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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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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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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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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 굿판이 벌어졌다

DUMMY

본격적인 의식 전, 정성(精誠)으로 몸을 씻으러 들어간 욕탕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도리어 그것이 편했다. 그곳은 깜깜했지만, 유일한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일부러 저 화려한 색유리가 바닥을 수놓는 곳에 자리를 잡고 바가지로 물을 떠 온몸에 끼얹었다. 몸이 벌벌 떨렸다. 정식으로 신을 뵙기 전에 찬물 하나 두려워해서는 신딸로서 체면이 서지 않았기에 항상 오기로 그러던 것이 이제는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이 물은 낮에 미리 욕조에 향긋한 풀을 담아놓으라 원장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오이풀, 쑥, 영생이, 백리향, 파슬리, 쥐오줌풀, 오레가노, 운향, 머위 등등. 둥둥 떠다녔다. 에카는 훗 웃었다.


'머위는 왜 있는 거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녀 본인도 딱히 어느 게 영험한 풀인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숲에서 의식을 치를 때는 신어미 족장이 시키는대로 움직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신어미 족장 막사로부터 많은 걸 배웠지만, 이걸 할 때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배우지 못했다고 하기보다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라 그분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려나 하는 생각이 요즘들어 들곤 하였다.


바깥에 나와 홀로 이 일을 시작했을 때 가장 처음 난관에 부딪힌 게 바로 이 물에 넣는 향풀의 종류였다. 처음엔 그저 야속했으나, 신경쓸 문제가 이것만이 아니라 어물쩡 넘어간 게 한두번이 아니다.


허나 하고 나면 몸이 더 준비된 느낌이라 그녀도 가능한 빼먹지 않으려 했다. 경험을 쌓다보니 풀의 종류는 크게 상관없구나 싶어 지금은 수사들의 재량에 맡기는 중이었다.


그런 연유로 원장에게 부탁했을 때, 그들이 나눈 대화는 이러했다.


"마지막으로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원장님. 욕탕의 나무통 하나에 물을 채워넣고, 거기에 향풀을 띄워주셔야 합니다."

"그거야 어렵진 않은데. 의식에 관련된 것이냐?"

"그 물로 더 정갈하게 되려고 합니다."

"가장 순수한 물은 더한 것 없이 맑은 담수인데.... 쓸데 없이 물로 치장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 아닌가? ...그건 그렇다 치고. 어떤 풀을 쓰면 되겠느냐?"

"그건 원장님의 식견에 따르겠습니다. 향풀이면 뭐든 좋습니다. 정원이나 채마밭 약초가 아깝다면, 근처 들숲에서 적당히 뜯어다 주셔도 됩니다. 다만, 가짓수는 넉넉했으면 합니다."


뜰채로 풀들을 모두 걸러낸 뒤에 그 물을 끼얹은 몸은 약한 바람에도 콧가에 솔솔했다.


몸을 닦으러 나왔더니 탈의실에서 그대로 바깥 공기를 맞았다. 늦은 꽃샘 바람이 야심한 밤중 지각을 알려왔다. 낮 동안 켜켜히 쌓였던, 때 묵은 냄새며 끓인 물에 흐린 쑥내가 안으로 방긋 휘몰아 나무 먼지를 쏠았다.


그녀는 저 멀리 늑대 소리에 흠칫 놀랐다가 서둘러 옷을 입었다. 소리는 하늘까지 가서 달을 때렸다. 달은 얻어맞은 종처럼 진동했다. 달을 때리면 흐린 빛깔이 흔들리고 초목은 산천 융융으로 답해 내려왔다. 살갖은 차갑고 닭살이 올랐다.


에카는 밖으로 나왔다. 너무 맑고 밝은 나머지 와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무당은 애 같은 우수에 차올랐다. 위요한 성벽이 지평선을 씹어먹은 공터에서 하늘과 땅은 무참히 격리되었다. 그리고 식어버린 밤들을 널리 풀어놓았다. 에카는 눈을 크게 뜨고 저 멀리 별들을 보며 오늘밤의 운세를 점쳤다.


달래기에 좋은 날이다. 그렇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그녀가 요구한 것을 준비하러 지금쯤 부엌에 작은 불이 올라있을 것이다. 준비가 끝나기까지 시간이 남았다. 약간의 짬이 생긴 셈이다. 그녀는 주변에 보리수나무가 있는지 확인하고 그곳으로 가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바랑에서 방울을 꺼내들었다. 광대들이 달고 다니는 딸랑방울과 비슷하나 용도는 전혀 다른 물건. 모두 일일히 머리를 빼둔 건 심술일까 터부일까. 이런 경우 그녀는 두 가지 모두를 즐겨 택했다.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일히 쇠구슬을 넣어가며 머리를 돌려끼운 뒤에, 손잡이 끝에 팔뚝 길이의 삼색 천을 묶었다. 허공에 대고 몇 번 흔들었다. 금속 막대 끝에 작은 방울이 여러개 달려 한 손에 잡고 흔들기 좋았다. 청아한 방울에 북 소리였다. 그녀는 손바닥 만한 흔들북도 같이 잡고 흔들었다.


한 번에 챙겨야 하는 제구가 이리도 많으니 등짐에 몽땅 지고 가는 몸은 얼마나 고단할까. 다행인 건 웬만한 교회나 수도원이라면 먼지쌓이고 케케묵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런 건 하나쯤 언젠가 올 무당을 위해 구비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오랜 옛날의 선조 때부터 물려받은 이 뿔뿔히 흩어진 유산들을 그녀는 어떤 심정으로 잡고 흔들어야 하는지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놋쇠 몸뚱이에 달빛을 받고 제 하고픈 말들을 한 둘씩 속에다 숨기고 있는 법이다. 그러니 흔들어 소리를 뽑아내 준다.


교회따라 수도원따라 방울 모양도, 손잡이 모양도 어느 하나 똑같은 것이 없었다. 어렴풋이 알기로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경험 상 오래된 것들은 이렇게 방울머리가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사자, 원숭이, 코끼리, 말, 독수리, 늑대, 도마뱀 등등 참 많았다. 간신히 알아본 것만 보면 그랬다.


교회끼리도 물려받는 물건이 있을 테니, 130년 된 수도원에 이런 물건이 없으리란 법은 없었다.


전번 사람이 잘 해뒀겠지만, 훔나인 무당과 주술사들의 공통된 불문율에 따라 그녀도 녹이 슬지 않도록 기름천으로 먼지와 녹을 닦아냈다.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마 지금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다들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에카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바랑에서 머리카락 뭉치를 꺼냈다.


"......" 깎을 때 어찌나 울었던지.


에카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을 가지고 다녔다. 여행에서 불편한 시선을 받지 않으려고 아예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기 전에, 14살까지 길렀던 머리카락은 인사하는 손처럼 흘러내렸다. 그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에카는 바람에 까르륵 날리는 그것을 무릎에 늘어놓고 어린 동생처럼 살살 빗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람 소리에 기댄 채로 목청껏 밝고 낭랑한 노래를 불렀는데, 그 가사는 처음에 이 땅에 남은 신들의 업적을 칭송하고 애환을 달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나, 끝으로 갈수록 그 나잇대 소녀들이 부르기 쉬운 노래로 바뀌어갔다.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에카는 가발을 쓴 채 다시 그 방으로 돌아가자 모두가 놀란 눈치였다. 특히 원장은, 낮에 그녀가 쓰고 갔던 가발은 수녀들이 장식용으로 으레 쓰던 붙임머리였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본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알 수 없겠지만, 가발은 턱끈이 있어서 의식 중에 떨어지지 않도록 고정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지시한 대로다. 철장 앞으로 작은 상이 놓이고 그 위에 과자와 빵, 절인 과일, 마른 과일, 무른 복숭아 하나, 삶아서 녹색 소스를 얹은 돼지고기 수육과 술이 차려졌다. 덮개를 벗기자 물씬 김이 올랐다. 에카는 술잔을 코에 갖다대고 상태를 가늠하고는 맛을 봤다. 달고 신선했다.


수도자들은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피해 벽이나 감방 안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의식이 시작된다.


"계곡의 바람을 다스리고 지금껏 우리 사람들을 잘 봐주셨으니, 저도 감사히 계셔야 할 곳으로 모셔 가겠습니다. 우선 그 몸에서 나와 더는 죽은 사람을 괴롭히지 말아주세요."


이제 에카는 비로소 가장 중요한 물건을 꺼내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걸 가면이라고 부른다. 개성없이 밋밋하고 단순해야 무당의 가면이라 할 수 있다. 신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특정한 누군가를 가면으로 세길 수는 없는 일이다. 모두를 모시려면, 편애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쓴 순간부터, 크고 작은 얼굴들을 일일이 이어붙여 만든 가면은 그 수많은 신들과 조상신을 그녀와 연결했다. 누구던 상관없다. 중요한 건 신이 아니라 신들이었다. 얼굴들은 머리와 뒤통수를 덮고 어깨까지 드리웠다.


재료는 그때그때 달랐다. 하얀 뼈와 하얀 조개, 보리수나무, 느티나무, 짐승의 뿔을 썼다. 위로 뛸 때마다 절그럭거렸다. 모두 하얗게 칠해놓았다.


얼굴도 그때그때 달랐다. 사람 얼굴이 가장 많고, 사자와 늑대, 말, 뱀, 호랑이, 곰, 사슴, 토끼..... 이질적인 게 섞였다. 빨간 새끼줄에 연결된 작은 방울들이 아래로 떨어져 흐느적거린다.


눈구멍은 없었다. 상관 없다. 무당의 시야는 중요하지 않았다. 작은 틈이면 충분했다.


가면을 씀은 제령의 시작을 의미했기에, 구석에 앉은 노파가 징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시끄런 소리 쨍쨍 울리고 촛불은 귀를 기울였다.


에카는 처음에 방울을 몇 번 흔들고 그저 제자리에서만 낮게 뛸 뿐이었다. 동작은 점점 빠르고 세졌다. 원장은 대놓고 불편해했다. 있는 집안 도련님으로 자라 불혹의 나이까지 성직의 녹을 먹어온 사람에겐 익숙치 않은 소리였다.


물론 그도 외국에서 온 악단이나 행진 틈바구니 속에서 자칫 세속적이라 할 수 있는 소리들을 몇 번이나 들어본 사람이었다. 이것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이교의 잡신놀이만 아니더라면 그도 자뭇 호기심있게 보았을 터다.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또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이것이 응달에 자리잡는 잡귀를 쫒아내는 소리라 했다.


"우선 근방에 있는 잡귀들을 쫒아 자리를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몹시 불쾌해 마땅한 말이었다. 원장은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으나, 그 말을 도로 되세겨보니 이 소리는 정말 께름칙한 데가 있었던 것이다.


무당의 양손에 들린 북과 방울이 허공에 선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그 춤은 귀족의 춤도 아니고 농부의 춤도 아니오 무당의 춤이다. 가면 뒤에 남은 눈은 그저 꾹 감았다.


몸은 위아래로 흔들리며 물처럼 쪼르륵, 이리 갔다 저리 가고, 고개를 흔들고, 퍼뜩 들었다가 위로 방방 뛰었다. 가면이 깔깔거렸다.


'왜 저 여인은 수녀복을 입고 저런 춤을 추는 건가.'


원장은 옷이라도 갈아입힐걸 뒤늦게 후회했다.


굿판이 벌어지는 감옥 한가운데, 향로에서 하얀 연기가 기어나오고 있었다. 교회에서 피우는 향이었다. 소나무 향기가 났다. 무당은 기침하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따금 그 입에서 감탄인지 기합인지 모를 헛소리, 추임새가 터졌다. 그때마다 원장과 수사는 움찔 놀랐다.


므레무스는 철창 앞에 들여놓은 상차림을 게걸스레 입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따로 차려둔 상이었다. 따뜻한 돼지목살을 절인 야채와 함께 와그작 흐르는 즙을 빨았고, 꿀잼을 먹느라 입이 다 붉어졌다. 송곳니에 묻은 저 산딸기는 핏기가 빠진 잇몸보다 붉었고, 분명 달콤하리라. 데운 밀빵 조각에 포도주를 부어 삼키고 건포도와 무화과에 구운 과자를 먹었다.


노파가 징에서 돌연 깽깽이로 바꾸었다. 저 사람은 소위 말해, 이럴 때 쓰려고 눈에 띄지 않는 오두막에 모셔둔, 불목하니에 속했다. 자기가 온 부족도 언어도 잊고 이제는 악기로 소리 때리는 곡만 남은 사람이다.


촛불이 흔들렸다. 방이 깜빡거렸다. 므레무스는 마지막으로 복숭아를 빨간 입안에 넣고 씹었다. 절규같은 과즙이 떨어졌다.


일전의 대화가 떠오른 자크는 땀을 닦았다.


'그동안 깜빡하고 말을 못 했는데요. 신들은 복숭아를 좋아하세요.'


가장 좋아하기에 가장 마지막에 먹는 음식이라 했다.


'복숭아?' 그가 물었다. '네 신들은 입도 참 고급이다. 그 귀한 걸..... 왜 하필 복숭아냐?'

'그건 저도 모르는데요, 어쨌든 좋아하셔요.'


자크가 반응이 없으니 그녀가 말하길,


'혹시 하나만 쓸 수 있을까요? 제가 먹으려는 게 아니고요. 그쵸, 이 계절에 과일은 안 나긴 하죠.'

'있을걸.'


그때 홱 돌아본 무당의 얼굴을 생각하면 지금도 생경한 기분이 들었다.


'하나 정도.'


일부러 오래되고 무른 것이라 쐐기를 놓았으나 되려 그 편이 좋다고 했다. 무른 것이 먹기도 좋다면서. 흐르는 즙을 좋아한다면서.


그 아이가 저기서 저리 뛰고 있었다. 무당은 저기 있는 게 본인이 아닌 듯 했다. 자크는 손 안에 꼭 쥐는 염주를 붙들었다.

옆을 보니 원장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계란처럼 둥근 민둥머리에서 땀이 흘러내렸고, 횃불에 반사된 빛이 그 위에 아롱져 번들거렸다. 원장은 이따금 눈을 질끈 감으며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나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으니까.'


자크는 그가 돌연 소리를 지르며 이 모독적인 의식을 방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지만, 원장이 합리적인 인간임을 믿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되려 주의를 주는 건 그를 무시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므레무스가 흐리멍덩한 고개를 들고 일어나 제자리에서 낮게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복숭아는 씨만 남았다. 죽은 입과 입술로 간신히 빨아먹은 씨는 과육이 많았다. 그는 다 죽은 손에 그것을 소중히 잡고 입술로 씹었다. 씨는 망가진 손에서 금방 떨어졌다.


에카는 막칼을 잡더니 양 손을 머리위로 올려 칼로 방울을 쨍쨍 때렸다. 그 소리는 귀를 괴롭혀 못 쉬게 했다. 귀가 멍했다. 방울이 칼을 때리듯 칼은 방울을 때리고 맞잡아 박수치는 듯도 하고 악바리 같았다.


촛불이 더 세게 흔들리고 노파는 깽깽이를 피리로 바꾸었다. 그 피리는 일반 저것과 다르게 소리를 파르르 떨었다. 바람도 없는데 촛불이 하나둘 꺼지고 따로 펴둔 상 주위로 희미한 그림자가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원장은 묵주를 가슴 위로 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주 하나님, 이 어린 영혼을 지켜주소서."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두툼한 볼이 평소보다 붉었다. "그분보다 자비롭고 강대한 분은 이 세상에 다시 없으시다."


이제 무당과 므레무스는 마주보고 섰다.


무당은 흥 난 광대처럼 쿵쿵 뛰고 위로 올린 손을 내리더니 므레무스의 성난 턱을 꽉 붙잡았다. 막칼을 곧게 들었다. 벽에 받은 불빛이 애처럼 뛰어다녔다. 방은 하나의 큰 초롱이었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어지러워 잔상이 된다. 자크는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저 하얀 팔에 퍼런 힘줄이 솟았음을 똑똑히 보았다. 여린 팔이 힘으로 불거졌음을.


무당은 아래로 숙인 망자의 얼굴을 막칼로 만져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방울은 비명했다. 처음엔 이마를 그리다가 눈으로 가고, 평평한 면으로 갗을 쓰담았다. 콧구멍을 살살 후볐다. 양쪽을 모두 후볐다. 피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소중히 입으로 넣었다. 칼끝을 깊숙히 쑤셔 이곳저곳을 휘저었다. 피는 나지 않았다.


사위는 가끔 번뜩이고 커졌다가 좁아지고 사라진다. 모든 것이 까마득한 어딘가로 달아나는 듯하였다. 깜빡거리는 촛불이 사람의 양눈을 잡고 힘센 야바위질을 시작했다. 무당의 몸에는 날개도 뿔도 털도 꼬리도 없었다. 이곳에는 타오르는 불도 악마의 꼬챙이도 없었다.


'차라리 있었으면....'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저 아이가 악마라서 맘 편히 저주할 수 있다면.... 때리고 쫒아버릴 수 있다면.....'


눈이 뜨였다.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비명같은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 안에서 꺽꺽 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당은 칼을 놓고 두 손으로 남자의 얼굴을 만져댔다. 자크는 조용히 들었다.


추운 몸에서 열이 났다. 이 장소는 항상 추웠다. 멎었던 피가 차가워진 사지 끝단에서부터 다시 도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털석 쓰러졌다. 연주가 멈췄다. 에카는 여전히 흐느꼈다. 무당은 울고있었다. 밖에서 횃불을 들고 들어왔을 때, 가면 뒤에서 떨어지는 흰 빛이 마주났다.


쏠아먹히는 어둠은 숨 죽여 무당의 결론을 요구했다. 무당은 칼을 쥔 채로 눈물을 닦았다. 남자의 몸은 철창 뒤에 힘없이 쓰러져있었다.

바다두이 에카가 마침내 울음을 그치고 말했다.


"제령은 끝났습니다. 이 신은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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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3화 - 네 사람을 기억하라 23.04.03 18 0 14쪽
24 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23.04.01 26 0 18쪽
23 21화 - 무당 사는 동굴에 귀인이 찾아왔다 23.03.28 16 0 15쪽
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0 0 19쪽
15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3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3 0 18쪽
»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4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7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4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7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2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30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9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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