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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막대 님의 서재입니다.

레날의 기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포·미스테리

꼵꽭
작품등록일 :
2022.12.31 21:50
최근연재일 :
2023.04.03 00:21
연재수 :
2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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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86,305

작성
23.02.28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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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DUMMY

암만 사람이 두 눈 부릅 뜬 채 있더라도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새 조팝나무가 만개하고 있으니 요 한달이라는 시간도 어물쩡 흘러가고 세상 만사는 아스라이 봄사월 중순으로 접어드는 법이다.


외딴 굴 속에 방울이 우르고 사위는 알랑거리니 꼭 다른 세상에 온 듯 하였다.


터줏대감 늪주인은 주렴 뒤에 모로 누웠다. 즐거운 건지 지루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붉은 구슬발 너머 검은 바탕에 희미한 형체는 팔다리 긴 사람의 모습이었다. 상완보다 전완이 길었다. 허벅지보다 종아리가 길었다. 저 구슬발 아래로는 개미 한 마리도 기어나오지 않았다.


거대했다. 저 머리카락을 몸에 다 두르면 그녀나 신어미 족장이나 온통 파묻혀 허우적거려야 할 판이었다.


그러니 무당은 터줏대감 늪주인 앞에서 열심히 춤출밖에.


"오늘은 늪주인한테 가자."


족장이 어깨를 흔들어 신딸을 깨웠을 때 시간은 닭도 안 우는 새벽이었다. 에카는 벽을 보며 멍 때리다가 군말없이 씨큰한 몸을 일으켰다. 차릴 음식부터 준비하고 짐 챙겨 밖으로 나갔을 때 해는 기별도 없었다.


산 너머 흐린 빛살에 의지하여 어느 으슥한 굴속의 늪으로 당도한 이들은 그곳에서 늪주인을 뵈고 차린 음식부터 드렸다. 씹은 쌀에 야생 벌집을 짓이긴 물로 빚고 마른 백합을 띄워 삭힌 독주 단지를 놓자, 주렴발 사이로 푸르딩딩한 손이 기어나와 안으로 가져갔다. 늪주인 저 큰 걸 한 손에 잡고 천천히 마셨다.


터줏대감은 말이 없었다. 에카는 가면을 써서 무당이 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가면 속의 그녀는 한낱 인간이지만, 신어미가 알아서 자리를 잡고 북을 치니 하늘하늘한 옷 입은 무당이 주렴 앞에 서서 춤추기 시작했다. 위로 휙 돌아 앉더니 대뜸 다리를 번쩍 들었다. 한 손에 방울을 들고 한 손에 부채를 들고 온몸에 알록달록 천을 감았다. 모두 어제 새로 물들였다.


허접한 염료에 매염이라 해와 양잿물에 한 달도 못 가 모두 바래서 칙칙한 회색으로 되겠으나 오늘 하루만 쓰면 충분하니 상관 없었다.


두 달의 순례를 간신히 마치고 저번 주에 돌아온 무당은 어제와 오늘 하루를 푹 잤는데도 졸린 눈을 꾹 감은 채 배운 대로 두 바퀴를 사뿐 돌았다. 거위털 부채는 검은 점으로 총총 곡선을 그렸다.


'너희마저 날 잊으면 그 땐 어디로 가야 하냐.'


추면서도 므레무스를 생각하는 그녀의 몸은 멍했다. 흙바닥에라도 누워서 자고 싶었다. 이 몸에 받았던 그 영이 아직도 남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예리한 손이 가슴 속 살을 붙잡고 여전 눅눅하여 축 늘어진 채로.


이 동굴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많이 나는데, 이미 무당은 북과 물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춤 추며 먼 데로 갔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분명 헛것이다. 옛 신은 울면서 갔으니까. 그녀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가 한 톨의 한도 넋도 남지 않았으니까. 다들 그렇듯, 옛 신은 울고 그녀도 울고, 보내는 신어미도 울었었다. 신을 보내는 굿의 끝은 울음이었다. 무당과 신이 함께 울어야 비로소 굿판도 끝이 난다. 에카는 우는 게 싫지만 할 때마다 저절로 울게 되었다. 그래서 더 싫었다. 하지만 족장이 우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미워서 그런 건 아니고, 그들 사이에 딱히 원망은 없는데, 신어미가 울음을 보이는 건 굿판이 벌어질 때 뿐이고, 옆에서 함께 넋 놓고 우는 게 그녀는 그저 후련했던 것이다.


그때였다. 늪주인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그곳에 속한 공기가 이쪽으로 밀려왔다. 에카는 눈이 번쩍 뜨여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고 얼어붙었다. 그 냄새를 맡고 싶지 않았다. 터줏대감이 그녀의 무례를 알아차렸을까?


아닌 것 같았다. 늪주인은 손을 들어 무당을 물렸다.


"이제 됐다. 밥 줘라."


그들은 하던 것들 멈추고 후다닥 차려온 음식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늪주인은 다 차려지기도 전에 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마구 집어먹고 있었다. 주렴발이 정신없이 넘실거렸다. 그 안으로 말린 과일이며 생 열매며 버섯에 닭알이며 온갖 요리에 뜯어온 약초와 (전날 미리 옮겨놨던)삶은 통돼지가 들어갔다. 게걸스러운 소리가 났다.


늪주인은 통돼지의 머리를 비틀어 뽑더니 두 손으로 잡고 한 번에 삼켜 씹어먹었다. 턱뼈가 과자처럼 으스러졌다.


터줏대감들은 굶주리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음식을 맛으로 먹었다. 그리고 정성으로. 신들은 정성이 없으면 죽는다 했다. 어지러운 세상에 어찌 이리도 신이 많을까. 에카는 누구 하나 붙잡아 묻고 싶었다.


"차린 건 입에 맞으시는지요." 족장이 에카 옆에 서서 공손히 물었다.


늪주인은 씹은 돼지머리를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가을에 숲을 떠돈 돼지입니다. 늙었지만 기름이 잘 올랐을 겁니다."


"술 맛도 좋구나." 늪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천장에 거의 닿았다. "그래, 이런 걸 가지고 오란 말이야. 시큼한 포도즙 말고. 옛날엔 좋아했지만, 요즘은 이런 독한 게 아니면 술 같지도 않다." 우악스레 먹던 것과는 달리 술은 조금씩 음미했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다. 늙은이를 혼자 두면 쓰나." 술독에 동이 나자 늪주인은 긴 혀를 뽑아 핥았다. "그래, 이번에는 뭐 때문에 왔니."


족장은 목을 가다듬었다. "뭐 때문에 왔긴요. 잘 지내시는지 인사차 온 거죠."


"저번보다 빠른데."


"덕분에 저희도 숲에서 편히 잘 살고 있으니 감사를 드리려고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좀 했습니다. 정성을 어여삐 봐주세요."


"별로 한 거 없는데." 늪주인은 돼지 몸통에 박은 얼굴을 들었다가 다시 부드러운 내장부터 먹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 참 흉흉해졌습니다. 이러는 동안 가뭄이라도 겹치면 큰일인데 걱정입니다."


늪주인은 돼지 뒷다리를 뜯어 입안에 넣고 쫀득한 비계와 껍질의 맛을 음미했다.


"비는.... 올해는 괜찮을 거 같은데. 아닐 수도 있고. 맞을 수도 있고. 둑을 쌓아서 나쁠 건 없겠지."

"둑이야 항상 쌓아서 물을 가두고 있지요."

"그럼 더 할 건 없겠네."

"그렇습니다."


족장이 아쉬운 내색을 드러내자 늪주인은 끙 소리를 냈다.


"가뭄이 아니라 전쟁이 무서운 거라면, 내가 아니라 너희 군주를 찾아갔어야지. 이번 군주는 누구냐? 일림은 죽었을 테고. 여전히 마월이냐?"

"이번 영주 콜헨 마월이 자리를 잡은 지가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갑니다. 그렇죠. 저희 살길은 저희가 찾아야지요. 그래요, 그렇고말고요."


족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덕분에 이 숲은 늑대원숭이의 피해가 적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다릅니다. 인간은 냄새가 아니라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늑대원숭이도 다를 것 없다. 너희는 왜 그놈들을 개처럼 생각하냐."


과연. 이 영물들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에카는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지금 그 대답을 들은 셈이었다. 그렇게 말을 잘랐으나 족장은 어거지로 말을 이어갔다.


"전쟁의 업화가 이 숲까지 찾아들면, 험한 꼴을 당할까 두렵습니다."

"너희 나름대로 깊은 곳에 숨어라."

"만약 저들이 저희 땅에 눌러앉으면, 평생 숨어지낼 수는 없을 겁니다."


곤란한 어조를 지키면서도 한 걸음 내빼지 않으려는 대거리에 에카는 곁눈으로 보면서도 적잖이 감탄했다.


"가까운 곳에 큰 성이 있는데 왜 너희 땅에 눌러앉겠냐."

"그러지 말고 저희를 잘 좀 숨겨주시지요. 그간 섭섭지 않게 해드렸잖아요. 이번 난리를 잘 보전한다면 전에없이 성대한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무조건 그리 할 겁니다. 없는 살림 쪽쪽 빨아서라도...."


족장이 말끝을 흐리자 늪주인은 먹던 것을 멈추었다. 입안에 든 것들을 모조리 뱉고 남은 음식들을 꽉 쥐어 뭉게버리는 건 아닐지 에카는 걱정스러웠다. 이 터줏대감을 끔찍한 괴물처럼 생각하고 있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러니 그가 잔잔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을때, 너무 안도한 나머지 저 혼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도 그걸 그렇게 잘 하는 건 아니다. 기껏해야 길을 조금 울창하게 보이도록 할 뿐이라고. 놈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길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으면 나도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 말을 들은 족장은 웃음을 머금었다.

"저희가 잘 숨어사는 한 그럴 일은 없겠지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다음번엔 더 독한 술을 준비해 드릴게요."


허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사실은 이번에 아주 안타까운 분이 또 저희에게 왔습니다."


'그럼 그렇지' 라고 말하는 듯, 터줏대감은 긴 숨을 내쉬었다. 족장은 미안한 말씨로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자리를 더 좁게 해서 폐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므레무스이고 신계에서 쫒겨나 이런 인간 땅의 변방에서 죽은 자의 추레한 옷을 입고 쌓인 한(恨)을 풀려 하셨습니다. 다행히도 미연에 사로잡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클라르코 수도원에서 왔습니다."


족장은 주렴 앞에 나무 꼭두를 조심스레 갖다 놓았다. 용맹한 전사가 화려하게 치장한 채 한 손에 검을 들고 서있었다. 파란 피부에 눈은 붉었고, 옷과 장신구는 빨강과 흰색, 노랑, 흰색으로 수놓았다. 수많은 깃털과 뱀이 보였다. 빈 손은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뻗었다. 몸은 짱딸막하고 코는 크고 머리와 그걸 쓴 모자도 컸다.


그녀가 물러나기도 전에 늪주인의 손이 그것을 안으로 가져갔다.


가면 속 무당의 눈이 주렴 사이로 사라지는 목각상의 눈을 쫒았다. 신이 깃드는 상을 볼 때마다 그녀는 세월을 관통하는 무언의 고집을 느꼈다. 그것이 싫었다. 저 찡그린 얼굴에서, 치장한 몸에서, 붉에 칠한 눈에서 베어나오는 고요함은 나무로 화한 포효였다.


그래서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저 아집은 풍화되고 모든 건 추한 발버둥이 되고야 말겠지, 만물이 알 때까지 기다리는 고통의 시간 뿐. 잠시 사람이 눈으로 보아야 하는 그 과정의 피폐 뿐. 무당은 눈만 떠있으면 되는 사람이다.


금을 나타내는 놋쇠 장신구는 저 습한 곳에서 얼마 못 가 녹이 슬 것이다. 정성스레 칠한 색들은 벗겨지고 나무는 곰팡이 슬겠다. 만든 사람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하리라. 머나먼 영광의 시절부터 그런 상들은 저 주렴 뒤 굴속에 해마다 몇 개식 쌓여서는 지금에 이르렀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사라져주세요.' 에카는 생각했다. 마침내 므레무스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에카는 숨 쉬기가 편해졌다.


그런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안에 깃든 신과 어울리는 모습이 되리라고, 그녀는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므레무스의 용맹한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늪주인은 그 자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자세를 곧게 펴 앉았다.


"거긴 어찌 그리 씌이는 사람이 많은가?" 늪주인이 말했다. 에카는 경솔하게 답하려다 그걸 바라고 물은 게 아니라는 걸 퍼득 깨달았다. "동지가 늘면 나야 좋지."


족장의 얼굴이 눈에 띄게 편해졌다.


"그분도 함께 이곳에 모셔 사계에 네 번씩 제례를 드리고 춤 추어 놀러 오겠습니다. 갈 곳 없는 분에게 자리를 내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잠깐만."


신어미는 돌아서던 발을 멈추었다. 말없이 이유를 묻자 늪주인이 물었다.


"최근에 누가 오지 않았나?"


족장은 어찌 그걸 아냐는 듯이 말했다.


"왔었습니다. 어떻게 그걸 아셨죠?"

"누가?"


에카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얼굴이 주렴발을 해쳐 다가올 것처럼 느껴졌다.


"영주의 파발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로가슬로 잠시 갔었지요."

"그거 말고는 없었나?"

"그렇습니다."


늪주인은 크게 한숨 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렇구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족장이 몸을 돌리며 묻자 늪주인은 굴벽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아무것도 아니다."

공물을 바치는 입장이지만 이쪽도 늪주인의 사정같은 건 궁금하지 않았다. 허나 새롭게 솓아난 터줏대감의 호기심이 읍하고 돌아가려는 그들의 등을 붙잡았다.


"저 아이가 이 자를 데려왔다고?"


"그렇습니다."


신어미는 새삼 그런 걸 묻나 싶었으나 뒤이은 말을 듣고 불안해졌다.


"이름이 무엇이지?"


"바다두이 에카라 합니다." 신딸의 진명은 말하지 않았다. 에카는 그것으로 일종의 주의를 주었음을 알아차렸다.

"바다두이 에카. 너는 잠시 남아라." 그리고 신어미에게 말했다. "너는 가도 좋다."


에카는 어쩔 줄 모르다가 족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지못해 알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저러지?'


듣기로 저 자는 그 존재의 근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신이긴 한 건지도 확신할 수 없다. 달리 부를 말이 없어서 신이라 부를 뿐, 그들이 바치는 건 숭배가 아닌 공양과 감사였고, 행실은 사무적이었다.


속으로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추잡하고 더러운 일이 떠올라 겁을 먹기도 하였으나 일단 그런 생각은 떨쳐냈다. 머리에 쓴 가발이 신경에 밟혔지만 이제 와서 벗는 것도 이상하고 예의가 아니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식구들이 들어와 함께 짐을 날랐다. 족장의 발자국 소리가 뒤로 멀어진 뒤로 일대는 지나치게 조용해졌다. 마침내 독대하자 늪주인은 다시 모로 누웠다.


지레 겁 먹은 것과는 다르게 대화는 놀랍도록 편안했다.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것이 있었는지 늪주인은 이것저것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묻기 시작했다. 행동거지에 늘 신중하며 안전을 위해서라면 남장으로 소중한 머리를 박박 깎고 다니는 에카도 어느새 편히 앉아 말을 주고받기 시작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이 오래된 영물의 신통한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특히 그녀의 대리 순례 일에 관해 묻는 게 많았다. 훗날 에카가 그리운 옛날을 떠올리며 곰곰 생각해보길, 터줏대감은 그저 굴늪에 처박혀 산 지 너무 오래되어 바깥 일이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안타까웠다.


"남의 순례를 해주고 다닌다고?"

"그렇습니다. 교회에선 진정한 순례로 쳐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많이 모이면 제 값을 한다 합니다. 한 두달 정도 거리라면 경비도 지원해줍니다."

"그 자들은 그저 너를 믿고 맡기더냐?"


"저희는 어음을 받습니다. 증서에 의뢰인이 허용한 목록 외의 소비는 금하도록 명시되어 있습니다. 거기다 보통은 감시인이 붙습니다만, 대부분 얼마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 이들은 도시 경비와 친분을 맺는 걸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 사람들은 길목이 겹치는 도시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제가 기간 내에 들어오면 합류하고 들어오지 않으면 그제서야 보고합니다."


"세상은 재미있어."

"그래서 저는 일부러 몰래 돌아서 갑니다."

"너는 더 재미있구나."

'이 신은 말이 좀 통하는데.' 에카는 웃음을 머금었으나 경솔하게 선 넘는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세상은 좀 어떻니?"

"세상이요?"

"세상 돌아가는 일 말이다."


늪주인이 긴 팔을 들어 자세를 고칠 때 바닥에 긁히는 칼소리가 났으나 이 때의 에카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그럴싸하게 추려내다가, 로가슬 성벽 안의 모든 종들이 제 몸을 두드려 울던 순간을 떠올렸다. 집에 막 도착해 절벽 경치나 보고 오자 하여 거기 가 섰을 때, 그 소리가 봄바람 지천을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왕께서 얼마 전 승하하시어...."

"그런 얘기 해도 난 모른다." 늪주인이 가로막았다. "사람 이야기를 좀 해주어라. 세상은 요즘 어떻게 돌아가니?"

'갑자기 그런 걸 물어도.'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니, 그것만큼 단번에 꺼내놓기 어려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 어디서부터 무엇을 말해야 할 지 몰라 "어, 어," 소리 내며 난감해하던 차에 제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던 늪주인이 간만에 찾아낸 옛 기억을 꺼내들었다.


"그래, 레날이 부활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게 사실이냐? 아에리우스가 한 일이냐? 그가 살이있더냐?"


늪주인이 칼끝을 바닥에 대고 몸을 일으켰으나 굴속이 돌연 어두워져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다만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얽혀 혼란스러웠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에카로서는 더 난감해기지만 할 뿐이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그건 옛날부터 이어져온 케케묵은 전설이었다. 허구의 이야기를 실제 사람마냥 이야기하는 것은 썩 불쾌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잘 모르겠다며 대답을 회피하니 늪주인도 "그렇겠지." 할 뿐 별 말이 없었다. 그들은 다시 대화를 시작하였으나 얼마 못 가고 늪주인이 그녀마저 내보냈다. 쪽잠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나갔더니 다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너 왜 가면을 쓰고 있니?"


그제야 에카는 얼굴을 만져 확인했다. 볼에 손을 대자 하얀 얼굴들이 만져졌다. 바깥은 바람이 많이 부는데 계곡이었다. 구멍 위로 머리를 뺀 그녀의 가발이 바람과 함께 가면 속의 볼살을 만져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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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3화 - 네 사람을 기억하라 23.04.03 19 0 14쪽
24 22화 - 게헨나 땅에 노을이 지고 불구왕자가 목소리를 높혔다 23.04.01 27 0 18쪽
23 21화 - 무당 사는 동굴에 귀인이 찾아왔다 23.03.28 17 0 15쪽
22 20화 - 메센나 왕비가 장 마피 왕자를 꾸짖는다 23.03.26 15 0 15쪽
21 19화 - 백벽에서 온 기사 23.03.25 21 0 15쪽
20 18화 - 늑대원숭이가 심상치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23.03.20 22 0 17쪽
19 17화 - 백벽전사의 칼에는 사자가 있었다 23.03.10 21 0 15쪽
18 16화 - 왕궁에서 전령이 왔다 23.03.05 23 0 16쪽
17 15화 - 불구왕자는 왕궁의 소식을 듣고 앞잡이 여자는 끌려갔다 23.03.03 30 0 15쪽
16 14화 - 이 주 전에 집 떠난 청년들이 놀라운 것을 잡아왔다 23.03.03 21 0 19쪽
» 13화 - 대리 순례 갔다가 돌아온 무당이 늪주인을 만났다 23.02.28 24 0 17쪽
14 12화 - 늑대원숭이 감방 23.02.23 26 0 17쪽
13 11화 - 메센나와 장 마피 왕자가 앓아누운 존 왕을 찾아간다 23.02.21 28 0 15쪽
12 10화 - 사내가 깨어났다 23.02.19 23 0 18쪽
11 9화 - 굿판이 벌어졌다 23.02.12 24 0 16쪽
10 8화 - 옛 신을 만나고 제령은 시작된다 23.02.09 29 0 22쪽
9 7화 - 원장은 신성한 법열에 빠지고 불목하니가 황자 얘기를 꺼냈다 23.02.02 28 0 21쪽
8 6화 - 새 신과 옛 신 모두에게 기도를 드리고 원장을 뵈었다 23.01.28 27 0 16쪽
7 5화 - 장 보듬 왕자 23.01.12 25 0 18쪽
6 4화 - 메센나 왕비가 병든 남편을 찾았다 23.01.08 38 0 18쪽
5 3화 - 랑캉탱의 자크는 에카에게 꺼림칙한 일을 시키려 한다 23.01.06 33 0 15쪽
4 2화 - 웬 여자아이가 열 여덟 명의 순례객들을 데려왔다 23.01.04 30 0 16쪽
3 1화 - 방당크 순례자들, 클라르코 수도원 23.01.02 45 0 11쪽
2 프롤로그2 23.01.01 62 0 17쪽
1 프롤로그1 22.12.31 101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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