '엉킨 숲'에 사는 락카리 주술사가 침실에 찾아와 방울을 흔들며 굿판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이런 잡설은 영주를 시기하는 자들이 퍼뜨린 악소문으로 흘려들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그랬더니, 모두의 염원과 진력을 받아, 주님께 감사할일이니, 상처가 아물고 호흡이 돌아왔다.


'그럴 리가 없어. 살아날 수 있을리가 없어.'


오직 그의 수술을 집도했던 애숭이 린로드 사제만이 내장을 집어넣고 뚫린 상처를 봉합하던 그날의 감촉을 떠올리며 조용히 이런 생각을 하였으나 일단은 제쳐두자.


어느정도 혈기가 돌아온 뒤부터는 이불을 솜 채운 마직으로 바꾸고 바람이 잘 통하는 선선한 옷을 입혀 너무 덥지 않도록 했다.

목에 관을 넣어 꿀 탄 약물을 넣어주었고, 배게 주변에는 액운을 막는 온갖 부적과 십자가, 염주와, 성모상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드디어 그가 눈을 떴을 때, 옆방에서 물에 개어줄 단약의 재료에 대해 논의하고 있던 사제들 중 한 명이 다급히 들어와 한 말은 이와 같았다.


"아직 깨면 안되는데...."


'이 사람들은 누구지?'


개릭은 생각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둘씩 기어들어와 동물원 짐승 쳐다보듯 이쪽저쪽으로 그를 보았다. 허나 그들이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돌연 상처의 고통이 엄습했는지 개릭은 눈을 크게 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팔다리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달려들어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그의 몸을 눌렀지만 겨우 봉합한 부분에서 결국 피가 솟았다.

평소 교회에 머무르며 고운 손으로 글을 쓰고 성경을 넘겨 낭랑한 목소리로 미사를 집도하던 사제들도 그 순간만큼은 신께서 사랑으로 빗어주신 근육을 발휘하여 강제로 사내의 입을 벌려 수면제를 탄 술을 집어넣고, 이따금 고향 사투리로 욕지기를 뱉었다. 다들 고향이 다르다 보니 알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약효가 돈 건지 아파서 정신을 잃은 건지 아무튼 얌전해지자 다들 침울한 얼굴로 다시 수술을 준비했다. 그들의 머리 속은 영주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 지, 책임자는 누구로 할 지에 대한 고민 뿐이었다.


이렇게 개릭은 다시 한 번 감사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나 눈을 떴을 당시에는 그런 감사함조차 알지 못한 채 또 한 번 정신을 잃고야 만 것이다.


허나 고통이 찾아오기 직전에 개릭에게도 잠시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을 여러분께서도 알아야 한다. 하녀가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었을 때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빼어난 미모의 씩씩해보이는 여성이었다. 본인은 몰랐으나 얼굴에 진땀이 흘렀던 것이다. 이 여자가 바로 그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발견하고 곧장 옆방에 알려준 사람으로, 이름은 켈라였다. 그들은 잠시 눈길을 교환했다.


그가 정신을 잃은 동안 의학에 지식이 있는 사제들이 다시 터진 상처를 꿰메 소독해주었고, 다시 기운을 차려 깨어날 수 있도록, 이번에는 상처가 잘 아물어서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러울 때에, 그렇지만 굶주려 말라죽지는 않을 정도로 시간이 지난 정도에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다. 영주가 보낸 사람이 도착했고, 상황을 전달받은 뒤에 다시 돌아갔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그러는 동안 개릭은 노을녘 평야에 서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 한 피투성이 악마가 신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악마의 곁으로 다가갔다.

악마의 몸은 검고 짧은 털로 뒤덮혔고, 흔히 알려진 뿔은 달려있지 않았다.


그것의 코는 인간의 것과 비슷했다. 귀는 양쪽에 두 개가 달렸고, 그것은 박쥐의 귀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간사한 귀는 새 편과 동물 편 양쪽을 오가는 박쥐의 것이며, 또 악마들은 그것을 알기에 자신의 귀를 박쥐의 것으로 만드는걸 좋아했다.

길게 찢어진 입을 채운 것은 날카로운 이빨과 구린 혀였다. 개릭은 악마의 혀가 구리면 구릴수록 간사하고 음탕한 말을 뱉으며, 누군가를 조롱하고 이간질하는 것을 잘 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 교회에서 사제가 알려준 사실이다.


저쪽 나무그늘에 앉아 있는 까마귀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까마귀는 지는 석양을 등지고 서있었다.


그냥 새 같지 않았다. 까마귀는 악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년은 녀석이 악마의 숨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확실히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움직였다. 개릭은 위험에 처한 동물을 곧잘 도와주곤 하였고, 그 당시에는 놈이 부린 술수 탓에 악마의 몸뚱이가 넝마를 걸친 노인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의 눈에 악마는 역겨운 모습과 불쌍한 모습이 자꾸만 교차되었는데, 그것이 이상하고 어쩐지 호기심도 들어 다가가게 된 것이다.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그 얼굴은 제 발로 들어가 살았던 공허의 일그러짐과 그들 나름의 온도를 똑똑히 증거하고 있었다.


"꼬마야, 내 배에 꽂힌 이 화살을 빼주지 않겠지?"


악마 눈 속의 타오르는 홍채가 부르르 떨었다. 이빨은 사람과 똑같은데, 다만 어금니가 있어야 할 곳까지 앞니로 들어차있었다. 왜냐하면, 앞니야말로 말을 만드는 이빨인데, 그 외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릭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묻은 피와 처참하게 눌린 자국들을 보면 애먼 갈대를 참살한 현장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악마의 혀는 멈추지 않았다.


"이 화살을 빼준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 악마에게 고마움을 산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아니? 네가 원하는 것을 이뤄줄 수도 있어."


"하지만···." 소년은 머뭇거렸다. "화살을 빼면 죽어요. 피가 더 나올 거예요.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죽었어요."


"악마는 그런 걸로 죽지 않아." 그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악마를 죽이는 건 사제와 주술산데, 이건 주술사가 쏜 화살이야. 게다가 독까지 발랐어. 제기랄, 이게 내 몸을 아작내고 있구나. 어서 화살을 빼주렴."


"그럼 저에게 뭘 해줄 수 있나요?" 당돌했다.


악마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건 그 같은 무리에게 익숙했다. 개릭은 조금 놀랐다.


"네 소원을 들어주마. 대신 현실적인 것이어야 해."


소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현실적인 게 뭔데요?"


"말이 되는 소원을 말하라는 거야. 네 소원을 평생 들어달라거나, 막대한 돈을 한번에 달라거나, 갑자기 미천한 너를 왕이 되게 해달라거나,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 하는 것 같은 바램뿐인 소원은 못 들어줘. 악마가 전지전능한 건 아니니깐. 아, 물론, 나는 전지전능하지.

하지만 하늘에 계신 주님만큼은 아니란다. 그분은 악마의 유일한 겸손이니까."


부모님을 살려달라는 소원은 빌 수 없게 되었으니 소년은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악마는 못 참고 벌러덩 드러누워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제 부모님이 죽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소년이 말했다.

"뽑아주면 말할게... 뽑아주면 말해주마."

"지금은 원하는 소원이 없는데요."

"그럼 아무거나!" 악마는 들판이 떠나가라 외쳤다. "아무거나 들어줄게!"


소년이 그 말에 떠밀려 다가가자, 까마귀가 날아와 앞길을 막아섰다. 평범한 새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마치 마법이 그림자로 내려앉듯, 검은 안개같은 게 푹 터지며 흩어졌다. 깃털은 검지만 푸른 빛이 돌았고, 눈은 비취같았다. 온몸에 심한 부상을 입고 피를 흘렸다. 한쪽 눈알이 없었다.


까마귀는 비틀거리며 말했다. "지금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길 빌겠다." 그러고는 석양의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소년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악마의 재촉에 단단히 박힌 화살을 잡았다. 아버지와는 다르게 쉽게 빠져서 놀랐다. 단단했던 화살은 꿈틀거렸고, 놀란 소년이 그것을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푸른 진액을 뱉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쐐기벌레가 되었다. 벌레는 곧 검은 머리카락 뭉치로 화했고, 스스로 타더니 재로 변했다.


그러자 소년의 눈앞에 이전과는 달리 웃음을 띤 악마가 있었다. 악마는 들판을 뛰어다니며 춤을 추었다. 엉덩이에 달린 얼굴도 소리내어 웃었다. 그 그림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거대했다.


석양이 더 붉어졌다. 들판에 초목이 억셌다. 달리는 그림자가 들판을 얼룩말로 만들었다. 악마는 털북숭이 손을 뻗어 소년의 손을 잡았다.


"악마와 협상을 하는 꼬마는 네가 처음일거다!" 그는 반대쪽 손을 뻗어 뾰족한 검지손톱으로 소년의 손등에 문양을 그렸다. "보아라, 보아라." 동그라미 세 개. "난 너같은 애들이 좋거든. 대담해, 대담해! 누가 악마를 도울 생각을 하겠냐?"


문양은 붉은 불처럼 밝게 타더니 검은 문신으로 피부에 세겨졌다.


"이제 너는 되돌릴 수 없을 거야!"


개릭은 덜컥 겁이 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악마는 놔주지 않았다. 악마는 깔깔 웃으며 울상짓는 아이를 잡고 들판을 춤추듯 뛰어다녔다.


어느 순간 손을 놓고 개릭이 던져져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을 때, 악마는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풀벌레 소리와 바람에 날리는 피묻은 갈대, 소년뿐이다.


소년은 악마가 쓰러졌던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 사방에 여자들이 있었다.


꿈에서 다시 잠들면 현실이라 했던가?


'약속은 지켰다. 꽤나 시간이 흘렀구나.'



온몸이 땀에 절고 뜨거웠다. 숨소리가 들렸다. 낮에 시중을 들던 하녀가 침대 옆 의자에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왼쪽 사물함 위에 놓인 수건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있다. 창밖은 깜깜했다. 차가운 공기 속에 투레질소리가 들렸다. 그는 한 번 눈이 뜨였던 그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두통과 어지러움에 얼굴을 찡그리며 도로 누웠다. 전형적인 숙취의 증상이었다.

꿈의 내용을 되짚어봤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안개 속을 떠돌다 온 기분이었다. 작게 타들어가는 초의 불을 더 큰 초에 옮겨붙였다. 주위가 환해졌다. 대야에 담긴 물은 핏기가 남아있었다. 바로 옆에서 잠든 여인의 얼굴에도 빛이 스몄다. 그녀는 밝아짐에 미간을 찡그렸다. 긴 속눈썹이 씰룩거린다.


'내가 꿈을 꿨나?'


손등을 확인했다. 세 개의 문양중 하나가 사라져 있었다.




이것이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개릭이 정신을 차린 직후에 겪은 일이다. 이후 로가슬 성 안에서 살아간 그의 일상을 일일히 서술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가 성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으며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는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기억을 잃은 채 기라성 같은 군주의 집에서 그 어떤 쓸모도 없이 깨어난 개릭은 허수아비처럼 성내를 떠돌았고,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내내 이런저런 질문을 받았다.


그런 기적같은 일을 한몸에 받으며 일어났으니 무슨 대단한 앞길이 그의 앞에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으나 그런 기대는 번번히 좌절되었는데, 사람이 너무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전에 알던 사람들을 한 명도 기억해내지 못했고, 이따금 자기 이름도 남이 알려주어야 했다. 검을 쥐는 법도, 싸우는 법도 잊어버렸으며 부당한 일에 항의하지도 못하고 남이 무얼 물어보면 무슨 말을 했는지 한 번 되물은 뒤에 다시 대답해주었는데, 그것마저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기억들에 대해 그 어떤 증언도 들을 수가 없게 되었고, 무수한 시도들은 번번히 실패하니 영주는 그간 들어간 돈이며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 눈앞에 어른하여 이 놈이 거짓말 하는 건지 아닌지 고문이라도 해봐야 하나 싶어 날로 근심이 늘어갔다.


이런 상태로 한 달이 자나자 영주도 이젠 싫증이 나서 이 사내를 하잘 것 없는 밥벌레로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적당한 변방에 자리를 주고 알아서 하란 듯이 던져버렸다.

바로 로가슬 성당의 감옥지기 역할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것이 아닌, 아주 특별한 감옥, 미리 말해두는 것이지만, 그곳에는 이성을 잃은 채 그르렁거리는 늑대원숭이들이 아주 많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차차 알게 될 것이고, 다만 지금은 그가 놈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밥을 배급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만 기억해두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하여 개릭이 감방 구석에 쭈그린 놈들의 눈을 불안하게 쳐다보며 여물통에 톱밥 섞은 꿀꿀이죽을 얹어주고 있을 때, 바다두이 에카는 방당크 순례를 끝마친 뒤 이제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성당 순례는 줄이 길어서 성문을 나올 즈음에 해도 거의 질녘이라 그녀는 돌아가는 길에 다시 클라르코의 문을 두드렸고, 이번에는 일반 순례자 숙사에 짚을 깔고 하루를 묵었다. 어둡고 이른 새벽이 되어 수사들이 남들보다 일찍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에 그녀도 조용히 일어나 성문 밖으로 나왔는데, 굿판을 벌일 때 악기를 쳐주었던 할멈의 집에 작은 촛불이 켜져있어 안부인사를 할 겸 찾아갔다.

이 할멈은 굿판이 끝나고 그녀와 함께 남은 음식들을 먹었었다. 신이 먹다 남긴 것 말고 따로 펴둔 상에서.


할멈은 어린 꼬마의 시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가만 보니 이 할멈은 눈이 먼 게 아니라 그런 척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가장하는 편이 빌붙어 살기에 더 좋기 때문이다. 에카는 일부러 모른 척 했다. 자기가 알 수 있을 정도면 수도원 수사들도 눈치는 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당크 대도시에서 사온 과자를 나눠주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노파가 그녀를 부르더니 두 손을 잡고 만졌다.


"어린 나이에 고생을 많이 하셨어...."


그 말을 끝으로 할멈도 바다두이 에카를 배웅했다. 이리하여 이 무당은 또 한 번의 고된 여정길을 따라 이번에는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배번텅 지방의 마월 령(領)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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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3화 - 네 사람을 기억하라 23.04.03 18 0 14쪽
24 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23.04.01 26 0 18쪽
23 21화 - 무당 사는 동굴에 귀인이 찾아왔다 23.03.28 16 0 15쪽
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0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3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3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3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7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4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7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2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30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9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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