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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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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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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8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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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DUMMY

다들 수근거리곤 하였다.


'첫째 왕자가 죽었던 날, 대체 뭔 일이 있었길레 저럴까?'


22살의 젊었던 메센나 왕비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협해를 건너 친정으로 향하던 날,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고 둘째와 자신만 살아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왕국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 궁중은 오죽할까. 그날 이후 왕비가 그렇게 좋아하던 수산물을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두의 값싼 입을 부채질하는 가운데, 그녀가 친정에서 데려온 전속 요리사는 거의 음울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마에유 성에 살던 시절에는 눈알 통통한 생선이 곱게 익어서 식탁에 올라오곤 하였고, 그곳 사람들은 바다에서 나는 것이라면 해초에서 불가사리에 이르러 편식이 없었기에 궁중의 식탁은 바다에서 갓 잡아온 것들로 알록달록했다. 바다가 가까웠던 것이다. 여왕의 요리사는 탁탁 튀는 새우와 껄딱거리는 가재가 가득한 상자를 주방으로 나르던 꼬마 시절부터 성 주방에서 일해왔고, 왕비를 따라 이곳으로 오는 배를 탈 때까지만 해도 부엌의 총 책임자로써 이 분야에 해박했다. 해물 요리야말로 그의 자랑이며 솜씨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종목이었으나, 이제는 모두 할 수 없게 됐다. 찐 새우, 오징어, 생선, 조개 국물, 매운 크림에 졸인 소라, 일단 하나 붙잡고 내장까지 빨아먹던 온갖 종류의 매콤달콤한 게들까지.


왕의 주방에서 바다는 물론 민물에 이르러 물 속에서 사는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배제되었고, 그런 사정 탓에 참회의 날인 매주 금요일에는 온 궁중이 계란과 젖, 야채만을 먹는 것이다. 하루라도 고기를 먹어주지 않으면 몸이 팍 식어버리는 사람은 아주 신물이 나는 실정이나, 그 고통을 여왕폐하가 알까 모를까!



메센나는 성벽 밖 도시에서 풍겨오는 생선 냄새를 참지 못해 방안에 틀어박히고 왕자는 가신들과 함께 불편한 식탁을 지켰으며, 그러는 동안에 왕은 떼지어 몰려온 생선장수들의 불만을 들으며 최대한 그들을 달래야 했다, 하는 것이다! 왕이 인근 소영주들에게 돈을 쥐여주면 영주들은 그 돈으로 최대한 많은 수산물을 사서 잔치를 열었다. 그 탓에 마루아 일대 수산시장은 도시 중심이 아닌 외곽 성벽에 딱 붙은 형태로 바뀌어 가는 실정이다.


"애는 잘 있소?"


그녀의 왕이 왕자의 안부를 물었는데 언제나 하는 말이 우선 그것이었다. 왕은 화려한 침대에 누워 힘겹게 씨근거리고 있었다. 장작불이 탁탁거리는 와중에 질문의 대답을 구하는 얼굴이 조금 환했다.


메센나는 자기도 종종 감기에 걸린 적이 있었기에, 저 몸이 누운 자리가 얼마나 뜨거울지, 답답하고 불쾌하며 땀으로 가득할 지 상상할 수 있었다. 저 숨의 미세한 높낮이를 이제는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갈 수록 좁아지고 있음을. 그 간극이 남은 수명임을 왕비가 모를 리 없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어렵사리 의자에 앉은 메센나 왕비는 그의 야윈 손을 잡아 소중한 배에 가져다 댔다.


"얼마 전에 배를 발로 차더라고요."

"정말?"

"그럼요." 그녀가 말했다. "이 아이는 강하게 자랄거예요."


그녀는 방금 자기가 '이번 아이'라고 말한 건 아니었나 생각하며 잠시 숨을 멈췄다.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기 전에 아이가 배를 찼고, 그래서 어깨를 움츠렸다.


왕의 떨림이 느껴졌다. 그는 이 뱃속의 자그만 발을 쥐고 싶어 했다. 부푼 배를 찰흙처럼 꾸욱 눌러서 손에 닿을 때까지 상냥한 힘을 주고 싶을 것이다.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러니까.'


그가 몸을 일으켜 입을 여는데 나온 건 기침이었다. 말이 나오다 막혀서 더 큰 사레가 들렸다.


여왕이 누굴 부르기도 전에 시동 꼬마가 달려와서 금과 은을 수놓은 도자기 접시에 붉은 기 도는 가래를 받았다. 그리고 씻으러 밖으로 달려나갔다. 왕은 그 사이에 한 번 더 가래를 뱉었다. 왕비가 접시를 들어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이번 가래는 조금 색이 옅었지만 냄새는 더 고약했다. 왕비는 접시를 시종에게 견내주고 이불 밖으로 빠져나온 왕의 손을 잡았다.


왕은 힘겹게 일어났다. 이불이 흘러내려 왜소한 몸에 하얀 내복이 드러났다.


"저 놈을 어찌해야 하나."


방에 있는 모두가 그 농담에 웃어야 했다. 그는 자주 아팠고, 저 농담에 장단 맞추어 웃을 기회도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왕은 할 수 있으면 자주 농담을 하려 했다.


이 얼굴은 살면서 아프지 않았던 날이 거의 없었던 탓에 고약한 찡그림이 습관적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지금처럼 가볍게 웃는 순간에도 한쪽 눈가와 깨끗하게 면도한 입매는 일그러져 있었다. 존 골은 그런 얼굴로 잠시 메센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남은 젊음과 얼굴에 감도는 피부의 활기에서 무언가를 읽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시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자, 그럼, 슬슬 유언장을 준비해야 되겠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왕비가 쏘아붙였다. 어찌 왕이란 사람이 이리 경솔한 말을 내뱉을 수가 있나?


"세상 만사를 자기 뜻대로 정하시는 그분께서 나를 빨리 보고 싶다 하시는데 나도 준비를 해놓아야 하지 않겠소? 애들도 건강하고 왕비 당신도 남아있으니 내가 두려워 할 게 무어 있을까. 다만 주님 앞에서 내가 떳떳할 수 있을지 그것 하나만 걱정이라오."

"말이 씨가 된다고요."

"여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제 준비가 됐어. 이걸 말하고 싶어서 당신을 부른 거요."


왕은 그렇게 하면 병 걸린 몸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누워있는 몸으로 가능한 한 쾌활하게 보이려고 했다. 메센나는 이 잡은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왕으로서 건강한 모습을 보이려 하는 거라면 차라리 당장 그만두라 말하고 싶었다.


"제 생각에는 조금 이른 듯 하지만, 그것이 전하의 뜻이라면 말입니다." 머리가 벗겨진 비서장 콘딜리에가 종이와 펜을 들고 일어났다. "마침 왕비님도 계시고 하니, 우선 장 마피 왕자님을 위해서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가 내민 건 저번 달에 작성한 왕권 위양 문서였다. 좋은 기회를 엿보다가 이번에 꺼내든 것이다.


그 순간, 왕의 눈에서 당장이라도 이 노친네를 목졸라 죽여버릴 듯 분노가 벅차오르는 모습을 보고, 그 눈치를 살피던 왕비는 속에 가벼운 안도를 느꼈다.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이이는 언제나 그랬지.'


존 티레스터는 자기 죽음에 대해 농담을 던지고 남들이 웃지 않으면 침울해 하면서도, 정작 자기를 곧 죽을 사람처럼 대하는 자들에겐 용서가 없었다.


왕은 사냥을 나가곤 했다. 매 사냥이 아닌 짐승 사냥. 창을 쥐고 말에 올라 개들을 풀고 짐승을 쫒는다. 왕만이 부릴 수 있는 고집을 몇 달간 부리면 신하들은 어쩔 수 없이 한 번을 허락했다. 그것은 언제나 따뜻한 여름날, 모든 궁중의 사냥애호가들이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그를 호위하고 있을 때였다.


엽사들이 펀친 숲에 풀어놓는 짐승들은 모두 병들었거나 며칠을 굶기고 한 번만 배불리 먹여놓은 상태였다. 왕을 위해 잡힌 짐승들은 으슥한 우리에 가두어 며칠 동안 엽사를 대동한 고관들의 심사를 받았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다.


그런 짐승들은 병자라 해도 단단히 방비한 채 강한 무사들의 호위를 받는 자라면 쉬이 잡을 수 있는데, 존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를 보좌하는 가신들은, 솔직히 말하면 그런 접대 식의 행사를 지겨운 일로 여겼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애써 말리는 와중에 그들이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왕의 건강을 염려한 것을 제하더라도 상당히 진심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놀라울 건 없었다.


20명의 기사와 4명의 엽사, 말 탄 몰이꾼, 따라나간 궁정 귀족 십수 명, 18마리의 사냥개를 대동한 무리가 사냥창과 뿔나팔을 차고 성문을 나섰다. 8년 전의 여름이었다. 그날 왕의 시종들은 궁중 엽사를 다그쳤다.

"곰 사냥은 왕에게 어울리는 사냥이 아니야. 고귀한 사냥에 비해 가치가 떨어진다고. 그런 간단한 것도 망쳐놓다니, 교육을 잘못 받았군. 왜 사슴이 아니라 곰을 준비한 거야!"

"죄송합니다, 나리님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요즘 통 사슴을 잡지 못했거든요. 잡을 사슴이 없다면 쇤네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나간 사냥에서 왕은 사냥개들에 의해 궁지로 몰린 숫곰을 발견하고 곧장 돌진했다. 놈의 폐를 겨냥하여 가죽과 살을 뚫고 단단한 창날을 꽂아넣었다. 그 곰은 늙고 병들어 있었다. 회색으로 바랜 털을 갈색 염료로 칠했고, 이미 몇 번의 부상을 입은 채였다. 곰은 급소로 창날을 깊게 받아내더니, 고통스러운 몇 번의 허덕임을 끝으로 움직임이 멈췄다.


그때 호위들은 뒤에서 느긋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모시는 주군이 결정적인 순간에 누가 옆에서 방해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런 천하의 바보들같으니, 자네들이 뒤에서 겁 먹고 게으름피우는 바람에 나 같은 병자가 곰을 잡고 말았어!"

왕은 그들을 재촉하여 자신의 노획물을 자랑하려고 했다. 그 순간, 죽은 줄 알았던 곰이 발악하며 일어나 그를 말에서 떨어뜨리고 개들을 찢어죽였다. 왕은 그렇게 죽을 줄 알고 눈을 감았다. 수많은 증언에 따르면 곰의 아가리는 왕에게 입술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곰은 냄새를 몇 번 맡더니 그냥 뒤돌아 가버렸다.


그것이 어떤 의미로 비쳤는지 알 수 없지만 왕은 세된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힘이 다한 곰을 몇 번이나 내리쳤다. 힘이 다 빠진 곰은 도살되었다. 기사들이 자기를 안아들고 말에 앉힐 때까지 왕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무릎을 꿇은 채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사냥 따위를 입에 담지 않았다. 메센나는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냥은 위험하고 소견머리 없는 것들이나 늘상 하는 짓이니까. 하지만 그 후로 왕이 자신의 용맹을 증명할 기회를 병자의 쿱쿱한 침대 속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메센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지금 그의 눈가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 떨림은 축 쳐진 볼살로 옮겨가고, 뜨거운 체액이 방방 뛰어 목에 얹힌 가래를 녹여없애겠지.


존은 이 종이를 찢어버릴 것이다. 비서관의 따귀를 날리고, 호화로운 깃펜을 양 손으로 구겨버리고, 터져나오는 욕지기를 마구 내뱉으며, 이 무례한 자를 처단하기 위해 단검을 뽑아들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물론 아주 크나큰 실수가 되겠지만, 왕비는 여태 그랬듯 이 사람이 아직 팔팔하며 살 날이 많이 남았다고 안심할 수 있을 터다.


하지만 존은 몸을 일으켜 차갑게 식은 손으로 깃펜을 들어 서명하기 시작했고, 지친 목소리로 문서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내렸다.


"거룩하며 복되신 그분께서 나에게 권리가 아닌 의무로써 쥐여준 모든 권리와 영토를 내 아들 장 마피 티레스터에게......"


그는 이쯤에서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두 줄을 찍찍 그어 고쳤다.


"...모든 권리와 영토는 왕의 사후, 내 살아있는 아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 유언의 집행을 내 아들 장 마피와 아내 메센나에게 맡기겠다."


'나이가 많은 아들.' 메센나는 배에 심한 격통이 느껴졌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못된 것이 뱃속에 손을 집어넣고 가장 소중한 것을 움켜쥐는 것처럼. 아팠다. 정말 아팠다. 너무 아파서, 머리가 뜨거웠다. 하지만 그건 아이의 발길질이었다.


"콘딜리에, 왕께서는 항상 아프셨어요." 메센나가 말했다. "그래도 여지껏 잘 버티면서 살아왔고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해요?"

"그만하시오." 왕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왕비 저하."


비서장은 조용히 문서를 돌돌 만 뒤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작고 납작한 모자에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회색 코트 차림이었고, 채색된 가죽 벨트를 톡 튀어나온 배에다 얹어놓았다. 구부정한 허리 탓에 퉁퉁한 배가 더 튀어나온 꼴이었다. 메센나는 저 음울한 뚱보가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왕이 기침 소리를 냈다.


존은 43년을 아픈 몸으로 살아오면서 다툼을 끝내는 데는 몇 마디 말보다 자기가 기침을 몇 번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다.


그러다가 진짜 기침이 나와서 한참이나 온몸을 들썩거려야 했다. 메센나는 그 소리를 구분할 수 있었기에 얌전히 기침을 따랐다.


"나가시오"

왕이 마침내 말했다. 그는 손바닥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비틀린 얼굴에 짜증이 확 치밀어올랐다.

"또 이러네, 그런 말 할거면 다 나가!"


의사가 신호를 보내자 하인들이 끓인 물을 바닥에 밀어넣어 침대를 덥히고 따뜻한 약물을 마시게 한 뒤 시원한 리넨 수건을 이마에 깔아주었다. 그리고 진홍색 양단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나가라고.'


왕비는 숨을 돌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곳은 왕의 침실이다. 그녀는 나가라는 말에 나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침실 바닥의 타일을 깔기 위해 머나먼 반도에서 장인까지 모셔왔었다. 그 위를 양탄자로 덮었다. 배개야 침대 시트야 벽난로야 창문이야, 모서리 기둥에 천장, 탁자와 침대 위 넓따란 천개까지. 하찮은 쪼가리는 비단이고 굴러다니는 돌까지 상감이다.


지난 수십년간 이런 것들은 그를 지켜주지 못했는데도, 갈수록 쌓여서는 벽처럼 주인을 둘러쌌다. 궁은 왕의 이불이었다.


메센나는 곧장 나가지 않고 왕의 손을 잡았다.


"전하는 이 아이가 자라서 자식을 볼 때까지 사실 겁니다. 다른 왕들처럼요."

그녀는 놓으려는 왕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왜 그런말을 하세요. 마음 아프게."


존은 몇 번 더 힘을 주었지만 결국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자기가 병자라는 사실을 더 상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눈짓하자 가까이에 있던 모두가 자리를 비켰다.


"애한테 애비 아픈 걸 보여야겠어? ....그래, 당신 말이 맞지. 나도 반쯤은 농담이었고, 될 수 있는 한은 노력할 거야. 내가 오래 살아야 그...."


왕과 왕비의 눈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푸름과 푸름이다. 젊었을 적엔 그런 사실이 떠올라 이렇게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그 얘기는 꺼내지 말아요.'


왕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머리가 좀 아프네. 열도 있고. 좀 쉬고 싶은데, 자리를 비켜줬으면 좋겠어. 이런 젠장, 당신이 쳐다보고 있으면 잠을 잘 수가 없잖아."


메센나가 손을 놓자 시녀들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고개 숙여 절을 한 뒤, 나갈 때 뚱보의 앞을 가로채갔다. 시녀들이 따라나왔다. 시종장은 그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천장이 궁륭으로 되어있는 복도를 성난 발로 걷는 동안 왕궁에 봄비가 내렸다.


'장 마피가 왕이 되면 저자부터 내쫒겠어.'


메센나는 봄비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이 시기에는 비가 많이 내리니까. 봄은 불쾌한 선객이 있다. 빗줄기는 그 기분나쁘도록 끈적한 공기와 한탕 뒹굴다 내려와서는 바닥에 툭 찍혀서 자국을 남겼다.


그런 것들이 도로 바닥에 진창으로 벌어지는 날이면, 그녀는 높은 탑으로 들어가 문을 틀어막았다. 빗기로 습하고 축축한 날에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폣속이 꾸덕거리는 것이다.


그 물로 피어나는 꽃들이 있다면 그렇게 뻔뻔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봄꽃도 싫었다. 봄은 그냥 싫다. 다 싫었다.


언젠가 한 번, 카스의 계절에 내리는 안개비를 본 적이 있다. 온통 올챙이였다. 창문 너머 세상이 달팽이 같은 소용돌이로 가득했다. 미세한 빗방울은 하나하나가 제 의지를 가졌는지 사람을 농락하여서, 꾸물꾸물 춤을 추었다.


것들은 좀처럼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바람이라도 한 번 불면 단번에 온통 쓸려가는데, 잠시 숨을 돌릴 세면 금방 또 돌아와 온몸에 땀처럼 달라붙었다. 팔에 닿으면 싸르르 녹았다.


그 안개비들은 이틀을 살았고, 내내 진한 비와 소나무 냄새가 진동했다. 냄새는 어느 방이든 소리없이 들어와 철퍽거리는 발바닥으로 이곳저곳을 걸어다녔다.


밤에 창문을 열면 도시에 떠도는 경비들의 희미한 횃불이 빙빙 돌며 이쪽을 보는 듯했다.


습한 속옷도 평소 같지 않고 잠자리도 눅눅하여 잠을 자도 쪽잠에다 꾼 꿈은 열에 들뜬 개꿈이다. 그러고 나서 봄이 오면, 봄비랍시고 또 내리는 탓에 공기가 항상 습했다.


그러니 어찌 이런 계절을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지난 카스의 계절 동안 왕은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악마가 환절기의 지독한 공기를 존의 폐로 밀어넣고 기침과 가래로 반죽하여 뽑아내는 소리가 회색으로 축 쳐진 하늘로 온통 음습한 가운데, 궁중 무리들의 뇌리에는 백벽(白壁)에서 사자들과 맞서는 불구의 그림자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은 노파의 유방처럼 늘어진 구름이 살살 걷히고 내리는 빗물 사이로 해가 들어온다. 저 멀리 아까 그 시동 꼬마가 모퉁이를 돌아 달려나오고 있었다. 다 씻은 그릇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멀리서 그녀를 보고 찬 숨을 삼키며 천천히 걸어오다가 멈추어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왕비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얘." 그녀가 말했다. 아이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돌아보았다. "뛰어야지."


그러자 녀석이 한 번 더 절하고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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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3화 - 네 사람을 기억하라 23.04.03 19 0 14쪽
24 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23.04.01 26 0 18쪽
23 21화 - 무당 사는 동굴에 귀인이 찾아왔다 23.03.28 17 0 15쪽
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1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3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3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4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7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4 0 18쪽
»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8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2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30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9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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