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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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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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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2

DUMMY

그의 수염은 떨리지 않았고, 늘상 냉정했다. 자신의 종자가 곧 기사로 서임된다며 술에 절은 혓바닥으로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던 중늙이지만, 오늘만큼은 평소와 달랐다.


이런 긴장되는 때에 지금처럼 보이는 강인함은 개릭을 비롯한 수많은 병사들이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상대가 무장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 않고 흔들림 없는 노란색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킬가 경은 매끈한 은색 판금 흉갑과 사슬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갑옷의 빈자리마다 날강거리는 가죽과 가벼운 천이 자리를 잡았다. 추적을 위해 무거운 것들은 대부분 두고 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잘 차려입은 기사가 전투에서 죽는 일을 상상하는 건 어려웠다.


투구는 벗어서 안장에 묶어놓았다. 마을을 가로질러 갈 때면 마을의 처녀와 아낙네들이 창문과 길가에서 목을 쭉 빼고 그의 늘씬한 몸과 명예로운 얼굴을 보며 울적해진 마음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뜨거운 갈망에 한숨을 내짖으리라.


그에 비해 병사들은 칙칙한 누비갑옷 위에 철판 댄 가죽 조끼를 걸치고 아마포로 짠 망토와 은색 철 반투구를 쓰고 있었다.


오직 개릭만이 천과 가죽 사이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사슬갑옷을 걸쳤다. 촘촘하고 단단한 고급품이다.


그는 이런 물건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봉급을 잘 받는 병사가 아니었다. 애숭이 시절에 훌쩍거리며 전장을 떠돌다가 머리에 도끼가 박힌 남자에게서 온전한 물건을 챙길 수 있었다. 갑옷 주인을 죽인 남자는 철퇴로 쇄골이 으깨져서 어차피 입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자는 그때까지 숨이 붙어있었는데, 개릭이 자기가 죽인 남자의 몸에서 갑옷을 벗기는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때 개릭은 근처에서 주운 건초 더미로 죽은 남자의 흉하게 작살난 골통을 가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한동안 건초도둑이라고 불렸다.


‘이런 물건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깟 별명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고리 하나하나가 단단하고 납작한 연강(軟鋼)인 사슬은 촘촘하게 짜여 날아오는 화살도 막았다. 그는 전장에 나갈 때면 갑옷 위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기사 흉내 낸다고 놀림을 받아도 개의치 않았다.


멀리서 화살이 날아오면 두꺼운 누비 갑옷이 뚫리기 전에 사슬에서 힘이 다했고, 찌르는 창날이 들어와도 심한 부상을 입을지언정 목숨은 잃지 않았다. 개릭은 가능하면 값싼 놈을 더해 두 겹을 입었다. 안쪽 사슬에 상처가 나면 그의 칼은 매워졌다. 전투가 끝날 때쯤이면 겉에 화살이 대여섯 발은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돌아와 에리카를 안았다. 소매는 길게 올라와 장갑처럼 손등을 덮었고, 목 부분은 머리에 두건처럼 감을 수 있었다. 개릭은 틈이 날 때마다 자신의 사슬 갑옷을 정비하고 끔찍이도 아꼈다. 사슬이 하나라도 튿어지면 성의 대장장이에게 달려가 큰 돈을 들이고 전체적으로 손을 봤고, 혹여나 작은 녹이라도 슬지 않도록 귀족들이 갑옷을 정비할 때 쓰고 남은 모래통에 넣고 굴렸다.


그의 갑옷은 언제나 말끔했으며, 촘촘한 만큼 무겁고 튼튼했다. 기름을 먹이고 일일히 닦는 게 고역이지만 입을 때만큼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장비를 정비하는데 봉급의 일정 부분을 할애했으나 그때 거기서 남들보다 빠르게 이 갑옷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을 아주 큰 행운으로 여겼다. 이런 갑옷은 킬가 경에게 받는 1년치 봉급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은 그의 예감이 좋지 못했다. 빗속에서 이틀을 달렸다. 이틀 동안 비는 끊이지 않았고, 이틀 동안 갑옷을 닦지 못했다. 쇠와 가죽 사이사이에 습기가 가득했다. 운 나쁘게 사슬이 부드럽지 않은 곳에 공격을 받으면 연결이 끊어져 서슬이 틈새를 파고들었고, 거기에 녹까지 생기면 더 최악이다. 그는 지금이라도 당장 사슬을 벗고 일일히 점검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비를 맞으며 약해진 몸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아픈 엉덩이도 문제가 아니었다. 자랑인 갑옷이 평소보다 약해진 기분이다.


전투에 앞서 장비 점검을 게을리한 적이 없었던 개릭은 항상 칼날을 예리하게 갈았고, 가죽조끼 속 철판이 조금이라도 헐거우면 곧장 수리하고 바느질했다. 그런 꼼꼼함 덕분에 여러번 목숨을 구했다는 것을 스스로의 장점으로 생각해 온 그로서는, 그리고 장비 관리를 게을리한 채 전장에 나갔다가 죽어버린 사내들을 병신새끼들이라고 생각해왔던 그로서는, 지금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전투에 좋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


괴한의 한 손은 여전히 주문진의 검은 그을음에 가있었다. 그가 입은 외투는 노란색에 낡고 해졌으며, 아무런 문장이 없었다. 그런데도 장화와 장갑은 그닥 낡아 보이지 않았다.


개릭은 초조하게 오른쪽 손등을 만졌다.


'젠장, 왜 이리 춥지.'


불어오는 바람은 유난히 찼다.


"떨어지라는 말이 어렵소?" 킬가 경이 또 한 번 말했고, 그제야 괴한은 일어났다. "이 길은 마월 가문의 로가슬로 향하는 길인데, 그곳에 목적이 있습니까?"

"딱히." 괴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기분 나쁜 목소리가 투구 속에 울려퍼졌다. "성으로 가면 안 되는 거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세상이 워낙 흉흉하니까. 늑대원숭이에, 사자인에, 괴물들도 있고." 킬가 경은 이 말을 농담처럼 얘기했다. 그는 '너 수상해 보인다' 고 대놓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거기서 뭘 하고 있었죠?"

"잠깐 보고 있었소. 지나가다 눈에 띄어서."

"그게 뭔지 아시오?"


킬가 경은 역겹게 생긴 주문진을 가리켰다. 검은 부분에 빗물이 스며들어 진물처럼 보였다. 그을음은 바위에 깊게 박혀서 물이 흘러도 섞여들지 않았다.


"잘은 모르오."

"락카리. 그 야만인 개새끼들의 물건이지." 킬가는 침을 뱉듯이 말했다. 토벌 전쟁에서 연인을 잃은 그였다. "아이를 제물로 바치고 사람 살점을 뜯어먹는 족속이오." 정확히는 늑대원숭이들이 죽였지만, 락카리의 방식을 쓰는 놈들이니 매한가지다. "얼굴이나 보게 투구 좀 벗어보시오."

"투구를 벗으면 벌거벗은 기분인데."

"면갑이라도 좀."


괴한의 투구는 특이했다. 보통보다 앞부분이 더 튀어나와 있었다. 개릭은 저 투구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 구조가 둔기에 공격받았을 때 피해를 경감할 수 있을 것인지 상상하고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반적인 투구를 망치로 두드려 편 것인데 낡아서 녹대가리였다. 그렇다고 면갑을 벗기에 어려움은 없을 터였다. 놈은 움직이지 않았다. 킬가 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싫은가보군." 그는 안장에서 투구를 꺼내 머리에 썼다. 눈치 빠른 개릭이 다가가 이음매를 고정시켰다. "어디서 오는 길인데요?"

"북쪽. 폼바다."


폼바다는 비교적 가까웠다. 배로 사흘 물길이면 닿는 항구도시였다. 퀸지 강을 젖줄삼아 배가 드나들고, 로가슬과 교류가 섭섭지 않았다. 경칩이 오면 연두색으로 칠한 '새봄보름' 호가 별 뜬 새벽에 첫째로 돛을 폈다. 개릭은 그 배를 타고 로가슬에 왔다. 오래 전 일이다.


"보통은 배로 오던데." 킬가 경이 말했다. "타고 온 말은 어딨습니까."

"없소."

"걸어서 예까지 왔다고?"


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엉컹 숲과 거대한 바위산은 어둡게 지평선을 가렸다. 안개는 숲머리에 엉켜있었다. 그 뒤로 폼바다까지 말로 며칠인가, 걸어서 오기에 힘든 길이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킬가 경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괴한이 대답했다.


"지나가는 길이오. 앞에 성이 있는 줄은 몰랐소."


좋은 대답은 아니었다.


"몰랐다고."


로가슬은 왕국에서 손에 꼽는 성이다. 킬가 경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상대방의 인정을 끌어낼 때 말보다 침묵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의 침묵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이만 가겠소."


기사는 등을 돌려 그대로 걸어갔다. 이제 보니 그의 갑옷은 이곳 저곳 흠집이 많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철과 철이 긁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등쪽은 아예 녹투성이였다.


망토는 너무 더럽고 추저분해서 망토라고 우기는 꼴의 거지누더기였고, 관절을 감싼 직물과 사슬고리는 절박한 꼬라지로 매달려 있었다.


킬가는 농담에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그쪽은 절벽인데." 괴한은 멈춰서 뒤돌아봤다. 병사 두 명이 말을 몰아 길을 막았다. "경의 목적이 나비처럼 훨훨 날다가 사뿐히 떨어져서 다진 고기가 되는 거라면 나도 굳이 말리진 않겠소."


그는 절벽에 사람을 태우는 권양기와 열 명의 병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보시오, 경, 우리도 바쁩니다. 나도 빨리 성으로 돌아가서 따뜻한 와인으로 목 좀 축이고 찐득한 닭고기 껍질을 뜯고 싶어요.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당신이 이 계절에, 그 역겨운 주문진에서 혼자 뭘 하고 있었는지 알아야겠소."


그러자 한시라는 이름의 병사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성질을 냈다.


"그냥 끌고 갑시다. 고문관이 이놈 살가죽과 함께 아는 걸 전부 드러내겠죠."


참을성 없이 칼을 휘두르곤 하던 한시는 그저께 애인의 바람 현장을 목격한 이후로 더 사나워져 있었다. 소란스러운 축제를 틈타 밤중에 도망친 농노를 먼저 발견해 죽인 것도 그였다. 광증에 걸린 놈들인데 그마저도 남편 쪽은 도망쳤다.


아내를 미끼로 버리고 도망간 개새끼한테는 흑주술에 연관됐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영주의 권리였다. 킬가는 영주가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알았고,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완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이 놈이 나타난 것이다.


부하들은 당장이라도 칼을 휘둘러 놈을 반병신으로 만들고 피해 없이 일을 끝내고 싶었지만, 그는 아니었다.


놈이 평화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올렸다. "난 그저 평범한 순례객이오. 기사의 칭호도 지금은 내려놓았소. 방당크에 가는 길입니다. 성 레바스티오님을 봐서라도 좀 봐주시길."

"이 계절엔 순례의 문도 닫하는데, 그걸 모르오? 아니, 그건 그렇고 성지는 알면서 성은 모른다고?"


킬가는 그가 진짜 기사였을 경우를 대비해 예의를 갖추려는 듯 보였지만, 수염 위로 번뜩이는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는 데는 서툴렀다.


"그렇다면 가까운 숙소를 찾아야겠군."


괴한은 누더기 같은 망토를 벗어서 무릎에 놓인 바랑에 정성스레 구겨 넣었다. 마른 목구멍처럼 깔깔한 침묵이 내리깔렸다. 이제 보니 그 망토는 여러 가지 천을 조각조각 잘라 꿰맨 것으로 조각마다 어떤 가문의 것으로 보이는 문장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보이는 것만 스무 개가 넘었다.


개릭은 그 중에서 크라이크 가문의 검은색 여우 문장을 알아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색이 바랜 초록색이었고, 꼬리가 두 개였다. 나머지 것들은 알아볼 수 없었다. 아예 처음 보는 동식물이 많았다.


토벌전쟁에서 마주친 사자인(人) 군대의 깃발에도 저런 것들은 없었다. 킬가 경도 그처럼 괴한의 망토에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에, 그는 검을 쓸 때 방해되지 않도록 망토를 뒤로 넘겼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곧 그 얼굴마저 면갑이 가렸을 때, 개릭도 그를 따라 장비를 살피고 있었다. 킬가 경이 말을 앞으로 몰았다.


"숙소는 찾지 않아도 된다." 투구 철판 속에서 적에게 말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런 수고를 들게 해줄 수는 없지."


괴한의 시선은 안장에 매달린 피에 젖은 자루를 향하고 있었다. 시선은 천천히 바닥을 끌다가 자신의 발치에서 멈췄다. 천천히. 킬가 경은 무시당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말고삐를 잡고 기사를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까지 말을 몰았다.


"이 계절엔 순례객 따위 없다. 이 거짓말쟁이야."


목소리를 높히자 바람이 불었다. 카스의 계절 특유의 어둡고 끈적한 공기를 불어오는 습한 바람. 입김이 하얀 궤적을 그렸다. 흐릿한 입김은 땅에 떨어지듯 날리고 흩어졌다.


"네놈은 기사가 아니야. 제법 흉내를 냈다만 내 눈은 못 속이지."


개릭도 같은 생각이었다. 놈은 곁에서 보필하는 종자나 하인도, 말도 없었다. 하인을 부리지 못할 만큼 가난한 기사라고 해도 상식이 있다면 갑옷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둘 리가 없다. 거기까지 가버린 것들은 대부분 배불뚝이에 겁쟁이 주정뱅인데, 놈에겐 그런 기색조차 없었다. 오히려 키와 자세가 좋고 풍채도 곧았다.


이는 놈에게 있어 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다. 킬가 경은 어릴 때부터 검술교관의 칭찬을 받으며 솜씨를 닦아왔고, 웬만한 기사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았다. 그의 종자인 호크 폴라드는 서부에서도 손에 꼽는 가문의 셋째 아들이고, 말을 붙여본 적은 없지만 그 놈도 꽤 강하며 명예를 알았다. 킬가 렉시스 경은 종군 창녀를 무릎 위에 놓고 으스대는 형편없는 기사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넌 우리와 함께 간다. 순순히 따라오면 말을 탈 거고, 반항하면 병신을 만들겠다."


결정적으로 이쪽이 머릿수가 셋이나 더 많았다. 아무리 강한 기사라도 잘 무장한 장정 서너 명이 장검과 단검을 들고 한꺼번에 달려들면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전쟁을 통해 개릭이 깨달은 세상의 이치였다. 킬가 렉시스 경을 포함해 든든한 세 명의 전사가 개릭과 함께 냉엄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사람을 죽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개릭은 놈이 다음으로 보인 행동에 몸을 떨었다. 그들은 초조하게 눈짓을 교환했다. 괴한은 자기 발치에서 멈춘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윽고 그가 고개를 들고 내뱉은 말은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람을 죽였군."


다시 땅을 보고 말을 이었다. 녹슨 투구가 삐걱 하고 숙였다가 다시 말에 묶인 자루에 갔다.


"말 위에서 내리쳤어."


한시는 도망친 농노의 아내를 그렇게 죽였다. 저 머저리 새끼는 여자가 활을 쏘려 했다고 변명했고, 분명 근처 어디에 여자가 떨어뜨린 활과 화살이 있을 거라고 우겨댔다. 그들은 비 내리는 숲속에서 한참동안 증거물을 찾다가 인내심을 잃은 킬가 경이 그의 뺨을 갈긴 후에 현장을 정리하고 이렇게 돌아가는 길이었다.


안장에 매달린 자루는 잘린 머리에서 나온 피로 붉었다. 가장 붉은 밑단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아침의 서늘한 빛이 차가운 소리와 함께 검날에 번뜩였다. 놈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놈이 일어났다. 놈의 손이 칼자루를 잡았다.


"그 칼 뽑으면 그 병신같은 투구 채로 대가리를 날려버린다." 개릭이 가장 먼저 검을 앞으로 치켜들었다. 어쩌면 놈을 처음 봤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지금처럼 예리한 칼날을 겨누면서. 그는 갑옷을 생각했다. '지금 싸우면 안 돼. 지금 싸우면 안 돼······.'


"킬가 렉시스 경."


놈의 손이 멈췄다. 그 말을 들어서는 아니었다.


"왜 이리 나한테 무례하게 구는 거요? 왜 권양기가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


목소리는 쇠로 된 성대에서 긁어올린 것 같았다.


"내가 그걸 타면 안 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소. 내가 뭘 잘못한 건가?"


지난 세월 동안 칼날에 스쳐온 피의 역사를 보고 있던 킬가 경이 이제 곧 하나가 늘어난다는 듯 침울한 목소리로 침묵을 깼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나?"


괴한이 검을 뽑아들었다. 병사들은 자기 눈을 의심하여 얼이 빠졌다. 놈이 뽑아 든 것은 목검이었다. 퍽퍽하고 윤기도 없지만 단단해 보이는, 정성스럽게 세공된 갈색 나무는 끝이 뾰족했다.


비릿한 기름 냄새가 났다. 놈이 한 손으로 검을 들고 다가왔다. 아주 잠깐 목검에 스친 은은한 녹빛을 보며 개릭은 그 검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다음날 개릭이 푹신한 깃털 침대와 진홍색 벨벳 이불 속에서 눈을 떴을 때, 근처를 지나가던 하녀가 눈을 마주치더니 화들짝 놀라서는 밖으로 뛰쳐나갔다. "일어났어요! 일어났어요!"


잠시 후, 처음 보는 수많은 얼굴들이 방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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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3화 - 네 사람을 기억하라 23.04.03 18 0 14쪽
24 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23.04.01 26 0 18쪽
23 21화 - 무당 사는 동굴에 귀인이 찾아왔다 23.03.28 16 0 15쪽
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0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3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2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3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7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4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7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2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29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9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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