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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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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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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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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DUMMY

새들이 북쪽을 보면 후르술기가 있고, 남쪽을 보면 마라나잘이 있었건만, 만물이 이런 이치를 거슬러 서쪽에 스스로 반신임을 선언한 에티후안이 나타나 삼라만상이 어지럽던 시절에는 황금으로 많은 조각과 사원을 지었었다. 세월이 흘러 그런 것들이 모두 쓰러지고 그 자리에 높은 성당이 세워져 두 개의 제국과 열 개의 소국이 흥하며 망하는 동안 옛 신이 죽고 새 신이 약동하는 나라에서 사람들은 성지를 따라 꾸준히 들판을 걸었다. 그 길은 순례하는 길이고 북적였다. 날마다 몰리는 방문객들은 집을 떠나기 전에 유언장을 쓰고 오는데, 성인의 묘에 손끝 한 번 대고 심심한 예배를 드리고 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교리에 따라 순례길을 걷는 자들은 모두 죄인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일로 밥벌이 하는 자들은 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다.


정말이지 겨울처럼 녹을 수 있는 것도 없어서 한창 물 세례를 맞고 깨어나는 봄은 금세 땅이 질척하고 애먼 장화만 낑낑 울기 좋았다. 사실 더 울고 싶은 건 못이 박이고 부르튼 발바닥이다.

카스의 계절은 저 멀리 날아갔다. 저번 달이 막바지였다. 그런 시절이면 사람들도 으슥한 나무나 수풀 따위에 괴물 하나씩은 있는 듯이 굴었다. 봄철에 서풍이 불어 끈적거리는 공기가 점차 청명해지면 그런 구석진 것들도 구정물 씻기듯 날아가는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딱 정해주지도 않았건만 어느날 갑자기 다들 일제히 고개를 위로 척 올리더니 킁킁 바람 냄새를 맡고는 미소 짓는다. 그러다 완연 봄이었다.

망울에 맺힌 이슬마다 함뿍 익어서 그 향내가 슬슬 퍼지는데, 경칩이 저번 달이다. 반사된 햇빛에 아롱지며 목피도 푹 젖었다. 고개 바짝한 풀들은 연두가 그윽하여 씹으면 단내가 났다.

방당크 대성당까지 30킬로미터 남은 골짜기, 19명의 순례자 무리가 방금 이곳에 도착했다. 붐비는 수도원에 이르자 미리 목욕물을 준비하고 있던 자크 수사가 그들을 따스히 맞았다.


"주님의 고된 사랑을 함께하시는 어린 사륵(양)들이 사납고 격원한(먼) 길인데도 잘들 찾아 오셨습니다. 순례하는 넋들이 다른 사륵과 상이한 점이 있다면 즉슨 자신의 길을 잘 알고 명징허니 따라간다는 것이겠지요. 주님의 안락한 품은 항시 개방되어 있으나 그분께선 자기 사륵들을 잘 아십니다. 송구하오나 입장 전에 신원증명서를 식별해야겠습니다."


수도원 수사 중에서도 업무 상 세속과 가까운 자들은 힘써서 안아줄 듯 하다가도 문득 사무적인 뽐새가 되어 손을 슥 빼는 데 능숙한 법이다.


수사들 특유의 어려운 단어를 고르는 말투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 예에." 하며 당장 문서를 꺼내 바쳤다. 각자 소속된 교구의 담당 사제들이 여비와 함께 쥐여준 물건으로 이게 없으면 큰일이 날 수도 있기에 흉년으로 미친 도적이 된 기사를 만나 알몸에 속옷 바람이 되더라도 이것만큼은 사수하겠노라며 가장 안전하고 은밀한 곳에 꽁꽁 숨겨놓은 터다. 감히 순례자를 건드릴 베포가 있는 자들은 이미 지옥에 떨어질 것이 확정되어서 두세 번 더 떨어질 게 아니면 더 이상 무서울 것도 없는 악한들이 있을진데, 요즘처럼 한가한 시절에 그렇게까지 궁지로 몰린 자들은 드물었다. 허나 사소한 소매치기며 살인이나 절도는 또 다른 얘기다.


수사는 필연적으로 나게 되어있는 은밀한 체취에 팍 찡그리는 티를 숨기지는 못했다.


'킁킁! 킁킁! 아잇, 이게 무슨 냄새람! 아니 대체 이 가련한 자들은 주님 앞에 자신이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진정 사타구니에 숨겨놓는단 말인가? 적어도 거기에서 꺼내는 모습만큼은 보여주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야. 이런 가여운 방식으로 스스로의 신앙심을 일개 수사 앞에 증명이라도 할 셈이냔 말이다. 성 오모리데스여, 긍휼히 여기시길!.'


냄새의 대부분은 오랜 고행으로 지친 몸과 마음과 피부에 마른 구정물에서 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약식으로 슬쩍만 보고는 차례차례 따뜻한 목욕과 음식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마지막 순서로 들어온 앳된 나이의, 소녀라고도 여인이라고도 하기 애매한 사춘기 여성이 건내준 종이를 보고는 그녀와 잠시 눈빛을 교환하고 똑같이 뒤로 보냈다. 이곳은 고요한 수도원 본관이 아니라 순례객들을 맞이하는 별관이다. 수도원장이 그에게 전권을 위임했기에 랑캉탱의 자크는 자기 건물 안에서 원장이나 다름없었다.


"여러분! 첨존제위여(여러분)!"


이제 자크는 모든 순례객들이 관내에 들어와 안락함에 눈물 지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하늘에 감사 드리는 동안 잠시 기다렸다가 목을 높혔다.


"말했듯이 이곳 별관의 문은 주님의 품과 다름이 없어서 문객에게 항상 열려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허나 천당에 이르는 문이 모두에게 개방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 수도원의 모든 문들이 만민에게 개관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엄중히 상기시켜드리고 싶습니다. 그 외엔 어디든 가셔도 좋습니다. 산보를 하셔도 되고 쇄량(햇빛을 쐬고 바람을 쬠)하러 아랫마을 하행하셔도 좋고 정답게 담소를 나누셔도 됩니다. 아니면 혹시 이런 분들, 나는 성 레바스티오님을 하루 빨리 뵙고 싶다, 그분의 뫼(묘)에 구순(입술)을 안착하고 예배를 드리고 성수로 죄를 깨끗하게 감고(씻고) 싶은 마음이라 참을 수가 없다! 하시는 분들은 지금 단통(곧장) 가셔도 좋습니다."


이제 여기서 랑캉탱의 자크 수사는 대도시의 탁발 수사들이 설교단에서 파문과 지옥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을 겁주고 경고를 내릴 때와 비슷한 분위기를 꺼내 좌중을 압도하려 했다. 실제 그는 저 베네시의 유명한 설교가 바오노와 함께 한때 브란돌라 수도회의 수사로써 밀턴과 레네시앙, 브뤼포와 가가니 등지를 유량하던 시절에(벌써 그것이 20년 전이다) 시민들에게 청빈과 참회를 설교하고 때로 지옥과 악마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며 악덕을 비난하고 선행을 장려하는 일을 했던 것이다. 물론 그때가 벌써 수십년 전이고 당시 그는 직접 설교단에 서지 못해 바오노를 보필하는 젊은 수사에 불과했으나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곁에서 보고 들으며 배운 기술들을 간간히 요긴하게 써먹었다.


"허나 지나치게 들썩한 소리를 유발하여 주님의 집에 소란을 가져오는 분들이나, 아닙니다! 혹시나 여러분처럼 충실하신 분들이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저는 그런 자들을 분이라고도 칭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소란을 가져오는 자들, 본관 문간에 옥지(발)을 들이는 자들, 특히! 여자들! 방방 뛰는 어린애들! 이런 자들은 사자인이 잡아가기를! 이 짐승의 무리들도 그로 하여금 이 신성한 병참(수도자들은 곧 주님의 병사이기 때문에)에서 악을 퍼뜨리는 자들을 격리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곧 신성한 사자의 명분을 취하게 되겠지요. 이 별관 건물에 부녀자의 긴 머릿미역이 들어와 함께 목욕하고 밥을 먹고 순례를 위한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음은 현 수도원장님의 과감한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는 점을,"


이 부분에서 목소리가 부드럽고 낮아졌다.


"그렇게 내린 결단이 한낮 호기심이나 향락의 기분 따위로 좌절된다면, 군주는 그보다 더 엄중한 명령을 내리는 수 밖에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떠올려 주십시오. 부디, 부탁인데, 여성들은 주님의 집 안에서 수사들의 시선에 띄지 말 것이며 또한 사내들은 수녀들의 눈에 띄지 말아주십시오. 성(종교)과 속(세속)을 구분해주십시오. 불가피하게 나갈 일이 생겼을 때는 몸에서 육체적인 부분을 드러내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신분과 나이 할 것 없습니다. 이런 규칙들만 지켜주신다면 저희의 집에서 마음껏 쉬고 먹을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지불하신 금액에 한해서요."


순례객들은 대강 "하면 안 되는 건 하지 마라." 는 뜻으로 잘 알아듣고 탈의실로 안내받았다.


별관 건물은 방금 그들이 자크 수사의 언사를 들은 현관에서 두 쪽으로 나뉘어 남성과 여성을 따로 관리한다. 가족과 친지들, 연인들은 나무 격자 사이로 서로를 잠깐 보고는 김이 펄펄 나는 입구로 줄 맞춰 들어갔다.


훗훗한 온탕 열기에 말린 약초 냄새가 화사하고 각자 성별에 맞춘 하인들이 벽에 매단 약초 주머니들을 새 것으로 갈아끼운다. 은은한 쑥 향과 로즈마리다. 위층에서 물을 끓여 통에 부으면 벽에 조각된 돌 성인들이 들고 있는 잔과 컵, 물통에서 뜨신 물이 콸콸 나왔다. 탕은 석조로 네모낳고 넉넉하여 성인 한 명이 들어가면 허리에 닿고 앉으면 목까지 잠겼다.


사람들이 탕에 들어가자 넘친 물이 경쾌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바닥에 난 홈을 따라 배출된다. 수사들은 낭비를 정말 싫어해서 이렇게 나간 물을 한 곳에 모아놓았다. 밭에 물을 주거나 정원에 물을 주거나 끓여서 가축 여물을 주거나 불 났을 때를 대비해 모아두거나 이것저것 최대한 쓰려고 노력은 해본다. 그래도 숨 넘어가게 많은 양이 남곤 하는데 모두 고용인들을 시켜서 적당한 데 흘려보냈다. 이 물들은 수도원 근처 콸콸 흐르는 계곡에서 날마다 수 십 단지씩 길어오는 것으로 가져올 때마다 정말 숨이 꼴딱 넘어갔다.


"내 가족들과 같이 목욕할 수 있다면 돈을 더 내겠소."


이러는 사람들도 있으면 자크는 이렇게 대답했다.


"혼탕은 아직 고려중입니다."


탕은 남녀 각각 네 개씩 총 여덟개로 한 탕에 열 명이 들어가도 족했다. 뒤쪽에 있는 탕으로 갈수록 가격이 높아지고 물에 타는 향료의 값도 비싸졌다. 가장 좋은 탕은 보통 비어있었고 돈을 내는 손님이 왔을 때만 급하게 이런저런 동방의 향신료들을 우려서 채워넣었다. 또 유일하게 그곳이 현랸한 색유리 창문으로 햇볕이 들어오는 곳이다.


일단 미지근한 물로 흙먼지를 씻어내고 모든 인간 귀천에 차별없이 태어난 모습 그대로 가장 싼 탕에 들어갔는데 이곳의 물은 맹물이다. 너무 노곤하고 팔다리가 다 녹신거려 쿨쿨 자는 사람도 있고 누구는 아찔하여 그만 오줌을 찍 하고 지렸다. 탕을 이루는 돌이 녹색이라 색깔로는 구분할 수 없었다. 사소한 실수로 빈객들의 기분을 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수사들의 세심한 배려였다.

다음 여정이 고작 하루 남았다는 사실에 두 손이 절로 모였다. 남탕은 어린 예비 수사들, 여탕의 경우엔 어린 예비 수녀들이 흘리지 않고 먹을 것을 권하며 나무 쟁반에 말린 과일, 견과, 치즈, 빵 한 조각, 약간의 꿀과 잼, 일년 정도 지난 신 포도주를 담아 건냈다. 포도주는 적색으로 따뜻하게 끓여 마시기 좋았으며 놀랍게도 생강, 계피와 꿀내가 났다.


이렇게 받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이 때 정말 오줌을 찍 싸고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아, 내가 이렇게 순례를 했는데 오줌 한 발쯤이야.'


다들 그런 생각을 했다. 방당크 일대에는 이런 사업을 벌이는 수도원들이 많고 많았으나 단연 으뜸은 이 클라르코 수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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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6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4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1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4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7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3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4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8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5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8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3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30 0 16쪽
»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6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10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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