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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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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05

작성
23.02.23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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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DUMMY

레날의 기사가 나타났다.


그는 요란한 흑마를 안장 없이 타고 왔다. 갑옷은 햇빛에 환하고 번뜩번뜩, 투구에는 자기 머리만한 헝겊 용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온몸에 붉은색과 노란색 띠를 칭칭 감았는데 그 색이야말로 놈의 간악한 근본을 상징한다.


왕과 귀족들은 벌벌 떨며 하늘에 대고 두 손을 모았다.


"오, 내가 척 보아 누군지는 알 수 없겠으나 아주 사악하고 못된 기운으로 가득 찬 것만은 알 수 있겠네. 저 자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왕이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묻자 여왕이 대답했다.


"나의 왕이시여, 어찌 당신같은 분이 척 보고 모른다 하시이까? 저 자야 말로 당신의 가장 위협적인 적이며 맞수이자, 반사자와 붙어먹고 또한 사자를 적으로 모는 사악한 용입니다."


이 여왕은 가슴이 풍만했다.


"저 자가 바로 레날의 기사입니다. 제 생각에,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의 종지부를 찍으라는 뜻으로 저 자를 전하께 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로군!"


왕이 성난 가슴을 쭈욱 펴고 출렁거리는 검을 뽑아들며 놈을 희떠보았다. 레날의 기사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왕을 무시한 채 이곳저곳을 달리며 아주 노한 목소리를 뽑으며 허공을 갈갈이 찢어댔다. 그가 자신이 어떤 겨래의 사람이고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그동안 어떻게 이 나라에 수많은 전쟁과 기아와 비참함을 불러왔는지, 얼마나 깊은 증오를 품은 채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었는지 설명할 때마다 고귀한 왕과 귀족들은 그의 악행에 질려 벌벌 떨었으며, 뾰족검이 내내 하늘을 찔렀다.


"내 그동안 너희들의 자만과 악행을 익히 보아 이를 갈고 있었으나 이를 행동에 옮기지 않았던 건, 어차피 전능하신 주님께서 너희들을 가만 두지 않을 것인데 공연히 내 손과 발을 아파해가며 쓸데없는 참견을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야."


그는 난쟁이였다. 그가 면갑을 내던지고 불 붙은 솜덩이에 숨을 불어넣자 하늘 위로 불길이 솟았다. 그리고 그것을 먹었다. 어린 아이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뭐야, 젠장, 도대체 저걸 어떻게 한 거지?"

"분명 난쟁이 광대만의 특별한 술수가 있는 게 분명해!"

이 난쟁이는 이런 일에 도가 튼 사람이지만 전날 너무 과음을 했고 또 요즘 감기 기운인지 몸도 좋지 않았기 때문으로 침안에 침이 모잘라서 불을 잘 끌 수가 없었다. 하여 억지로 입안에 삼킨 다음 뜨거운 걸 참고 마구 문질러야 했다. 삶에 대한 의지와 근성만으로 생 불을 먹은 것이다. 그는 눈물과 슬픔을 머금으며 물집으로 만창이 난 입을 움직였다.


"허나 요즘 곰곰히 생각해보아 이런 결론이 났으니, 너희를 심판하는 건 그분의 역할이나, 그분께 너희를 보내는 건 바로 이 나의 역할이라는 걸 이제는 아주 잘 알겠다는 거다.

티레스터 왕이여! 그대는 부당한 방법으로 친형의 왕관을 뺏고 머나먼 백벽에 유폐시켰다. 쓴 말은 뱉고 단 말만 삼켜 악인과 친하고 선인을 버렸으며, 이 땅 왕국에 온갖 사악이 낭자하도록 내버려두었지. 이는 그대의 유약한 몸뚱이가 증명하는 바이다. 그건 나의 역할이야! 너는 허락도 받지 않고 소견머리 없이 나의 공적들을 가로채갔어. 그 독한 죄를 물어 이 내가 고대 위대한 레날의 형법으로 그대를 범하노니...."

"저 자가 지금 나를 벌한다고 했나?"


왕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범한다고 한 게 맞습니다, 전하."


신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대를 범하겠다, 티레스터 왕이여! 나는 오늘 너를 병신으로 만들려고 왔어! 그리 하면 첫째로 너는 불구왕자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 그 양반은 너보다 훌륭한 군주니까 자연히 왕좌는 있어야 할 곳으로 가게 된다. 너를 여자로 만든다면 그 왕관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겠지? 내, 이걸! 로 말이야!"


레날의 기사가 뒤로 젖힌 허리를 힘껏 앞으로 뻗었다. 그곳에는 팔다리가 잘린 닭이 앙증맞은 구멍에 머리 하나만 내민 채 꼬꼬거리고 있었다. 이 닭은 극단이 병아리 때 미리 팔다리를 잘라두어 지금까지 손수 먹이를 먹여가며 구경거리로 키운 것인데, 그 덕에 볏이 빨갛게 짝 서고 목청도 우렁한 수탉으로 의젓하게 자라났다.

키 큰 장신의 사내가 쪼아대는 닭을 피해서 왕들이 걸치는 화려한 망토를 펄럭거리며 도망갔다. 헝겊 말을 탄 난쟁이가 수탉을 앞세워 그 뒤를 열심히 쫒았다. 좌중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고, 모두가 깔깔 터뜨려며 웃어댔다. 조금 음탕한 사람들은 난쟁이가 지나갈 때 다리 사이로 솟아오른 닭머리를 만져대고 실실 웃었다. 왕이 잠깐 넘어진 사이, 심지어 그것들은 몇 번 부딪히기까지 했다. 지저분한 연극이었다.


왕과 신하들이 함심하여 레날의 기사와 화해하고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결말 부분에 이르자 민초레 사제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의자에는 빨갛게 달군 석탄이 쌓여있었고, 하루종일 달린 나머지 지쳐있었던 레날의 기사가 거기에 털썩 주저앉은 것이다.


기사는 즉시 튀어올랐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이곳저곳 뛰어다니다가 식은 소 여물이 가득한 구유통에 엉덩이를 푹 박았다. 그리고 "아아." 소리를 냈다. 그의 뒷자락은 모두 타버려 털 난 엉덩이가 드러났다. 그러자 다들 어디선가 헉 소리 나는 회초리를 하나씩 들고 와서는 그를 에워싸고 집단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비루한 항복의 소리가 울려퍼지고, 엉덩이에서 여물을 뚝뚝 흘리며 기사가 도망친 뒤에야, 종막을 알리는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 때 레날의 기사가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나는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도 힘을 합쳐서 맞서 싸우겠다!"


왕과 신하들의 이렇게 맞받아친 뒤에야 비로소 연극이 끝났다.

기사가 무대 뒤로 돌아가자 관객들도 웃음을 그치고 흩어졌다.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는 게 싫었던 민초레 사제는 광장을 떠돌며 뭔가 더 시간을 때울 만한 놀거리가 있는지 둘러보았으나 자꾸만 불안해졌다.

그의 직속상관이자 엄밀한 의미에서 실질적인 주군이나 다름없던 브밀로 사제 형님께서 혹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팍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걸.'


그는 성직 서품도 받지 못하고 용언(교회와 법정에서 쓰는 고급 언어)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으나 어쨌든 사제 시켜준다고 성당으로 오라 하여서 기쁘게 달려갔던 2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가자마자 그는 이런 말을 했었다.


"언제쯤 사제님들이 입을 수 있는 그런 옷들을 입을 수 있을까요?"


그때 브밀로 형님께서 말 없이 보여준 표정으로 민초레는 자신에게 부여된 위치를 똑똑히 알고 다시는 주제넘는 짓을 하지 않았다. 허나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가죽장이 도제 일을 하다 뛰쳐나온 민초레는 로가슬 성당에서 하인으로 살았지만 직함은 사제인 터라 입장이 상당히 난감하다.


그는 교황 성하께서 성직자들에게 부여한 규율을 누구보다 엄격하게 지키면서도 어느 정도는 내놓은 자식마냥 널널한 통제 하에 갈굼을 받으며 변변찮은 잡일을 맡아 살았던 것인데, 그런 그를 누구보다 잘 감시하고 꾸짖은 것이 브밀로 형님이었다.

최근에는 그보다 훨씬 우둔한 사람이 생겨서 좋았다.


"좋긴 무슨, 내 정말 욕지기를 참으며 살고 있다고. 짐덩이야, 짐덩이! 이대로 가다간 그놈 때문에 죄를 짓고 지옥에 떨어지고 말 거야, 정말이라구!"


친구들에겐 그렇게 말했으나 오랜 쫄따구 생활을 탈출하고 자기 부하가 생겼다는 건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싫은 놈도 애와 증으로 보게 되는 법이다. 마침 개들 밥을 줄 시간이라 대성당 지하로 축축한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데 구수한 잡탕 여물 냄새가 진동했다. 방안을 보니 그 신성한 기적으로 죽음 문턱에서 깨어나셨다는 병사가 여물죽에 톱밥과 모래를 섞으려 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엔 망할 놈의 잡놈이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민초레가 삿대질을 해대며 곧장 말했다.


"너 이놈아! 개새끼들 밥은 잘 주었느냐?"

"지금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제님."


민초레는 저놈한테 말끝마다 '사제님'을 붙이도록 명령한 터인데 잘 지키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사자놈은?"

"주었습니다."

"사자밥이랑 개새끼밥이랑 헷갈리면 안 돼."

"알겠습니다."


민초레는 거만하게 위세를 부리며 여기까지 와서 딱히 할 일이 없는데도 더러운 단지 내용물을 조금 찍어 손끝을 비벼보았다. 그래봤자 톱밥섞은 죽이거늘, 괜히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해장도 할 겸 이것저것 딴죽을 걸었다.


"모래 넣었어?"

"아직 톱밥만 넣었습니다."

"한 번에 섞지 왜 따로따로 섞었어?"

"아..." 이 개릭이라는 놈은 바지 뒷섶에 더러운 손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빨리 해.... 톱밥 얼마나 넣었어?"

"저번에 말하신 대로 넣었습니다. 그러니까...." 개릭은 멀리서 깨끗이 씻은 박바가지를 들고 왔다. "이거로 두 바가지 넣었습니다."

만초레는 조그만 횃불 하나만 틱틱거리는 어두운 방에서 그 윤곽만 슬쩍 보았다.

"야, 이, 멍청한 호구야, 어차피 개새끼들 줄 건데 그건 뭐 하러 맨날 씻고 그러냐. 그래. 모래도 넣어야지. 그래. 반 바가지 만, 그래. 너무 많이 넣지 말고. 너무 많이 넣으면 뭐라고?"

"애들이 배탈이 납니다."


민초레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깜깜하고 으슥한 곳이라 빨리 나가고 싶었다. 벽을 만지면 젖은 검댕이가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다 섞었습니다."


개릭은 진땀 흘리며 뻑뻑한 죽을 젓는 작업을 끝냈다. 그들은 함께 복도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민초레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재촉했다.


"빨리 주고 나가자."


좁은 복도 양 옆으로 줄 지은 녹슨 철장들에 무수한 손톱과 이빨자국들이 나있었다. 늑대원숭이는 잡아서 이렇게 가둬놓는다. 죄수들이 요란스럽게 새 자국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빨이 녹을 깊게 긁어 지나가면 그 속에 구린 색깔이 드러났다.

돌바닥에는 산만한 발톱 자국들이 많았다. 재판을 위해 끌려 가는 놈들은 꼭 저렇게 바닥에 자국을 남기고 갔다. 개릭도 그 모습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저번에 지린 오줌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감방에 똥통이 같이 있는 터라 티가 나지 않았다. 때문에 아까부터 거의 끔찍한 악취가 나는 중이었다.

가지고 들어온 등불을 제외하면 긴 복도는 희미했다. 이따금 명멸하는 그림자의 경계를 보면 고개를 빼꼼 내미는 쥐가 있었다. 쥐새끼 개새끼 아주 그냥 지랄이었다.


죽통을 든 개릭이 수레를 끌며 앞장서고 장창을 꼬나쥔 민초레가 뒤에서 따라갔다. 개새끼들은 밥을 달라며 알 수 없는 소리로 짖어대고 있었다. 좁은 철장을 두드리고 아르르아르르 앞니로 깨물었다. 철장을 두드려도 소리는 잦아들지 않으니 빨리 밥을 주고 나가는 것 밖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철창마다 하부에 좁은 구유통들이 있었지만 개릭은 그쪽으로 밥을 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미 이곳에 배치된 첫날에 똑똑히 배웠다. 저렇게 낮은 곳에 주둥이를 처박고 먹다가는 다치기 쉽고 무엇보다 밥 주는 국자를 뺏길 수 있다.


첫날부터 개릭은 늑대원숭이한테 밥 주는 국자를 빼앗기고 곧장 민초레 사제를 찾아갔었다. 밥을 주고 있는데 갑자기 녀석이 두 손으로 국자를 잡고 잡아당기기에 어어 하며 그만 놓아버린 것이다. 그들은 창과 집게를 각각 들고 둘이서 어떻게든 해보려 하였으나 늑대원숭이는 국자를 품에 안고 감방 구석 닿지 않는 곳까지 달아나 버렸다. 도구에 대한 늑대원숭이들의 집착은 대단했다. 맛있는 고기를 보여줘도 다가오지 않는데, 그렇다고 막상 들어가는 건 겁나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4급 서기관 브밀로 사제를 찾아갔더니, 그가 별 한심한 놈들 다 본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늑대원숭이한테 국자를 뺏긴 이유는 뭐고 그걸 나에게 보고하러 온 이유는 또 뭔가? 지금 나한테 짬통 국자 뺐는 걸 도와달라고 하는 건가?"


민초레가 얼른 대답했다.


"이런 일로 귀찮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브밀로 사제 형님. 하지만 늑대원숭이는 인간의 도구를 쓸 줄 알고, 그것으로 어떤 사고를 칠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걸 뺐긴 건 제가 아니라 이놈입니다. 아주 매를 쳐도 모자랍니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죠."

"그냥 줘."

민초레는 자기도 에초부터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확실히 해두고 싶었기에 이렇게 물었다.

"그냥 주라고 하신 게 맞습니까?"

"감방에 갇힌 놈이 그 국자로 뭘 한다고. 그건 그냥 그놈 가지라 하고 주방에서 새 거 받아가도록 하시오, 응? 알았지? 그건 그냥 그놈 주라고."


브밀로는 떠나려는 그들에게 경고하듯 덧붙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시게, 알아들었소? 이런 걸 보고로 써서 올려야 하는 내 입장도 생각해 달란 말이야. 이걸 장부에 뭐 어떻게 적으라는 거지? 늑대원숭이한테 국자를 뺏겨서 새 국자가 필요합니다, 뭐 이렇게? 아이고, 성 말돈이시여, 저 멍청한 놈들을...."


그런 뒤에 그는 궤짝을 뒤적거려 특별감방의 물품 망실 목록을 찾았다. 낡은 종이의 공란에 국자 하나를 새로 기입하고 사유란에 "늑대원숭이...." 까지 적었다가 고민하더니 "제압 중 파손" 으로 마쳤다.


욕을 실컷 얻어먹은 것과는 별개로 개릭과 민초레의 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개릭과 민초레는 주방까지 달려가서 낡은 국자 하나를 가져가기 위해 주방장과 또 한동안 입씨름을 해야 했다. 그것은 그날 일과를 온통 잡아먹은 하나의 소동이었고, 개릭은 하루종일 온갖 욕을 얻어먹었다. 이때까지는 민초레도 후임에게 잘 해주고픈 마음이 있었으나 시작도 전에 완전히 돌아서버린 것이다.


"이놈아, 그걸 잡힌다고 뱅신마냥 주르륵 놔버리냐? 왜 놓냐 그걸? 왜 너 때문에 나까지 욕을 먹어야 하는 건데."


민초레 사제는 그 일이 있고 한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넌 싹수부터 싯누런 자식이었다며 이따금 그 화재를 꺼내 개릭을 갈구었다.


개릭은 그날의 사건을 교훈 삼아 뜨거운 죽을 감방 구석을 향해 적당히 뿌려주어 알아서 바닥을 핥아먹도록 하는 방법을 택했다. 밥을 받은 감방이 차례차례 조용해졌다. 모두 독방이었다. 늑대원숭이들은 절대 둘 이상 모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국자를 뺏어간 놈은 구유통에 담아주면 국자로 어설프게 떠먹었다. 그 모습을 보고 국자를 하나씩 배급해주면 어떨까 하고 물었다가 되레 욕만 잔뜩 먹은 적이 있다.


마지막 순번까지 배급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뒤쪽의 감방에서 초췌한 사자인이 그들을 불렀다.


개릭과 민초레는 놈의 이름을 몰랐다. 브밀로 사제가 목록의 글자를 보고 겨우 말해준 것을 들었지만, 이상한 이름이라 새겨듣지 않았던 것이다. 사자의의 이름은 대게 그랬는데 놈들은 주님을 믿지 않는 이교도에 오랑캐들이다.

그들이 이 구역을 한참 맡기 전부터 저 놈은 여기 있었으니 어찌 보면 선배라 할 수 있다.


놈이 한 말은 "물." 이었다. 저 사자인은 가끔 들려오는 단어들을 기억해두었다가 간수와 미약한 의사소통을 나눌 줄 알았다. 왜냐하면, 이런 곳의 간수 노릇 하는 자들은 사자인이라도 괜찮으니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은 변방의 외로운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 역할을 개릭이 맡고 있었다.


민초레는 무시하고 올라갔지만 개릭은 상층의 깨끗한 우물까지 달려가서 물을 떠온 뒤에 넉넉한 바가지를 구유통 구멍으로 넣어주었다.


그들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방 보초를 서는 일은 지루한 데다 밥 주고 청소할 때가 아니면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짐승 오줌에 똥 냄새도 적응하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늑대원숭이들도 적당한 통을 주면 대소변을 가릴 줄 알았고, 통을 치워주는 순간만큼은 얌전히 있어주었다.


이 감방에 케루쉬라는 이름의 늑대 원숭이가 들어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남았는데, 그날까지도 개릭은 이런 식의 일과를 반복하며 자리를 닦아놓고 있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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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3화 - 네 사람을 기억하라 23.04.03 19 0 14쪽
24 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23.04.01 27 0 18쪽
23 21화 - 무당 사는 동굴에 귀인이 찾아왔다 23.03.28 17 0 15쪽
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1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4 0 17쪽
»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7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3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4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8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5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8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3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30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10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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