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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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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2.3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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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프롤로그1

DUMMY

그들은 레날의 기사를 알아보지 못했다.


해가 뜨기 전의 일이다. 옅은 안개가 피어 오르고 뱉은 숨의 냉기가 허연 아침녘, 로가슬(lowcastle) 성채를 굽어살피듯 솟아오른 '깎은절벽' 너머 언덕지대에서 마월 가문의 기수 서너명이 남루한 차림의 괴한을 발견한 것이다. 이슬 핀 이파리에 꽃봉오리가 맺힐 법한, 춥지만 봄이 다가오는 시기로 올해 첫 카스의 계절이었다.


괴한은 오래 전에 버려진 락카리 주문진 앞에 꿇어앉아 그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개릭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늑대원숭이인가?"


일행 중 누군가 소리쳐 그의 생각을 대신 말했다. 확실히 원숭이 몸뚱이에 늑대 대가리가 달린 그놈들은 인간이 버린 지식이나 장비를 그러모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꼬맹이 낙서를 일주일 동안 붙들고 앉아 있을 정도로 멍청한 개새끼들이다.


"놈들은 짐승이야. 저렇게 차분한 녀석은 없어." 선두에 있는 킬가 렉시스 경이 그 말에 응수했다. 그는 일행 중에 토벌전쟁에 가장 많이 참전한 기사다. "저건 인간이야."


그렇다. 토벌전쟁이 벌어지는 동쪽은 멀었다. 늑대원숭이 한 마리가 살아서 도달할 만한 거리도 아니었다.


"늑대원숭이라고 해도 저기서 뭘 얻을 수 있겠습니까?" 로미는 겁을 먹었는지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는 어젯밤 숲 속에서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은 이후로 주위를 흘끔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놈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먼저 그랬겠죠."


겁쟁이지만 맞는 말을 했다. 이번 영주 동안만 주문진의 비밀을 풀겠다며 세계 곳곳에서 찾아왔던 마법사가 다섯이었고,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꼽만 잔뜩 먹고 돌아간 것이다.


개릭이 알기로 저 꺼림칙한 흔적은 천년 전 고대 락카리 연합의 패망 이후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고, 굳이 누군가 다가간 적도 없었다. 그만큼 소름 끼치고 기분 나쁜 모양새였다. 평편하게 다듬은 바위 위로 손발이 없는 사람의 전신 뼈 그림 다섯 구가 바깥의 원을 이루었고, 가운데에 피눈물을 흘리는 눈 ―피인지 눈물인지는 꽤나 의견이 갈리지만, 그는 피눈물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 사이에 음부와 남근, 손바닥과 발바닥, 그리고 젖가슴 그림이 무던히 새겨져 있었다. 개릭은 영주 하인의 딸이 실수로 저 주문진을 보고 악몽을 꿨다는 이야기를 단번에 납득할 수 있었다. 저건 그만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이다. 하지만 그는 어른이고, 수 차례의 전장을 경험한 숙련된 병사다. 그는 겁먹기보다 주문진에 깃든 표현력에 더 주목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지대한 노력과 정성이 없다면, 그리고 인체 구석구석의 아주 세밀한 그것도 극히 일부에 대한 것일지라도 깐깐하고 세세한 지식을 갖추지 않았더라면 절대 그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림의 다소 강박적인 세심함의 근본을 따라가보면 실제 사람을 주술로 박아 넣었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오를 정도였다. 여성의 음부와 남근, 젖가슴은 다소 단순하지만 손바닥과 발바닥이 찍힌 모양은 먹물을 묻혀 찍어내는 것만큼 정확했고, 근육과 피부의 굴곡이 살아 숨쉬었다. 또 사람의 전신 뼈 그림은 실제 사람과 그 크기가 비슷했으며, 각자의 세부적인 모양이나 크기가 다른 것을 보면 각각의 신체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표현한 것 같았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포와 의심, 역겨움을 주고 그 일면에 어두운 호기심을 드리우는, 기분나쁜 세심함이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저 주문진이 불에 탄 듯한 새까만 그을림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개릭이 아는 한 그 누구도 어떻게 저런 방식으로 단단한 바위 위에 그토록 세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주변에 잡초 한 포기 피지 않는 건 내가 상상 못할 어떤 비극이나 증오 서린 저주가 이 땅에 남아있기 때문인 걸까?'


근처를 지날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주변은 풀뿌리가 없어 흙이 드러났고, 바람이 불거나 비가 와서 주변이 엉망 될 때마다 새 흙과 풀을 모아 빈 곳에 채워 넣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 풀이 또 시들면, 다시 병사들의 삽질과 풀 심기가 반복된다.


책 깨나 읽었다는 사람들도 그런 주문진이 락카리 연합이 나타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그 세력이 뻗었던 만큼 대륙 곳곳에 뻗어있다는 사실만을 그에게 말해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이 언덕에서 끈적하도록 음울한 기운을 느꼈고, 분명 뭔가 불쾌하고 어두운 진실이 저 그림 속에 분명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하나같이 입을 모았다.


"왜 영주는 저 불길한 주문진을 치워버리지 않는 걸까?"


요망한 점술사나 예언가도 이 주변에 다다르면 공포에 젖은 낮빛을 하거나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정작 그 이유를 알려주진 않는다. 때문에 그들은 말을 달리면서도 외면할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괴한은 말발굽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이지 께름찍한 날이었다. 공기가 찐득한 카스의 계절엔 여러번 말을 달린 마월 령(領) 근방도 평소 같지 않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말도 몸을 떨었다. 괴한은 누더기를 망토처럼 걸치고 있었다. 모양을 보면 망토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멀리서는 거지가 걸치는 천 쪼가리만도 못해 보였다.


개릭은 어느정도 가까이 가서야 그가 갑옷을 입은 기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럽고 너저분한 망토 사이로 흐릿한 갑옷의 쇠빛이 박혔고, 허리띠 아래로 빛 바랜 가죽 칼집이 보였다. 칼을 꺼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흘린 식은땀이 피부에서 차갑게 식었다.


계절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지난 카스의 계절은 늘 그랬듯이 사람의 웃음을 하늘의 칙칙한 구름 속으로 끌고 갔고, 그들은 꼬박 하루 동안 잠도 못 자고 빗속에서 주구장창 말을 달린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저 수상한 놈에게 다짜고짜 검을 들이대고 잔혹한 콜헨 마월의 앞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영주는 그를 심문할 것이고, 운이 나쁜 경우엔 고문을 받을 수도 있었다.


'고문이라.'


개릭은 가만히 생각했다. 간수이자 고문관인 갤거의 면상을 떠올리자 기분이 나빠졌다.


"고문은 예술이야. 언젠간 알게 될 거라구." 작년 봄맞이 축제에서 놈이 말했었다.


"저리 꺼져, 병신아."


개릭이 대답했고, 놈은 꺼졌다. 주사위 놀이에서 돈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주걱턱과 넙데데한 얼굴만 봐도 화가 치밀었다. 언젠가 '붉은 아가씨들' 4층 침대에서 에리카를 범하려고 한 놈을 개릭이 반 죽여놓은 일이 있었다. 그날 이후로 고문관은 그에게 대들지 않았고 가끔은 비굴하게 친한 척 굴어왔다. 개릭은 놈이 필요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짜증스럽게 생각했다.


여자를 고문하며 즐거워하던 역겨운 간수놈은 씹던 양파과 맥주를 내려놓고 기쁜 마음으로 죄수를 맞이할 것이다. 발 가죽이 뜯긴 채로 소금물에 절여지거나, 불알(혹자가 말하길 진실의 주머니)에 달군 쇠로 글자를 찍어 단어를 만들거나, 쥐가 손가락을 조금씩 갉아먹게 하거나······. 그 밖에 자신이 매일매일 히죽거리며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발전시켜온 '창의적인' 고문들을 포로에게 선사할 것이다. 그러다가 죽어버리면 비 오는 날 질퍽거리는 진흙탕이나 영주가 기르는 식인 개들에게 던져지는 것이다.


이것이 한 사람이 고통스럽고 무의미하게 죽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나서 그 얼굴을 보는 것이다. 분간하기 힘들만큼 훼손되고 고통과 공포와 고문에 찌든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피부에 스며드는 이 끈적하고 싸늘한 무언가를 던져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말이 땅을 찰 때마다 몸을 스치는 차가운 공기도 그를 안심시키지 못했다. 카스의 계절은 인간을 그렇게 했다.


하지만 앞서 달리는 킬가 렉시스 경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는 노래와 이야기에 등장할 법한 기사였다. 무례한 상대를 만나도 다짜고짜 검을 꺼내는 경우가 없었고, 우물에 물 뜨러 가는 노부인에게도 고개를 살짝 숙여 예의를 표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개릭에게 있어 불길한 예감으로 다가왔다.


"킬가 경." 개릭은 그를 따라잡았다. "저건 락카리의 주문진이에요. 뭔지 아시죠? 이건 불길한 징조예요."


킬가 경의 갈색 콧수염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옆을 흘끔 보고는 우아한 자세를 유지하며 말을 받았다.


"무섭나?" 평소 같았다면 이쯤에서 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개릭은 여기서 물러서기 싫었다.


"하지만 제 평생 동안 저 주문진을 직접 만져본 사람은 한 명 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돈을 받은 떠돌이 광대였어요. 모자에 달린 종을 딸랑거리며 뛰어가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다음날 벼락을 맞고 죽었죠."


킬가 경은 또 한 번 고개를 돌렸다. "무섭다고?”


그걸로 이야기는 끝이었다. 뒤에서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발정기가 가까운 개릭의 갈색 준마도 저주받은 계절의 공기가 마음이 안 드는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눈 녹은 물에 젖은 서부의 축축한 땅으로 말 편자가 사정없이 박혀 들어갔다. 그는 점점 가까워지는 기사의 모습을 초조하게 응시했다.


낮은 언덕 군데마다 뜨문뜨문 자라있는, 헐벗은 잡목의 음울한 나뭇가지가 괴한에게 다가가는 그들을 소리 없이 지켜보는, 뒤틀린 망자 무리의 검은 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오직 한 지점만이 창 끝처럼 위로 솟아오르고 해안절벽처럼 좌우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어나간 '깎은절벽'의 예리한 꼭짓점이 보였다. 평소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과 기형아를 낳은 어미의 자식에겐 저주의 대상인 절벽이었다. 절벽은 안개에 휩싸였다.

저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희뿌연 안개 너머로 음울한 로가슬의 회색 성채가 우글거리는 개미 때처럼 작게 보였고, 그 뒤로 길게 뻗은 퀸지 강이 은빛 실처럼 서쪽으로 한 줄기 함뿍 흘러갔다. 모두 음울한 빛에 빠져있을 시기였다. 뒤에서 말이 불안하게 울었다.



'락카리.'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죽이 쭈뼛 솟았다. 하지만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다. 그 개자식들은 모두 옛날에 사라졌고, 악몽같던 토벌 전쟁은 작년의 일이다. 개릭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너무 빠르게 말을 달리고 있었다. 일행에 맞춰서 속도를 늦췄다. 가까이 갈 즈음에 말들은 걷고 있었다.


"주술사가 아니라면 떨어지시오." 킬가 경이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그 주문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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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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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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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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